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믿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사도신경 시리즈 11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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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을 생각할 때 어떤 하나님이 떠오르십니까? 모든 사람을 안아주시는 분입니까? 아니면 어떤 사람이 죄를 지을 때마다 회초리를 들고 준비하시는 분입니까?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여러가지 의문이 들때가 있습니다. 특히 저는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행동을 보면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이상할까요? 하나님은 죄인들을 용서하시지 않습니다. 분명하게 보응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우리 하나님은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분입니다. 그들을 사랑하고 아끼시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떤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다고 말해야할까요?

Ⅰ. 십자가는 하나님의 저주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단락은 여러분이 그토록 많이 들어왔던 ‘십자가’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십자가를 너무나 피상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왜 피상적이라고 말할까요? 그것은 여러분이 아는 십자가는 대부분 감동적인 십자가이지 사도신경이 말하고 싶어하는 십자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과 관련된 영화를 보면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고난의 장면과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장면을 보면 어떻습니까? 감동이 되지 않습니까? 나를 위해 그토록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많은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마음의 격동과 감동이 사실을 넘어서거나 사실을 근거하지 않은 감동일 때 오는 문제가 무엇일까요? 그 감동은 지속적이지 않습니다. 그런 감동은 단회적이고 효력있는 감동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볼때 눈물을 흘린다고 눈을 개슴츠레하게 뜨면 안됩니다. 오히려 분명하고 선명한 정신으로 눈을 크게 뜨고 십자가를 봐야합니다. 거기에는 놀라운 진리 곧 사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왜 예수님이 죽어야했는지 아십니까? 여러분이 그토록 많이 들어왔던 이야기 아닙니까? 왜 그분이 죽으셔야했습니까? 나의 죄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수백번 들어왔던 이야기이지 않습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자주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죄 하나 용서하지 못하겠냐는 것입니다. 사랑이 그토록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 죄 하나 용서하지 못하겠습니까? 왜 하나님이 그냥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면 되시지 굳이 예수님을 죽여가면서 까지 우리의 죄를, 나의 죄를 씻으셔야했을까요? 우리의 죄를 하나님이 용서할 수 없었을까요? 정답은 "예"입니다. 여러분 세겨들어야합니다. 정답이 "예"라니까요? 너무나 자주 말해도 또 이야기해야할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죽지않고는 우리의 죄는 처리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죄는 매우 무겁고 무서운 것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죄가 세상에 가지고 들어온 가장 핵심적인게 무엇입니까? 죄는 무엇을 들고 세상속으로 들어왔습니까? "사망"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시고 아담을 만드셨을 때 아담은 죽음을 몰랐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죽지 않게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죄를 범하지요. 그러자 세상에 무엇이 들어왔습니까? 사망입니다. 창세기 5장에 아담의 계보를 보십시오. 몇백살을 살다가 누구를 낳고 뭐했다고 써있습니까? 죽었다는 것입니다. 핵심이 무엇입니까? 오래 살았든지 짧게 살았든지 이제 모든 인류는 죽습니다. 창세기 3장부터 11장의 내용이 이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이제 죄는 한 개인에 문제가 아닙니다. 그저 아담 한 명을 죽이는 수준이 아닙니다. 죄는 훨씬 강력하게 온 인류를 휘감았습니다. 죄는 사망을 낳았고 우리는 사망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이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망은 단순히 몸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게 우리가 오늘 다룰 핵심입니다. 사망은 단순한 죽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진노가 부어지는 것입니다. 죄는 곧 사망을 가지고 온다와 죄는 곧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는다는 동일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자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던 자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서로 사랑하는 관계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했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자 우리와 하나님을 원수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싸우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의 눈으로 보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제 어떤 자들이 되었습니다. 죄 아래 있는 우리는 어떤 자들입니까? 우리는 모두 "저주받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의 심판의 검이 우리를 겨누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망입니다. 죽음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 심판을 받아야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모두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십니까? 오늘 어떤 일을 이루고 계십니까? 내가 받아 죽어야하는 그 죄의 결과인 사망을, 하나님의 심판을, 하나님의 저주를 다른 누군가에게 쏟아 붓고 계십니다. 누구에 이 저주를 퍼부었습니까? 누가 그 하나님의 심판의 검을 맞으셨습니까? 바로 우리의 주되시는, 우리의 구원자 되시는,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 자신의 아들되는 예수님에게 부어지고 있는 것이 우리가 보고 있는 십자가입니다.

Ⅱ.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사도신경의 십자가라는 단어는 그냥 단순한 처형방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십자가는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지혜롭고 놀랍고 탁월한 분인가를 설명하기 너무나 적절한 내용입니다. 이래서 제가 여러분 공부해라는 겁니다. 모르니까 감동이 없지요. 모르니까 뭐가 뭔지를 모르는 겁니다. "그냥 십자가에서 죽었나보다, 날 위해죽었나 보다, 그래도 나는 내가 중요하고 내삶이 우선이지 예수님은 뭐... 알아서 잘사시겠지" 속이 뒤집어집니다. 여러분은 유대사회에서의 처형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구약 성경을 찬찬히 보면 사람을 처형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돌로 쳐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돌에 맞아 죽지 않지요? 로마의 처형방식인 십자가 형을 당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사실 여러분은 압니까? 왜 하나님은 예수님을 유대인들의 방식이 아닌 로마인들의 방식으로 죽였을까요? 십가자 형이 더 독하고 참혹하니까? 사람들이 후대에 봤을 때 더 극적이 감동적인 이야기로 만들려고 십자가에서 죽였을까요? 그게 아니지요. 중요한 내용입니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는가? 신명기 21장 2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후반절입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신명기 21:23) 여러분 나무에 달린자는 어떤 자입니까? 저주받은 자입니다. 누구에게 저주 받습니까? 하나님께 저주 받습니다. 이 맥락 이해가 되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누가 저주받은 자입니까? 누가 저주 받을 자 입니까? 우리가 저주받은 자이며, 저주받을 자이지요. 곰곰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의 악함을 정말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참으로 저주받을 자들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오늘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저주 받아 마땅한 우리에게 그 저주를 돌리지 않습니다. 저주받아서 하나님의 심판을 당연히 받아야할 우리에게 그 심판을 내리지 않습니다. 왜! 왜! 그렇습니까? 성경은 이 이유를 다름과 같이 말합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니라" 하나님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죄 중에 멸망당하시는 것을 눈뜨고 보지 못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가 택한 방법이 무엇입니까? 온 인류가 받을 자신의 모든 저주를 하나 뿐인 자신의 독생자에게 퍼붓는 것입니다. 모든 인류의 죄를 자신의 아들에게 퍼붓는 것이지요. 십자가는 단순한 감동이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에 마음을 적적하게 하는 사건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두려운 사건입니다. 아주 무시무시한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무엇입니까? 십자가 사건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줍니까? 십자가는 저주입니다. 하나님의 극렬한 심판과 저주를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장소이며, 사건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공의롭다는 것,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지 않고 반드시 벌하신다는 것을 가장 완벽하게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그분의 공의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그분의 절절한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완전하게 나타나는 신비한 사건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보고있는 십자가 입니다.

Ⅲ. 결론 - 십자가에서 공의와 사랑을 맛보라.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에게 진지하게 묻고 십습니다. 여러분은 진짜 이 십자가를 아십니까? 그냥 우리가 초두에 말한것 처럼 예수님이 못 박히는 것이나, 가시면류관 쓰는 것이나 옆구리에 창 찔리는 것 때문에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 말고, 그 하나님의 저주! 그 하나님의 진노가 예수님께 쏫아질 때 그게 당연하게 예수님이 받아야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그 십자가에 달려서 그렇게 처절한 죽음과 쓸쓸한 죽음,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했다는 사실을 아느냐 묻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노아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방주를 타고 동물원 만든사람이지요? 그 노아의 방주를 신약은 예수님이라고 말해줍니다. 여러분 세상이 죄로 가득해지가 하나님 모든 인류를 저주하십니다. 그리고 그에 합당한 심판을 하시는데 그것이 어떤 심판입니까? 홍수, 물로 모든 인류를 진멸해 버리는 것입니다. 모두 하나님의 진노 앞에 죽었습니다. 그런데 누구만 살았습니까? 노아와 노아의 가족들만 살았습니다. 왜 살았습니까? 방주 속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들은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전혀 경험하지 못했습니까? 아닙니다. 전혀 아닙니다. 이들은 오히려 더 절절히 더 생생하게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크고 두려운 일인가를 깨달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저와 여러분이 방주 속에 있습니다. 그럼 비와 물난리는 피합니다. 맞지요? 그러나 그 생생한 천둥소리, 번개, 사람들의 아우성과 동물들이 죽어가는 소리, 방주가 파도에 밀려 쓸려가는 모든 것, 비가 또 얼마나 방주를 때렸겠습니까? 그때 뭐 빛이라고는 있었겠습니까?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것을 공포의 소리 뿐이지요. 제가 생각했을때 노아는 방주 안에서 어허와 둥둥하면서 춤추고 노래부르지 않았을 겁니다. 오히려 그 생생한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하면서 두려워함과 함께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마음 속 깊이 감사했겠지요. 여러분 우리에게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경험했다는 사람들이 전부 심판은 모릅니다. 전부 구원받은 감격만 있다고합니다. 아닙니다. 그렇게 되니까 십자가가 얼마나 위대하고 놀라운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 방주는 오늘날 십자가와 똑같은 경험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똑같은 경험이 우리에게 주어져야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바로 아래서 보십시오. 그곳은 하나님의 사랑만 있는 곳이 아닙니다. 방주 곧 예수님을 속에 들어갔을 때 예수님이 당하시는 그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크고 두려운지 우리는 봐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진짜 예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큰 진노가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것인지를 알게 될 때, 역설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절절한지 알게 될 것입니다. 저는 소망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냥 예수님을 아는 사람, 그냥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고백하는 수준의 사람이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저는 소망합니다. 여러분이 성경이 말하는 것 처럼 하나님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여 자신의 독생자도 아낌없이 주셨다는 사실을 진실되게 깨닫는 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십자가의 풍성함을 깨달아, 신앙에 감격이 있고, 오늘도, 내일도, 평생을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감격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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