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름으로 시작하는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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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서론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을 시작으로 우리는 주기도문 전체의 내용을 살피게 됩니다. 이번 정기예배를 통해 여러분이 주기도문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기도가 무엇인지 알고, 진정한 기도를 하는 사람으로 자라가는 것이 이번 정기예배의 목표고 목적인 것을 함께 알았으면 합니다. 아무쪼록 은혜가 가득한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Ⅰ. 모든 종교가 기도한다.
Ⅰ. 모든 종교가 기도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기도에 대해 배우게 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이미 우리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굳이 기도에 대해 배울 필요가 있을까요? 어떤 면에서는 기도를 배우는 것보다, 지금 기도를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지 않을까요? 오늘 설교가 끝나면 기도회를 가질 것입니다. 어찌보면 설교시간을 줄이고 기도하는 시간을 늘리는 것이 기도에 대해 배우기에 더 적합한 자세가 아닐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기도를 배운다? 무엇인가 어색한 내용 아닙니까?
그렇다면 질문으로 시작해봅시다. 우리는 기도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종교에도 기도가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그럼 그들이 하는 기도와 우리의 기도는 어떻게 다릅니까? 여러분 이런 생각해본적있습니까? 우리는 기도합니다. 어떤 기도를 합니까? “주님 행복하게 한주 보낼 수 있게 해주세요.”, “주님 이번에 시험이 있는데 합격하게 해주세요.”, “주님 남자친구, 여자친구 좀 만들어봐요” 뭐 이런 기도합니까? 보통 이런 기도가 우리의 기도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기도와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의 기도가 다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는 누가 할 수 있습니까? 아무나 다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기도합니다. 그러나 진짜 기도, 바른 기도는 누구만 할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가 배우게 될 내용이 이 것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기도 말고, 우상에게 빌어대는 기도 말고, 그저 입만 뻐끔거리는 기도말고, 그런 가짜 기도가 아닌 진짜 기도가 무엇이며, 그 기도를 누가 할 수 있는 지 알아갈 것입니다.
Ⅱ. 잘못된 기도
Ⅱ. 잘못된 기도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바른 기도를 배울 것입니다. 물론 그 바른 기도가 무엇이겠습니까? 눈치가 빠르다면 당연히 바른 기도가 주기도문이라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그러면 답은 정해졌습니다. 이제부터 주기도문을 배우면 되겠지요. 그러나 본문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눈을 더 크게 뜨고 본문을 봐야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알아야 할까요? 그것은 바른 기도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잘못된 기도가 무엇인지 먼저 알아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도 이 사실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9절을 봅시다.“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기도가 시작되기 전에 도입부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사용된 단어가 “그러므로”입니다. 이는 대조를 말하고 있지요. 즉 바른 기도에 앞서 잘못된 기도가 무엇인지 예수님은 가르쳐주고 계신 것이지요.
1. 외식으로 하는 기도
1. 외식으로 하는 기도
그렇다면 잘못된 기도는 무엇입니까? 5절을 보십시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를 하는데 어떻게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외식으로”기도합니다. 외식으로 기도한다는 말이 무엇인지 압니까? 여기서 “외식”으로 사용된 단어의 본래의 뜻은 “연기자”입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이지요. 기도를 하는데 무엇때문에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내가 나름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기도의 모양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서 서서 기도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성경은 이 사람들이 왜 이렇게 기도했다고 말합니까? “사람에게 보이려고” 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은 통상적으로 산상수훈이라고 불리는 마태복음 5장부터 7장 중간부까지에 속하는 본문 속에 있습니다. 산상수훈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의 나라의 특징을 말하고 있는 본문입니다. 그런데 그 본문에 핵심적 단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의”입니다. 진정한 의, 세상이 말하는 의는 어떤 의입니까? 도덕입니다. 착한 것입니다. 좋아 보이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 마음의 중심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착하면 됩니다. 좋아 보이면 됩니다. 어느 정도 도덕적이면 됩니다. 피해주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의 의는 그런 조잡한 의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통용되는 의, 정의, 공의, 의로움, 옳음, 선함은 무엇입니까? 중심이 변화되는 의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속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위선에 속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겉만 번지르한 사람을 원하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의는 무엇입니까? 중심이 변화되는 의, 중심이 움직여져서 전혀 다른 가치를 따라 사는 의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이 사실을 말합니다. 그들이 기도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를 위해서 입니다. 그들의 마음에 주된 관심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통해 평가되는가?, 하나님이 나를 통해 어떤 분으로 들어나는가?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결국 중심이 자기에게만 온전히 있는 것이지요. 결국 그는 기도하지만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면서도 자기에게만 집중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신의 거룩함과 자신의 온전함,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들어내고, 나타내는 것에 집중하는 사람이지, 하나님을 정말 원하거나, 하나님이 온전히 들어나는 일에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짜 기도는 어떻게 다릅니까?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때때로 모여서 기도합니다. 그리고 대표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골방에서 기도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 통성기도나, 대표기도는 모두 잘못된 것입니까? 아닌거 아시겠지요? 누군가에게 들리게 하는 기도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통성기도고 해야하고 대표기도도 해야합니다. 그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누구에게 기도하고 있냐는 것이지요. 위선으로 하는 기도는 결국 남들에게 하는 기도입니다. 남들이 자신의 기도를 듣고 자신을 높게 평가하기를 원하는 기도이지요. 그러나 더 이 기도가 역겨운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이 기도의 본질은 누굴위한 기도입니까? “자기”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가 진짜 역겨운 것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중심을 옮깁니다. 그리고 그 중심을 아버지에게 가져다 놓습니다. 그리고 그는 압니다. 자신의 기도를 듣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그 기도를 들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그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이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이것이 바른 기도의 한 부분입니다.
2. 중언부언하는 기도
2. 중언부언하는 기도
본문을 보면 또 다른 잘못된 기도의 한 예가 나옵니다. “7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두번째 잘못된 기도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중언부언”하는 기도입니다. 중언부언하는 기도라는 것은 의미없는 말을 계속해서 하는 기도, 또는 기계적으로 반복해서 말하는 기도를 말합니다. 이 기도에 아주 좋은 예들이 있습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서론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도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의 기도의 특징이 무엇인지 압니까? 중언부언입니다. 그들이 잘 쓰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지성이면 감천이다.” 자기 신을 극진히 모시면 그 신도 감동해서 어쩔 수 없이 그 기도를 들어준다는 것입니다. 물론 기독교인들고 똑같은 기도를 반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기도를 반복하고 똑같은 제목의 기도제목으로 하나님께 힘쓸 수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똑같은 기도를 3번이 하셨고, 그 기도가 얼마나 치열했던지 땀이 피가 되기 까지 기도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반복적인 기도나, 열심있는 기도가 모두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의 기도가 잘못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방인의 기도가 틀린 이유는 열심히 쌓아올린 그들의 기도가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이유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는 이방인들이 하는 방식의 기도이지 성도가 드리는 방식의 기도가 아닙니다. 구약을 보면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 간에 싸움을 하는 본문이 있습니다. 제단을 쌓고 제물을 올려둔 후 각자의 신에게 기도하는 것을 통해 제단에 불을 붙게 하는 것이 그들의 싸움의 내용이 었습니다. 바알 선지자는 450명이 었고, 엘리야는 혼자 였습니다.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바알 선지자 편에 사람이 많았기에 그들이 먼저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본문은 이 내용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열왕기상 18:26–29입니다. “26그들이 받은 송아지를 가져다가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그들이 그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27정오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28이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더라 29이같이 하여 정오가 지났고 그들이 미친 듯이 떠들어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르렀으나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하는 자나 돌아보는 자가 아무도 없더라” 왜 자해를 합니까? 왜 자신을 괴롭게 하고 미친듯이 소리를 지를까요? 신이 자신들을 봐주기 원하는 것입니다. 자해를 하고 고통을 당하면 신이 그것이 불쌍해서든지, 그 노력이 가상해서 그들의 기도를 들어준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응답합니까? 그들의 신이 응답합니까? 결코 응답하지 않습니다. 왜요? 그 신은 죽은 신이며, 없는 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를 보십시오. 열왕기상 18:32–35입니다. “32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제단을 쌓고 제단을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둘 만한 도랑을 만들고 33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34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 번째로 그리하라 하여 세 번째로 그리하니 35물이 제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 찼더라” 엘리야가 어떻게 했습니까? 물을 부었습니다. 불이 붙어야할 그 제물에 물을 부었습니다. 그것도 3번이나 부어서 옆 쪽에 파둔 도랑에도 물이 가득해졌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36-38절입니다. “36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37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38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엘리야가 때를 썼습니까? 엘리야의 영성이 대단해서 이 일이 일어납니까? 엘리야의 기도가 너무나 지극 정성이라서 하나님이 감동을 해서 이 일이 일어납니까? 아닙니다. 왜 이 기도가 응답될까요? 그분이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니 본문은 더더욱 놀라운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까? 마태복음 6:8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을 감동시켰기 때문에 들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왜 우리의 기도가 응답될까요? 우리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는 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전부터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우리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기시를 기대하고 바라시는 그분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는 것이지요. 제발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지극정성이 기도가 응답되는 이유가 아닙니다. 기도가 응답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하나님이 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며, 우리가 아는 것보다 우리를 더 깊이 아시고, 우리의 필요는 나보다도 더 잘아시는 그분이 계시기에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어지는 것이지요.
Ⅲ. 우리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
Ⅲ. 우리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살펴본 바를 보면 결국 잘못된 기도와 바른 기도를 가르는 기준이 무엇일까요? 성경은 이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참된 기도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잘못된 기도와 바른 기도의 핵심적인 차이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방금 보았던 두가지의 잘못된 기도를 보십시오. 그들이 몰랐던 것이 무엇입니까? 왜 그들을 외식하는 기도를 드렸습니까? 왜 그들은 중언부언했을까요? 모르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데로 모르니까 기도가 엉망이 되는 것입니다. 너무나 가슴 아픈 사실은 현세대에 많은 사람들이 이 하나님을 모릅니다. 물론 말은 안다고 말합니다. 안다고 말은 하지요. 그러나 보십시오. 정말 압니까? 우리의 기도를 보십시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치장합니다. 골방에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를 하는데 멋있게 하고 싶어합니다. 기도의 내용을 보십시오. 조잡하기가 짝이 없습니다. 우리가 뒤에 계속해서 다루게 되겠지만 기도의 내용이 하늘에 닿아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는데, 여전히 우리의 기도는 땅에 속하고 땅에 것에 혈안이 된 기도를 합니다. 방식은요? 때쓰는게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매달리면 하나님이 다 들어 줄것이라는 얄팍한 신앙, 마치 이방인이 신에게 기도하는 방식을 따라 하는 식의 기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닙니다. 눈을 뜨십시오. 눈을 끄게 뜨고 우리가 기도할 때 반드시 기억해야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기도하기 전에 무엇을 알고 기도해야합니까? 그분이 계십니다. 하늘에 계시지만, 전능하신 분이지만, 만유의 주재이지만, 이 세상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에 계시지만 우리와 함께 하시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관심과 사랑을 지니고 계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시고 그 세상을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부름으로서 기도를 시작합니다. 여러분 기도의 시작은, 바른 기도가 시작되는 지점은 바로 여기입니다. 하나님을 압니까? 이 하나님을 알고 계십니까? 그와 함께 이 하나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기도응답에 비결입니다. 이 하나님을 알고 기도 속으로 들어간다면 저는 장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말할 수 없는 영광과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때쓰지 않아도, 잘 보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참된 믿음을 가지고 이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부름으로 기도를 시작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바른 지점에 와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기도의 시작입니다. 기도가 바로 여기서 시작되어져야 합니다. 여러분 간구합니다. 그리고 찾기를, 발견하기를 갈망합니다. 이 하나님을 바로 알기를 갈망하고 또 갈망합시다.
Ⅳ. 우리를 먼저 부르신 하나님
Ⅳ. 우리를 먼저 부르신 하나님
사랑하는 여러분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살펴보고 오늘 말씀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제 바른 기도의 핵심이 무엇인지 배웠습니다. 바른 기도의 핵심은 기도의 대상이 되시는 그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부르는 것이지요. 그런데 보십시오. 정말 우리는 하나님을 바르게 알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정말 바르게 알 수 있을까요? 아니지요. 우리는 하나님을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왜요? 우리는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로마서 3:23입니다. (NKRV)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우리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물창고를 뒤질 수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기도를 통해 그 보물창고에 있는 모든 신령한 복을 얻을 수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보물창고 근처도 가지못하는 자들입니다. 왜요? 만약 우리가 그 보물창고에 들어간다면 우리는 죽을 것입니다. 거룩하신 그 하나님, 하늘에 계시며 구별되신 그 하나님의 보물창고는 거룩하신 하나님 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무도 하나님을 부를 수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쫒겨난 자들이며, 추방된 자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부를 수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습니다. 어떤 일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찾기 전에,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기도 전에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고, 부르시는 일을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갈망하기도 전에, 우리가 하나님을 구하기도 전에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진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셨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우리는 몰랐습니다. 우리는 정말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 줬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늘에 속에 모든 신령한 복” 진짜 복,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했던 복, 자기 아들 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찾았습니까? 웃기는 소리지요. 우리는 하나님을 원한 적이 없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거역하고 하나님을 떠나는 역사뿐입니다. 아무도 스스로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인류는 늘 하나님을 등졌고, 그분을 배반했습니다. 진짜 복이 하나님께 있는데 말입니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이지요. 그런 인생들을 우리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바로 이 역사지요. 하나님의 끊임없는 사랑, 하나님의 포기를 모르는 사랑, 하나님의 지칠줄 모르는 사랑, 그 사랑에 정점에 누가 계십니까? 우리를 부르시기 위해 하나 뿐인 자기 아들을 보내는 사랑, 그 아들을 죽이는 것을 통해, 배반자, 멸망자, 아무짝에 쓸모 없는 인생을 자기 아들 삼는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부른 것이 아닙니다. 기도가 특권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있습니다. 기도를 해서 무엇인가를 얻고, 기도한데로 무엇인가가 되는 것이 특권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가 기도하는 것 자체가 특권이며, 영광인 것이지요. 아들이 아니었던 자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는 영광, 복의 근원에서 끊어졌던 자가 복의 근원과 연합되는 영광, 부를수 없던 자가 먼저 불러짐으로 하나님을 부를 수 있게 되는 영광이 이 자체가 영광이지요.
Ⅴ. 결론 - 아들은 받는다.
Ⅴ. 결론 - 아들은 받는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당장 대통령 집에 있는 냉장고 바나나를 먹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요? 제가 지산교회에 있을 때, 담임 목사님 사택에 자주 갔는데, 가면 제일 처음 한 것이 있습니다. ‘냉장고 문을 열고 먹을 것이 있는지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나나가 주로 있어서 자주 먹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이 누가복음 설교를 하는데, 목사님은 말씀했습니다. “우리 교회에 이상한 청년이 있다. 우리 집에만 오면 마음데로 냉장고 문을 열고 바나나를 훔쳐먹는다.” 누군지 아시겠지요? 그런데 그때 설교 본문이 누가복음 11:9이었습니다. “9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그러면서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자기 집 냉장고를 마음데로 열어도 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입니다. 누구일까요? 누가복음 11:11–12입니다. “11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누구입니까? “아들”은 마음데로 냉장고를 열어도 됩니다. 왜요? 아들이니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참 아들이 오셔서 우리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 또한 그분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하늘창고가 누구의 것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 누구의 것입니까?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을 이유가 어디있겠습니까? 우리가 그분의 자녀인데, 어찌 우리의 기도가 땅에 떨어질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지게 됩니다. 왜요? 우리 아버지가 듣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아들도 아낌없이 우리에게 주신 그 아버지가 어찌 부스러기 같은 복을 주시기 않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