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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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일을 멈춰서는 안된다.

1. 설교자의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신앙고백
성령님의 능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님께서 행하신 것을 드러내는 차원에서 역사하신다.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만 역사하신다.
성령님을 받는 자는 영광을 입으신 예수님께 생명을 받는다.
그러므로 이제 성령님께서 비추시는 빛 가운데 거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완성된 구원을 이해할 수 있다.
2. 설교자의 회개기도 및 간구의 기도
주님 저는 아무것도 할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님을 의지하여 에수 그리스도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당신의 뜻을 이루게 하소서!
3. 본문 석의
3절, 하느님께서 허락하셔야 우리는 회개와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대해 알 수 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구원에 대해 알 수 없으며, 구원 받을 수 없다.
6절, 타락은 주님으로 부터 떨어져나가는 것을 말한다. 불순종은 성도의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님께서 더 이상 거하는 성령님의 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타락하면, 떨어져 나가면, 즉 불순종의 배교 행위는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행위라고 비유한다.
예수님을 다시금 십자가에 못 박는 짓은 어떤 의미의 행위 일까?
주님께 의를 받은 예수님의 영광을 보잘게 없게 만드는 예수님의 희생의 보혈의 피를 보잘것 없는 수치로 여겨지도록 만드는 일이다.
7절, 땅은 자주 내리는 비를 맞아야 농부가 뿌리는 씨가 뿌리를 내려, 열매를 맺는 복을 주님으로 부터 받게 됩니다 - 믿음의 원리
하지만, 가시덤불(가시나무 수풀:많은 날카로운 가시를 가진 일종의 관목이나 덤불)과 엉겅퀴(성경에서는 ‘가시나무’, ‘가시덤불’, ‘독보리’, ‘찔레’ 등 가시 있고 날카로운 잎을 가진 식물을 통틀어 가리킨다. 쓸모 없는 것, 폐허, 거짓 선지자에 비유된다)를 내면, 땅의 본연의 속성에 맞는 것이 아니기에 그 땅은 쓸모가 없어 버려지게 된다. 본문은 불에 탄다는 것을 표현한다. 왜냐하면, 주님 앞에 중간 영역은 없기 때문이다. -> 나는 구원을 받기 위해 노력 중이다. (죄를 짓고 있는 상태에서의 변명)-> 이것을 드러내야 한다. 비 성경적 신앙 사고 의식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는 다 맡겨서 받는 것이기에 자신의 결심이나 열심을 바탕으로 그리스도님을 위한 것이 아니다. 성경은 결심이나 열심마저 할 수 없는 불능을 깨닫 는데 있다고 말한다. “저는 하느님을 붙을 만한 힘도 없고, 열심을 낼 힘이 없습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그러한 사람이 될 능력이 없습니다.
그때 주님은 “네가 복이 있다.” 라고 말씀 하신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5:3)
(‘내 증인이 되리라는 행1:8절’은 주님의 능력이나 축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9절 , 성령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님의 영화를 위해 일하신다. 하느님의 이름을 위해 , 즉 주님의 이름을 나타낸,
kjv) toward his name
위클리프성경) in his name
제네바성경) towarde his Name
틴데일성경) in his name
루터성경) an seinem Namen : 실로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성인을 섬기며 또 예배하는 동안에 너희가 그의 이름으로 행한 너희들의 행위와 사랑을 망각하는 것에 부당하지 아니 하시노라
그의 이름을 향해 보여주었다는 의미인데, 주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했다는 것이다. 주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했기에 그 행위를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라고 말한다. 주님은 이를 기뻐하시기에 그 사역을 순종을 멈추지 않는 열정을 가지라는 이야기이다.
그 열정은 소망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 소망은 13절 이하 에서 설명하고 있으며, 그 소망은 휘장 안까지 들어가게 해주는 결과를 낳게 한다.
그러므로 히브리인들은 그 소망을 멈추지 말아야 하며 , 그 소망을 멈추는 일은 게으른 사람이라 본문에서 칭힌다(12절). 그 소망을 멈추면 게으른 자라 칭한다.
그 소망은 하느님께서 해 주신 약속을 상속 받게 된다.
본문은 그 소망믿음과 인내로 상속받은 증인들, 곧 믿음의 선조들을 본받아야 함을 증거한다.
아브라함 13-15절) 약속- 복을 주고 번성하게 해겠다. 아브라함의 인내-> 사라에게 잉태할 수 없는 아이, 이삭이 잉태되었다. 아브라함이 참고 인내한 것은 무엇인가? 창12: 4 아브람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길을 떠났다. 롯도 그와 함께 길을 떠났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나이는 일흔다섯이었다.” 창13:14-18 “롯이 아브람을 떠나간 뒤에,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 있는 곳에서 눈을 크게 뜨고, 북쪽과 남쪽, 동쪽과 서쪽을 보아라. 네 눈에 보이는 이 모든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아주 주겠다. 내가 너의 자손을 땅의 먼지처럼 셀 수 없이 많아지게 하겠다. 누구든지 땅의 먼지를 셀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너의 자손을 셀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 땅을 너에게 주니, 너는 가서, 길이로도 걸어 보고, 너비로도 걸어 보아라.” 아브람은 장막을 거두어서, 헤브론의 마므레, 곧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거기에서 살았다. 거기에서도 그는 주님께 제단을 쌓아서 바쳤다.” 창15:1-6 “이런 일들이 일어난 뒤에, 주님께서 환상 가운데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네가 받을 보상이 매우 크다.” 아브람이 여쭈었다. “주 나의 하나님, 주님께서는 저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저에게는 자식이 아직 없습니다. 저의 재산을 상속받을 자식이라고는 다마스쿠스 녀석 엘리에셀뿐입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셨으니, 이제, 저의 집에 있는 이 종이 저의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아브람이 이렇게 말씀드리니,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 아이는 너의 상속자가 아니다. 너의 몸에서 태어날 아들이 너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주님께서 아브람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서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그리고는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아브라함은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믿음과 인내로 행하여서 약속을 상속받아 이삭을 얻는 큰 위로를 받게 되었다. 아브라함이 믿음과 인내를 행했기에 이삭을 얻고 그의 민족이 번성하게 되는 큰 위로를 받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나타낸 사랑,’ 즉 주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했기에 주님께 합한 자(곧, 그러 믿음을 의로 여기심)가 완성되어, 주님께서 그에게 해 주신 약속을 이루어 주신 것이다.
16-18절, 주님께서는 약속맹세를 붙잡기를 원하신다.
자신의 모든 유익과 생각을 포기하면, 남는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19-20절 , 확실한 영혼의 닻-> 소망(약속과 맹세)-> 휘장 안으로 들어가게 한다. (주님과의 영적 일치, 그리스도님과의 연합, 하느님 나라 입성 )
4. 설교자로서 (분문에서)목격하게 된것: 청중의 상황 포함
전장,히브리서 5: 8 “그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절에 예수 그리스도님께서도 성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당함으로써 복종을 배우셨다. 이는 철저히 주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것이다. 주님은 영화로우신 분인데, 주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필요가 있을까?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신 이유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대신, 대표해서 받으신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께 대한 믿음은 맡기기 때문에 받는 것이다.
죄가 없으신 성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데 죄인들을 대신해서 대표하여 받으신 것은 주님의 사랑을 나타내는(보여주는) 거룩한 사랑의 표본 이기 때문이다. 구원을 위한 거룩한 사랑의 표본이 되심으로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 것이다.
하느님께 떨어져 나간 사람, 즉 타락한 사람은 성령님이 그의 몸 안에서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다시는 그를 새롭게 해서 회개하게 할 수 없다.
특히, 초보적 원리 , 곧 회개와 믿음과 세례, 안수와 부활, 심판에 관해 많이는 들었지만, 경험(순종)하지 못 했기에 자신의 삶에 적용하지 못한다
믿음에 관해 순종은 경험을 통해 예수님처럼 배우는 행위이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기에 늘 순종하시는 아드님이시기에 배우실 필요가 없으신 분이시기에 베우신 것이다. 하지만, 성도는 경험(순종)함으로 배우는 것이다. 이 순종(경험)을 통해 성도는 선과 악을 분별하는 세련된 지각을 지니게 된다.
그렇지만, 성도는 경험(순종)함으로 무조건 선과 악을 분별하는 세련된 지각을 지니게 되는 것은 아니다. 본문에서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은, 3절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면 이다. 믿음은 주님께 다 맡겨서 받는 것이기에 자신의 결심이나 열심을 바탕으로 그리스도님을 위한 것이 아니다. 성경은 결심이나 열심마저 할 수 없는 불능을 깨닫 는데 있다고 말한다. “저는 하느님을 붙을 만한 힘도 없고, 열심을 낼 힘이 없습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그러한 사람이 될 능력이 없습니다.
그때 주님은 “네가 복이 있다.” 라고 말씀 하신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5:3) 이때, 성령님은 움직이신다.
우리가 하느님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위해 우리 안에 역사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마5:3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이 개인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하며, 늘 잊지 않아야 하는 신앙의 마음 자세이다.
그리고, 순종하고 경험해야 한다. 무엇을? 경험해야 하는가?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
하지만, 반드시 유의해야 할 부분은 하느님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내는 사랑이어야 한다. 단순한 맹목적인 사랑, 순종, 헌신이어서는 안된다.
그러면 지쳐 쓰러진다.
성령님이 여러분 안에 활동하셔야 여러분은 지쳐 쓰러지지 않는다.
여러분 안에 성령님이 떨어져 나가면, 여러분의 헌신과 복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땅에 불과하다. 쓸모가 없는 저주 받은 땅입니다.
많은 성도분들이 인생에서 겪는 고난과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주님께 성령님의 능력을 구합니다.
하지만, 먼저 선행되어야 하고 알야 하는 것은
성령님의 능력은 오로지 그리스도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역사(나타내다는) 사실 입니다.
여러분의 문제 해결만을 위해 기도하지 마십시요.
뭔가 성령님의 능력을 받아 유익을 취하기 위해 선행을 베풀지 마십시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님과의 연합, 곧 주님과의 영적 일치를 위해 구하십시요!
성령님의 능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님께서 행하신 것을 드러내는 차원에서 역사하신다.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만 역사하신다.
성령님을 받는 자는 영광을 입으신 예수님께 생명을 받는다.
그러므로 이제 성령님께서 비추시는 빛 가운데 거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완성된 구원을 이해할 수 있다.
고난의 극복은 그 다음 문제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주님 앞에 내려놓을때, 자신의 모든 유익과 생각을 포기하면, 남는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약속맹세(보증)를 붙잡기를 원하신다.
약속과 맹세는 히브리서 6:16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위대한 이를 두고서 맹세합니다. 그런데 맹세는 그들에게 모든 논쟁을 그치게 하여 주고, 확정을 지어줍니다.” 때문입니다. 히브리서6:17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상속받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더욱 환히 나타내 보이시려고, 맹세로써 보증하여 주셨습니다.” 보증하여 주시기 사실 때문 입니다.
주님은 약속만 하신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맹세해 주셨다는 사실은 그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정해 주시고 계시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맹세는 확정+보증-> 이것은 우리에게 소망이 되고도 남을 정도로 안전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확실한 영혼의 닻’이라 표현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 나라를 약속받은 성도의 안전하고 든든함을 항구에 을 내리고 정박해 있는 배에 비유하고 있다(히 6:19).
저는 오래전에 아주 막막하게 갇혀 지냈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아무런 희망도 없었고, 뭔가 나의 힘으로 제게 직면한 어려운 고난과 고통의 순간을 극복하기 위해
모든 정신이 팔려 있눈 상황이 었습니다.
갇혀 지낸 시간이 6개월이 지나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고
그때 부터 간절히 주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그때의 기도는 딱 하나엿습니다. 저는 할 수 없으니 주님께서 주님의 능력으로 이겨달라는 것이었 습니다.
그때, 성령님은 움직이셧습니다.
주님은 그 때 제가 , 주변 지인과 가족들이 생각 할 수 없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주님의 뜻을 이루어 가셨고
저는 3개월이 더 지나서 9개월이 되서야 갇혀 있는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 주셨 습니다.
그 때, 순간적으로 저는 왜 9개월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저를 구원해 주시는 방식이
반드시 저의 죄를 간과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남겨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겪는 고난과 고통은 우리의 죄가 함께 속해 있음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아무리 고난 속에서 주님을 향한 간절한 외침도! 주님은 죄를 잊어버리기 원하시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남에게 탓 하기 때문에
늘 억울해 합니다.
여러분! 고난은 우리의 죄가 속해 있음을 간과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히브리서 기자는 하느님을 영화롭게 하는 성령님의 사역을 잊지 말라고
간절히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멈추는 자를 향해 '게으른자’라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을 멈추는 것이 죄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여러분 앞에 놓여있는 고난과 고통에 확실한 영혼의 닻인 주님의 약속과 맹세를 소망하며, 직면하고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님의 이름을 영화롭게하는 일을 중단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일을 시작도 안했다면, 그 일을 소망을 갖고 시작하시길 바랍니다.
더 이상, 문제 해결을 위해 그리스도님교의 초보적 교리, 즉 회개, 맏음, 세례, 안수, 부활, 심판의 교리에 갇혀 있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것을 듣는 것에 모든것을 알고 이루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시길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순종한 사랑을 주님께서는 앚지 않으시기 때문 입니다.
지금, 소망을 갖고 시작하여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셔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한 보혈의 진가를 인식하시고 경험하시길 소원합니다.
그래서 ,확실한 영혼의 닻-> 소망(약속과 맹세)-> 휘장 안으로 들어가게 한다. (주님과의 영적 일치, 그리스도님과의 연합, 하느님 나라 입성 )
성령님 충만이 여러분의 삶에 임하는 놀라운 성령님 세례를 경험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서론
열심히 주님을 믿고 교회를 출석하는데 우리는 고난과 고통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리 열심(기도, 성경공부, 예배, 전도 등등)을 내어도 우리의 고난과 고통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질병이 끊이지 않고, 마음의 쉼이 없습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에 대한 성경의 말씀은 무엇이라 말씀 하시는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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