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며 돌아온 나병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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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본문 눅17:11-19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나병환자 열 명이 치료 받았지만 오직 한 사람만 돌아와 감사했다'는 내용이다. 사실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본문이기에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중 어떤 분들은 “아 목사님이 오늘 이런 식의 설교를 하시겠구나" 미리 답을 정해 놓고 아무런 감흥 없이 들을 만도 합니다. ‘순종하면 치료 받는다’, 또는 ‘감사하는 삶이 참 믿음이고, 구원받는 삶이다’라는 식으로 우린 이미 뻔한 답을 내려놓은 상태입니다. 오늘 제 설교의 결론도 그 뻔한 답에서 멀리 떨어져 있진 않습니다.
다만, 저는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발견한 몇 가지 이상한 점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이상한 점은 예수님의 여행 코스에 관한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던 도중인데 사건의 배경이 되는 지역은 일반적으로 ‘부르킨’이란 마을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곳이 사마리아와 갈릴리 접경지대에 있는 산 위 마을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던 이동경로와 대비해서 따져 보면, 그것으로 방향을 틀 일도, 더구나 산 위로 올라갈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직선 코스인 요단동편에 평야지대가 펼쳐 있었기 때문이죠.
목적지가 정해진 사람치고 편한 길을 택하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예수님은 평지를 거부하고, 길을 돌아갑니다. 그것도 굳이 산 위 마을로 올라갑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일까요?
설교를 준비하며 이렇게 돌아간 이유가 무엇일지 고민해 보았습니다. 제가 저 상황이라면 결코 저런 험로를 택할 이유가 없습니다.
도대체 왜, 예수님은 길을 돌아서 산 위로 올라갔을까요? 길을 잃고 어쩌다 그 마을에 도착한 것일까요? 사실 성경이 답해주지 않기 때문에 그 해답을 알 길은 없습니다. 그저 여러 가지 상상을 해 볼 뿐입니다.
이런 상상을 해 봅니다. 혹시 우연히 이 마을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들어가신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으로 본문을 읽어보니 본문에 숨겨져 있던 새로운 메시지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치유의 사건이 우연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도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은 결코 고통 중에 있는 자들의 현실과 비탄의 소리를 외면하지 않는다.’는 뜻이 됩니다.
이 깨달음은 시련과 고통 중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됩니다. 게다가 열 명 가운데 아홉은 유대인이고, 한 명은 사마리아인이었다는 사실은 복음의 이 기쁜 소식을 더욱 강력하게 만듭니다.
유대인이야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자부하는 백성이기에 하나님의 돌보심을 당연하게 여기더라도, 사마리아인의 경우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유대인 생각에 피가 더럽혀진 민족이고, 저주 받은 이방인들입니다. 당시 민간에선 하나님이 이방인을 창조하신 이유가 지옥의 땔감으로 쓰기 위해 지었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사람 취급 받지 못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구별과 차별의 금지선을 보기 좋게 넘어가 버리십니다. 그리고는 그렇게 넘어선 자리에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치유만 남겨 두십니다.
그래서 유대인이나 사마리아인이나, 백인이나 유색 인종이나, 부한 자나 가난한 자나, 지혜자나 배우지 못한 자나 성소수자나 교회 일에 충성하는 자나 가나안 성도나 가릴 것 없이 시련과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관심과 자비의 대상이라는 것을 이 사건을 통해 상기 시킵니다.
이런 기쁜 소식을 더욱 확고하게 확증하는 것은 이 사건의 주인공 역할을 사마리아인이 맡고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 할 수 있습니다. 눅17:19절에서 예수님은 치유 받고 돌아온 사마리아 사람에게 구원을 선언하시면서 이런 사실을 더욱 확고하게 만드십니다.
한 가지 더 이상한 것 찾아봅시다. 14절 말씀을 읽어보면, 자기들의 처지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나병환자들의 절규를 들을 수 있습니다. 문둥병으로 알려진 나병은 피부조직에서 가장 약한 부분부터 괴사해서 나중엔 손과 발까지 퍼지는 병입니다. 그런데 가장 먼저 괴사하는 조직은 성대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병자들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이 단발마의 외침은 입으로 깨작거리는 소리가 아니라 자기 몸의 모든 힘을 짜서 토해내는 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죽더라도 저 예수에게 이 한 마디는 꼭 전해야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비통한 소리를 듣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4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이 대목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치료해줄려면 그 자리에서 치료해 줄 일이지 왜 하필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했을까요?
물론 이 대목은 유대인의 율법에 관한 말씀이 배경에 있습니다. 나병에 걸린 사람이 치료받은 경우, 제사장에게 보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 생각에 나병이란 것은 하늘의 저주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그 병은 사람이 고칠 수 없는 것이고, 설사 치료가 된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하신 일이란 것을 제사장에게 가서 확인받으라는 뜻인거죠.
그런데 여기서 좀 다르게 생각할 여지가 생깁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치유하시는 목적에 관한 특별함 입니다. 나병은 유대 사회에서 저주 받은 불치병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치료는 모든 것을 회복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믿습니다.
그런데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는 예수님의 명령엔 그저 '몸'이 치료 받았으니 확인 받으라는 뜻만 담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성 밖으로 내쳐진 사람들을 다시 성 안으로 들어가게 만들어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성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가지 못하고, 직장을 얻고 싶어도 못 얻고, 정상적인 사회적 권리를 누리고 싶어도 누릴 수 없는 사람을 성 안으로 들어가게 만들어서, 정상적인 사회적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예수님의 치유입니다.
이렇듯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단순히 몸을 치료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전 삶을 원래의 첫 창조 때의 모습으로 회복시킨다는 뜻이 여기 담겨 있습니다. 그 회복을 통해 첫 사람 아담이 누렸던 에덴의 기쁨을 누리며 살게 하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이상한 구석 하나 더 찾아 봅시다. 치유 받은 열 명 모두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부터 놓치지 말아야 할 귀중한 방점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돌아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냥 돌아온 것이 아니라 돌아온 그 사람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15-16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여기서 초점은 '회복된 사람의 태도가 무엇인가?'하는 것입니다. 어떤 모습을 보입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이며 감사했다’는 것이죠. 쉽게 말해 ‘감사하며 찬송했다’는 뜻입니다.
이제 여기 나오는 ‘감사’라는 말에 집중해 봅시다. 원어로는 ‘유카리스티아’, 감사라는 이 단어는 그 유명한 예수님의 오병이어 사건에도 나오고, 우리가 매 주일 예배 때 함께 나누는 성만찬 제정의 말씀에도 항상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감사라는 말이, 나머지 두 곳에선 모두 “떡을 들어 ‘축사’하시고”라는 구절에서 나옵니다. 여기서 ‘축사’라는 말도 역시 똑같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 날 밤에 있던 최후의 만찬을 떠 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날이 밝으면 죽게 될 운명을 알고도 떡을 들어 하나님께 감사(축사)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감사의 마음으로 제자들과 한 자리에서 떡과 잔을 나눕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항상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 때문에 오늘도 우린 주님의 이 명령에 따라 성찬례 가운데 그 감사의 마음을 함께 나눌 것입니다.
바로 거기서 성만찬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성만찬이란 기쁨 뿐만 아니라 생사화복의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성찬의 감사는 아멘하고 혼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 식탁에서 함께 나누는 데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감사(유카리스티아)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누는 삶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삶이고, 구원 받은 삶의 징표가 됩니다. 그렇기에 '예배에 참여하고 성찬을 함께 나눈다'는 뜻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것처럼, 내가 받은 것을 세상 속에 들어가 이웃과 나누겠다는 나눔의 고백이고 결단이 됩니다.
그렇기에 예배는 감사의 끝이 아니라 감사의 시작이고, 일상의 끝이 아니라 일상을 나누는 시작이 됩니다. 내 주머니에 있는 돈과 내 시간, 내 재능을 이웃과 나누는 삶의 시작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배우는 ‘감사’의 진면목이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간혹 '난 감사할 것도, 너무 가난해서 이웃과 나눌 것도 없다'고 응답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정말 감사할 것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종교개혁자 루터의 가르침에 잠깐 귀를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영적 기갈, 즉 양심의 배고픔이 없는 자는 성만찬에 올 필요가 없다. 죽음과 마귀에 늘 포위되어 있는 자가 가장 잘 준비된 사람들이다. 배고프고 시련 가운데 있는 자에게 주님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보물을 약속하셨고, 그 보물이 바로 여기에 준비되었다.” (1522: WA 10, III, 48-5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맺습니다. 주님은 시련과 고통 가운데 외치는 자의 소리를 절대로 외면하지 않습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에서 비통하게 소리치던 사람처럼 이 자리에 오셨습니까? 그렇다면 잘 오셨습니다. 기갈과 시련 가운데 있는 바로 여러분을 위해 주님은 세상이 주지도 빼앗지도 못할 하늘의 선물을 오늘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말씀과 성찬 가운데 그 위로와 회복의 기쁨을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감사하며 돌아온 나병환자
눅 17:1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