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가운데 선 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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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어제까지 룻기 설교를 마무리하고 이제부터는 바로 뒤의 성경인 사무엘상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무엘상과 하는 원래 한 권의 책입니다. 히브리어로 한 권의 책이었는데 헬라어로 번역하다보니까 양이 많아져서 1, 2로 나눠서 분류하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상하는 왕이 없어서 자기 소견대로 행하던 백성들이 신실한 인간 왕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신실한 인간 왕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왕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모든 성경이 그렇듯이 사무엘상하도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보여줍니다. 새벽기도를 통해 사무엘상, 하를 묵상할 때마다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경험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사시대를 종결시키고 하나님 나라의 왕정체제를 세울 사무엘이라는 인물이 어떻게 태어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인물은 반복되고 해결 불가능한 절망을 돌파하는 한 여인에 의해 태어났습니다. 함께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인생의 절망은 반복된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은 인생의 절망은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상의 시작은 유서깊은 족보로 시작합니다.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고조할아버지까지 족보로 추적할 수 있는 뼈대 깊은 가문의 사람이었습니다. 지금이야 족보라는 것이 별로 의미가 없지만 고대에는 내가 어떤 집안에서 태어났고 누구의 아들, 누구의 손자인지가 중요했습니다. 족보가 스펙이었습니다. 엘가나라는 사람은 이런 부분에 있어서 내세울 만한 것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엘가나에게 두 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이름은 한나고 다른 아내의 이름은 브닌나였습니다. 한나가 먼저 나온 것으로 봐서 한나가 먼저 맞이한 아내고 브닌나는 두 번째로 맞이한 아내입니다. 본문은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고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다고 묘사합니다. 아마 한나가 자식을 낳지 못하니까 브닌나를 두 번째 아내로 맞이해서 대를 이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엘가나라는 사람의 가문이 뼈대도 튼튼하고 또 물질적으로도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두 명의 아내를 두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일부일처제를 이야기합니다. 레위기 18장에 보면 아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요약하자면 아내 외에 다른 여자와 성적인 관계를 맺지 말라는 것입니다. 18장 18절에는 그 이유를 말합니다. “너는 아내가 생존할 동안에 그의 자매를 데려다가 그의 하체를 범하여 그로 질투하게 하지 말지니라” 아내가 질투하도록 하면 안됩니다. 이것이 남편의 의무입니다. 아내를 두 명 이상 맞이하면 반드시 질투하고 가정에 불화가 찾아옵니다. 엘가나라는 사람에게 두 명의 아내가 있다는 것은 이것 때문에 나중에 어떤 문제가 생길 것을 보여줍니다.
사무엘상 초반의 상황만 해도 왕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사사가 임시적으로 다스리는 사사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혼란 사사시대에 엘가나라는 사람은 기본적인 신앙이 있었습니다. 우상을 섬기기보다는 하나님을 섬기고자 한 사람입니다. 3절에 보면 엘가나가 매년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예배하며 제사를 드렸다고 말씀합니다.
문제는 4절부터 시작됩니다.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의 아내 브닌나와 그의 모든 자녀에게 줬는데 한나에게만 갑절을 줬습니다. 이것 때문에 브닌나는 한나를 괴롭게합니다. 본문을 보면 6절에 브닌나에게 있어 한나를 적수라고 표현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한 지붕아래 사는 사람을 적수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까? 이 둘 사이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왜 이렇게 사태가 심각했습니까? 성경에서 갑절을 준다는 것은 장자로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가문을 이을 가주로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브닌나의 생각은 그녀가 자식을 먼저 낳았고 브닌나의 자식이 장남이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문을 이끌어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엘가나가 한나에게 분깃을 갑절로 주니까 엘가나의 생각은 나중에 한나가 늦게라도 자식을 낳으면 한나의 자녀가 엘가나의 뒤를 이은 장자가 되고 가문의 리더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갑절로 분깃을 주는게 그 둘 사이의 은밀한 시그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브닌나가 한나를 괴롭힙니다. 매년 실로에 가서 제사를 드릴 때마다 매년 괴롭힙니다. 연례행사처럼 이 고난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한글 성경으로 보면 브닌나가 격분시키기 때문에 한나가 먹지 않았다 이정도로 되어 있지만 영어 성경으로 보면 한나가 밥이 안 넘어갈 정도로 브닌나가 괴롭혔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이 매년 반복됩니다.
어제까지 룻기 성경을 보셔서 잘 알지만 고대근동의 상황에서 자식이 없는 것도 고통인데 남편의 배려 아닌 배려 때문에 남편의 다른 아내한테 괴로움을 당해야 합니다. 게다가 이 엘가나라는 사람이 신앙은 좀 있는지 몰라도 그렇게 지혜롭진 않았습니다. 8절에 보면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냐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어찌하여로 연결된 구문은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이 구조를 쓰면 꾸짖고 책망하는 어조가 강한 말투로 보시면 됩니다.
엘가나는 한나의 고통이 자신의 잘못된 배려로 생긴 것인 줄도 모르고 도리어 내가 너한테 좋은 남편인데 왜 밥을 굶어 식사를 안 해? 왜 울고만 있어 이런식으로 이야기 하고 있었습니다. 한나의 속이 얼마나 썩어 문드러졌겠습니까?
본문의 말씀은 이 가정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보여줍니다. 뼈대 있고 신앙이 있는 가정인데도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일부일처의 명령을 지키지 않아 고통당했습니다. 가족끼리 먹는 제물의 의미는 서로 교제의 의미가 있는데 엘가나가 이 정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멋대로 누구한테만 두 배를 줘가지고 가정에 불화가 찾아옵니다. 제대로 된 위로가 없습니다. 여기다가 성전은 정상적입니까? 다음 번에 설교할 때 언급하겠지만 성전은 흡니와 비느하스라는 악한 제사장들이 잡고 있었습니다. 이걸 굳이 3절에서 언급하는 것은 엘가나의 가정을 통해 이스라엘의 절망적인 영적인 상태를 말해주기 위함입니다. 어쨌든 본문은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말해줍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인생의 절망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인생, 하나님을 떠난 인생에게는 절망밖에 남지 않습니다. 엘가나 가정이 매년 실로에 올라가고 매년 분깃을 불공평하게 나눠서 매년 한나가 고통당합니다. 누구 하나 의지할 사람이 없고 누구 하나 진정으로 내편 들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 같은데 도움이 안됩니다. 남편이 아니라 진짜 남의 편 같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반복된 절망 밖에 없습니다. 마치 룻기 이전의 사사시대의 반복된 고통의 패턴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절망이 반복되면 사람이 어떻게 살겠습니까?
본문 2절에 한글성경으로는 브닌나는 자식이 있고라고만 이야기했는데 영어성경에는 복수형태로 나왔습니다. 브닌나에게는 자식들이 있고 이렇게 됩니다. 상상을 한 번 해봅시다.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사람은 저렇게 자식이 많습니다. 나는 하나도 없는데 저 사람은 자식이 많습니다. 그 자녀들이 매년 키가 자라고 생각이 자랍니다. 브닌나의 말을 듣고 한나는 무시합니다. 남자아이들은 아빠의 다른 아내를 보고 경계하는 표정을 짓고 여자아이들은 앙칼진 표정으로 아빠의 다른 아내를 보았습니다. 자기들끼리 자기 엄마한테 가서 쑥덕거리고 킥킥거리며 얼마나 힘들게 했겠습니까? 브닌나의 아이들이 자랄수록 매년 제사를 지내러 가는 일이 반복될수록 한나의 절망은 깊어져 가고 절망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적용) 우리에게도 남에게 말하기 힘든 절망이 있지 않습니까? 물질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카드 값이 계속 밀리고 빚이 계속 쌓이고 전세금과 월세가 올라가거나 대출을 많이 내서 마련한 집의 가격이 떨어집니다. 후배에게 승진이 밀리거나 실적에서 무시를 당합니다.
신앙적인 측면에서는 자꾸 반복된 죄를 짓고 은밀하게 짓고 있는 죄를 끊을 방법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한 지 오래되고 봉사도 익숙하게 잘하는, 내 나름대로 교회에서 입지가 있는데, 남들에게 말하기 참 힘들고 껄끄러운 것들이 나의 삶을 옥죄어서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누구 하나 나의 고통을 알아주지 않고 알아줄 수도 없는 그런 상황에 처합니다.
2- 사람이 내놓은 해결책은 효능이 없다.
(설명) 그다음으로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사람이 내놓은 해결책은 효능이 없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집안의 뼈대가 있고 물질적으로도 여유가 있는 이 엘가나 가정에는 깊은 문제와 상처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문제로 시작했을 것입니다. 엘가나가 한나와 결혼을 했을 땐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몇 해가 지나도 자녀가 없으니까 인간적인 방법을 썼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사라에게서 자녀를 얻지 못해 하갈이라는 여종을 들인 것처럼 엘가나도 비슷한 방법을 썼습니다.
한나에게서 자식을 낳지 못하니까 브닌나라는 여인을 맞이했습니다. 처음에 뼈대 있는 엘가나 가문에 후대가 없으니까 브닌나만 데려와서 자식을 많이 낳으면 해결되겠지 했습니다. 그리고 브닌나가 자식을 몇이나 낳았을 때는 그 문제가 해결될 줄로 알았을 것입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모든 상황을 극복할 줄로 알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적인 방법을 쓰면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고 행복해질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나는 자기 배로 낳은 자식이 아니라 엘가나 만큼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엘가나 생각해낸 방법이 한나에게 분깃을 더 주는 것입니다. 한나가 분깃을 더 많이 받으면 좀 힘든 마음에 위로를 받겠지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단순한 그의 생각에 브닌나는 자식이 많고 행복하니까 한나가 분깃을 더 많이 받아도 이해해주겠지 하고 생각 없이 챙겨줬는데 이것 때문에 이 집안에 더 문제가 생깁니다. 두 여인의 사이가 나빠집니다. 사이가 나빠진 것 때문에 한나가 힘들어하니까 찾아가서 내가 열아들보다 더 좋은 남편이잖아 하고 위로합니다. 이 위로도 전혀 해결이 안 됩니다. 오늘 보면 자꾸 인간적인 방식으로 해결하고 위로하려고 하는데 근본적으로는 해결이 안 됩니다.
이런 일이 생긴 배경에는 5절과 6절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 한나의 태의 문을 막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걸 두고 하나님께 구하고 기도를 해야 하는데 첫 단추를 잘못 끼우니까 계속 절망이 깊어집니다. 이쪽 구멍을 막으면 저쪽 구멍이 뚫리고 또 다시 저쪽을 막으면 이쪽이 뚫립니다. 사람이 아무리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해도 그 문제의 근본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으면 결코 해결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문제를 통해 우리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있는데 자꾸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고 인간적인 방편을 쓰면 괴로움만 더욱 찾아올 뿐입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이 의사 저 의사를 다 만나도 괴로움만 더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문제의 근본을 해결할 수 있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인간적으로 해결하려고 해도 고통만 가중되었습니다.
(적용) 우리도 이런 일들을 삶 가운데 경험하지 않습니까? 내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고통만 커집니다. 인간관계가 너무 힘들어서 내 나름대로 그 사람에게 잘해줘도 보고 으름장도 내보면서 주도권을 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면서 온갖 노력은 다하지만 결국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고 나만 지칩니다. 참고로 우리가 절대 싸워서는 안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하고는 절대로 싸우면 안됩니다. 반드시 집니다. 두번째로 기도 안하는 사람하고 싸우면 절대로 안됩니다. 반드시 집니다. 예수님 잘 믿는 사람일 수록 반드시 집니다. 우리가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 말고는 이길 방법이 없습니다.
이런 것 말고도 내가 가진 문제들 나 혼자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혼자 끙끙 앓고 있으면 해결은 안되고 문제 때문에 겪는 고통이 늘어만 갑니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무수히 다 경험을 해보았습니다. 저도 남들이 모르는 깊은 상처가 있습니다. 제가 잘못해서 생긴 상처가 아니기 때문에 너무 억울한 상처였고 누구에게 하소연하기엔 너무 커서 다른 사람을 부담스럽게 만들 것 같은 그런 상처가 있었습니다. 저의 상태가 폭발하기 일보직전까지 갔을 때 미칠 것만 같아서 하나님께 나아가고 그걸 해결 받게 되었습니다.
(예화) 내가 어떤 병이 생겼는데 자꾸 내 몸은 내가 잘 안다고 고집 피우고 병원에 가지 않고 맨날 네이버 검색해서 이런 정보 저런 정보 다 들어가며 혼자서 처치하면 결국 병세만 깊어지고 고통한 가중됩니다. 이 병을 해결할 수 있는 의사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생긴 문제는 우리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가져가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처방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이상 우리의 본성에서 흘러나오는 절망은 피할 길이 없고 그걸 우리가 해결하려 들다가는 더 심각한 상황만 옵니다. 이 때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다음번에 다루게 될 내용이지만 한나가 자신의 상처가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녀는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서 자신의 상처를 치료받은 것을 넘어서서 왕이 없던 시대에 왕을 세우게 될 인물을 양육하게 되는 위대한 역할을 감당하게 되고 구원 역사의 일꾼으로 쓰임 받습니다. 한 때 상처 입은 여인이었지만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통해 오히려 상처 입은 이스라엘을 치유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메시아가 오실 토대를 열어 이스라엘이 구원의 여정을 걷도록 하는데 쓰임 받게 됩니다.
결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절망과 상처가 반복되는 가운데 살고 계십니까? 도저히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이 되지 않습니까? 죄송하지만 이것은 우리에게 다행이기도 합니다. 계속 절망이 반복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치유가 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힘으로 절망이 해결된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나의 힘으로 절망이 해결됐다면 사사시대를 종식시킨 사무엘이라는 인물이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류의 죄 문제가 자체적으로 해결이 되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절망은 사실 소망의 통로가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많이 아프시지요? 힘드시지요? 이것을 안고 지금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십시다. 그래서 절망의 수렁 가운데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찾고 이 뜻을 실천하여 하나님의 사역에 동역자가 되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놀라운 일이 우리가운데 있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