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의 말씀이 다시 임하다

이사야서 설교 1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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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의 원인. 의지해서는 안 되는 것들

오늘 말씀의 배경은 학자들에 의하면 여전히 웃시야 왕 말기 때라고 합니다. 이전 설교에서 말씀드렸던 웃시야 왕 때의 상황을 잠시 되새겨 보겠습니다.
이 당시의 유다는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매우 강성하던 때였습니다. 이들은 해안까지 세력권을 뻗치고 있었습니다. 지중해변 해안을 따라 건설된 육상무역로, 또한 지중해를 낀 해상무역로가 유다의 손아귀에 있었으며, 블레셋이 다스리던 지방도 일부 점령하여 군사적으로도 그 세력권을 뻗치고 있던 때였습니다.
웃시야 왕이 사망한 것에 대해 학자들은 대부분 기원전 742년 정도로 추산하고 있는데, 바로 이 몇 년 후에,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이 일어납니다. 이 당시에는 북이스라엘이 그 마지막 세력을 뻗치고 있던 때였습니다. 이들은 신앗수르 제국의 디글랏빌레셀 3세가 세력을 확대하는 것에 대항하여 동맹을 맺고 그들과 대항했습니다.
이 전쟁 당시의 유다 왕이었던 아하스는 이 동맹을 거부합니다. 오히려 앗수르에 원조를 요청하지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북이스라엘-아람-두로-블레셋 동맹군은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공격합니다.
따라서 학자들은 오늘의 말씀이 이 예루살렘 포위 당시, 그리고 나아가 유다 왕국의 멸망에까지 이어지면서 성취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성취의 여부는 나중에 조금 더 판단해보도록 하고요, 오늘 말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크게 세 부분으로, 작게는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3, 4-7, 8-12절, 그리고 13-15절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형벌의 예언은 이유와 구체적 내용의 순서로 구성되지만, 오늘의 말씀에서는 구체적 내용이 먼저 제시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이 의뢰하며 의지하는 것을 제하겠다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사뭇 대단합니다. 음식과 물, 용사, 전사, 재판관… 물질적인 것이 1절에서 묘사된다면 2-3절에서는 리더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1절에서의 물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아까 전 언급드린 포위로 인한 기근에 대한 예언이라고 한다면, 2-3절에서의 리더들에 대해서는 바빌론에 의한 유다 왕국의 멸망에 의해 성취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열왕기하 16:5 NKRV
이 때에 아람의 왕 르신과 이스라엘의 왕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싸우려 하여 아하스를 에워쌌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열왕기하 24:14 NKRV
그가 또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과 모든 지도자와 모든 용사 만 명과 모든 장인과 대장장이를 사로잡아 가매 비천한 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었더라
이 두 가지의 시대상이 예언된 오늘의 말씀은, 그 이후의 섬뜩한 현실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4절부터 7절과 12절에 등장하는 예언 성취 후의 사회의 모습을 한 번 보겠습니다.
소년과 아이들이 백성의 고관이 됩니다. 그들은 백성을 학대합니다. 또한 여자들이 그들을 다스립니다. 현대의 상식으로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여자들이 나라를 다스려서 뭐가 문제가 되겠습니까? 이미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의 많은 나라에서 여성이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 많이 있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이 표현은 말 그대로의 뜻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단순한 문학적 비유로 읽거나, 문자 그대로의 뜻으로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문화를 고려해서 성경을 읽어야 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유다 백성에게 가하실 심판은 그들의 지도자를 ‘아이들’, 즉 미성숙하고, 현명하지 못하며, 이기적이기만 한 지도자로 교체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마치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네가 그 지도자들을 의존한다고? 그러면 진짜를 보내줘볼게.”
물론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잘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의뢰하고 의지해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의지한 지도자의 목록을 한번 보겠습니다. 용사, 전사, 재판관, 장로, 모사… 잘 보면 그 중에 의지해서는 안 되는 이들이 있습니다. “복술자”와 “능란한 요술자”를, 유다 사람들이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나라를 잘 이끌어가는 역할을 왕이나 다른 이들에게 기대하는 것이나, 용사나 전사에게 전투의 성과를 기대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그러나 복술자와 요술자라니요. 우상이나 귀신이 나의 앞길을 잘 인도해줄 것이라고 믿는 그들이라니요.
이들은 하나님께서 ‘존재를 용납하지 않았던’ 존재가 아닌가요? 이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있던 가나안 땅에서 그들을 쫓아내셨는데 말입니다.
신명기 18:9–12 NKRV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이런 일을 행하는 모든 자를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다시 말해보자면, 하나님께서 금지하시고 본받지 말라고 하셨던 그 행위를 유다 백성은 본받는 걸로도 모자라 그들에게 자신들을 다스려달라, 인도해달라고 의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매우 간단하게 추론할 수 있지만 성경에 있는 그대로를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수아 23:12–13 NKRV
너희가 만일 돌아서서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이 민족들을 가까이 하여 더불어 혼인하며 서로 왕래하면 확실히 알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덫이 되며 너희의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의 눈에 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마침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하리라
하나님은 자신이 하신 말씀을 잊지 않으십니다.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삶이 너무나도 갑갑한 나머지 하나님에게 의지하기보다는 먼저 점술가나 법사님들, 영험하다는 분들을 찾아가시는 분들이 있지요. 우리 헤브론 지체들 중에 이렇게 하시는 분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상숭배’라는 것은 반드시 어떤 신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기에 더욱 주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상숭배에 대한 개념은 여러 가지로 정의가 되고 있습니다. 보통 우선순위의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님보다도 다른 것이 더 위에 오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지요. 자신의 미래, 가족, 돈, 명예 등등. 그런데 제 나름대로 우상숭배를 정의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하는 것’. 이것은 우상숭배 중에서도 최악의 것입니다. 하나님마저 내 신하로 두려고 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거대한 흐름에 나를 내맡기는 것이지, 하나님을 내가 원하는 대로 하게 만드는 기계장치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의 혼란. 그러나 문제는 계속됩니다.

이 사회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사회의 수평적 관계와 수직적 관계가 모두 어그러집니다. 심지어 왕이 되기 위한 단 하나의 조건이 ‘겉옷이 있음’인데, 그 와중에 자신은 통치자, 즉 고치는 자가 되지 않겠다고 소리를 높입니다.
겉옷이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 것인가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22:26–27 NKRV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것이 유일한 옷이라 그것이 그의 알몸을 가릴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
여기서 ‘옷’이라고 표현된 단어가 바로 오늘 본문 6절에서 말하는 ‘겉옷’입니다. 이 겉옷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사람이 가지고 있을 ‘최저 단위’에 해당합니다. 이 겉옷은 알몸을 가릴 것이자 이불입니다. 자기의 생존권을 지킬 수 있는 최저 단위인 것이죠.
그런데 이것이 바로 통치자의 자격이 됩니다. 이것은 사회 전반의 시스템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아예 뒤집혔음을 의미하는 것 아닐까 합니다. 심지어 이 사회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사회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표현으로, 자기가 사는 곳이 “폐허”라고 이야기하지요.
사회의 모든 혼란을 하나님께서 야기시키십니다. 정확히는 이 모든 일은 인간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지만,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고 나서도 사람들은 구제불능의 모습을 보입니다. 이 때가 되어서도, 주변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자신을 덮을 옷가지조차 없이, 폐허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속에서조차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그 와중에 통치를 요구받는 이는 내겐 양식도 의복도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상황에 대한 어떠한 완화도 치유도 할 재주가 없으니 남은 것은 이러한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것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없다는 걸 아는 것이 그나마 다행일까요.
이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 인간들에게 남은 것은, 모든 관계의 손실이라는 가르침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하나님 없는 사회에서 하나님이 그 조금 있는 리더들마저 제해버리니, 남는 것이 혼란밖에 없는 것이지요.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22:37–40 NKRV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첫째와 둘째라는 순서의 구분은 우리에게 무엇이 더 중한지, 혹은 무엇이 더 먼저인지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합니다. 이 순서대로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선 잘 되어 있는 이라야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틀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어떤가요? 이 말씀의 표면적 교훈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사회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기 때문에, 이 말씀은 흔히 고지주의 신학, 또는 성공주의 신학이라고 불리는 것, 즉 우리가 모든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는 주장에 인용되고는 했습니다. 그래서 선거가 되면 그 사람의 종교부터 체크하고, 경쟁할 때면 그들의 종교를 일단 먼저 파악하고는 합니다.
그런데 한 글자가 추가되어야 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있는지를 믿고 아는 것은, 유다의 악한 왕들도 다 했으며 심지어 이방인들도 했기 때문입니다! 귀신들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은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누군가를 우리의 지도자로 세울 때에는 그가 하나님을 믿되 ‘잘 믿고 있는가’를 반드시 살펴야 합니다.
그들의 평소 말과 행실이 하나님의 기준에 부합하는가, 끊임없이 기도하며 그들을 검증해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입으로 이야기하는 이가 아니라 그 행실이 ‘의인’이라 하기에 적합한 이여야 합니다. 이 나라의 모든 분야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그들이 하나님을 공경하되 말뿐 아니라 행실과 영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이들이어야 한다고, 오늘 말씀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이들이 자기들끼리 사회를 운영하려고 아무리 시도해봐야, 남는 것은 폐허이며 패배주의일 뿐입니다.

지도자들에게 또 다시 임하는 심판

오늘의 세 번째 단락에서 명확하게 명시하는 것은 ‘그들’, 즉 예루살렘과 유다의 언어와 행위가 여호와를 거역하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모든 유다의 백성을 향한 말씀이기도 하지만, 오늘의 말씀의 문맥상, 더 정확하게는 이들의 지도자들을 향한 경고라고 보시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언어와 행위에 있어서 하나님을 거역하다 못해 하나님의 영광의 눈을 범할 정도로 이야기되는 이들은, 그들의 안색과 행위에 있어서 ‘숨기지 못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오죽하면 예언자는 이들의 악행에 대해 ‘소돔과 같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심지어 이들은 그들의 악행이 얼굴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들의 얼굴이 그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은 단 한 마디로 정리하십니다. 자업자득이다.
이사야 3:9 NKRV
그들의 안색이 불리하게 증거하며 그들의 죄를 말해 주고 숨기지 못함이 소돔과 같으니 그들의 영혼에 화가 있을진저 그들이 재앙을 자취하였도다
이사야 3:11 NKRV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이는 그의 손으로 행한 대로 그가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
한편 의인은 ‘그들의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이다’라고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등장하는 의인에게 복이 있다는 표현은, 이전의 내용과는 달리 격려의 의미는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 절 이외에는 본문 어디에서도 구원의 가능성이 언급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 내용은 불의하고 불공정한 유다의 고관들에 대비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더욱 대비시켜 드러내는 곳으로 이해하는 것을 학자들은 권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갈라디아서 6:7 NKRV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특히 이러한 심판은 지난번에도 언급하였지만 지도자를 먼저 향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자신이 지도자라고 생각하는 자’, ‘선생이라고 생각하는 자’를 먼저, 더 크게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3:1 NKRV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를 이끌어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끊임없는 기도와 검증, 그들이 하나님을 ‘잘 믿는가’에 대한 물음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라고 오늘의 본문은 이야기합니다. 오늘 본문의 14-15절에서는 지도자들이 해서는 안 되는 행동들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심판하고 계십니다. 그들이 가난한 자에게서 탈취하고, 포도원을 삼키며, 그들의 얼굴에 맷돌질을 합니다.
오늘날의 우리 사회는 그런 의미에서 상당히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약자를 짓밟는 것을 정당화합니다. 그들에게서 빼앗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최소한의 안전장치로 우리가 ‘복지’라고 부르는 것이 존재하지만, 그것을 기능하게 하는 ‘세금’이라든지 일반적 인식이 거기에 거부반응을 일으킵니다.
세금을 덜 내는 것은 ‘합리적 선택’이자 누구나 해야 할 일이 되었고,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임대주택에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는 아파트 입구를 같이 쓰는 것조차 하지 못하게 막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정책은 내 재산을 증식시켜주는 정책이지 가난한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기회 외의 것이 주어지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주장합니다.
충격적인 것은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임대주택과 관련된 조금은 불편한 뉴스들이 보도될 때면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 살기도 불편한데 그런 걸 굳이 보아야 하냐.” “전파 낭비다.” “어차피 그들은 낙오자니 그들이 스스로 갱생하게 해라.”
명확히 말하겠습니다. 이 태도는 결코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태도가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약자를 가난한 자를 끊임없이 주지시킵니다. 그들을 돌보고 같은 이웃으로 여기며 함께 살아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결산하실 것이기 때문에라도, 우리는 그 결산을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사람을 의존하며 사는 것은 우리의 사는 방식이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을 우리가 조종하려고 드는 것 역시 우리가 취해서는 안 되는 삶의 방식입니다. 정치도, 경제도, 그 무엇도 우리를 ‘구원해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회를 변혁시켜 하나님의 통치질서를 이 땅에서 이루며 살아가려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어디에선가 지도자의 자리에 설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 말씀은 그 때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두어야 할 말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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