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그 자리

창세기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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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쫓겨나다 2. 죽게되다 3. 하나님 나타나시다 4. 예상치 못한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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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o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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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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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아마 저를 처음보지 않을까 생각해요. 저는 청년부와 영아부를 섬기고 있는 양휘석 목사에요. 혹시 고3 친구들 있으면 손 한번 들어 볼래요? 고3임에도 예배의 자리에 나온 친구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건강이 가득하기를 축복해요. 사실 저는 오늘 굉장히 부담되고 힘든 마음으로 이 자리에 왔어요. 강도사님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채우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러분은 진짜 복 받은거에요. 강도사님처럼 그렇게 열정 넘치고 여러분 생각하는 사람 없거든요. 연락 안되면 속상해하고, 어떻게든 만나려고 노력하거든요. 그러니까 연락하면 꼭 받아줘요. 알겠죠?
무튼 제가 아무리 생각해도 강도사님의 빈자리를 채울 수 없을 것 같더라구요. 아 어떻게 하지 하다가 한 가지가 생각이 났어요. 제가 강도사님을 이길(?)수 있는 한 가지가 있더라구요. 그건 바로,
저는 우리 모두의 삶은 어쩌면 광야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참 많이 하며 살아갑니다. 각자의 삶을 되돌아보면, 광야와 같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힘들고, 지치고 때론 넘어지죠. 참 좋은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에 있는데 이상하게 외로울 때도 있습니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인지 의문이 들고,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시는가? 하는 탄식이 우리 안에 터져 나오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아브라함의 가족들입니다. 이들은 다른 인격을 가진 사람들이지만, 순간 순간 각자의 광야에서 괴로워합니다. 때론 마음이 언짢아지기도 하고, 고뇌하기도 하고, 속상해서 울기까지 합니다. 이들의 삶의 모습은 저와 여러분의 모습과도 상당히 닮아있습니다.
본문은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더라.”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삭의 출생 때에는 별다른 행사를 하지 않았던 아브라함이 이삭이 젖을 뗄 떼에는 큰 잔치를 베풀고 있습니다. 이삭이 몇 살에 젖을 뗐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당시 비슷한 시기의 문헌들을 보면 고대 이스라엘의 어머니들은 아이에게 3살까지 젖을 먹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아 사망률이 높았던 고대 사회였기에 젖을 떼는 것은 매우 경사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첫돌을 맞은 아이를 위해 크게 돌잔치를 해주는 것처럼, 당시에 젖을 떼는 아이가 있다면 가족과 이웃을 초대하여 잔치를 벌였습니다.
아들 이삭의 젖 떼는 것을 축하하는 그 잔치의 자리. 기쁨과 웃음과 풍성한 음식과 교제로 즐거웠던 그 날을 즐길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많은 이들에게는 기쁨이 날이었지만, 사라와 아브라함 그리고 하갈과 그녀의 아들 이스마엘에게는 잔인한 날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하갈과 이스마엘은 쫓겨나 통곡까지 합니다.
이렇게 기쁜 날 그들이 쫓겨나게 된 이유는 9절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요. 사라의 기분이 상당히 언짢아졌기 때문입니다. 정말 오랜 시간을 기다려 낳은 약속의 아들 이삭. 사고 없이 잘 자라 이제 젖을 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신의 아들 이삭을,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놀리고 있었기 때문이죠. 아기 이삭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 위해 하갈의 아들이 재롱을 떨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심각하게 조롱하고 놀리고 있었습니다.
기분 좋은 날이었기에, 이삭을 향한 하갈의 아들의 조롱 섞인 행동을 웃으며 넘길 수 있었을 수도 있지만, 사라는 그 행동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이미 그녀에게는 비슷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죠.
9절을 보면 사라가 이스마엘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라의 시점으로 바라보고 있기에, 이스마엘이 아니라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라고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녀가 이스마엘이라 하지 않고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라고 이야기 한 이유는, 이스마엘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스마엘은 사라의 눈에 가시가 되어버렸습니다.
창세기 16장 4절을 보면 하갈은 임신하자 자신의 주인인 사라를 멸시하는 행동을 보였습니다. 그 때 보였던 하갈의 태도는 자신을 주인보다 더 높게 생각하고, 사라의 자리에 도전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 때 겪었던 그 멸시의 아픔을 알고 있었던 사라였기에, 자신의 종 하갈의 아들이, 자신이 낳은 아들 이삭을 조롱하는 것을 보고 참을 수 없었던 것이죠.
오랜 시간동안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고통스러운 광야의 시간을 보냈던 사라였고, 그녀의 마음은 이미 상처로 가득했습니다. 사람들의 이야기 혹은 행동 등으로 인해 오랜 시간동안 위축되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을 향한 하갈의 태도는 그녀에게 말할 수 없는 큰 상처가 되었던 것이죠.
차라리 하갈을 통해 아들을 낳고 그 아이를 키우면 그 마음이 채워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자신을 무시하는 하갈을 보며 또 다른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자신이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양보하여 아이를 낳았음에도,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결과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사라는 이름조차 부르지 않고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아내라고 아브라함에게 강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아브라함의 반응은 어떠했나요? 그는 커다란 고민거리를 안게 되었습니다. 이삭이 그의 아들인 것처럼 이스마엘도 그의 아들이거든요.
아브라함이 근심했던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창세기 17장 18절을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 원하나이다.”라고 이야기를 했는데요. 이것은 이스마엘을 자신의 장자로 인식하고, 기업을 이어나갈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앞 장인 16장을 보면, 사라의 요구에 따라 원하는데로 아브라함은 하갈을 내쫓았지만, 하나님께서 오히려 하갈에게 이스마엘에 대한 약속을 주어서 집으로 돌려보내셨어요. 아브라함은 이전의 이 사건들이 기억이 난거죠. 그래서 지금 사라가 하고 있는 이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이 너무 불편했을거에요.
당시 법이요. 여종을 통해 낳은 아들을 아버지가 아들로 인정했으면요. 반드시 기업을 나누어줘야 했어요. 아브라함은 이미 16장과 그리고 21장 11절에서 보듯 이스마엘을 이미 자신의 아들로 생각하고 있단 말이죠. 만약 아브라함이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내고 이스마엘의 상속권을 박탈했다면 그것은 불법이 되는 것이죠. 지금 아브라함은 확신이 서지 않아요. 그는 이스마엘을 사랑했고 또 그가 속한 사회에서도 어느정도 지위가 있던 사람이었기에 관습을 어기는 것이 부담이 되기도 한 것이죠.
여러 고민을 하던 중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어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고민을 해결해주신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더 말씀을 이어 가십니다.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다음달 아침 일찍 일어나 아브라함은 즉각적인 순종을 보이며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 하갈에게 주며 아이를 데리고 나가라고 말합니다. 그래도 자신의 아내와 아들이었는데 너무 간단하게 내보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18장에서 전혀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도 이미 송아지를 잡고 빵을 구워 잔치를 해주었을만큼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죠. 아브라함은 왜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떡과 약 12L터의 물이 들어있는 가죽부대만 주어 나가게 했을까요.
아브라함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내라고 하신 것은요.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보시겠다. 책임지시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거든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 마음을 이해했기에 특별한 물질적 배려 없이 내보냈습니다. 이제부터 하갈과 이스마엘은 세상의 물질이나 음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개입하심이 필요해졌습니다.
그런데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어요. 만약 제가 그리고 여러분이 이 하갈의 입장이라면 어떤 마음이셨을 것 같은가요. 우리가 이스마엘이었다면 과연 어떠했을까요. 이스마엘이 태어나고 이삭이 출생할 때까지 1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의 관계를 끊어놓지 않으셨어요. 14년간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어요.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키우는 14년이라는 시간 동안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유일한 아들이었기에, 정말 귀하게 키우지 않았을까요? 애지중지하며 그 만족감과 행복함을 누리는 시간이었을 거에요. 이스마엘은요? 14년이라는 시간동안 아버지의 사람을 계속 받아왔어요. 그런데 이삭이 태어났어요. 자신이 밀린 것을 알았어요. 그리고 이제는 아버지 무리에서 떠나야만 해요. 이스마엘은 무슨 감정을 느꼈을까요? 상실감? 좌절감? 허탈함? 아마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감정이었겠죠.
제가 초등학생 때요. 피시방보다 오락실이 많았어요. 학교를 끝나고 저는 피아노 학원을 가서 레슨을 받고 태권도장을 갔어요. 학교가 끝나 학원을 가고 있는데요. 친한 친구가 저를 부르는거에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떡볶이를 사주면서, 은밀하게 꼬시는거에요. “우리 오늘 학원 땡땡이 치고 오락실 가자!” 저는 엄청 착한 아이어서요. 갈 수 없다고 했어요. “나는 학원 가야해. 왜냐하면 돈이 없거든” 그러자 친구가 자신이 돈을 대신 내줄테니 오락식을 가자고 하더라구요. 저는 정말 착한 아이었기 때문에, 친구가 그렇게 요청하는데 거절을 할 수가 없더라구요. 그래서 학원을 가지 않고 오락식을 갔어요. 근데 가서 놀다보니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버린거에요. 제가 학원을 끝나 집에 들어가야 할 시간이 넘어선 것이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집을 가면서, 저는 어떻게 어머니에게 말을 해야 할까 나름 변명거리를 갖고 들어갔어요. 집에 들어갔는데 이미 어머니는 제가 학원에 가지 않은 것을 아셨어요. 저에게 이런 저런 질문을 하는데 제가 변명을 하며 다녀왔다고 얼버무리며 거짓말을 했어요. 저희 부모님께서 싫어하셨던 것 중 하나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거든요. 제가 계속 거짓말을 하자 어머니께서, 저의 버릇을 고치기 위해 “자꾸 거짓말을 하면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겠다!”라고 하셨어요. 저는 그 말씀을 “집에서 나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듣고,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어요.
그 때 저는 정말 ‘내가 거짓말을 해서 부모님에게 벌을 받는 거구나. 이제 나는 이 집에 들어올 수 없구나. 어디로 가야하지?’ 이런 생각을 하며 나갔어요. 그런데 제가 가봤자 어디를 가겠어요. 깜깜한 집 근처를 배회하며 서있었죠. 제가 잘못해서 나온 결과였음에도 불구하구요. 그 때 제가 느꼈던 감정은요. 상실감. 허탈함이었어요. 더 이상 부모님을 볼 수 없다는 슬픈 마음도 있었구요.
이스마엘이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을까요. 이스마엘의 기준에서 보면요. 14년간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어요. 이삭이 태어나기 전에,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집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고, 아버지의 자랑과 기쁨이었을 것에요. 그런데 어느 날 태어난 둘째로 인해 뒤로 밀리기 시작했어요. 물론 자신의 어머니 하갈은 여종의 신분이었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첫째란 말이에요. 동생이 젖을 떼고 큰 잔치가 벌어지니, 그 나이 때 아이들이 하는 것처럼 질투와 불만 등 여러 감정들이 섞여 동생을 심하게 놀렸을 뿐인데, 그것 때문에 집에서 나가야 해요. 자신만 나가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도 집 밖. 광야로 내몰렸어요. 어머니에게도 미안함이 있었겠죠? 하갈도 이스마엘도 서로에게 어떤 말을 할 수 없을 정도의 정신이 무너져 내린 그런 상황이었을거에요.
어떤 상황인지 제대로 인식하기도 전에 광야로 내몰렸고, 지금 그들이 가진 것은 이 삼일 먹을 수 있는 분량의 음식뿐이었습니다. 그들은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졌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누군가 지나가다 그들을 불쌍히 여겨 살려주거나, 광야에서 죽을 날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가죽 부대의 물이 떨어지자 하갈은 이스마엘을 관목 아래에 내려놓습니다. 관목은 가시덤불을 이룬 작은 나무들을 이야기 해요. 사막의 관목은요. 쉴만한 그늘을 만들지 못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갈이 이스마엘을 관목덤불 아래에 둔 이유는요. 뜨거운 사막의 태양 아래에 있는 것보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낫기 때문이에요. 하갈은 지금 모든 것을 포기했어요. 물도 떡도 없어요.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어요.
제가 예전에 인도에서 1년간 지냈던 적이 있는데요. 그 때 사막을 여행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함께 만난 사람들과 같이 사막에서 하룻밤 자기 위해 사막으로 들어갔습니다. 베이스캠프가 그리 멀지 않다고 들었던 저희는, 40도가 넘는 무더위 속에 계속되는 갈증을 느껴 물을 마셨습니다. 처음엔 아껴 마시려 했지만, 갈증이 나는 속도가 너무 빨라, 주체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마셨습니다. 금방 도착한다던 베이스캠프는 보이지 않고 모래만 계속해서 보이더라구요. 낙타를 타고 들어간 사막이었음에도, 너무 덥고 마실 물도 없고 하니 금방 지치더라구요. 그래서 저희는 낙타 몰이꾼에게 혹시 물이나 탄산음료를 구할 곳이 없느냐 물어보았습니다. 왕복 2-30분 거리에 작은 마을이 있는데 그 곳에서 물을 구할 수 있다고 얘기를 하더라구요. 그래서 저희는 돈을 줄테니 구해달라 요청을 했습니다 그러자 낙타 몰이꾼들은 저희를 그래도 나무처럼 보이는 곳들 아래로 데려가서 쉬고 있으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잎이 무성하지도 않고, 그리 높지도 않은 나무 아래에 앉고 누워있으니까요. 조금은 살 것 같더라구요. 물이 도착하기까지 2-30분 동안 정말 힘들었습니다. 목이 마르다는 생각이 드니까요.더 목안이 타들어가는 것 같고, 당장 물이 없으면 어떻게 될 것 같다는 마음이 들더라구요.
아마 여기 계신 모든 분들도, 갈증으로 인해 힘들었던 경험이 한번쯤은 있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갈증을 느꼈다 해도,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은요. 지금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어요. 하갈은 지금 죽어가고 있는 자신과 이스마엘을 보면서 원망과 분노 그리고 슬퍼하고 있어요. 관목 아래에 이스마엘을 둔 것은요. 그를 살리기 위한 의도가 아니에요. 16절 상반절을 보면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라고 기록해요. 그리고 그녀가 자리를 피하는데, 화살 한 바탕 거리정도 떨어져 앉았다고 해요. 멀찍이 떨어진 것 같지만 사실은 이스마엘이 보이는 맞은편 자리에 앉은 거에요. 자리에 앉은 그녀가 이내 울기 시작해요.
서두에 저는 우리 모두의 삶은 광야의 길을 걷고 있다.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장소와 상황만 다를 뿐 우리도 하갈처럼 이스마엘처럼 그리고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늘 어려움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수도 없이 넘어지고 좌절하고 우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왜 늘 우리를 광야 속에서 살아가게 하시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길 때도 참 많습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요. 광야를 견디고 견뎌낸 후 끝난 것 같아 보이면 또 다른 광야가 나타난다는거에요. 사라와 아브라함의 인생에 있어 가장 큰 광야와 같은 힘든 시기는 언제였을까요.
아브라함. 그의 인생을 돌아보면 평탄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하시죠. 이동해서 정착해서 살고 있는데 조카 롯과 땅 문제가 생기죠. 그래서 조카 롯에게 땅 선택권을 양보했더니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 당했죠.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 속이며 왕에게 빼앗겼죠. 아이는 태어나지 않죠. 고민 끝에 하갈을 통해 아이를 낳았는데 그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고 하시죠. 여러 고민과 어려움 속에 살았던 그였습니다. 이제 약속의 아들이 젖을 떼고 잔치가 벌어졌는데, 그 날 아브라함의 마음을 온통 뒤집어 놓는 사건이 발생해요. 만약 아브라함의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었다면 어떠셨을 것 같아요? 매일 매일이 시트콤이에요. 한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요.
사라는요? 그녀도 여러 힘든 일들이 있었죠. 남편을 따라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길을 따라나섰죠. 처음부터 쉬운 길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그녀의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상처와 아픔은 아이 없음이지 않았을까요. 그런 그녀를 향해 하나님은 약속 하셨고 결국 아이를 주셨어요. 아이만 낳으면 그녀의 힘든 이 싸움은 끝이 날까요? 아니요. 아이를 낳았더니 하갈이 보이고 이스마엘이 보여요. 자신의 아들이 약속의 자손이 되고 기업을 이어 받아야 하는데, 가만 보니 이스마엘이 나눠가지게 생겼어요. 하갈이랑 이스마엘로 마음이 또 어려워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쫓아낼 수 있을까 하는 고민도 있었겠죠. 그리고 드디어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는 것을 보고 기회를 삼아 내쫓았죠. 근데 그러면 끝나는 것일까요? 하갈과 이스마엘이 그녀의 앞에서 사라지기만 하면, 광야를 졸업할 수 있을까요?
인도에서의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겠습니다. 제가 인도를 가기로 결정 한 후 기도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저는 9살 때부터 선교사의 꿈을 꾸며 자랐습니다. 인도라는 땅은 저에게 정말 매력적인 곳이었습니다. 넓은 그 땅에 정말 수많은 종교들이 있습니다. 선교 훈련을 하고, 문화 훈련을 하기에 정말 적합한 곳이라 생각했습니다. 학교를 다니며, 친구들을 사귀고 그 친구들 집을 방문하며, 가까워지면 복음을 전하기도 했고, 또 다른 지역을 돌아다니며 많은 종교들을 탐방하고 연구했습니다.
저는 그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마음으로 그 곳에 갔습니다. 너무 사랑스러웠습니다. 하지만 그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정말 어려웠습니다. 기숙사 문을 열고 나서면 있는 신전과 붙어 있는 마을에서는 매일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루도 말씀을 묵상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으면 종일 머리가 지끈거리고 몸도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몸이 아파오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샌가 인도인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 오르구요.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고, 같이 밥 먹는 것조차 부담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을 놓으면 어떤 사고를 칠지 모르는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참 많이 물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준비하고 선택하고 간 나라면서, 왜 나를 이 곳에 보내셨는지 묻고 따지며 매달렸습니다. 인도에서의 삶을 포기하려 했습니다. 한국에 돌아오면 이 힘든 시기는 다 끝이 날 것이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한국에 돌아오려고 마음을 먹은 어느 날 한국에서 한 통의 문자를 받았습니다. 평소에 잘 알지 못했던 한 후배였습니다. “본인이 인도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인도인들에 대한 마음이 어떠한지, 인도인들을 잘 섬겨주고 사랑해달라는 내용”의 문자였습니다.
전 그 문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인도인들을 사랑하고 섬기려는 마음으로 왔는데 불과 2-3달 만에 변해 버린 저의 모습이 보였거든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기보다, 혼자 동떨어진 곳이라 생각했고, 하나님께서 저를 인도 땅에 버리셨다고만 생각을 했거든요. 그런데 돌아보니 하나님은 늘 저와 함께 동행하고 계셨는데, 제가 깨닫지 못했던 것이고, 그 광야가 혼자 걷는 곳이 아니었음에도 나 혼자라는 오해 속에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죠.
여러분에게도 이러한 광야의 이야기가 있지 않으신가요? 어쩌면 지금 그 곳을 걷고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주저앉아 있을 수도 있겠죠. 통곡하는 마음. 애타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오신 분들도 분명 있으실 것입니다.
하갈이요. 이스마엘에게서 조금 떨어져서 울기 시작해요.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해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요. 하나님의 반응이에요. 우리 함께 17절을 읽어볼까요?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아멘
먼지 호칭의 변화가 나타났어요. 창세기 16장에 처음 하갈이 집에서 나와 헤매며 울부짖을 때 하나님께서 그녀를 만나주셨습니다. 그때는 하갈을 “사라의 여종 하갈아”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사라의 여종”을 빼고 “하갈아”라고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큽니다. 브엘라 헤로이에서 하갈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는 ‘사라의 여종’이라 부르시며 그녀를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하지만 지금 찾아오신 하나님은 그녀를 아브라함의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을 것이며, 새로운 방법으로 너의 삶을 이끌어 갈 것이다! 라는 것을 의미하는 거에요.
그리고 지금 속이 상해서 울고 외치고 있는 것은 하갈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갈아 무슨 일이냐. 내가 너의 울음을 들었다.”라고 하지 않으세요. 하나님께서 하갈을 부르신 이유는요. 하갈의 그 통곡을 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소년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에요. 17절에 두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세요.
하나님께서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시게 된 계기가 하갈의 통곡이 아니라, 16절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관목 아래에 있었던 이스마엘이 그 죽음의 문턱에서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듣고 응답하신 것이죠.
하나님의 일하심은 늘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습니다. 하나님의 계획표는요. 우리가 감히 생각조차 못할 내용들로 가득 차 있어요. 지금 나의 모든 상황의 주도권을 내가 잡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주도권을 잡도록 잠시 허락해주신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착각을 하면서, 마치 내가 삶의 주인인 것 마냥, 이 어려운 시기를 내가 헤쳐나갈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잠시 용납해주신 것 뿐이에요.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힘들고 그 어려운 시기를 왜 내 힘으로 해결하려고 할까요. 담임목사님께서 송구영신예배 때 말씀하셨던 것처럼, 올 한해 아니 앞으로 더 많은 어려움과 힘든 일들이 우리에게 생길 거에요. 지금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처럼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들이 우리의 삶을 계속해서 가로 막을 것이란 말이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과는 별개로 우리의 삶은 큰 변화가 없는 것 같아요.
아브라함과 사라가 그랬어요. 하나님께서 약속은 하셨는데, 그것이 언제 이루어질지 정말 모르겠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종을 통해 아들을 낳았어요. 하나님의 일하심은 자연적 사건의 발생이 아니라, 초자연적 사건의 발생으로 나타나는 것이었는데, 아브라함과 사라가 그것을 막아버린 것이죠.
전형적인 우리의 모습이에요.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의 이 작은 사고 체계 안에 구겨 넣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일해주시기를 기대하고 기다려요. 사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인간이 생각하는 자연스러운 방법을 넘어서는 것인데 말이죠. 아브라함과 사라가 당시 가장 자연스러웠던 첩을 통해 아이를 낳는 방법을 택했듯이, 우리도 어떤 일이 삶에 나타나면요. 마치 아브라함이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던 것처럼 그런 자신만의 방법을 사용해요. 그래서 자꾸만 더 꼬여가고 힘들어져요.
하갈도 마찬가지에요. 자신이 원했던 상황이 아니었는데, 아들만 낳아주면 되는 것인줄 알았는데 상황이 계속 꼬여만 가요. 이제는 그 무리에서 나와야 해요. 그런 하갈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이제 그녀에게 직접 말씀하세요.
“두려워 하지 말라.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새로운 소망을 주셨어요. “하갈아. 더 이상 두려워 하지마! 가서 이스마엘을 일으켜! 그 손을 놓지마!! 내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해줄게!”
아무런 소망 없던 그녀와 이스마엘에게, 언제 죽을지 모르는 광야에 던져진 모자에게 하나님께서 새로운 꿈을 주셨어요. 그런데요. 새로운 꿈을 꾸고 소망을 가지게 되었는데요. 여전히 그녀와 이스마엘은 광야에 있어요. 뭐하나 바뀌지 않은 환경이에요. 하나님이 아무리 크고 멋진 계획을 들려주셨어도, 여전히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에요. 그럼 이 소망의 메시지가 그녀의 마음에 와 닿았을까요? 감동이 있었을까요?
저도 여러분들도 차마 다른 이에게 말하지 못하고 기도하는 그런 어려운 부분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은데, 하나님께서 “두려워 하지 마. 조금만 견뎌”라는 감동을 주셨어요. 순간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는 메시지는 될 수 있겠지만, 기도 후 눈을 뜨고 바라보면 바뀌지 않은 현실이 보이면요. 우리는 또 갈등하고 마음이 흔들려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요. 그냥 희망고문일 뿐이에요.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그런 보이지 않는,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은 허상과도 같은 것이에요.
세상의 권세 잡은 자는요. 우리에게 이렇게 다가와요. 우리의 마음 속에 헛된 희망만 잔뜩 불어넣어줘요. 조금만 견디면 상황이 호전될 것처럼, 얼마 지나지 않으면 모든 일들이 해결 될 것처럼 희망고문을 해요. 지난주일 담임목사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예기치 않은 문제와 갈등 앞에 금방 지쳐버리게 되는 것이에요.
하갈이 울고 통곡하는 그 자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브엘세바가 있었어요. 바로 앞에 있는 그 우물을 하갈은 보지 못했어요. 지쳐버렸기 때문이에요. 그 어떤 소망도 없었기에 시야가 좁아졌고,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죠. 하나님은요. 어떤 소망을 우리에게 주고 알아서 하라고 방관하지 않으세요. 그녀의 눈을 뜨게 해서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하갈의 눈을 뜨게 하셨어요. 샘으로 유명한 브엘세바 근처에 머물면서 우물을 찾지 못해 죽을 고비를 맞이했다가,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이제는 보게 된 것이죠.
그것을 본 하갈은 즉시 일어나 우물 물을 길어 가죽 부대에 채우고, 꼼짝도 못하고 누워있는 이스마엘에게 주어 마시게 했어요. 이제 하갈과 이스마엘의 인생은 변했어요. 20절을 함께 읽어볼까요?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서 거주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아멘
하나님이 이스마엘과 함께 하세요. 이스마엘이 하나님과 동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와 함께 하세요. 이스마엘과의 이 동행은요. 일시적인 짧은 순간이 아니에요. 그가 성장하는 동안 지키고 보호하는 지속의 동행이에요.
그리고 집을 나왔음에도 아브라함의 집 근처를 떠돌던 두 사람이요. 그 반경을 벗어나 바란 광야로 이주했어요.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 이스마엘을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그 약속에 대한 희망을 갖고, 하나의 민족을 꿈꾸며 바란 광야로 이주한 것이죠.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는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살아보려고, 살아내려고 몸부림칩니다. 그런데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나를 자꾸 억누르고 작아지게 만듭니다. 작아지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제는 눈을 들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때입니다. 광야라는 곳은 정말 재미있는 곳입니다. 죽을 것같이 힘들지만, 또 행복한 곳이기도 합니다.
죄송합니다. 아직 어린 저에게도 여러 삶의 고비들이 있었습니다. 그 고비를 지날 때에는 정말 죽을 것 같이 힘들었고, 그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을 때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주신 사역의 자리를 포기하고 싶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요.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살아보려고, 싸워보려고 고개를 들고 일어서서 문제와 다시 부딪쳤을 때요. 저를 기다리고 계시던 하나님을 다시 만났습니다. 이스마엘과 동행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저와도 늘 동행하고 계셨던 것이죠. 그리고 지금 여러분과도 동행하고 계셔요.
나 혼자 걷는 광야는 지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공간이지만, 하나님과 함께 걸을 때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곳이 됩니다. 하나님과 함께 걷는 그 광야. 말만 들어도 기대 되지 않으신가요? 우리가 걷고 있는 개개인의 광야. 바로 그 곳이 우리의 피난처이고 회복되어지는 소망의 자리가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찬양의 가사입니다..
주님만 내 도움이 되시고, 주님만 내 빛이 되시는, 주님만 내 친구 되시는 그 광야
주께서 나를 사용하시려 나를 더 정결케 하시려 나를 택하여 보내신 그 곳 광야
성령이 내 영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곳 광야에 서있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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