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서가 없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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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질서가 없는 건가?
본문 : 욥기 42:1-9
1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2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7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8 그런즉 너희는 수소 일곱과 숫양 일곱을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가 우매한 만큼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라
9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1. 욥은 자기가 왜 고통을 당하는지 몰랐습니다.
크게 잘못한 게 없었거든요.
급기야, 나는 죄가 없다. 나는 죄가 없는데, 하나님이 억울하게 나를 힘들게 한 것이다.
이런 말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힘든 일이 있습니다.
사는 게 힘들고 그렇습니다.
타락 이후로 인간은 악합니다.
다른 사람도 악하지만, 나 자신도 악합니다.
트라우마 라는 말이 있죠.
근데 나 자신도 문제입니다.
좋은 일에 대해서는 왜 오래도록 기억하지 못합니까?
죄인이라서 그런 것입니다.
나쁜 일에 대해서는 상처다, 트라우마다, 라면서 오랫동안 기억하는데,
왜 좋은 일에 대해서는 은혜다, 감사다, 행복이다, 라고 하면서 오랫동안 기억하지 못합니까?
그래서요.
우리는 다 죄인들입니다.
단 한 사람도 죄 없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꿈을 위해서 기도하는데요.
여러분의 꿈이 다 이루어지면, 정말로 행복한 세상이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꿈이 다른 사람을 살리는 꿈이 아니라면, 행복한 세상이 되지 못합니다.
북한의 김정은은 한반도의 적화통일, 그러니까 공산주의로 북한과 남한 전체를 통일시키는 것이 꿈입니다.
미제를 몰아내고요.
그게 김정은의 꿈이죠.
그 꿈이 이루어지면 행복해집니까?
마음으로부터 거듭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죄를 깨닫고,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내 안의 죄의 뿌리를 뽑아내지 못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해요. 예수님께 순종하는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총을 잘 쏘는 게 꿈인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총을 잘 쏠 거야. 나는 가장 뛰어난 저격수가 될 거야.
이 꿈 자체는 좋아 보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그것은 이 사람이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총을 쏘느냐 하는 것입니다.
가장 뛰어난 그 실력으로 누구를 위해 사용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실력이 누구를 위해 사용되어야 할까? 누구를 위해 이 공부가 필요할까? 그 고민을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2. 욥이 만난 세 명의 친구들은 지혜자들입니다.
똑똑한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이 세 사람을 책망하십니다.
니네들 틀렸다. 니네들 말이 잘못되었다. 라고 하시면서 화를 내세요.
7절을 읽어봅니다.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니네 말이 틀렸다.
니네들은 똑똑하고, 그래서 지혜롭다고 생각해서, 욥의 아픔과 고난에 대해서 너무 쉽게 말했다.
함부로 말했다.
그런데 그 똑똑한 지혜가 맞는 말이 아니다.
너희들은 알지도 못하고, 욥을 말로 괴롭혔다.
그래서 내가 너희들한테 화가 났다.
여러분, 여러분의 말이 상대방을 살리는 말이어야 합니다.
상대방을 죽이고, 절망하게 하고, 무너지게 하는 말이 아니어야 합니다.
말을 함부로 한다는 것은, 아직 말을 통해 당하는 고통을 겪어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내가 옳고, 내가 하는 말이 맞고, 이런 것에 집착한다면, 아직도 말이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파괴력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10대 때는 더 그래요.
아무 생각 없이 말합니다.
여러분 친구들이, 너무 쉽게 여러분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기 쉽습니다.
여러분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겪어보지도 않았으면서, 함부로 평가하고 정답을 말하기 쉽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그냥 신경쓰지 마세요. 여러분 인생은 하나님이 가장 잘 아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한테, ‘너 잘못 되었다. 너 틀렸다.’라고 말하지 않는 이상, 여러분 인생에 대해서 스스로 깎아내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의 말에 휘둘립니까? 평소에 여러분이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사람을 두려워하라고 말한 구절이 없어요.
하나님 경외하라. 경외하라는 말은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의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성적 좀 안 좋으면 휘청, 친구들이 이런 말, 저런 말 하면 휘청거리는 게 우리지만,
그래도 좀 덜 흔들리고 싶으시면, 반드시 성경을 읽고, 말씀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훈련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3.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정확했습니다.
하나님은 욥이 참 온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라고 평가하였고, 사탄은 욥이 잘 사니까 그렇게 신앙생활 잘하는 거라고 비판했는데,
결국 누가 이겼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이겼죠?
하나님의 평가가 옳았죠?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가장 잘 아시고, 가장 잘 이해하시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 고난도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단순히 욥을 회복시키시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야말로 진짜 세상의 통치자라는 것을 알리십니다.
욥이 아무리 고난과 아픔 가운데서, 이해못할 고통을 겪고 산다고 할지라도,
그때도 하나님은 땅과 하늘을 다스리시고,
해와 달과 별을 다스리시고,
자연세계에 비와 구름, 서리를 내리게 하시며,
하늘과 우주를 운행하시며,
동물들에게 지혜를 주어서, 먹을 것을 먹게 하며,
동물들에게 새끼를 낳고 번성케 하도록 도우시며,
또한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악한 자들을 짓밟으시며,
강력한 베헤못과 리워야단과 같은 피조물들도 통제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욥이 고통 당하고 힘든 상황 가운데에서,
욥은 자신이 아픈 이유, 고통 당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 못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은 그 시간에도, 모든 피조세계를 질서 있게 다스리시며, 성실하게 일하고 계신다는 거죠.
욥이 죄가 많아서,
욥이 무언가를 잘못해서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4. 말씀의 결론입니다.
욥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잠을 자고 있거나, 친구 만나러 놀러 갔거나, 어디 떠나고 여행가셔서 당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실하게 일하고 계셨습니다.
세상을 다스리고 계셨습니다.
욥이 세 친구들에게 억울하게 당하는 모습도 다 아셨습니다.
다 아시는데도 신적 섭리에 의해서, 욥이 고난 당하는 것을 허락하셨다는 거죠.
여러분, 세상에는 이해하지 못할 고통이 참 많습니다.
가장 이해하지 못할 고통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죠.
하나님이 모르시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때도 하나님은 성실하게 일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억울하게 당하도록 허용하셨습니다.
다 아시는데도 고난을 허락하신 거죠.
심지어는 겟세마네 기도처에서, 하나님 피하게 해달라고, 십자가지지 않게 해달라고, 피가 흐르도록 기도했던 예수님의 기도도 들으셨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예수님이 십자가 지기를 바라셨고, 예수님은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이 잠을 자고 계셨습니까?
친구 만나러 놀러 가셨습니까?
어디 여행 가셨습니까?
아니요.
하나님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통 가운데서도 성실하게 일하고 계셨습니다.
여러분이 당하는 고난은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고난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몰라서,
여러분에게 관심 없어서,
어디 다른 데 놀러가서 고난을 허락하신 게 아닙니다.
반드시 선을 이루게 되는 고난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고난을 기쁨으로 견디십시오.
알지 못하는 그 하나님의 계획을 믿고 기다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차차 보여주십니다.
그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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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2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7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8 그런즉 너희는 수소 일곱과 숫양 일곱을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가 우매한 만큼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라
9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내용 구조
1 욥이 여호와께 대답함
A 2 주는 전능하시다
A’ 3 나는 무능하다
B 4 그러므로 주님은 나의 질문을 듣고 깨닫게 해 주십시오
B’ 5 지금까지 주님을 소문으로 들었는데, 지금은 눈으로 주를 보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C 6 그렇기 때문에 나는 싫어할 것이고, 나는 위안을 받을 것입니다
7 여호와께서 엘리바스에게 말씀하심
A 내가 너(엘리바스)와 네 두 친구(빌닷, 소발)에게 화가 났다.
B 너희가 나에 대하여 한 말이 서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8 그러므로 너희는 번제를 드리라
C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이다
A’ 내가 욥을 기쁘게 받을 것이다
C’ 너희의 어리석음 대로 갚지는 않겠다
B 너희가 나에 대하여 한 말이 서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9 그러자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하였다
A’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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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다’ : 동침하다, 알다, 깨닫다
2, 3, 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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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의 가장 핵심적 이슈는 ‘왜 죄 없는 자가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 ’다.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다. 그런데 욥은 바로 자신의 그런 순전함 때문에 엄청난 고난을 당하게 된다. 더욱이 욥기 서론은 욥이 당한 고난이 다름 아닌 하늘에서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이루어진 거래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정의롭고 솔직한 지적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대목에서 심각한 문제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탄에게 욥을 시험하고 공격할 수 있는 권한을 허락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그 시험의 범위와 한계를 정해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사실 사탄은 독자적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비록 하나님께서 욥의 고난을 ‘허용’하셨지만 그럼에도 욥이 받은 고난의 직접적인 원인은 사탄의 비뚤어진 시기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 고난의 직접적인 근원자가 된다는 어떤 철학자들의 주장은 성경적으로 근거를 잃는다.
하나님은 고난과 악을 일소하는 대신에 그것을 허용하고, 그것과 씨름하며 대결하기로 결정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비로운 의지와 지혜에 따른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 및 악과 직접 대결하고 씨름하는 주체로 자신이 아닌,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지정하신 한 인간을 내세우셨다. 욥은 그 일을 위해 부름 받은 인물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두 가지 모험을 감행하신다. 첫째는 악과 고난을 허용하시는 것이며(자유의 필연적 결과로),둘째는 하나님 자신의 명예와 자존심을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에게 위탁하시고 의존하시는 것이다. 만일 욥이 시험에서 승리한다면 하나님의 결정이 옳음이 입증될 것이다. 그러나 욥이 패배한다면 그것은 바로 (논리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패배 혹은 실패로 연결될 것이다. 따라서 욥의 시험을 둘러싼 싸움은 욥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매우 중요했다.
엘리바스는 ‘자기 고양적 경건주의자’ 유형의 인물이다. 그는 욥을 위로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욥을 가르치고 야단친다.
빌닷은 기계적 교리주의자’ 유형의 인물이다. 그는 문자주의에 빠져 기계적으로 상대를 재단하고 판단한다.
소발은 빌닷을 논리적으로 그레이드한 인물이다. 그는 기계적 문자주의를 세련된 정통주의로 만든다.
욥의 친구들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데서 머물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 인과응보의 세계관을 갖고 욥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그들은 위로를 가장하여 상대의 인격을 벼 팔 뿐더러 상대의 존재의 기반을 폭파시킨다.
심지어 욥의 친구들은 ‘기계적 인과응보의 상자’ 안에 하나님마저 가둬놓고 하나님을 인간의 논리와 법칙대로 행동하시도록 강요한다. 그들의 이런 태도는 스스로 창조주의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인간 심리(교만)의 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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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하나님은 이 긴 연설을 통해서 욥이 지니고 있던 질문, 곧 ‘왜 무죄한 자에게 고난이 일어나는가? ’ 하는 문제에 대해 일절 답을 주시지 않는다. 대신에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무려 70개의 질문세례를 퍼부으신다. 이로써 고난의 문제는 여전히 ‘열린 질문’, 곧 ‘신비’로 남는다. 하
지만 하나님의 현현을 직접 목격한 욥은 자신의 무지와 오만을 회개하며, 하나님께서는 그런 욥의 고난을 마침내 치유하신다.
① 하나님께서 폭풍 가운데 나타나셔서 욥의 ‘무지’와 ‘오만’(자기 의) 을 꾸짖으셨다. 욥이 제아무리 의롭고 지혜롭다 한들 그것은 한낱 피조물의 지혜와 의에 불과하다.
② 하나님께서는 욥이 피조물이라는 사실과, 피조물의 지혜와 의가 지닌 유한성을 깨우치시기 위해 ‘창조의 영광과 지혜와 능력’을 일일이 나열하셨다.
③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영광과 권능과 신비를 통해 이 세계에는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도무지 알 수 없는 신비한 영역이 있음을 분명히 하셨다. 그것은 인간에게는 닫혀 있는 세계다.
④ 고난의 신비는 하나님의 무한한 세계에 속한 문제다. 욥이 당한 고난은 하나님의 세계에서 결정된 것으로서 땅의 지혜를 갖고는 도저히 알 수 없다.
⑤ 그럼으로 하나님께서는 사실상 욥과 그의 친구들이 자신들의 의와 지혜(인간의 신학) 를 가지고 하나님을 그 안에 가둔 채 해부(인수분해) 하려 했던 오만을 통렬하게 꾸짖으시며, 피조물인 인간이 자신의 제한된 세계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신비한 세계로 믿음의 도약을 감행할 때에만 거기에 진정한 신앙의 세계가 펼쳐질 수 있음을 암시하신다.
⑥ 사실상, 욥이 받은 고난도 하나님께서 허용하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처럼, 욥이 받은 복도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이었다. 욥의 복과 고난 모두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의해 주어진 것이었다.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는 인간의 인과응보의 논리를 뛰어넘는다.
욥의 회개와 고난의 치유
① 하나님께 꾸지람을 받은 욥은 그제야 자신의 무지와 오만을 회개한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을 다 듣고 계셨음을 알고 난 후 고난 중에도 하나님이 자신의 곁에 계셨다는 사실에 큰 위로를 받는다.
② 하나님은 욥에게 다시 일곱 아들과 세 딸을 주시고, 재산은 두 배로 회복시켜주셨다.
③ 그러나 하나님은 끝내 욥이 당한 고난의 원인에 대해서, 하늘에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이 없으셨다. 하나님은 다만 자신을 욥에 게 보여주셨을 뿐이며, 그리고 이를 통해
욥의 고난을 치유하셨을 뿐이다. 이로써 고난의 문제는 여전히 신비로 남는다.
세계관들은 왜 고통의 문제를 다루는가?
고통의 문제는 모든 종교와 세계관이 심각하게 다루는 문제다. 모든 종교와 세계관의 공통점은 “이 세상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전제한다는 것이다. 즉 이 세상은 이상적인 상태가 아니며 인간에게 고통을 가져다주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고통스러운 상태가 존재하는 이유와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결책은 종교나 세계관마다 다르다. 어떤 종교에서 고통의 문제는 그 종교가 지닌 문제의식의 출발점이자 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기독교처럼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궁극척인 목표가 아닌 종교도 고통의 문제를 심각하게 다룬다. 기독교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궁극적인 문제의식이지만 고통의 문제를 결코 가볍게 다루지 않는다. 타락한 인간이 처한 상황은 고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