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간증, 우리의 간증

허주
빌립보서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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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간증을 통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과 간증을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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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3:4~14
2022년 3월 20일(주일) 사랑의교회 갱신공동체 (김근수 위원장/김동일 설교목사)
“바울의 간증, 우리의 간증” (3:4~14)
우리 그리스도인은 ‘간증’이라는 장르(이야기 형식)를 가지고 있다. ‘간증’(干證)은 (방패 ‘간’이기도 하지만) 범할 ‘간’자와 증명할 ‘증’자를 사용한다. 사전에 보면 ‘간증’은 “타인이나 자신과 연루된 범죄와 관련된 증언”으로 과거에는 법정용어로 사용되곤 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기독교 안에서 “자신의 신앙적 체험을 고백함으로써 하나님의 존재를 증언하는 일”로 이해된다. 그리스도인의 간증은 한 마디로 “말이나 행동을 통해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간증의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언제 그리고 어떻게 영광을 받으실까? 성도가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할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사실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것’은 우리의 성공여부와 관계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피조물과 관계없이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하나님께 영광’은 우리의 형편과 관계없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보자. 부모는 언제 자녀로부터 영광을 받는다고 생각하는가? 자녀가 좋은 대학/직장에 들어가서 돈을 잘 벌고, 자녀 때문에 부모가 자랑할 수 있을 때인가? 어느 정도는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 자녀가 세상에서 인정받으며 경제적으로도 부유한데 바쁘다는 이유로 부모와 연락을 끊고 산다면, 자녀의 성공이 부모의 영광과 비례하는 것은 결코 아닌 것이다. 세상에서 유명하지 않을지라도, 부모를 부모로 인정하며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갖고 사는 자녀야말로 부모의 기쁨과 영광이 된다.
성경에서 자주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사건은 하나님의 백성 개인이나 공동체가 자신의 무능과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때이다. 사무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미스바에 모여 금식하며 회개했을 때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백성들의 회복이 일어났다(삼상 7:3-17). 다윗의 회개가 전쟁의 승리보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더 입었다(삼하 12:1-23; 시 51편).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이 엉엉 울면서 회개하던 에스라/느헤미야 시대가 그러했다(느 8-9장).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신 사건 중의 사건이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였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치유하며 소경의 눈을 뜨게 했을 때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다. 하지만 이것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 때는 예수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하면서도 (말하자면 하나님이 자신을 떠난 것 같은 바로 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놓치지 않았을 때였다. 성경은 이 사건을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고 선언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증명되고 간증된 사건이었다. 예수님 자신에게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의 간증이었다.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는 예수님의 간증이자, 우리 죄인을 사랑함으로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간증이기도 했다. 나사렛 예수의 자기부인의 순종이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간증이었던 것이다. 올해 우리가 갖게 된 간증은 무엇인가? 내 평생 손에 꼽을 간증은 무엇인지 잠시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좋겠다.
바울 편지들을 읽다보면 그의 간증이 종종 발견된다. 대표적으로 갈라디아서 1장 11-17절이 있다. 사도행전 22장과 26장에서 저자 누가도 바울의 간증을 소개한다. 오늘 우리가 읽은 빌립보서 3장은 바울의 간증을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대표적 성경구절이다. 여기 있는 ‘바울의 간증’을 살펴보면서 우리 개인과 갱신공동체의 간증을 묵상해 보기 원한다. 짧은 시간이지만 예배 가운데 여러분의 지난 생활을 회고하면서 주님의 은혜를 다시 기억해내고, 이후 펼쳐질 일을 소망하는 시간되길 원한다.
빌립보서는 로마 감옥에 있던 바울이 빌립보 도시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이다(참조. 성경지도 – 마케도니아 지역 도시들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네압볼리>빌립보>암비볼리>아볼로니아>데살로니가>베뢰아). 바울이 빌립보를 처음 방문한 때가 49년 중순경이었고(행 16:11-40), 로마 감옥에 있었던 때는 60~62년경이었다(행 28:16-31). 이때 4편의 옥중서신이 작성된 것으로 이해된다(빌립보서/에베소서/골로새서/빌레몬서). 약 10년간의 교제가 있었던 셈이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영적 아버지였으며, 성도들은 그런 바울을 위해 재정적 후원을 아끼지 않은 교회였다. 바울이 빌립보서를 쓰게 된 배경도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또 한 번 보내준 후원금을 바울이 잘 받고 감사인사를 표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빌립보서를 읽다보면 즐거운 내용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매우 불편한 내용도 발견된다. 그 중 하나는 빌립보 성도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사람들과 관련이 있다. 사실 바울도 이들 때문에 매우 힘들어했다. ‘바울의 적대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인종적으로 유대인들이었고,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이 믿는 복음’‘바울이 믿는 복음’ 사이에 결정적 차이이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다른 복음”(헤테론 유앙겔리온)이라고 했다(갈 1:6, 8; 고후 11:4 - ‘다른 예수’/‘다른 성령’/‘다른 복음’; 갈라디아교회와 고린도교회에서도 바울의 적대자들이 활동했다는 증거). 빌립보서 3장 2절에서 바울은 이들을 “개”(퀴온), “악한 일꾼”(카코스 에르가테스), “몸을 자르는 자”(헤 카타토메)라고 비하했다.
빌립보서 3장에 나오는 ‘바울의 간증’은 (가) 바울과 빌립보 성도, (나) 바울과 바울의 적대자들, (다) 빌립보 성도와 바울의 적대자들, 이런 얽히고설킨 인간관계 속에서 고백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신자의 간증은 좋은 환경보다는 열악한 환경에서 피어나는 연꽃과도 같은 것이다. 16세기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1483~1546)는 바른 신앙을 위해 꼭 필요한 세 가지 요소를 기도-말씀묵상-시련이라고 했다. 루터 관점에서 볼 때 신앙인에게 ‘기도와 성경말씀 통독/묵상’이 진보하지 않는다면 ‘바른 신앙’의 진보는 기대하기 힘들다. 또한 ‘기도’와 ‘말씀묵상’이 있을지라도 ‘믿음의 시련’이 없(었)다면 바른 성도로서 결격사유가 될 수 있다. 중세교회의 또 다른 개혁자 장 칼뱅(1509~64) 역시 55년 생애 가운데 수많은 시련으로 점철된 생애를 보냈다(망명/추방/자녀들의 이른 죽음, 등). 중세교회 교권자들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인생‘이라고 칼뱅을 저주한 이유이다. 시편 119편 71절.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고 했다.
오늘 빌립보서에서 관찰할 수 있는 (1) 바울의 간증은 자기 인생을 과거-현재-미래라는 삼중적 틀 안에서 조망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3장 4-6절은 과거 관점으로, 7-14절은 현재와 미래 관점이 오버랩 된다. 이와 유사한 시간적 패턴은 성경에 나오는 지도자들의 ‘고별설교’에서 종종 나타난다. (예. 모세의 고별설교로서 신명기 / 여호수아의 고별설교 – 수 23-24장 / 사무엘의 고별설교 – 삼상 12장 / 예수님의 고별설교 – 요 14-17장; 행 1장 / 바울의 고별설교 – 행 20장; 디모데후서)
바울은 한때 그렇게 자랑스러워했던 자신의 과거가 부끄러운 날들이었음을 고백한다. 자신의 감춰진 내면을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가장 보기 어렵고 읽어내기 힘든 것이 자기 자신이다. 타인을 바라보는 것은 ‘몸의 눈’이지만,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마음의 눈’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자랑하고 소중하게 여기던 것이 실상 자랑할 만한 내용이 아니었음을 깨닫는 것은 ‘실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이 실력이 다름 아닌 ‘신앙’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나사렛 예수께서 내 주가 되시고 세상의 왕이 되신다’라는 인생관이 신앙의 기초석일 때 우리는 신앙의 집을 올바로 건축하게 된다. 빌립보서 3장 7-8절.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디아’ - ‘ 때문에’) 다 해(‘제미아’)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디아’).”
건강한 인생은 자신의 인생을 균형 있게 바라보는 사람이다. 과거중심?(왕년에는... 라떼에는 그러면서 옛날 얘기만 한다) 현재중심?(현세적 인물로서 눈에 보이는 것만 급급해한다) 미래중심?(뜬구름 잡는 얘기만 하기 쉽다). 어느 한 쪽에 치우지지 않고 자기 인생을 “삼중적 시제의 인생틀” 안에서 덤덤히 바라보는 지혜를 소유하는 우리가 되면 좋겠다. 우리 인생을 한번 돌아보자. 찬찬히 읽어보자. 사랑의교회 멤버십 이전의 내 인생. 교회의 일원으로 지내왔던 과거와 현재 내 생활. 향후 내 인생의 목적과 방향. 이런 회상과 전망 속에서 성경과 예배생활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물어보자. 무엇보다 ‘나와 주님’은 어떤 관계인지 확인해 보자. (야곱이 얍복강에서 주님과 홀로 외롭게 씨름하면서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지 않았는가?) 한 달에 한 번씩 자기성찰의 글을 남기는 것도 주님와 나의 관계를 확인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기도문을 종종 작성하면서 내 마음을 글로 남겨보자.
(2) 바울의 간증을 자세히 보면 바울은 자기 인생을 ‘새로운 이야기’ 안에서 읽어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새로운 이야기’ 안에서 자신을 읽는다는 것은 바울이 자기중심의 인생 이야기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인생 이야기로 변화된 것을 말한다. 빌립보서 3장 7절. “내게 유익하던 것을”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로 수정되었다. 3장 8-9절. “내가 그[주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배설물은 헬라어로 ‘스퀴발론’ – 신약성경에서 단 한번 사용됨/ 동물의 굳어버린 배설물로 전혀 쓸모가 없는 ‘쓰레기/폐기물’). 성도는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동행 하는 인생이다. 예수님을 통해 끔직했던 세상 나라에서 빠져나와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간 내 인생 스토리. 이것을 감사하고 자랑하고 싶은 것이 성도의 간증이다. 내 인생 이야기 안에서 하나님/예수님을 말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나/인간 중심의 인생 이야기’ 덫에 빠지지 않도록 부단히 애써야한다. 이것이 로마서 14장 7-8절이 말하려는 것이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투 퀴리우 에스멘’).” ‘주가 나의 것’이 아니다. ‘나/우리가 주의 것’이다. 교회 역시 나/우리의 것이 아닌 주님의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라고 하지 않는가!
성도의 일상은, 교회 직분에 관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야기’ 안에는 인물과 사건이 나온다. 사람들은 자기 인생에서 만난 인물들과 사건들을 ‘자기중심으로’ 읽는 습관을 갖고 있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행복했던 일과 불행했던 일. 즐거웠던 기억과 슬펐던 기억. 이와 같은 판단과 평가의 기준이 나 중심의 이야기에서 하나님 중심의 이야기로 계속 변화되는 과정이 성도의 삶이요, 성화를 증진시키는 삶이다.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자기 인생을 ‘다시’ 읽어낼 수 있었다. 성경도 날마다 ‘다시’ 읽어야(해석해야) 할 텍스트이다. 세상도 ‘다시’ 읽어야(해석해야) 할 텍스트이다. 우리가 ‘다시’ 읽어내야 중요한 텍스트가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란 텍스트이다. 어찌 보면 우리가 읽고 해석하는데 가장 난해한 텍스트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예수께서 내 인생 문장의 주어로 자리 잡게 되면, 꼬여 있는 것 같은 내 인생 이야기가 ‘다시’ 바르게 제자리를 찾게 된다. 고린도후서 5장 16-17절.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단순히 ‘나 혼자’ 새 사람이 되었다가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세계가 새로워졌다는 말이다.
(3) 바울은 자기 인생의 간증을 아직 끝나지 않은 달리기 게임에 비유하고 있다. 인생의 경주가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점이다. 말하자면 아직 끝나지 않은 자신의 인생을 긴장하면서 살아가겠다는 말이다. 빌립보서 3장 12-14절. “12 내가 이미(‘에데’) 얻었다 함도 아니요 [이미 - ‘에데’가 여기서 한글성경은 생략됨]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디오코’)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this one thing I do / ‘헨’)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에이스 토 브라베이온 테스 아노 클레세오스 투 쎄우 엔 크리스토 예수’) 달려가노라(‘디오코’).” (성경원어에서는 “결코 ~이 아니다”라는 강조형 용어로 문장이 시작된다 - ‘우크 호티...’)
‘내 인생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고백은 성공한 자에겐 겸손을, 실패한 자에겐 소망을 던지는 메시지이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다’라는 진실이다. 이런 점에서 성도에겐 두 번의 피니시 라인(finish-line)이 있다. (가) 하나는 이 땅에서 숨을 거두는 순간이다. 이때까지는 내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쉽게 예단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이것도 진정한 끝은 아니다. (나) 신자의 인생이 최종적으로 평가 받는 것은 예수님의 최종 심판의 날이다. 예수 재림의 날이다. 바른 성도는 종말론적 신앙에 뿌리박힌 사람들로 주님께서 약속하신 내일의 실재를 오늘 여기에서 바짝 끌어당겨 우리의 일상을 믿음으로 살아내는 사람들이다.
찬양가사처럼 우리는 “주님 뜻대로 살기로 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미련을 품고 과거를 뒤돌아보지 않기 원한다. 불확실한 내일도 염려하지 않기 원한다. 이런 때일수록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우리가 되길 원한다.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간증이 생명의 계절을 맞이한 우리에게 활짝 피어나는 3월 되기를 축원합니다.
“주님, 우리의 간증을 통해 주님이 이름과 영광이 높아지기 원합니다. 이곳에 모인 갱신공동체 한 사람 한 사람이 한국교회의 간증이 되기 원합니다.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기 원합니다. 갱신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지도부와 교역자님들과 주일학교 선생님들을 보호하시고 위로하여 주옵소서. 연로하신 성도님들과 병상에 누운 성도님들의 눈물의 기도를 응답하여 주십시오.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바라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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