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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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3:14-22; 신앙의 온도
(계 3:14-22)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하나님의 경고
0. 도입
내가 거의 매일 즐겨 마시는 음료가 있다. 뭘까?
(사진) 그러나 내가 마시지 않는 커피가 있다. 어떤 커피일까? 그것은 바로 ‘미지근한’ 커피다.
더운 날에는 시원한 아이스커피가 좋고, 추운 날에는 따뜻한 커피를 마시면 너무 좋다. 그러나 미지근한 커피는 어떤날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이도저도 아닌 미지근함은 언제나 별로이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은 미지근한 커피 같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시는 주님의 말씀이다.
1. 주님의 책망
(계 3: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아멘’, ‘참된 증인’, ‘창조의 근본이신 이’는 ‘예수님’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참고로 ‘아멘’은 ‘확증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이다. 예수님은 진리를 확증하시는 ‘아멘’이시고, 하나님의 사명을 충성되게 감당하신 ‘참된 증인’이시며,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시작)’이시다.
온 우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말씀하신다.
(계 3:15-16)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사도 바울의 전도로 세워진 ‘라오디게아 교회’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신앙을 유지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그러한 라오디게아 교회의 미지근한 신앙을 비판하시며 따끔한 책망을 하셨다.
Q 왜 미지근한 신앙을 엄하게 책망하실까? 뜨거운 것은 좋고, 차가운 것은 나쁜 것 아닌가?
A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라오디게아 교회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알아야 한다.
(사진) 라오디게아 교회 근처에는 ‘히에라볼리’와 ‘골로새’라는 두 개의 도시가 있었다.
라오디게아 북쪽 10km 거리에 있는 ‘히에라볼리’에서는 치료 효과가 있는 ‘뜨거운 물’이 나왔고,
라오디게아 동쪽 16km 거리에 있는 ‘골로새’에서는 건강에 좋은 ‘차가운 물’이 나왔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지역에서는 물이 나오는 곳이 없어서, 수로를 이용하여 ‘히에라볼리’와 ‘골로새’ 지역으부터 물을 가져와야 했다.
(사진) 수도시설이 뛰어나지 않았던 당시 물이 ‘라오디게아’에 도착할 때에는 이미 물이 미지근해졌었다.
미지근한 물은 마시기에도 거북하고, 건강에도 아무런 효능이 없다는 것이 당시의 상식이었다.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은 원기를 회복시켜주지만, 미지근한 물은 도움이 전혀 안되는것으로 이해되었다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지역에서 마시는 미지근한 물에 빗대어 그들의 미지근한 신앙을 비판하신 것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신앙공동체로서 진리로 사람을 이롭게 하기보다는, 그저 미지근한 모습으로 적당하게 믿으며 안일함과 무능함 속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적당한 신앙이어도 신앙만 있다면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주님이 보시기에 미지근한 신앙은 ‘하나님의 입에서 토해지는(버려지는) 신앙’이다.
Q 주님은 왜 이렇게 미지근한 신앙에 엄중한 반응을 보이시는 걸까?
A 하나님을 진정 믿는다면 미지근한 신앙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미지근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따르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 따른 결과가 있다. 밥을 먹으면 배가 부르고, 물을 마시면 갈증이 사라지며, 신 것을 먹으면 침이 나온다.
그런데 어찌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자가 미지근한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적당히’ 하나님을 믿어도 괜찮고, ‘미지근하게’ 주님을 섬겨도 구원받으니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에 대해 딱 잘라서 말씀하신다. “미지근한 너희를 내가 토하여 버리리라”
세상나라와 하나님 나라를 동시에 섬길 수 없고, 진리와 불의를 동시에 행할 수 없으며, 빛과 어둠 두 곳에 모두 거할 순 없다. 마찬가지로 참된 하나님의 자녀들의 신앙은 미지근할(대충 믿을) 수 없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왜 이렇게 미지근한 신앙 갖게 되었을까?
2. 라오디게아 교회의 착각
(계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잘못된 모습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은 오히려 스스로 매우 만족해하며, 좋은 상태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있었던 라오디게아 지역은 당시 상업·의학·섬유 산업의 중심지였다.
라오디게아는 경제와 의료기술의 발달로 물질적 풍요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곳이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이러한 물질적 풍족함을 만족스러워하며, 자신들의 신앙 또한 부요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겉으로 평안하고 부유한 환경이 그들로 하여금 거짓된 만족을 갖도록 한 것이다.
그러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너희는 너희가 부자라고 하면서 만족해하지만, 내가 보기엔 전혀 그렇지 않다. 너희는 곤고하고, 가련하며, 가난하고, 눈은 멀었고, 벌거벗은 상태다.”
돈도 많고, 예쁜 옷도 많고, 훌륭한 의료시설까지 다 구비되어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였지만, 하나님의 시선으로 볼 땐 그들은 가난한 자들이며, 눈이 어두운 장님이고, 벌거벗어 수치스러운 자들이었던 것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풍족한 물질로 인해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절실함을 잃었고, 간절함도 잊어버렸다.
그렇게 결국 그들의 믿음은 ‘히에라볼리’와 ‘골로새’로부터 길어온 ‘미지근한 물’과 같이 된 것이다.
현실의 풍요로움과 영적인 풍요로움은 일치하지 않는다. 오히려 넉넉하고 아무 문제없는 환경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어서 영적으로 가난하고 병들게 할 수 있다.
간절함이 없으면 적당하게 믿는 습성을 갖는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죄인)들이기 때문이다. 적당한 믿음의 위험성이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3. 그리스도께 얻는 부요함
그러나 우리 주님은 책망만 하는 분이 아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위한 해결책을 말씀해주신다.
(계 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영적으로 가난한 라오디게아 교회는 주님이 주시는 ‘금’(부유함)으로 영적 부요함을 회복해야 했다.
주님께 ‘흰옷’을 받아 벌거벗은 수치(죄)를 가려야 했고,‘안약’을 사서 눈에 바름으로 영적인눈을 떠야했다
한 마디로 라오디게아 교회는 신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수님께 나아가야 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영적 가난함을 부요케 하시고, 예수님만이 우리의 수치를 가려주시고, 예수님만이 우리의 어두운 두 눈을 뜨게 하시기 때문이다. 주님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그러나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우리 스스로는 도저히 하나님께 먼저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죄인은 하나님께 먼저 나가지 않는다. 자신의 죄 조자도 깨닫지 못하는 자가 바로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이 먼저 찾아오셨다. 그래서 주님이 가난한 우리의 마음을 노크하신다.
4. 노크 중이신 예수님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 문 밖에 서서 두드리셨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연다면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먹을 수 있는 것(풍성한 영적교제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는 주님은 영적 교제뿐 아니라 더 큰 축복 또한 약속하셨다.
(계 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우리가 우리의 문을 주님께 여는 순간 우리는 주님과 함께 ‘이긴 자’가 된다. 주님이 이루신 영광의 보좌에 함께 앉아 하나님의 권세의 일부를 위임받게 되는 것이다(이것이 어떤 것인지 상상도 잘 안되지만).
놀랍지 않은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권을 공유 받는다니..
그저 이 생에서 복을 받는 차원이 아니라 영원한 그 나라에서, 영원한 상급을 받아 누리는 것이다.
이 모든 일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딱 하나이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께 나의 문을 여는 것”.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시면, 미지근한 신앙도 뜨거워지고, 차가워져서 이로운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시면, 영적 궁핍함이 부요해지고, 죄의 수치는 가려지며, 영적인 눈을 뜨게 된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계 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을 향한 열심이고, 회개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에게 우리의 문을 여는 것이다. 우리 안에 온전히 거하도록.
5. 결론
이름은 라오디게아 ‘교회’인데, 정작 주님은 그 교회 문 밖에 서계셨다.
우리가 겸허기 들어야할 것은 이 말씀이 오늘날 나(중고등부)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혹시 지금 중고등부 밖에서 주님이 문을 두드리며 계시진 않은가? 혹시 예배를 드리고 있으면서도 주님이 여러분의 마음 밖에서 기다리며, 여러분이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진 않은가?
영적으로 가난하고 궁핍한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했던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우리도 영적으로는 가난하고 궁핍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미지근함에 만족해하고 있을 수 있다.
주님의 책망을 지금 우리가 들어야 하는 것 아닐까? “열심과 회개”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 아닐까?
미지근하고, 안일한 신앙으로부터 벗어나자. 위험한 미지근함으로부터 서둘러 탈피하자.
주님을 우리 안에 모셔서, 주님이 주시는 부요함을 얻고, 주님과 함께 교제를 나누고, 주님이 주실 영원한 상급을 바라보며,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우리가 되자.
그리스도인다운 행동도, 생각도, 선한영향력도 없는 미지근한 신앙을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이번 한 주도 살아가는 우리가 되자.
----- 휴 지 통 -----
우리의 기도 생활은 어떤 상태인가? 만일 우리가 주님과 대화를 주고 받는 관계가 아니라면 어떻게 주님께서 우리가 가장 큰 가치를 두기 바라시는 보물을 우리에게 전달하시겠는가?
3:14-22을 눅 18:24에 비추어 생각해보자. 우리 자신은 부유한 자로 간주될 수 없지만 상대적으로 다른 국가들보다 훨씬 부유한 사회 속에서 사는 것에 어떻게 적용되는가?
충격적인 사실은 그들이 거짓된 자기 만족에 빠져 있는 동안 주님이 그들의 문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는 점이다.
서머나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물질적으로는 가난했지만 영적으로는 부자였다.(2:9)
라오디게아 교회의 죄과는 그 지역에서 우상숭배 및 음향과 연계된 지역 경제의 힘에 지나치게 의존한 것에 있었다(소아시아의 다른 도시들처럼). 17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자만적인 라오디게아 교회에 하신 말은 호세아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예언한 정죄로부터 인용한 것이기 때문이다(호 12:8). 호세아는 하나님께서 진실로 이스라엘 백성을 부자가 아니라 무가치한 존재로 아셨다고 선언한다(호 12:11).
여기서 두 동사 ‘서서’와 ‘두드리노니’는 그리스도의 현재 행동의 지속을 함축한다.
19절. 이는 개종하라고 보내는 초청장이 아니라 이미 시작된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새롭게 하라고 보내느 독촉장이다.
20절의 말씀은 아가 5:2에 기초가 두어져있을 것이다.
신부가 처음에는 그렇게 하기를 주저한다. 신랑이신 그리스도는 자신의 신부인 교회에 대하여 이와 또각ㅌ이 하고 계신다. 이것은 사랑하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의 외침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자기와 더불어 먹고, 이전에 알고 있었던 교제를 회복할 것을 촉구하신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리스도로부터 “불로 연단한 금”을 사야 한다. 이는 순결함에 대한 성경적 표현이다. (벧전 1: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본문은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라오디게아 교회가 갖고 있는 온갖 물질적 소유보다 무한히 더 큰 가치가 있다고 묘사한다.
3:14-21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에게 둔감한 교회의 마음속에 들어가기를 갈망하시는 분으로 묘사된다.
세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고, 적당히 믿으려는 그들의 우유부단, 양다리, 무능함, 무력을 지적하시는 것이다.
유일한 진리이신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 모인 곳이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라오디게아 교회는 세상도 아니고 교회다운 교회도 아닌 ‘미지근한 신앙’을 고수했던 것이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지닌 믿음은 주변 사람들은 물론 본인들에게도 전혀 이로운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주님은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믿음을 나무라시며, 토가 나올 정도로 그들의 모습이 좋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계시록 3:18에서 언급된 해결책은 계시록 1:13-14에 묘사된 예수님의 모습과 대응을 이룬다.
(계 1:13-14) 13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영적 부요함이 필요한 그들은 ‘가슴에 금띠’를 두른 예수님께 나아가야 했고,
‘머리는 흰 양털’ 같고, ‘눈은 불꽃’ 같은 것과 대응을 이룬다.
금, 흰 옷, 안약을 모두 그리스도를 지시한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해결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풍성한 음식을 먹지 않고, 세상의 악취 나는 음식을 먹는 것으로 만족하며 맛있다고 생각한다. 자기만족과 영적 무감각을 극복해야 한다. 그 방법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고, 그리스도와 관계를 새롭게 함으로써 가능하다.
주님은 집 주인으로서 깨어 있는 종들이 자신의 신호에 즉각 응답하여 문 앞에서 영접하기를 기대하신다.
(눅 12:36-37)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37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약 5: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버거킹에 가서 가장 맛있는 햄버거 세트를 시켰다. 감튀를 먹고, 햄버거를 먹고, 목이 말라서 콜라를 쫙 들이켰는데, 만약 음료가 미지근한 콜라라면 그 맛이 어떻겠는가?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가?
우리는 다른 일들에 사로잡혀 있던 탓에 얼마나 자주 그리스도에게서 등을 돌렸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