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한 교회를 채우는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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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새벽기도에 오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어제는 한나가 개인의 고통을 통해 시대의 고통을 깨닫고 헌신한 사건을 보았습니다. 오늘은 한나가 어떤 상황에서 기도하고 어떻게 응답을 받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한나는 성막의 상황이 어렵고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 기도하여 하나님의 일을 했습니다.
1- 하나님께서 불완전한 교회를 쓰셔서 세상을 회복시키신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은 하나님께서 불완전한 교회를 사용하셔서 세상을 회복시키신다는 것입니다. 어제 본문은 시대의 고통을 공감하는 한나의 기도와 헌신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오늘 본문은 당시 한나가 기도하던 성막과 대제사장의 상태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우리가 본문을 그냥 쭉 봐도 실로에 있는 성막의 상태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2절에 “한나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기도했다는 단어가 원문상으로 특별한 단어입니다. 기도라고 보편적으로 잘 쓰이는 게 ‘테필라’인데 이 본문에서는 팔랄이라는 기본동사를 히트파엘이라는 잘 안 쓰는 문법형식에 대입해서 ‘히트팔렐’이라고 썼습니다. 쉽게 말해서 잘 안 쓰는 구석진 곳에 있는 문법입니다. 예고 없이 시험에 제출하면 수강생들에게 원망을 들을 수 있는 그런 느낌입니다. 신학교 다닐 때 히브리어 교수님이 이 용법을 만날 일이 평생 목회하면서 잘 없을 것이라 하셨는데 저는 벌써 만났습니다.
어쨌든 이 12절에 기도한다는 표현은 좀 독특한 표현입니다. 이것은 ‘중재한다.’, ‘중보기도 한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를 쓰는 다른 본문들을 찾아보니까 모세가 백성을 위해 기도할 때, 솔로몬이 성전 낙성식에서 기도할 때,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해 기도할 때 이럴 때 사용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중재할 권한이 있는 직분자나 혹은 그에 버금가는 사람이 ‘중보기도 한다.’고 쓰는 단어를 오늘 본문 12절에 한나에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나는 직분자도 아니고 게다가 남자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 본문에 이 단어가 나온 건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무슨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당시 성막과 제사장이 얼마나 부족한 상태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제 말씀드린 것처럼 한나는 개인의 고통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일어났을 때 엘리는 그냥 앉아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원래 엘리가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놓고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를 중재하며 중보기도를 해야 하는데 오히려 한나가 중보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습니다.
12절에서 이렇게 오래 기도하는 한나의 상태를 주목하고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엘 리가 하나의 결론을 내립니다. ‘아 저거 술 취한 여자구나!’ 본문에 ‘취한 줄로’라는단어는 원문상으로 술주정꾼을 말합니다. 지속적으로 술을 먹고 민폐를 끼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엘리는 한나를 보고 오해하여 술을 끊으라고 그녀를 꾸중합니다.
이것을 보면 두 가지 측면에서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같은 일을 반복하다 보면 예감이라는 게 생기는 순간이 오는 사역도 마찬가지지 않겠습니까? 제가 예전에 다른 교회서 사역할 때 노숙자 분들이 교회를 많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분들이 유리문을 똑똑 두드리면 처음에는 가서 어떻게 오셨습니까? 뭘 도와드릴까요? 이런 식으로 물어봅니다. 금전적으로 도와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똑똑 소리가 날 때 굳이 찾아 가서 안 물어봅니다. 멀리서 오케이 표시를 하고 사무실에 가서 노숙자 구제용으로 마련된 동전을 가지고 가서 바로 드립니다. 노숙자가 하도 많이 찾아오니까 누가 오기만 하면 노숙자 같습니다.
엘리도 마찬가집니다. 성막에서 어쩌다가 누가 기도를 오래 하고 뭔가 중얼거리면 ‘야 저거 술취했다.’라고 할 정도로 성막이 타락한 것입니다. 얼마나 제대로 된 기도를 하는 사람이 없으면 그랬겠습니까? 당시 이스라엘에서 제사를 드리고 나서 제물을 먹을 때 술주정꾼들이 포도주를 과음하고 성막에서 기도를 핑계로 주정을 부리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방세계의 제사 제도에서는 음란한 행동을 하고 먹고 취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실로의 성막이 아마 이방 종교의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당시 이스라엘 성막이 영적으로 얼마나 타락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펴볼 또 다른 측면은 엘리 제사장의 목회적인 안목입니다. 목사님들은 사역을 오래 하셨기 때문에 척하면 척이지 않습니까? 성도님들 표정만 봐도 어떤 고민이 있는지 좋은 일이 있는지 딱 알아채고 기도하시고 위로해주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엘리 제사장은 이런 안목이 없었습니다. 종교관리인 정도였습니다. 성막에 뭔가 새로운 상황이 생기면 가서 알아보고 기도해주고 이래야 하는데 왜 내가 관리하는 구역에 이런 일이 생기나 뭐라 해야되겠다. 이런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제사장을 대표하는 이가 이정도 영적인 안목을 가졌으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충분한 영적 공급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의 목회적 안목을 보면 실로의 성막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한 가지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 불완전한 성막을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엘 리가 술을 끊으라고 꾸중했을 때 한나는 정중한 태도로 그것이 오해라는 것을 알립니다. 이것이 오해라는 것을 알게된 엘 리가 한나를 축복합니다. 제사장이 하는 중요한 일 중 하나가 백성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축복합니다. 엘리의 축복을 들은 한나는 그 기도제목이 이뤄졌다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얼굴에 근심 빛이 사라지고 이전에 못했던 식사를 다시 하게 됩니다. 성막이 늘 술취한 자들로 엉망이고 성막을 대표하는 대제사장은 영적지도자로서 태만하고 부족했지만 한나는 이 성막을 통해 위로와 확신을 얻어서 다시 삶의 현장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성막이 한나에게 그냥 단순한 위로와 확신을 준 것이 아닙니다. 대제사장 엘 리가 한나의 기도가 이뤄질 것이라고 축복하지 않았습니까? 한나의 기도제목이 무엇입니까? 타락한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나실인의 탄생, 그 나실인을 통해 메시아의 계보를 세우는 것이지 않습니까? 성막은 한나의 기도를 가지고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이라 선포했습니다. 영적으로 타락한 이스라엘이 치유 될 것이라 선언했습니다. 부족한 성막이지만 하나님은 이 부족한 성막을 통해서 시대를 치유할 것이라 선포하셨습니다. 부족한 성막을 쓰셔서 세상을 소망을 주셨습니다.
(증명)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에는 교회가 이 성막의 역할을 합니다. 성도 개개인이 그리스도안에서 거룩한 성전이 되었고 이 성도의 모임을 교회라고 하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교회가 실로의 성막 역할을 합니다. 세상이 교회에게 손가락질을 합니다. 억울하게 손가락질 당하는 교회도 있고 한 번 씩 엉뚱하고 충격적인 행동을 하는 일부분의 교회가 있어서 교회가 싸잡아 손가락질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한국 교회가 참 부족하다. 수준이 떨어진다 이렇게 교회를 폄하하기도 합니다. 이래서 교회가 뭘 할 수 있겠나 이렇게 말합니다. 이건 반만 맞고 반은 틀린 것입니다. 교회는 부족합니다. 사도들이 직접 개척했던 교회들도 문제가 많았고 중세시대의 교회도 타락을 경험했습니다. 종교개혁 시기의 교회도 이런 저런 투닥거림이 있었습니다. 역사상 교회가 완전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고 교회가 원망을 듣지 않았던 적인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타락한 교회를 사용하셔서 세상을 복음으로 물들이시고 세상을 회복시키셨습니다. 교회는 역사적으로 계속 이 사명을 잘 감당했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죄인인 우리가 어찌 지금 이 자리에 앉아있겠습니까?
(적용)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소망을 다른 어떤 것이 아닌 교회에 두어야 합니다. 나라가 정치를 너무 잘해서 세상이 바뀌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국민의 성숙함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성숙함 이면에 죄인의 타락상이 다 있습니다. 과학기술의 진보가 세상을 좋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과학이 발전할수록 범죄도 발전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나라가 수출규모 10위권 안에 들어가고 5위권 내를 노리고 있습니다. 군사력 순위가 전세계 6위입니다. 그래서 우리 삶이 더 희망적으로 되었습니까? 똑같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망을 그 어떤 것에 두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둬야 합니다. 교회가 우리가 보기엔 부족해 보입니다. 관공서처럼 뭔가 체계적으로 탁탁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찬양팀이 전문 밴드 수준으로 반주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의 설교가 하버드 교수의 명강의 같이 학문적이고 대중적인 임팩트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분의 구원 역사 가운데 끊임없이 불완전한 교회를 사용하셔서 세상을 회복시키셨습니다. 성경과 역사가 그걸 증명합니다.
2- 하나님께서 성도의 기도로 불완전한 교회에 힘을 더하신다.
그 다음으로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하나님께서 성도의 기도로 불완전한 교회에 힘을 더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의 한계나 부족함을 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신실한 한나가 어떻게 했는지 보면 됩니다. 한나는 이 엉망진창인 실로의 성막일지라도 그곳에서 기도했습니다.
아까 살펴본 것처럼 성막은 불완전 합니다. 지상에 세워진 교회들은 다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형교회는 대형교회대로 힘든 부분이 있고 중형교회는 중형교회대로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저는 어릴 때 개척한지 얼마 안 된 교회에서 신앙생활 했는데 그런 작은 교회는 작은 교회만이 가진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 모든 교회들에게 불완전함을 극복할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바로 성도의 기도입니다. 성도가 똑똑하고, 성도가 헌금을 잘하고 이런 것들이 다 귀하지만 가장 중요한 교회의 원동력은 기도입니다. 한나가 기도를 하니까 이 불완전한 성막이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을 선포하는 놀라운 일을 해냅니다. 한나가 기도를 하니까 이 엉망진창이었던 성막에 사무엘이라는 위대한 인물을 배출합니다. 교회의 원동력은 뭐니 뭐니 해도 기도입니다. 하물며 예수님께서도 교회를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교회도 기도하는 분들이 새벽에, 저녁에 자리를 채워 기도하면 교회가 더 단단해지고 회복될 줄로 믿습니다.
제가 제일 이해하기 힘들었던 게 금식기도와 새벽기도였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한 번 3학년 때 한 번 금식기도를 두 번 했는데 일주일간 사람이 물만 먹고 살아보니까 너무 충격을 많이 받아서 다시는 내가 일주일 금식기도는 절대 안한다고 다짐해서 아직까지 잘 지키고 있습니다. 그 금식기도 때문에 음식의 소중함을 과다하게 깨달아서 그때부터 살이 찌기 시작했습니다. 그전엔 항상 날씬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이해하기 힘들었던 게 새벽기도였습니다. 정신 멀쩡한 낮에 기도하든지 밤에 기도하든지 하면 될 것을 왜 꼭두새벽부터 저렇게 난리를 치나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신학을 공부하고 현장에서 사역을 해보니까 이 새벽기도가 너무 귀합니다. 성도님들이 자리를 채워서 기도를 하시니까 교회의 어려운 일 당하시는 분들이 위기를 넘깁니다. 교회가 어려운 일을 겪을 때 기도로 뚫어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잠잠하게 집중해서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이 새벽이 기도하기 좋습니다. 그 고요한 집중의 시간에 성도님들이 자리를 잡고 기도하니까 교회가 영적인 체력이 생깁니다. 신대원생들은 새벽기도 결석 일수가 일정부분을 초과하면 수석졸업을 해도 강도사 인허를 못 받습니다. 그만큼 신학교에서 새벽기도를 강조합니다. 저는 열심히 새벽기도 나와서 강도사 인허도 바로 받았지만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과제라도 많이 내주지를 말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교회 현장에서 새벽에 기도하시는 분들을 보니까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성도님들이 기도의 근력과 기도의 체력으로 교회를 든든히 받쳐주시는 모습을 보니까 왜 신학교 다닐 때 그렇게 기도훈련을 시켰는지 이해가 되었습니다. 어려운 시대에 교회가 세상을 회복시키는 일을 감당할 때 새벽에 교회 나와서 기도로 든든히 받쳐줄 분들이 없으면 어떻겠습니까? 교회가 교회로서 서기가 더 힘들지 않겠습니까? 교회가 사명 감당하도록 힘을 실어주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한나가 결국 실로의 성막에 힘을 실어줘서 부족한 실로 성막이 자기 사명을 감당해서 사무엘이라는 인물을 배출하지 않습니까? 교회가 너무 부족해보인다 이건 아니다. 싶을 때 나서고 지적하는 걸로 일이 해결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부족하다고 느낄수록 더 기도하면 됩니다. 다른 거 해봤자 문제만 더 생기지 교회가 힘을 얻지 않습니다. 가솔린 넣는 차에 연료가 부족하다고 해서 경유를 가득 넣어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시동 거는 순간 차가 맛이 갑니다. 교회의 연료는 기도입니다.
칼이 날카로워지려면 숫돌이 있어야 합니다. 숫돌이 자기 몸을 내어줘서 칼을 날카롭게 만듭니다. 우리가 숫돌이 되어 교회가 더 영적으로 예리하게 서도록 갈아줘야 합니다. 영적인 날을 새롭게 해줘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이 시대를 감당하는 하나님의 무기가 됩니다. 그 역할을 주로 감당하시는 분들이 지금 이 자리에 나오는 성도님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더 기도하고 이 자리에 더 많은 분들 초청해야 합니다. 우리 당평교회가 계속해서 복음의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
설교를 맺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완전한 교회를 사용하셔서 세상을 회복시키십니다. 그리고 이 불완전한 교회가 힘을 얻어 세상을 회복시키는 원동력은 바로 기도입니다. 지금 하시는 것처럼 기도의 자리를 지켜 교회에 영적인 능력을 더 실어주시고 우리 당평교회가 지역사회와 세상을 회복시키는 일에 더욱 쓰임 받게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