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를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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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5 views진정한 사랑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다. 1)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2) 받기를 바라고, 칭찬 받으려 베푸는 사랑은 진정한 것이 아니다. 3) 억지로라도 사랑을 하였을 때에 우리의 상급이 크다.
Notes
Transcript
Sermon Tone Analysis
A
D
F
J
S
Emotion
A
C
T
Language
O
C
E
A
E
Social
1. 서론
1. 서론
오늘이 벌써 2월 마지막 주입니다. 내일 모레 부터는 3월 달이 시작이 되면서 이제 아이들도 방학이 끝나고 개학하여 학교로 돌아가게 됩니다. 물론 코로나 19 확진자 수가 너무 많아서 온라인 수업으로 할지 등교를 하게 될지는 약간 변수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원칙적으로 등교를 목표로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계속 17만, 16만 그렇게 확진자 숫자가 나오는데 전문가들이 예상하기는 30만까지도 나올 수 있다고 보더라고요. 그런데 그렇게 정점을 찍으면 결국 이제 그 숫자가 내려가는 거 아닙니까? 사실 세계 모든 나라들이 정점을 찍고 이제 확진자 숫자가 내려가는 추세다 보니까 이제 코로나 19 시대가 끝이 났다고 전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 나라가 지금 이렇게 세계적으로 하루 확진자 숫자가 1위, 2위하는 이유는 그동안 방역을 잘해서 그만큼 확진자 숫자가 나오지 않다 보니까 지금에서야 많이 나오는 겁니다. 결국은 이제 코로나 19가 종식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몇 가지 문제들이 남아 있는데 첫 번째로는 이러다가 또 다른 변이종이 나오면서 다시 한 번 더 극심한 코로나 펜데믹이 오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코로나가 종식이 되고 난 후에 우리의 사회나 문화는 분명 코로나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라는 겁니다. 어두운 곳에 오래 있다가 갑자기 밝은 데로 나오면 눈이 아픈 것처럼 아마도 그러한 고통들이 생기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멀리서 볼 것이 아니라 교회만 해도 그렇습니다. 코로나 이전 교회에서 가장 강조한 것이 주일 성수입니다. 주일날 예배 안드리고 어디 가는 것, 집에 있는 것 이것은 반드시 금해야 하는 죄로 인식이 되어 있었고, 또 목사님들이 그렇게 강조를 해 왔습니다. 그런데 코로나 19로 인하여 그것이 깨어진 것입니다. 물론 코로나 19라는 특수성으로 인한 것으로 생각하면 되겠지만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이제 문제가 생기면 그냥 온라인으로 예배하면 되지 하는 여지가 생겨 버린 것입니다. 옛날에는 아파서 병원에 입원해 있어도 주일날 교회에 가겠다고 외출을 신청하고 그랬습니다. 제가 전도사 시절 섬겼던 교회 사모님은 반쪽이 마비가 와서 병원에 입원했는데 주일날 교회에 가겠다고 해서 휠체어를 타고 교회에 왔었다고 하시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러한 일들은 어리석은 일이요. 그냥 병원에서든지 집에서든지 온라인으로 예배를 보면 된다는 생각이 굳어지게 된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왜 큰 문제인가 하면 그렇게 교회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사실 마음도 멀어진다는 것입니다. 신앙도 식어 버리고 그러다가 결국은 교회를 떠나고 하나님의 품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탄 마귀가 그냥 놔두지를 않습니다. 이러 저러한 문제들을 우리가 안고 있는 것인데 결국 해답은 이러할수록 우리는 더욱더 말씀 붙잡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매달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기초적인 것인데 또한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것입니다. 오늘은 2월 마지막 주로 그동안 2월 한 달 동안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 사랑의 열매에 대해서 말씀을 전했는데 사랑에 대한 마지막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기독교의 가장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박애 정신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원수를 사랑하며 미워하는 자에게 선대하라는 말씀 때문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실천하셨고, 천군 천사를 불러 자기를 잡으러 온 로마 병정들을 다 무찌를 수 있었지만 오히려 자기를 보호하려고 제자 베드로가 칼로 제사장의 종의 귀를 잘랐을 때에 그 귀를 고쳐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죽어가시면서까지 자신을 향해 조롱하고 침맽고 욕하는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시면서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자신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그러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과 그리스도인들 역시 그렇게 사랑을 실천했기에 결국 오늘날 기독교가 이렇게 세계 종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분에 있어서 우리가 오해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이 그 원수가 죄를 짓는 것을 그냥 방치하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진정한 사랑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인데 왜 성 소수자를 사랑하지 못하고 그들을 인정하지 못하냐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성애자를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사랑한다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그들을 진리의 길, 바른 길로 이끄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지, 그들에게 잘보이기 위해서 그래 자기가 원하면 그렇게 살아야지 그렇게 살다가 지옥가세요. 라고 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가 제대로 이해를 해야 제대로 그것을 지켜 행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어떤 것이 진정으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지켜 행하는 것인지 알고 그것을 행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2. 본론
2. 본론
1)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1)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자 먼저 첫 번째로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7-28절을 보시면 원수를 사랑하는 것,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는 것,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고 모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우리가 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제대로 보여 주고 있는 말씀인데 첫 번째로 선대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로마서에서 보면 사도 바울은 악에게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악을 악으로 대하는 것은 결국 이기는 것이 아니라 지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의도대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대를 맞으면 너 때렸지 하고 한 대를 때립니다. 그러면 어! 나는 약하게 때렸는데 너는 쎄게 때렸어, 하면서 또 때립니다. 어! 나는 한 대 때렸는데 넌 두 대 때렸어. 결국 그렇게 치고 박고 싸움이 되는 것이고 결국 둘 다 상처를 입게 됩니다. 결국 악에 대해서 악으로 대항을 하면 둘 다 상처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으로 대할 때에, 물론 웃는 얼굴에 침 못뱉는다는 말이 있지만 나는 침을 뱉는다 퇘 하는 나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가 선대할 때에 결국 그것이 선하게 끝이 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우리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그 두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제 3자, 즉 하나님께서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들을 지켜보시고 선악 간에 판단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우리가 악을 선으로 대할 때에 그것을 우리에게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런 차원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선악 간에 판단하시고 악인은 벌을 주시고 선인은 상급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악을 악으로 대할 때에 결국 서로 상처 입고, 그로 인해 결국 서로 하나님께 벌을 받습니다. 그러나 악을 선으로 대할 때에 그것이 잘 되면 악으로 대했던 사람이 오히려 감독을 받고 선으로 대한 사람을 인정하게 됩니다. 설혹 그렇게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모든 것들을 지켜보고 계신 하나님께서 악인은 벌주고 우리는 상급을 주시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경우의 수를 보더라도 악을 악으로 대하기보다 선대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인 것입니다. 또한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라는 것과 모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것도 마찬가지로 믿음을 전제하고 본다면 저주하는 자를 위해 축복하여 그가 복 받는 백성, 믿음의 백성이 되기를 기도하고 바란다면 결국 그가 자기 잘못을 인정하게 되고, 둘의 관계는 회복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 나에게 욕했으니까 지옥이나 가라 하면 결국 그 사람은 지옥에 가서도 나를 저주할 것이고, 또한 형제에게 라가라고 욕하는 사람은 감옥에 갇히게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욕을 욕으로 대응 한 삶도 결국 그 죄의 값을 치루게 되는데 결국 그로 인해 손해를 보는 것은 우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대하고, 축복하고, 기도하는 것이 가장 최선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기 때문에 욱하는 감정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까지도 컨추럴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화가 나고 욱하여 입에서 욕이 나올 것 같더라도 이렇게 해보십시오. 야! 이 복 받을 놈아, 야! 이 천국 갈 놈아 에이 선 오브 갓, 야! 이 하나님의 자식들아! 라고 말입니다. 결국 성령께서 여러분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긍휼의 마음을 품게 하실 것입니다.
2) 받기를 바라고, 칭찬 받으려 베푸는 사랑은 진정한 것이 아니다.
2) 받기를 바라고, 칭찬 받으려 베푸는 사랑은 진정한 것이 아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서 전제가 되어야할 것은 받기를 바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즉 받기를 바라고, 칭찬을 받으려고 베푸는 사랑은 진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옛날에 코미디 프로에서 풍자하던 것인데 연말에 고아원에 정치인이든지 혹은 유명 연예인이든지 사업하는 사람들이 라면을 수 십 박스를 가지고 와서 마당에 쌓아 놓고 아이들이랑 같이 사진을 찍습니다. 그러면 아이들끼리 서로 수근 수근 댑니다. 아 올 겨울 주구 장창 라면만 먹겠네. 라면 정말 질린다. 라고 말입니다. 즉 선행을 베풀고 사랑을 베푸는데 받는 사람은 신경도 안쓰고 그냥 선전용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고 그것 또한 믿음이 없는 그런 사랑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들을 다 보시고, 심지어 그런 선행을 하는 그 사람의 속내까지도 다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칭찬을 받으려고 하는 사랑에 대한 부분인데, 이것은 경우에 따라서는 합당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하는 사랑은 외식하는 사랑이요.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사랑이지만 하나님께 칭찬을 받으려고 하는 사랑은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오늘 본문 32절을 보시면 “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는 말씀은 곧 우리가 대가 없이 원수를 사랑할 때에 하늘 아버지에게 칭찬을 받게 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목표로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받으려고 하는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경우에 따라서 합당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31절의 말씀을 보시면 알 수 있는데 “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은 너희가 받고 싶으면 대접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즉 받기 위하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마찬가지로 내가 이만큼 줬으니까 너도 이만큼 줘야 한다라는 주고받기 식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주관하셔서 우리에게로 돌아오게 되는 사랑인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의 양은 변하지 않고 그것이 이동하기만 한다는 것입니다. 즉 내가 이 사람에게 선을 베풀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풀고, 또 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그리고 결국 그렇게 돌고 돌고 돌아서 나에게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예전에 가이드 포스터에 실린 실화의 이야기인데 미국 사우스다코타 주에 로비타 에센 바움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시골길을 차로 달리다가 고장난 차 때문에 애를 먹고 있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을 도와 차를 수리해 주었는데 그 사람들이 돈으로 사례를 하려고 하자 그는 “다음에 다른 차가 고장난 것을 보면 도와주세요”라고 말하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두 주일 후에 그의 아버지가 차를 끌고 길을 가던 중에 타이어가 펑크가 나서 곤경에 처하게 되었는데 그때 어떤 운전자가 타이어를 교체해 주었다고 합니다. 너무나 고마워서 조금이라도 사례를 하려고 했더니 그 사람이 하는 말이 “2주일전에 어떤 사람이 말한데로 하는 겁니다.”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에센바움이 베푼 선행이 자기 아버지에게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믿음이 있는 사람으로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주관하시고 운행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께서 결국 갚아 주신다는 것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사람들로부터 대가와 칭찬을 바라지 마시고 우리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댓가와 칭찬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3) 억지로라도 사랑을 하였을 때에 우리의 상급이 크다.
3) 억지로라도 사랑을 하였을 때에 우리의 상급이 크다.
그런 차원으로 마지막으로 전제 되는 것이 바로 억지로라도 사랑을 하였을 때에 그 상급이 크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 데로 우리는 연약한 인간, 감정적인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게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우선적으로 그렇게 사랑하는 감정이 생기지 않는 걸 어쩌겠습니까? 그러나 그럴 지라도 억지로라도 사랑을 하였을 때에 그 상급이 더욱 큰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우리는 우리의 것을 많이 포기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젊은 부자 청년이 나옵니다. 이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계명을 지키라고 합니다. 그 청년이 말하길 자기가 그 계명을 잘 지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십니다. 그때 그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갔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제자들이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습니다. 라고 말하자 예수님께서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자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즉 많이 버린 자가 더 많이 포기한 자가 더 많이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의 자존심, 우리의 물질 포기하고 원수 사랑하는 것을 실천해야 큰 상급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어떤 상급이 가장 큰 상급인 가, 그것은 바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가장 큰 상급인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들이 이건희 회장의 아들이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팔자가 핀 거지요. 유산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12절에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5장 팔복 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엄청난 복인 것입니다. 아버지의 것을 받을 수 있는 자격, 즉 아버지 것이 다 나의 것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상급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게다가 그것은 바로 영생을 받는 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기 때문에 영생은 자동으로 오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이러한 큰 상급을 받아 누릴 수 있도록 억지로라도 원수를 사랑하실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3. 결론
3. 결론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이번 2월 달 한달동안 사랑의 열매 맺기 위하여 설교를 했는데 사실 제가 확진이 되고 그로 인해 전교인 온라인 예배를 드리고 해서 사실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정신 없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우리가 배운 그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귀한 상황이 또한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어려움 가운데 우리를 향하신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의 경험이 크면 클수록 우리는 더욱더 하나님 앞에 거함을 깨닫고 또한 그 사랑으로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우리는 주위를 둘러 볼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특별히 가족을 돌아보고 우리가 사랑을 해야할 너무나도 가까운 사람들을 돌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설교의 제목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인데, 자기 가까운 사람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원수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남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고 지난주에 말씀을 드렸던 것처럼 말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은 우리 속에서 넘쳐나서 그 주변으로 퍼지고 결국 그것이 원수에게 까지도 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원수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게 되고, 또한 대가를 바라는 외식적인 사랑이 아닌 하늘 아버지를 바라보며 억지로라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망우 중앙 교회에 하나님의 사랑이 차고 넘치고 넘쳐서 여러분들 가슴 속에 차고 넘치고 넘쳐서 그것이 여러분들의 가족에게로, 이웃에게로, 이 사회로, 심지어 여러분들의 원수에게 까지도 넘쳐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