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터면 예수님 모르고 살뻔 했다

요한복음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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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터면 예수님 모르고 살뻔 했다/예수님 사랑하면 우리는 영적인 눈이 열리고, 참된 평화,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서론]
최근에 장례식장을 갔다가 어떤 분에게 한권의 책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책 이름이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 했다’입니다.
재밌는 이름이죠?
제목만 들으면 대충 살라는 말처럼 들리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읽어보니 자기를 죽일만큼 아등바등 살지 말라는 의미였습니다.
우리가 관심있는 책들은 보통 이런 제목들입니다.
‘목표를 달성하는 비법’, ‘열정을 돈으로 바꿔라’, ‘하버드 열정은 잠들지 않는다’
제목만 들어도 뭔가 열심을 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나요?
우리는 과연 왜 그럴까요?
이 책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세상이 우리에게 열심, 열정을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열심이 없으면 그 사람을 불성실하다고 여깁니다.
또 열심이 없으면 각박한 세상에서 패배자가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열심히 산다고 모두 성공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열심도 내지 않으면 이정도도 못살 것 같은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아내가 최근에 자신의 SNS에 올린 피아니스트 김동혁 영상도 봤습니다.
그는 천재적 재능을 가지고 있는데도 300프로 연습해야 90프로 나온다고 말했습니다.
아내는 더 열심히 해야한다고 자신을 채찍질하려고 영상을 올린 것이었지만, 솔직히 저는 그 소리 들으니 숨이 꽉 막혔습니다.
여러분 중에 누군가는 김제동과 서장훈의 강의를 비교한 영상을 본적이 있을 것입니다.
김제동은 여러분이 열심히 살아도 실패자, 낙오자가 되는 것은 여러분 잘못이 아니다.
다 지도자들 잘못, 제도 잘못이다라고 말하며 청년들을 위로했습니다.
반면 서장훈은 더 철저히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더 충분히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라고 스스로를 채찍질을 하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과연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만 할까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말씀을 하실까요?
[본론]
오늘 말씀에도 열정, 열심 만땅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꾸 떠난다고 하니까 걱정과 두려움에 휩싸여 있습니다.
“3년을 모두 버리고 예수님을 좇아다녔는데 갑자기 우리들을 떠나신다고요?
예수님에게 제 인생을 걸었는데 지금와서 우릴 두고 떠나신다고요?”
그들의 속마음이 이랬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열정과 열심이 실패할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한명, 두명, 세명, 네명이나 예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수석제자 베드로가 질문하고, 도마가 질문하고, 빌립이 질문합니다.
이번에는 가룟유다가 아닌 또다른 유다가 질문합니다.
예수님의 유언과 같은 말씀을 도저히 이해할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솔직히 받아들일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번 유다의 질문을 볼까요?
22절입니다.
“주님, 주님께서 우리에게는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려고 하지 않으시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왜 이런 질문을 했을까요?
앞에 나온 17절, 19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먼저, 17절입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므로, 그를 맞아들일 수가 없다.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안다. 그것은 그가 너희와 함께 계시고, 또 너희 안에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는 성령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은 성령을 보지도 알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또다른 구절인 19절입니다.
“조금있으면 세상이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날테지만 세상은 예수님을 다시 보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유다는 이같은 질문을 한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는 드러내시면서,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는 것일까요?
첫번째, 예수님을 사랑하면 영적인 눈이 열립니다.
23절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리하면 내 아버지께서 그 사람을 사랑하실 것이요, 내 아버지와 나는 그 사람에게로 가서 그 사람과 함께 살 것이다.”
유다는 왜 세상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시냐고 물었는데 예수님의 대답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라고 하십니다.
마치 동문서답처럼 들립니다.
예수님의 답변이 어떤 의미인지 알려면 우리는 먼저 유다의 질문이 담고 있는 의도를 파악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의 열정과 열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인생 전부를 걸었습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로마의 지배로부터 구원할 메시아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들은 메시아로서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고, 물 위를 걸으시고, 죽었던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모습을 보며 엄청난 분이구나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메시아 예수님이 힘과 능력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시기를 바랬습니다.
자신들의 열심과 열정이 성공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혁명을 지도할 예수님이 떠나신다고 하니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왜곡된 기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들에게 하신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욕망이 그들의 영적인 눈과 귀를 가린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답변의 의미는 이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떠나더라도 예수님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감정적인 반응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럴 때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이 그 사람에게 가서 그 사람과 함께 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떠나시지만 예수님을 사랑하면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십니다.
그 성령, 거룩한 영이 거하시는 우리의 몸이 곧 성전이 되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이 거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계셨던 곳이 성막, 성전이었다면 그 성막, 성전이 이제는 믿는 우리들의 마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언제든지 주님을 만날 수 있고, 언제든지 주님께 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도 않을 뿐더러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도 않기 때문에 하나님도, 예수님도, 성령도 만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보여주면 예수님을 믿겠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반대입니다.
믿으면 보이는 법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랑하면 보이는 것입니다.
한 연예프로그램을 보니까 처음에는 남자들이 예쁜 여자에게 몰빵합니다.
제가 보기에 남자의 여자 선택 기준은 99.9프로 외모인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절망하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선택이 중간에 바뀌는 남자들이 있습니다.
외모에 가려졌던 시야가 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고나면 이제 다른 모습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여성들의 진면목을 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외모만 마음에 둔 남자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합니다.
이처럼 자신의 욕망이 영적인 눈을 가린 사람은 예수님을 제대로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사람은 예수님을 더 깊이 만나게 됩니다.
교회다니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지만 왜 그들의 삶은 변화되지 않을까요?
말로만 또는 마음으로만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아내한테 표현은 하지 않으면서 말로만 사랑한다고 말하는 저같은 남편들과 같은 것이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표현되어야만 합니다.
그 분의 말씀을 순종하고 지키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정말로 사랑해야 우리의 눈이 열립니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거듭났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을까요?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의 영적인 눈이 열려 주님을 더 깊이 만나게 되며, 놀라운 선물이 주어집니다.
그 선물이 무엇일까요?
바로 참된 평화입니다.
두번째, 예수님을 사랑하면 참된 평화를 얻습니다.
27절입니다.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
먼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시려는 평화란 무엇일까요?
평화가 무엇이길래 예수님은 내가 떠나더라도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것일까요?
평화는 히브리어로 ‘샬롬’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평화란 부족함이 없는 온전한 상태를 말합니다.
생명이 풍성하고, 창조 질서와 모든 관계가 회복된 복된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나와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가 회복된 상태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통해 주시고자 하는 복이 바로 이 ‘평화’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이 주는 평화와 자신이 주는 평화가 다르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란 무엇일까요?
세상은 힘과 능력을 통해 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게 그 당시 로마가 지향하던 ‘팍스 로마나’였습니다.
강자가 힘과 능력으로 만든 인위적인 평화의 상태를 말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로마가 너무 강해 아무도 못 건드리는 상태인 것이죠.
세상이 지금 누리는 평화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핵무기같은 강력한 무기를 보유하여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을 평화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러시아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듯 이 평화는 언제든지 깨질 수 있는 평화입니다.
나라들 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돈과 권력을 소유함으로 힘과 능력을 얻으려 합니다.
그것을 통해 안정감, 즉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믿는 이유도 이런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 입니다.
이러한 평화를 우리는 행복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렇게 세상이 우리에게 열심과 열정을 요구하는 것도 이런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우리를 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평화는 일시적 평화이며 거짓 평화입니다.
언제든지 흔들릴 수 있고, 빼앗길 수 있는 평화입니다.
그렇게 돈많고 영향력있는 사람들이 불면증때문에 프로포폴 맞고 때로는 자살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성경공부 시간에도 배웠지만, 이런 것들은 우리 인생에 어느 정도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것들을 절제할 능력이 없으며, 추구하면 추구할 수록 결국 평화와는 더 멀어집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참된 평화를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는 다릅니다.
영원한 평화이며,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평화입니다.
세상은 힘과 능력을 통해 평화를 얻으라고 우리를 속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과 희생을 통해 우리에게 참된 평화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세상에 보여주신 평화의 방법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참된 평화를 얻게 된 것입니다.
이 평화는 어느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영원한 평화입니다.
26절입니다.
그러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보혜사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에 제자들을 진리가운데 인도하십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참된 평화라는 사실을 제자들이 깨우쳐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자신들 곁을 떠나셨지만 인생의 진리가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그들은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자신들이 생각하던 메시아로 알 던 때에는 근심하고 두려워했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목격하고 난 후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 됩니다.
그들은 목숨까지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하고 도망쳤던 베드로는 이제 겁없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감옥에까지 갇히게 되었지만 그는 결코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곧 사형당할 처지였지만 감옥에서 잠까지 쿨쿨 잘 정도로 평안했습니다.
왜 일까요?
예수님은 떠나셨지만 성령이 그들의 위로자, 격려자가 되셔서 고난가운데서도 평화를 누리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4장 6,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으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리하면 사랑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사랑하면 주어지는 선물은 평화만이 아닙니다.
세번째, 예수님을 사랑하면 참된 자유를 얻습니다.
30,31절입니다.
나는 너희와 더이상 말을 많이 하지 않겠다. 이 세상의 통치자가 가까이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를 어떻게 할 아무런 권한이 없다. 다만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내게 분부하신 그대로 내가 행한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려는 것이다. 일어나거나. 여기에서 떠나자.
여기서 세상 통치자란 1차적으로 예수님을 잡으러 오는 종교지도자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사탄을 의미합니다.
사탄이 종교지도자들을 조정해서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들에게 잡히신 것은 사탄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충분히 사탄의 계획을 무너뜨리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지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셨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사탄의 계략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략이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이는 것이 자신의 성공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탄의 뼈아픈 실책이었습니다.
사탄의 뒤통수를 후려친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은 사탄이 알수 없었던 하나님의 숨겨진 비밀계획이셨던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겪는 고통과 고난이 사탄의 계획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자 사랑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께 붙어있는 한, 사탄이 우리를 조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표 안에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요셉을 보십시오.
그만큼 인생이 꼬인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형들에게 미움받아 노예로 팔려갔고, 감옥에까지 끌려갔습니다.
세상은 그를 실패자, 낙오자라고 불렀지만 하나님은 그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모든 고통과 고난, 실패는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나중에서야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세상이 우리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 기준으로 평가되지 않고 하나님의 기준으로 평가받기 때문입니다.
세상 스케줄대로 살아가지 않고 하나님의 스케줄대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뻔했다’는 책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우리 사회엔 ‘이 나이’면 ‘이 정도’는 하고 살아야 한다는 ‘인생 메뉴얼’이라는 게 존재한다. 실제로 그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모두가 그걸 알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맞춰 살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불안하니까. 나만 뒤처지는 것 같으니까.
나는 이 나이에 결혼도 안 하고, 월세에 살고, 자동차가 없지만 불편하거나 비참하지 않다. 문제는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본다는 것이다. 정작 나는 괜찮은데 사람들이 나를 불쌍하게, 한심하게 보니 나 좀 비참해지려고 한다. 아니 확실히 비참하다. 원래는 비참하지 않았는데 남들이 그렇다니 좀 그렇다. 이게 이 책 저자의 고백입니다.
우리들의 고백은 아닐까요?
저는 저의 고백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세상의 기준에서 자유하십시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자유하십시오.
아니 예수님을 사랑할수록 자유해질 것입니다.
괜히 여러분 위로하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정해놓은 인생 메뉴얼대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성경 메뉴얼이 더 중요하고, 하나님의 스케줄이 더 중요합니다.
[결론]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말씀에 순종해야만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주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우리의 영적인 눈이 열어져 인생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고,
주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우리 인생의 참된 평화를 얻을 수 있고,
주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우리 인생의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내 삶에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입니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뻔 했다’책 제목을 저는 이렇게 바꾸고 싶습니다.
‘하마터면 예수님 모르고 살뻔 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예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번 한주간 예수님을 더 깊이 사랑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할 일은 무엇일까요?
주님을 더 깊이 사랑하는 한주가 되시길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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