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역의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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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views1. 성벽 재건 2. 방해하는 무리 3. 우리의 마음 4. 반역의 불꽃을 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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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함께 나눌 말씀은 느헤미야 6장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오늘 1부 예배를 준비하며 어떤 말씀을 함께 나누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부담감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우리 담임목사님께서 요즘 회복과 공동체에 대한 주제로 말씀을 나누고 계시다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느헤미야는 회복된 공동체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어떻게 공동체가 회복되어지는지 그리고 회복된 공동체를 괴롭히고 또 분열시키는 것이 무엇인지도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코로나의 위협은 여전하지만 우리는 많은 것들을 회복하고 있고 앞으로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하는 것은 바로 공동체입니다.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 공동체가 반드시 회복되어야 합니다. 혼자 하는 신앙생활도 좋지만 함께 하는 것이 더 큰 은혜를 함께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제2가족 공동체가 회복되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가득하기를 소망합니다.
함께 살펴볼 느헤미야의 내용은 완전히 망해버린 이스라엘에게서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은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 완전히 폭삭 망해버렸습니다. 그들이 살던 터전은 완전히 황폐해졌습니다. 그들은 여러 이유들로 인해 황폐화된 그들의 삶의 터전. 고향을 다시 세울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발을 딛고 살아가던 터전들만 무너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선택받은 백성. 선민으로써의 정체성 마져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엘리트 그룹들은 포로로 잡혀갔고, 국민들은 강제로 이방인들과 결혼을 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세상은 이스라엘과 잡족이었습니다. 무조건 지옥에 가는 잡족이었던 이방인들과 결혼을 해야 했어요. 혼혈이 많아질수록 이스라엘은 선민으로써의 정체성을 잃어갔고 자신들의 대한 자존감도 낮아져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게 중요했던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성전까지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거의 없어진거에요. 유대인이라는 민족도 거의 없어진거에요. 이방인들과 동화된 삶을 살며 소멸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죠. 삶에 대한 모든 희망이 없어질 위기에 쳐했던 그 때 한분만은 희망을 잃지 않았어요. 바로 하나님이시죠. 회복의 물꼬를 틀 준비를 이미 마쳐놓으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의 자리로 이끌어 가세요.
에스라 느헤미야서는요. 시간적으로 약 100년에 걸친 내용들이에요. “여호와께서 바사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이렇게 시작하는데, 여기에서 ‘감동시키다’ 는 뜻은 ‘잠자던 사람을 깨우다’라는 뜻인데요. 성경학자들은 이 것을 ‘잠자고 있던 역사를 깨웠다.’라고 이야기해요.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잠자던 자와 역사를 깨워, 새로운 일들을 진행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죠.
그렇게 하나님께 잠자던 역사를 깨웠고 사람들이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어요. 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별 볼일 없는 집단이었어요. 많아봐야 수만명에 불과했고, 이미 예루살렘에 터를 잡고 살던 이방인들과 동화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어요. 하지만 그들은 버텨내며 성전을 지었고, 후에 성벽까지 건설하게 되었죠. 이 모든 순간들은 하나님의 일하심과 주도하심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느헤미야라는 리더가 뛰어났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했을 수 있어요. 하지만 리더가 아무리 뛰어났어도, 그가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았다면, 그의 믿음이 견실하지 않았다면요. 불가능했어요. 인간적인 관점으로 보았을 때, 할 수 없는 그 상황들 속에서도 리더들은 하나님을 붙잡았고 결국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수해내었죠.
이제 그들은 모든 것을 이룬 듯 보여요. 성전을 지었어요. 이제 하나님을 향한 제사가 회복되었어요. 성전이 재건되었어요. 이제 이방인들과 담을 쌓을 수 있어요. 구별되어지고 거룩해질 수 있는 기회가 생겼어요.
이제 그들은 선민으로써의 삶을 살기만 하면 되는 것이죠. 그런데 어떻게 됐죠? 그들이 회복된 모습으로 살았을까요? 아니요. 그들에게는 끊어내지 못한 여전한 반역의 불꽃이 있었어요.
그들에게 남아있었던 반역의 불꽃. 그 불꽃의 씨앗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아는 것처럼 성벽을 재건하는 일은 쉽지 않았어요. 정말 많은 어려움들이 있었어요. 특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떠한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위해 달려가면요.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려는 존재가 있고요. 목표를 흔들고, 다른 길을 제시해서 우리가 헤매도록 만드는 일들이 늘 있어요.
이 시대의 청년들이 그러는 것처럼 저도 정말 다양한 아르바이트들을 해봤어요. 노가다. 택배 상하차는 기본이구요. 최근에는 쿠팡 배송도 해봤습니다. 대리 운전도 해봤고,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보이는데로 했었어요. 왜 나는 이렇게 쉬지 못하고 일해야 하는 것일까? 이런 고민을 하며 마음 힘들어하기도 했고 또 하나님께 한탄하며 기도하기도 했어요.
그렇게 기도하던 중 이런 마음이 들었어요. 다양한 일의 경험이, 나를 성장시키는 시간이라 생각하면 어떨까. 이것이 나중에 사역하며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더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을까? 세상을 살아가며 느끼는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공감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이런 마음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이왕 이렇게 된 것, 사회 경험을 해본 사역자가 되어보자.’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팀 회식자리에서 술로 인한 곤란함도 경험해 보고 싶었고, 주일날 출근해야 하는 상황에도 처해보고 싶었어요.
그러던 중 한 곳에 취직을 하게 되었어요. 하나님이 저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많고 많은 부서 중 가장 일이 많은 부서로 보내셨습니다. 8시 30분까지 출근합니다. 퇴근은 기약이 없어요. 밤 10시에만 퇴근해도, 할렐루야입니다.
그러던 중 중요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었는데, 출근과 퇴근의 개념이 사라지게 되었어요. 어느 날은 새벽 4시에 퇴근을 했어요. 퇴근하면서 집에 가면 샤워하고 옷 갈아입고 잠깐 눈을 붙였다가 다시 출근인데, 집에 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게 고민하다 집이 아닌 교회로 향했습니다. 특새가 아니면 잘 보이지 않던 제가 멀끔한 양복을 입고, 새벽예배에 나오니 목사님들께서 “너 무슨 일 있냐. 왜그러냐.”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습니다.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약 4개월의 시간동안, 정말 힘들었습니다. 팀 프로젝트가. 저에게 주어진 영역만 한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더라구요. 제 옆에 있는 동료의 일까지 도와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동료가 진짜 일을 잘 안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본인 일은 하지 않으면서, 다른 일에 다 훈수를 두고 다니고, 정작 자신의 일은 밀려있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제 일보다, 그 분의 일을 더 많이 했던 것 같아요. 4개월 동안 가장 힘들었던 것은, 출퇴근의 개념이 없었던 것도, 잠을 제대로 못 잤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동료였습니다. 그리고 그 동료로 인해, 일의 진행이 더뎠고 팀장님은 화를 냈고, 저와 다른 팀원은 그 실수를 채우기 위해 정말 미친 듯이 일을 했습니다. 함께 마음을 모아, 공동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열심히 달려도 쉽지 않은데, 마음이 갈라지는 동료가 있으니, 더 어렵고 힘이 들더라구요.
이스라엘의 성벽 재건도 이와 동일했습니다. 첫 삽을 뜬지 52일에 걸친 성벽 공사가 끝이 났습니다. 52일 동안 아무런 방해도 탈도 없이 지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가 참 집요하게 괴롭혔습니다. 성벽 재건을 막으려고 정말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이 모이지 못하게 되었어요.
우리 17, 19절을 같이 볼까요?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또한 그 때에 유다의 귀족들이 여러 번 도비야에게 편지하였고, 도비야의 편지도 그들에게 이르렀으니”, “그들이 도비야의 선행을 내 앞에 말하고 또 내 말도 그에게 전하매 도비야가 내게 편지하여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하였느니라. 아멘”
유다의 귀족들이 도비야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 유다의 귀족들은 누구일까요? 18절에 그들 중 일부가 등장합니다. 도비야는요. 유다 귀족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보디야의 아들 여호하난은 유다 귀족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이 딸의 아버지는, 므술람입니다. 여러분 이 18절에 등장하는 이 므술람은 느헤미야 3장 4절에 등장하는데요. “므세사벨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므술람이 중수하였고” 므술람은요. 성벽 재건에 필요한 재정을 후원하던 사람이었어요.
느헤미야는 성벽을 재건하여, 이방인들과의 교류를 끊고, 이스라엘이 거룩한 공동체가 되기를 바랬어요. 므술람을 포함한 유다 귀족들 역시, 성벽이 재건되는 것에는 찬성을 했습니다.
그러나 함께 일을 하고, 많은 재정을 담당했던 므술람과 유다 귀족들은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느헤미야와 같은 마음을 갖고 있었어요. 성벽을 쌓고 그 안에서 살고 싶었어요. 선민답게 살아가고 싶었어요. 그리고 동시에 자신들이 가진 기득권을 놓지 않고싶었어요. 욕심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죠.
유다 귀족들이 도비야와의 관계를 끊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왔던 것은,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이유가 있었습니다. 도비야가 가진 권력과 재산은 막강했습니다. 도비야가 느헤미야를 죽인다고 협박을 하고, 암살 등 갖은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실패하자, 그는 전략을 바꿨습니다. 마치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고 처음에 힘으로 정치를 했죠. 그런데 굽히질 않는 것이죠. 그래서 그들은 문화 정치로 형태를 바꿔 지배하기 시작했던 것처럼, 힘으로 밀어붙이던 도비야가 전략을 바꾸어, 이제는 유다 귀족들을 구워 삼고, 예루살렘의 시장 경제를 장악하기 시작했어요.
무너졌다 이제 재건되기 시작한 예루살렘으로써는, 도비야의 이런 경제적 힘을 넘어서는 것이 쉽지 않았죠. 그러니 유다 귀족들은 자신들의 권력과 또 기득권 등을 지키기 위해선 도비야와 손을 잡아야 했어요. 손을 잡고 나니 걸리는 것이 느헤미야였던 것이죠. 자신들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이 성벽재건을 와서 해주니 고마워요. 이제 도비야랑 잘 지내기만 하면 모두가 평화로울 것 같은데, 느헤미야가 도비야랑 만나려고 하지 않는 것이에요.
19절처럼, 유다 귀족들이 느헤미야에게 가서 도비야 좋은 사람이라며, 그의 선행에 대해 막 이야기를 했어요. 도비야는 좋은 사람인데, 왜 그와 만나지 않느냐.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등의 질문을 하며, 느헤미야의 반응을 살폈고, 그의 대답을 또 도비야에게 쪼르르 가서 알려주곤 했어요.
유다의 귀족들은 욕심과 고집 그리고 그들의 권력을 끊어버리지 못했어요. 그럴 힘도 없을뿐더러, 놓고 싶지 않은 것이죠. 성벽이 만들어졌어요. 이제 예루살렘은 조금씩 예전의 모습을 회복해가고 있었어요. 그러면 누군가가 예루살렘을 다스려야 해요. 유다의 귀족들은 자신들의 이 권력을 유지하고 싶었어요. 자신들이 지도자가 되지 않아도, 가진 그 기득권은 가져가고 싶었어요.
성벽이 52일 만에 재건되었어도, 아직 끊어내지 못한 이방인 도비야의 흔적과 영향력이 계속 남아 있었어요. 이것이 해결되지 않고선 성전과 성벽이 완성된 것은 의미가 없어요. 유대인들은 언제든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넘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에요. 다시 말하자면, 반역의 불꽃이 언제든지 활활 타오를 수 있도록, 그들의 내면에 잘못된 마음들이 숨어져 있었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주권을 보았으면서,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꼈으면서 여전해요. 삶은 바뀌기를 원하면서 실제로는 그런 삶을 살지 않는 것이죠. 은혜는 받았으나, 누리고 있으나 아직도 세상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 있는 것이죠.
우리도 그렇지 않나요?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우리를 인도하셔서, 바른 길로 걸어가도록 하시죠. 우리의 몸은 그 길을 걸어가지만 눈은 마음은 앞이 아닌 옆을 바라보고 있을 때가 종종 있어요. 아니 어쩌면 더 많을지도 몰라요.
저는 말씀을 묵상하며. 저의 모습이 이 유다 귀족과 같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어요. 제 삶에도 도비야와 같은 존재 혹은 어떤 것인가가 존재하고 있거든요.
도비야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방해해요. 사람들의 잠재된 욕망을 건들이고, 필요하면 결혼도 하고 돈도 써가며 사람들의 마음을 유혹해요.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주는 유다 귀족들을 자신의 사람으로 회유하고 스파이처럼 만들어요. 성벽이 재건되었어요. 그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구원 받은 백성의 모습을 회복하고 살아가야하는데요. 그렇게 살지 못하도록, 결단 하지 못하도록 계속 방해해요.
우리의 삶에도 이런 존재 혹은 어떤 것이 있지 않나요? 이것들은 우리의 삶을 계속해서 건들어요. 한 곳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흔들어 댑니다.
도비야는 생각보다 유다 귀족들과 적극적이고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어요. 그와 오랜 시간동안 관계해오며 발을 깊게 넣은 유다 귀족들은 도비야를 끊어내지 못해요. 그들의 모습은 하나님께 향해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그들 마음 속, 내면 저 깊은 곳에서 존재하고 있는 반역의 불꽃이 타오르는 방향으로 움직여요. 그래서 그들은 도비야와 깊은 관계를 유지하며 끊어내지 못하고 있어요.
반면 느헤미야는 어떤가요? 성벽재건이라는 확실한 목표를 갖고 달려가죠. 아무리 옆에서 흔들고 소리치고, 넘어뜨리려고 갖은 애를 써도 어떻게든 버티고 서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꿈. 성벽 재건만을 향해 올곧게 달려 갑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다른 것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52일 만에 성벽 재건을 완료했습니다.
유다의 귀족들은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습니다. 성벽 재건을 지지하나 도비야와 계속 친하게 지내고 싶었습니다. 우리도 때론 세상과 양다리를 걸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내가 속해 있는 이 세상도 사랑합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관계 맺지만, 세상과도 관계를 맺습니다.
유다 귀족들이 놓고 싶지 않았던 것 도비야였습니다. 혹시 우리의 삶에도, 내가 놓고 싶지 않은 도비야가 있지 않습니까? 내 삶의 도비야는 무엇인지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생각났다면, 끊어낼 수 있는 힘과 능력을 더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제가 인도에서 채식주의자들틈에서 채소만 먹으면서 지냈어요. 고기가 먹고 싶기는 했는데 그냥 저냥 참을만 했어요. 한 6개월 정도 지났나? 한인 교회에 갔는데, 비빔밥이 나온거에요. 비빔밥에 올라간 고명 중에 잘개 다져진 고기가 있었어요. 그거를 먹었는데, 진짜 미치겠는거에요. 왜냐하면 고기가 더 먹고 싶어서요. 그래서 그날 기숙사로 돌아가서, 방콕에 가는 비행기 표를 끊었어요. 2시간이면 가는 거리고 왕복 20만원 정도 하길래 미련 없이 끊었어요. 그리고 방콕에 가서요. 10일 동안 고기만 먹었어요. 눈앞에 고기가 없을 땐 참을만 했는데, 먹고 나니까 참을 수가 없더라구요.
우리를 괴롭히는 도비야가 이런 것이에요. 한번 맛을 들이면 끊을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니까요. 하나님이 생각나지 않고 보이지도 않아요. 가끔 내가 잘못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만 이내 잊어요.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건가? 의문을 갖지만 이미 돌아간 나의 시선과 마음은 하나님을 오래 묵상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요.
바로 유다의 귀족들처럼요. 그들도 우리도 동일하게 하나님을 믿어요. 구원을 받았어요. 그런데 삶의 방향과 모습이 소름끼치게 비슷해요. 도비야가 우리의 마음을 계속해서 뒤흔들거든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부드럽게 혹은 강하게 떨어뜨리고 있는데도 깨닫지 못하게 만들어요.
느헤미야는요. 성벽을 재건한 후에, 만족하지 않았어요. 또 다른 꿈을 꾸었어요. 7장 4절이에요. “그 성읍은 광대하고 그 주민은 적으며 가옥은 미처 건축하지 못하였음이니라.” 성전과 성벽은 재건되었으나, 그 안에 살아가야 할 주민과 집이 없다는 것을 보게 되었죠. 또 다른 꿈을 꾸기 시작했어요.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크게 보았으면서도,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은혜 넘어 또 다른 은혜를 사모하기 시작해요.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고, 그분과 함께 걸어가는 사람이라면요. 은혜 받고 구원받은 것으로 끝내서는 안 돼요. 그 이상을 바라보아야 해요. 흔히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간다고 표현하잖아요? 그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가려는 노력이 있어야 해요. 이것을 성화의 단계라고 이야기해요.
성령님의 이끄심에 따라 순종하며 예수님을 아는 사람답게, 구원받은 사람처럼 살아야 해요. 그런데 이게 참 쉽지 않아요. 세상 속에 살면서, 예수님을 아는 사람답게 사는 것은 진짜 엄청 어렵거든요.
우리도 유다의 귀족들처럼요.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와 도비야. 즉, 세상 가운데서 갈팡질팡 할 때가 있어요. 그들은 양다리를 걸치느라 어느 쪽도 만족하지 못하고 있어요. 두마리 토끼를 쫓다가 다 놓치고 있어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으나, 여전히 그들의 시선은 세상을 향해 있어요. 어설프게 만족해요.
이 어설픈 만족. 하나님을 알기는 하나, 그 은혜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어설픈 만족은, 결국 그들 내면에 있던 반역의 불꽃에 불을 붙였어요.
혹시 여러분의 삶에도 도비야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방해하는 그 어떤 무언가가 있지 않습니까? 그것으로 인해 힘들어하고 계시진 않나요. 만약 있다면 이 시간 그것을 놓고 기도하며, 서서히 그리고 확실하게 끊어 낼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안에도 존재하는 반역의 불꽃을 꺼드릴 수 있기를 바래요.
내 삶의 도비야. 반역의 불꽃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 자꾸 흩어질거에요. 모래성처럼 자꾸 우리의 마음이 약해질거에요. 내 삶의 도비야가 반역의 불꽃이 우리를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자꾸 끌고 가려 할거에요.
만약 우리가 이 때 반역의 불꽃에 져서 고개를 돌리고 하나님을 또 외면한다면요. 내 삶의 도비야를 끊어내지 못한다면요. 우리는 또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기까지 오랜 시간과 에너지를 써야 할거에요.
우리가 은혜를 경험했지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았지만 자꾸 주저주저 하게 되는 이유는요. 우리가 너무 잘나고 똑똑해서에요. 조금 부족해야 하나님을 찾고 매달리는데요. 우리는 너무 똑똑해요. 각자의 생각들이 잘 정립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긴 하지만, 내 것으로 소화시키는데 시간이 오래 걸려요. 뭔가 일이 생기면, 하나님이 아닌 옆을 둘러봐요. 그게 저의 모습이에요. 어쩌면 여러분의 모습일지도 모르죠.
우리의 자아. 생각 그리고 고집 등을 조금이라도 꺾지 않는다면요. 그것이 여러분의 삶에 도비야가 될 것이에요. 반역의 불꽃을 사그라뜨리지 않고, 그 불씨를 남겨두는 역할을 할 거에요.
여러분에게 남아있는 반역의 불씨는 무엇인가요?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 생각인가요? 그 불씨를 끄고, 없앨 수 있는 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어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답이 없더라구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어요.
반역의 불씨를 꺼드리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해야 해요. 그리고 은혜를 받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되요. 은혜 넘어 은혜를 구해야 해요. 은혜 넘어 또 다른 은혜를 구해야 해요. 매일 새로운 은혜를 구해야 해요. 그래야 그 은혜를 통해 지치지 않고 또 반역의 불꽃에 놀라 넘어지지 않아요.
오늘 말씀을 통해 나는 느헤미야 그리고 유다 귀족. 우리는 어느 모습과 더 가까운지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은혜 넘어 은혜를 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매일 부어주시는 은혜를 힘입어 내 안에 남아 있는 반역의 불꽃을 꺼뜨리는 놀라운 역사하심을 경험하는 한 주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