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에서 채움으로

룻기 새벽기도 설교 시리즈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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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 코로나 블루, 레드, 블랙
코로나 사태가 지속되면서 코로나 끼치는 의학적인 피해 뿐 아니라 사회심리적인 피해도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겨난 신조어들이 코로나 블루, 코로나 레드, 코로나 블랙 같은 용어들입니다.
코로나 블루는 코로나 사태로 인해 출입과 만남이 제한되니까 사람이 우울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블루가 파란색이라는 뜻도 있지만 우울증이라는 뜻도 있어서 생긴 말입니다. 코로나 레드는 코로나 블루를 넘어서 분노의 감정이 폭발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우울에서 분노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분노의 상태에서 더 나아간 상태가 코로나 블랙입니다. 좌절과 절망입니다. 분노가 폭발해서 인격을 다 불태우고 마치 재만 남은 상태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불타고 검은 흔적만 남으면 그야말로 좌절과 절망이라는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소위 심리 방역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우울해지지 않고 분노의 감정을 조절하며 긍정적인 태도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여러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코로나 사태는 경제적 심리적인 공백을 생성했습니다. 이 공백을 채우지 못해서 많은 이들이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이 공백을 채우기 위해 국가가 나서서 노력하고 있지만 역부족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 채움의 역할을 감당하는 공동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 채움을 통해 무엇이 드러나는지에 대해 설명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참된 채움을 누리는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교회는 채움을 위해 부름받았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은 교회는 채움을 위해 부름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언약 공동체이기 때문에 구약교회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들레헴에 사는 이스라엘의 신앙공동체도 교회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구약교회는 이방인인 룻을 받아들여서 교회 공동체가 가진 것들로 환대하고 베풀며 율법의 정신인 이웃 사랑을 보여줬습니다.
이 율법의 정신을 극한으로 실천한 사건이 바로 나오미의 친족인 보아스가 자기 차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기업 무를 자가 되어 나오미의 며느리인 룻을 자기 아내로 삼은 것입니다. 이 사건은 교회가 채워주는 공동체로 부름 받았음을 보여줍니다.
나오미가 남편과 아들을 떠나보내고 과부가 된 며느리만 데리고 돌아왔을 때 무엇이라 고백했습니까? 1장 21절에 보면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라고 고백합니다. 나오미가 다시 고향으로 귀환했을 때 그녀는 비어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남편과 아들이 죽는 상실, 당시 고대사회에서 대를 잇지 못한 상실, 상실을 경험하고 돌아왔습니다.
교회를 떠난 나오미가 다시 이스라엘이라는 교회로 돌아왔을 때 교회는 그녀에게 무엇을 해주었습니까? 교회는 그녀를 비난하지 않고 다시 받아주었습니다. 받아줄 뿐 아니라 상실을 경험한 나오미와 그 며느리의 그 상실을 회복시켜주고 채워주었습니다. 구약 교회의 일원이었던 보아스가 밭에서 이삭을 줍게 해서 배고픔을 면하게 해줬습니다. 나오미 가정의 기업 무를 자가 되어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해결해줬습니다. 대를 이어줬습니다. 오늘 본문 13절에 보면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라고 말씀하는데 이 부분이 원문에서는 설명이 좀 더 자세합니다. 원문을 그대로 직역하면 ‘이에 보아스가 룻을 취하였고 이에 그녀가 그에게 아내가 되었고...’가 됩니다. 생각해보면 보아스가 룻을 취하면 당연히 룻이 보아스의 아내가 되는데 굳이 ‘그녀가 그에게 아내가 되었고’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룻기의 기록자가 왜 이렇게 했겠습니까? 룻은 원래 죽은 자의 아내였는데 이제는 살아있는 자 보아스의 아내가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룻은 죽은 자의 아내로 그 옆자리가 비어 있었지만 이제 보아스로 채워진 것입니다. 거기다가 또 룻이 채움을 경험합니다. 이전에 모압 땅에 있을 때 룻은 자녀를 낳지 못했지만 보아스와 결혼 한 후에는 자녀를 얻게 됩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고대사회에서 자녀를 낳지 못하는 것은 상실을 의미했습니다. 이제 룻은 언약공동체 안에서 자녀를 얻어 상실에서 채움을 경험합니다.
16절에 보면 룻이 아들을 얻은 이후에 나오미가 아기를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안고 그의 양육자가 된다는 말이 등장합니다. 이 장면은 우리를 울컥하게 만듭니다. 여기 아기라는 단어 옐레드는 나오미의 죽은 아들들을 가리키는 단어 옐레드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룻기 1장의 나오미의 죽은 나오미의 아들들도 옐레드, 아기고 지금 읽은 본문에 나오는 품에 안은 아기도 옐레드입니다. 1장에서 아기를 잃고 그 부모의 품이 비어버렸지만 하나님께서 다시 나오미의 품을 옐레드, 아기로 채워주셨습니다. 나오미가 양육자가 되었다고 했는데 이전에 양육자가 되지 못한 것을 다시 회복시켜주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나오미, 그리고 이방인으로서 베들레헴에 정착한 룻이 어떻게 상실에서 채움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까? 보아스가 속한 구약교회가 상실을 겪은 이들의 삶을 긍휼로 채워주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상실한 이들을 채워주는 공동체이고 채우기 위해 부름 받은 공동체입니다. 교회가 율법에 순종해서 이웃 사랑의 정신을 지킬 때 교회는 상실한 이들을 채워주는 공동체로 쓰임 받습니다.
(증명) 야고보 사도가 야고보서 1장 27절에 뭐라고 기록합니까?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라”라고 말씀합니다. 구약의 교회든지 혹은 신약의 교회든지 상관없이 교회는 일관적으로 채워주는 공동체로 부름받고 쓰임 받았습니다. 부모를 잃은 고아에게 교회가 부모가 되어주고 남편을 잃은 여인에게 교회가 남편이 되어주며 그 필요를 채워주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모습입니다.
(적용)
성도님 여러분 우리가 이 자리에서 교회로 모이지만 세상 가운데서도 한 분 한 분이 교회의 역할을 감당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세상 가운데 있을 때에도 채움의 교회로서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위로가 필요한 직장 동료에게 위로로 채워주고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이에게 작게나마 나의 도움으로 채워줄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삶의 현장에서 채워주기 위해 노력할 때 그것은 우리 개개인이 조금씩 채우는 것 같지만 그 조금씩의 채움이 세상의 상실을 넉넉하게 채우게 될 줄 믿습니다.
2- 교회의 채움을 통해 하나님의 채움으로 나아간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교훈은 교회의 채움을 통해 하나님의 채움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17절을 보 시면 이웃 여인들이 나오미의 손자, 룻의 아들에게 이름을 지어줍니다. 원래 성경의 세계관에서는 부모가 태어난 상황에 맞게 자녀의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 전형적인데 이런 전형을 벗어나서 이웃 여인들이 이름을 지어주는 건 좀 특별한 일입니다.
이 이웃 여인들의 역할을 좀 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웃 여인들의 역할은 축복입니다. 성문에서 남자들이 율법을 말하고 지킬 것을 권한다면 그 이후에는 여자들이 이 율법을 실천한 가문을 축복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남자들이 율법을 선언하고 여자들은 복을 선언합니다. 율법과 복을 선언하는 것은 언약의 공동체가 하는 일입니다. 이런 정밀한 본문의 구조에서 여자들이 아기 이름을 지어준 것은 언약의 공동체가 아이의 이름을 지어준 것이고 교회가 이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준 것입니다. 이 아이의 이름은 바로 오벳입니다. 아바드가 섬기다. 예배하다라는 동사고 이 동사를 명사형으로 바꾼 것이 오벳입니다. 예배하는 자, 섬기는 자 혹은 종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왜 이 아이에게 섬기는 자라고 이름을 지어줬겠습니까? 최근에 학자들은 이 아이가 나오미를 위해 봉사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종으로서 봉사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 봉사합니까? 17절을 보시면 이 오벳은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입니다. 17절 말씀은 오벳이 다윗의 할아버지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벳은 구속역사에서 메시아의 계보를 세우는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교회가 율법에 순종해서 한 개인의 상실을 채웠고 오벳이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그 결과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세상의 공허한 역사를 채우는 하나님의 채움이 드러난 것입니다.
다윗은 왕이 없어서 고통 받는 백성들에게 왕이 되어줘서 어두운 사사시대를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시대로 이끌었습니다. 나중에 이 다윗을 통해 우리를 구원 하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십니다.
룻기 성경의 내용은 보아스와 그가 속한 언약 공동체가 나오미와 룻의 상실을 채우는 것만 말하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채움을 보여줍니다. 끊임없이 외세의 침략에 시달리고 왕이 없어서 백성들이 방자하게 행하는 시대에 하나님께서 왕을 주십니다. 이스라엘을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지키게 하시고 하나님의 통치를 보여주시고 메시아가 오실 길을 예비하십니다. 메시아의 왕조로써 영적으로 텅 빈 이스라엘을 채워주십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성경의 족보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아담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 어떻게 구원역사가 진행되는지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 11개의 족보가 나오고 출애굽기 3개 민수기 13개의 족보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신명기 여호수아를 지나서 사사시대를 맞이하면서 이 믿음의 계보가 보이지 않습니다. 계속 어두운 시대가 지속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룻기라는 이 짧은 성경에 다시금 믿음의 계보로 채워주십니다. 메시아의 계보를 채워주십니다. 그래서 역대기에 나오는 9개의 족보와 연결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 믿음의 족보가 완성되게 하시고 마태복음 1장을 보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메시아의 족보가 완성이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완성됩니다. 하나님이 가장 어두운 이스라엘의 역사를 믿음의 족보로 채워주셨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나오미 가정을 채워주는 이 일이, 어두운 시대를 메시아의 소망으로 채우는 하나님의 사역까지 연결이 됩니다.
(증명) 교회의 채움을 통해서 하나님의 채움을 보여주는 이 원리를 사도바울이 굉장히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 8장에서 연보에 대한 이야기, 그러니까 구제헌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구제헌금을 권하는데 권하기 전에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예수님이 원래 부요하신 분이지만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파산을 경험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연보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넉넉하게 하시기 위한 십자가 사역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제 사역을 할 때는 우리의 측은지심이 발동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채움을 통해 하나님의 채움이 드러나게 됩니다.
(적용) 우리가 세상에 파송된 성도로서, 교회로서 나름대로 우리의 것으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상실을 채워줍니다. 우리는 그 채움이 단순히 눈에 보이는 채움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마 대부분 성도님들이 한번씩은 이런 생각을 해보셨을 것입니다. 내가 주변사람들에게 필요를 채워주고 전도할 거라고 식사도 대접하고 했는데 이게 전도라는 결과로 바로 바로 안 돌아올까 이렇게 생각을 해보셨을 것입니다. 다른 이의 상실을 채워줄 때마다 갑자기 새가족들이 등록을 하고 출석 숫자가 팍팍 늘고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오늘 본문 말씀에 힘 입어서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가 된다고 해서 당장 룻이 다윗을 낳거나 예수님을 낳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구원 계획의 어느 순간에 다윗이 태어나고 예수님이 태어나셨습니다. 우리가 인내하며 우리의 것으로 세상에게 채움을 베풀 때 결국 하나님의 채움이 세상에 전달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넉넉함이 세상에 스며들 때 언젠가 세상은 우리에게서 십자가의 그림자를 발견하게 될 것 입니다. 그게 우리 맘대로 되지 않아서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꾸준히 조금씩 세상을 채움으로 섬길 때 언젠간 세상 사람들이 그 채움을 통해 복음의 향기를 맡아 교회에서 참된 영혼의 채움을 누리게 될 줄을 믿습니다. 이 일을 위해 우리 당평교회 성도님들이 귀하게 쓰임 받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결론
설교를 맺겠습니다. 교회는 채움을 위해 부름 받은 공동체입니다. 채워줄 때 건강한 교회 건강한 성도가 됩니다. 그리고 이 채움은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만 끝나지 않습니다. 이 채움을 통해 하나님의 채움, 복음의 채움이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 당평교회 성도님들이 이웃의 필요를 채워줄 때 그 이웃들이 하나님으로 인해 영혼이 채워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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