새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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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하나님께 반역하고

Notes
Transcript

높이 살기보다 넓게 살아요.

미국 서부 고지대, 그러니까 매우 높은 곳에는 세코이아 국립공원이 있어요. 이곳은 사실 강풍이 종종 몰아쳐서 사실 식물이 잘 자랄 수 없는 곳이래요. 그런데 이곳에서 살아남은 식물 중의 왕, 나무가 있다고 해요. 그 나무 때문에 다른 식물들도 바람을 피해 모여살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나무는 무엇일까요? 네 세콰이어 나무에요. 세콰이아 나무는 엄청 키가 크죠?
그런데 말이죠. 다른 나무들은 강풍을 견디지 못하고 넘어지거나 뿌리채 뽑혀 버리는데, 이 세코이아 나무는 끄덕 없네요.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궁금하죠?
그래서 식물학자들이 이 나무의 생존전략을 연구하였다. 여러분, 이렇게 큰 나무는 뿌리가 깊을까요? 얕을까요? 그럼 세코이아 나무의 생존전략은 깊이 뿌리는 내리는 것일까요? 맞아요. 우리는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이 나무를 연구하던 과학자들이 이 나무의 생존 전략을 알아내고는 신기해 했대요. 이 나무는 뿌리를 얇게 내리는 대신 넓게 뻗었으며, 동시에 주위의 식물들의 뿌리들과 뒤엉키게 하여 서로 지탱하고 있었다. 나무를 높이 자라도록 하려면 혼자 깊이 뿌리를 파 내려야 할 것 같은데, 얇게 내리고 주변에 있는 식물들과 뒤엉키면 되네요. 깊이 자라는 것보다 넓게 뿌리내리는 것이 훨씬 낫네요.
성경에서도 이런 이야기가 나와요. 바로 바벨탑 이야기. 홍수 이후에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무지개 언약을 믿었어요. 하나님이 다시는 물로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하셨거든요. 그리고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넓게 퍼져서 살아라고 축복하셨서요. 하지만 2절에 보면 그 약속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이 나와요. 그래서 그들은 탑을 쌓았어요. 왜 쌓았을까요? 홍수가 나면 탑 위에 올라가 물이 잠기지 않으려는 거에요. 그래서 이 사람들은 흙으로 구운 벽돌에 방수가 되는 역청을 발라 탑을 쌓았답니다. 널리 흩어져 살라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믿지 않고, 높이높이 탑을 쌓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모여 살아가다 보면, 결국 하나님도 잊고, 하나님의 명령도 무시하면서 결국 죽게 될 것을 아셨어요. 그래서 내려 오셔서 언어를 섞어버렸어요.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반역하던 사람들은 널리 흩어지고 말았답니다. 높이, 깊이 쌓는 것보다 넓게 퍼지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그랬대요. 예수님을 왕으로 세워서 높은 자리에 올려다 놓고 싶어했어요. 유대인들은 그래서 유다 나라를 로마로부터 구원하고 하나님 나라가 열리기를 너무너무 원했대요. 사람들이 높이 올린 자리에 예수님을 두고 싶어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이 만든 높은 자리에서 왕이 되지 않으시고, 그곳에 십자가를 세우어요. 사람들은 예수님이 죽으셔서 좌절하고 실망했어요. 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하신 이유가 있으셨어요. 높은 자리에 왕이 되시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없었어요.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일, 곧 좋은 소식인 복음을 넓게 퍼트리고 싶으셨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높은 자리를 버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나라의 일이 널리 퍼져서 우리 친구들에게까지 들리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높이 쌓으면 홍수도 막고,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믿었어요.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친구들을 보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오셨고, 우리와 함께 연결되어 널리 퍼지기를 원하셔요. 마치 세코이아 나무처럼요.

죄는 지향의 문제입니다.

창세기 11:1 NKRV
1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하나의 민족이었고, 하나의 말을 쓰며 한 공동체로 살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새번역 성경은 이 말을 좀 더 알아듣기 쉽게 이렇게 표현합니다.
창세기 11:1 (NKSV)
1 처음에 세상에는 언어가 하나뿐이어서, 모두가 같은 말을 썼다.
말이 하나 뿐이다. 곧 한 곳에 한 민족이 모여 살아왔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누구일까요? 누가 이렇게 살고 있다는 말인가요?
창세기 9:18–19 NKRV
18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19 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홍수 후에 방주에서 나온 사람들입니다. 노아와 그의 세 아들, 그들의 가족들입니다. 이들은 참으로 한 민족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돌보심을 어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역사는 매우 밝아 보입니다. 하지만 노아 이후 역사는 밝았을까요? 아닙니다. 그들 이후의 후손들의 역사는 폭력, 아픔, 과오, 오염 등으로 얼룩지게 됩니다. 어쩌다가 그렇게 된 것일까요?
먼저 창세기를 읽을 때 염두해 두셔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그리스도인들과 현대인들을 위한 책이라 믿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요? 물론 우리에게도 유익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래 성경은 이스라엘 민족, 곧 노아의 후손,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위해 기록된 책입니다. 책을 쓸 때 읽을 사람을 염두에 두는데, 이 책은 약 3000여 년 후에 사는 우리가 아니라 고대 이스라엘을 위한 책이라는 겁니다. 이를 알려주는 구절이 9:18, 22입니다. 굳이 세 아들들 중에서 함을 꼽아 가나안의 조상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잘못은 함이 했으니 함의 잘못만 쓰면 되는데, 그의 후손인 가나안 민족까지 언급합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민족과 한 땅에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들은 늘 이스라엘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을 숭배하도록, 도덕적인 사람이 아니라 부도덕한 삶을, 노예를 두지 않고, 무기도 만들지 않으며, 고리대금업처럼 사람들을 괴롭게 하는 일을 하지 않기로 하나님과 맹세한 이스라엘이 영적 퇴보를 겪도록 만든 민족입니다.
창세기 9:22 NKRV
22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술에 취한 노아가 벌거벗고 자고 잇을 때 함은 그 아버지를 보고 형제들에게 알립니다. 그런데 이 일을 듣고 형제들은 아버지의 겉옷을 등 뒤에 걸쳐서 뒷걸음질 쳐서 덮어줍니다. 왜 이렇게 했을까요? 이것이 성경에 기록될 일일까요? 게다가 노아는 이 일로 함을 저주합니다. 그 저주는 고스란히 이 책을 읽는 이스라엘의 옆동네에 사는 가나안 족속에게로 향합니다.
창세기 9:21 NKRV
21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창세기 9:21 NKSV
21 한 번은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자기 장막 안에서 아무것도 덮지 않고, 벌거벗은 채로 누워 있었다.
노아는 자기 장막 안에서 그렇게 잤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집에서 벌거벗고 있었습니다. 공적인 잘못이 아니라 사실은 사적인 공간에서 사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함이 보고 공개적으로 형제들에게 알린 겁니다.
타인의 사적인 일을 알고, 그것을 또 다른 타인들에게 공개하는 것은 잘모소딘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부끄럽기 때문이죠. 여러분의 사적인 것을 누군가 발설하고 다닌다면 어떨까요? 그러니 함의 문제는 단순히 벌거벗은 아버지를 보고 가족들에게 알렸다의 정도를 넘어서는 겁니다.
하박국 2:15 (NKRV)
15 이웃에게 술을 마시게 하되 자기의 분노를 더하여 그에게 취하게 하고 그 하체를 드러내려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 하체를 드러냄은 상대방에게 창피를 주는 일입니다. 곧 상대방의 존엄과 품위를 찬탈합니다. 이웃을 네 몸 같이 아끼고 사랑하라는 말씀을 법으로 제정하신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악하며 화가 닥칠 일입니다.
창세기 9:22 NKRV
22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보고 라는 이 단어는 관찰하다의 뜻입니다. 유심히 관찰하여 상대의 흠, 부족함, 약점을 보았다 합시다. 인간관계에서 이런 것은 지배의 수단으로 순식간이 바뀝니다. 상대를 꼼짝하지 못하고 내 말을 듣게 할 볼모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함의 이런 행동과 달리 두 형제들은 그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기로 선택합니다. 드러난 하체를 보는 것이 죄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형제 지간이지만 차이가 큽니다. 그러니까 섞여 살 수 없는 함까지, 한 언어를 쓰며 한 공동체로 살고 있었습니다. 굉장히 이상한 풍경입니다. 그 배경을 설명해주는 구절이 11:1입니다.
그런데 이 공동체 움직임이 감지됩니다.
창세기 11:2 NKRV
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그들이라는 공동체가 떨어져 나갑니다. 분명 한 공동체 속했지만, 공동체와 다른 성격을 지녔던 사람들이 생긴겁니다. 여기서 잠깐 10:31을 보실까요?
창세기 10:20 NKRV
20 이들은 함의 자손이라 각기 족속과 언어와 지방과 나라대로였더라
창세기 10:32 NKRV
32 이들은 그 백성들의 족보에 따르면 노아 자손의 족속들이요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그 땅의 백성들이 나뉘었더라
11장은 아직 나뉘지 않았는데, 10장은 이미 언어가 나뉘어지고, 민족도 땅도 나뉘어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10장과 11절은 시간 순이 아닙니다. 10장의 사건, 역사의 결과가 왜 일어났는지 설명해주는 부분이 11장입니다.
창세기 11:2 NKRV
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그들이 시날 평지에 살아갑니다. 시날평지는 메포포타미아 문명이 싹튼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 유역입니다.
이곳은 바벨론 땅입니다.
창세기 10:8–12 NKRV
8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9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10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11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12 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을 건설하였으니 이는 큰 성읍이라
니므롯이라는 특이한 인물, 6장의 네피림처럼 용감한 전사이자 시날 땅에 나라를 건설한 인물. 여호와 앞에 용감하다? 만용을 뜻하는 말. 그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반역. 곧 하나님께 반역한 인물이자 그분게 반역한 바벨론의 조상으로 이를 묘사한다.
창세기 11:2 NKRV
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그들은 이제 방향을 동쪽으로 잡았다. 서쪽에서 출발하여 동쪽방향으로 나아간다.
창세기 3:24 NKRV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세기 4:16 NKRV
16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놋 : 떠돌아 다님.
창세기에서 동쪽 방향으로 나아감은 하나님과의 분리, 반역. 그 결과는 떠돌아 다님. 방황.
반대로 서쪽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성전의 문에 동쪽에 나 있다. 에덴의 동쪽에도 화염겸을 두셔서 그들을 만나셨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과 분리되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니므롯을 대표로 하는 집단. 또한 타인을 내 몸처럼 아끼고 돌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슬렀던 함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 상대를 존엄하게 대하기 보다 목적에 맞춰 지배하려는 자들.
방향성이 중요하다. 무엇을 지향할 것인가? 그리고 지향은 반대편의 것을 포기하는 것 의미. 지양하는 것도 동반된다.
폭력, 지배, 하나님 불신은 지양 / 타자를 존중, 황금률 실천, 하나님 사랑은 지향
그들이 망한 이유는 마음의 방향을 하나님의 명령과 의도에 맞추지 않았다.
그럼 도대체 마음의 지향을 어떻게 하나님께 향하고 살아야 할까?
창세기 11:1 NKRV
1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말의 문제. 9절 말의 문제로 끝난다. 말이 중요하다.
11장은 1-2절에서는 시날평지 가기까지 한 언어였다는 점을 설명한다. 하지만 3-4절은 시날 평지에서 서로 말하는 사람들의 언어를 묘사한다. 그리고 5-7절은 이들을 보신 하나님의 언어를 기록한다.
하나였던 말이 인간의 말과 하나님의 말로 분리되고, 결국 인간의 말도 여러 갈래로 분리되었다. 그래서 이름이 바벨, 신의 문. 하지만 히브리어로는 발랄. 왁자지껄한 소리. 혼잡한 소음일 뿐이다. 한 말을 하던 사람이 두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혼잡이 찾아왔다.
시편 12:2 NKRV
2 그들이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야고보서 3:9–12 NKRV
9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10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11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12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마가복음 7:6 NKRV
6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말만 같을 것이 아니라 말과 마음이 말과 행동이 맞춰져야 한다. 지향하는 바만 말로 드러낼 것이 아니라, 지향하는 바를 살아내는 일이 중요하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이들은 어떤 일을 구체적으로 했나?
창세기 11:3 NKRV
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대신하자. 대체하자. 돌 대신 벽돌, 진흙 대신 역청. 돌은 이스라엘 지방에서는 흔했지만 시날 지방에서는 멀리 가서 구해야 했다. 또한 가나안 지방은 돌을 햇볕에 말렸지만, 시날지방은 가마에 구웠다. 이 기술은 최첨단이며 비싼 것이라 공공시설을 지을 때 주로 사용했다. 최첨단의 것으로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모두가 힘을 모아서 만들어야 하는 것이 생겼다.
개인 대신 집단이다. 하나님 대신 인간의 기술이다. 하나님의 약속 대신 인간의 자구책을 찾는다. 특별히 이 벽돌에 역청. 방주에 쓰던 재료. 아마도 방수로 만든 이유. 탑을 세워 하늘에 닿아 홍수를 피하고자 했던 그들의 노력이다.
창세기 11:4 NKRV
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또 말했다. 성읍으로 흩어짐을 면하고, 탑으로 우리 이름을 내자고 했다. 이름을 내다는 명성과 관련된 표현이기도 하다.
창세기 5:2 NKRV
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하나님도 사람에게 이름을 주셨다. 신이나 초월적인 존재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들에게 한다. 서로에게 신이 되겠다는 말.
고대에서는 이름을 내다는 표현이 자신들의 이름을 신격화 하자는 표현이었다고 한다. 탑은 지구라트. 신들을 향해 나아가는 계단과 높은 곳에는 방이 있는 신들을 맞기 위한 문. 이 지구라트는 최첨단 기술, 그들의 업적. 가의 신의 대접을 받을 만해서 신격화함. 그렇게 스스로 이름을 지어버림. 이름을 짓는 것은 창세기에 통치의 의미. 하나님께서 위임받은 세상을 다스리는 인간은 동물들의 이름을 지었다.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들 선택함으로 결국 하나님을 대적, 반역하게 된 셈이다. 하나님을 대신할 것들을 찾아 하나님을 조직적으로 밀어내는 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들의 모습을 보자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이 쌓는 업적이 악한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호와 하나님을 분노케 한 것은 도성 건축이 아니다. 인간이 도성에 부여한 안전성, 의존성, 인간의 교만이다.” - 월터 브르그만, 창세기, 312쪽
지식은 상아탑, 돈은 금으로 된 탑, 우리가 쌓는 직업 경력 이런 것을 쌓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에 의존하는 것을 경계하라는 말이다.
성적표, 명함, 경력, 재산
무엇-됨에서 벗어나 나 다움으로
안식일을 주신 이유
무노동은 노는 것?
있는 그대로, 존재 그대로 받아들여짐을 감사하는 날, 안식일
우리가 예배하는 이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짐. 침례요한이 정말 당신 오실 그분 하나님 나라의 일을 모두 하시고, 알려주실 분이십니까?
무엇됨의 세상에서 늘 아웃사이더이거나, 부족한 사람들을 존중받을 수 있게 회복시켜 자유롭게 하신 분이 예수님
그럼 인간의 말을 들은 하나님은 어떤 말씀을 준비하셨을까?
창세기 3:8–9 NKRV
8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창세기 4:9–10 NKRV
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사법적 판단을 하시기 전에 조사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조사의 때가 입박했다. 지존자께서 인간들이 건축한 것을 보시려고 곧 강림하실 것이다.” - PP, 124쪽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감찰하사 모든 인생을 보심이여 곧 그 거하신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을 하감하시도다. 여호와께서 열방의 도모를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케 하시도다.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33:13, 14, 10, 11
정말 내려오셨다. 우리가 하는 일에 관심 있으실까? 이런 생각을 한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내려 오셨다. 탑 건설자들은 자신들이 하늘에 올라가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탑을 짓는 이유가 신들을 위해서였다. 신들이 내려와 만날 것이라는 상상상하며, 말하며 지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진짜로 내려 오셔서 보셨다.
창세기 11:5 NKRV
5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왜 내려 오셨는가? 사람들을 보시기 위해 내려오셨다. 원어성경에서 사람들은 인간의 아들들이라고 적혀 있다. 창세기에서 인간의 아들들은 하나님과 적대적인 계보의 사람들로, 유한하며 연약하다. 하지만 폭력적이며, 자신들의 강함을 널리 알리려던 자들이다. 네피림이기도 했고, 용사이기도 했던 이들이 속해있던 집단이다.
그들이 탑을 지었다. 유한하고 연약하다. 폭력적이기까지 한 이들이 탑을 건설하고 성읍을 세웠다.
건설하다, 만들다 : 닐베나 / 혼잡하게 하다 나벨라.
인간들이 만들고, 세우며 업적으로 치려는 것이 도리어 혼잡이라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들이 한 땅을 선택해서 거주했다. 그런데 그들은 결국 흩어졌다. 결국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짐을 말씀하신다.
인간의 입장에서 바벨탑 건축의 중지는 큰 실망이었을 것이다. 건축자들에게는 삶의 의욕과 목적마저 빼앗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보다 먼저 그들을 위한 목적을 세우셨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내려오시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
인간의 뜻이 아무리 원대하고 강력해도, 이 땅은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다. 이를 말해준다. 이를 탑건축 사건이 보여주고 있다. 똑같은 사건이 신약에도 등장한다. 예수께서 하늘에서 떠나 이 땅에 나타나셨다. 인간들은 그분을 높은 자리, 곧 왕으로 삼고자 하였다. 정치적, 군사적인 힘을 가진 왕으로 만들어 민족을 구하고, 강한 이스라엘을 꿈꾸었다. 그래서 억지로 왕을 삼고자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를 그 위에 오르셨다. 사탄 역시 계획을 세웠다. 그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십자가 사건이 이뤄지지 않도록, 하나님의 뜻이 어그러지게 만들고자 노력했다.
그런데 예수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 그 뜻을 이루셨다. 그렇다 참으로 하나님의 뜻은 하늘에서도, 그분이 이 땅에 내려오실 때 이루어진다. 우리는 그런 재림을 기다린다. 그런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마냥 재림을 기다리기만 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의 일이 오늘 이 땅, 내 삶에서 일어나기를 고대하고, 살아낸다.
먼저 방향서부터 잡지 않겠는가? 동쪽으로 동쪽으로, 하나님과 멀어지는 길이 아니라, 서쪽으로 서쪽으로 성전의 문을 통과하여 제사장이신 예수님께 힘입어 담대하게 은혜가 넘치는 그분 앞으로 나아간다.
내 무엇됨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는 분을 예배하고자 뵙고자 나아간다. 가인이, 그들의 후손이 동쪽으로 감으로 결국 방황하고 실패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방황의 땅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이끌어내셨다. 그리고 광야교회에 우리를 초청하신다. 우리 하나님은 광야에서 예수님이 시험을 이기도록 도우셨다. 예수님은 그분의 말씀을 붙듦으로 이겼다.
붙든다. 덮어놓고 믿어서 일까? 아니다. 암송하고 기억하고, 이해하고 되씹으셨다. 예배 이후 일상을 어떻게 살아야할지 보여주는 말씀이다. 예배의 자리를 사모한 만큼 일상에서 하나님과 연결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일, 말슴을 가까이 두고 질문하고 암송하고 해답을 찾아가는 여정이 필요하다.
11장1-9에서 많이 반복되는 표현이 거기다. 장소에 관한 표현이다. 하나님은 거기 계신다. 한 민족으로 한 언어를 쓸 때에도, 탑을 짓고 성을 쌓아 명성을 쌓고 흩어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길 때도 거기 계신다. 참으로 여기 계실까? 오시면 어떨까 라는 상상을 하던 그때에도 하나님은 계신다.
바벨탑은 인간이 하늘을 향해 놓은 계단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을 대신할 요량으로 세운 것이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내려오셨다.
28장. 야곱의 사닥다리이야기.
창세기 28:11–12 NKRV
11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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