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2)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27 views
Notes
Transcript
갈라디아서 강해(23)
갈라디아서 4장 25-31절
지난 시간 바울이 하갈과 사라를 비유로 사용해서 여종과 자유 있는 여자, 육체를 따라 태어난 아들과 약속을 따라 태어난 아들이라는 대조로 성경의 가르침을 설명하는 것을 살폈습니다. 우리를 종노릇 하게 만드는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욕심과 노력을 따라서 벌어지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은 25절부터 계속해서 하갈과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을 연결하고, 동시에 하갈과 예루살렘을 연결해서 설명을 이어갑니다. 즉, 바울은 종이라는 하갈의 상태가 시내산에서 받은 언약 앞에서의 이스라엘의 모습과 연결되고, 지금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인들의 모습과 연결된다고 본 것입니다. 핵심은 하갈이 종이었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약시대나 지금이나 율법 아래에서 종노릇 한다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여종인 하갈을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이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고,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왔는데,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여전히 아라비아에 있는 것처럼 표현한 것입니다.
분명 지도상으로 예루살렘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진정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여전히 아라비아 광야에서 자유를 얻지 못하고, 종노릇 하면서 헤매고 있다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인 가나안은 안식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에 매여서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전히 광야에서 헤매면서 종노릇 하고 안식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산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노릇 하고”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하갈을 시내산과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라고 설명했고, 그가 그 자녀들과 함께 종노릇 한다고 말을 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들입니다. 이들은 육신적으로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자손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을 하갈의 자녀로 설명합니다. 즉, 육신적으로는 사라의 자손이겠지만, 영적으로는 하갈의 자녀가 되어 함께 종노릇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5절에서 예루살렘이 언급되었는데, 26절에서도 예루살렘이 나옵니다. 그런데 26절에서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라고 부릅니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이고 우리 어머니라고 설명을 하는데, 이것은 25절의 예루살렘과 대조가 됩니다.
위에 있다는 말은 하늘에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즉, 바울은 땅에 있는 예루살렘과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을 대조해서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갑자기 예루살렘을 향해서 우리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거짓 선생이 예루살렘을 우리의 어머니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거짓 선생은 율법을 중심으로 예루살렘이 자신들의 어머니라고 말하지만, 바울은 언약을 중심으로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이 우리의 어머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구약에서 예루살렘에 대해 선지자들은 죄악되고 부패하고 타락하고 우상숭배를 하는 장소로 하나님의 진노가 내려질 것을 말했습니다. 동시에 선지자들은 또 다른 예루살렘을 말하면서 그곳은 은혜와 사랑이 넘치고 하나님의 공의가 다스리는 곳으로 설명했습니다.
또 다른 예루살렘은 이전의 타락한 예루살렘을 무너뜨리고 새로이 가져오는 예루살렘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바울이 없던 개념을 만들었던 것이 아니라, 이미 성경에서 사용되던 개념을 사용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들을 사용해서 바울은 지상의 예루살렘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정한 나라인 하늘의 예루살렘을 말했고, 참된 하나님의 백성은 지상의 예루살렘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의 예루살렘에 속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주려는 것입니다.
사라가 이삭을 잉태해서 낳을 수 있었던 것은 성령님의 은혜이고 능력입니다. 마찬가지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 것도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점을 연결해서 자유자인 사라가 성령의 은혜로 언약 백성을 낳은 것처럼 성령의 은혜로 믿음을 갖고 구원을 받은 우리가 사라의 자녀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27절에서 이사야 54장 1절 말씀을 인용합니다. 여기에서 잉태하지 못한 자와 남편 있는 자는 사라와 하갈을 적용해서 바울이 설명하는 것입니다. 잉태하지 못한 자는 사라가 잉태하지 못했었던 일들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남편 있는 자라는 말은 남편을 가진 자라는 의미로, 잠자리를 가졌다는 의미도 됩니다.
바울이 인용한 말씀의 원래 의미는 이스라엘이 포로로 끌려가서 아이가 없는 여인과 같은 처지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포로로 끌려가서 보호자인 남편도 없이 지내는 처지가 됩니다. 단지 남편이 없는 것이 아니라, 버림받은 아내로 묘사가 됩니다.
그런데 이사야 54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남편이 되어 주시고, 이스라엘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신다는 말씀이 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버림받은 아내의 처지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시고, 이스라엘을 다시 아름다운 도성으로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처지는 자식이 없는 처지이고, 남편에게 버림을 받았고, 수치를 당하고 부끄러움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을 향해서 하나님이 친히 남편이 되어 주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시고, 하나님의 자비가 내려서 절대 떠나지 않도록 해주신다고 약속하며, 그것을 화평의 언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런 이스라엘의 상황이 사라의 삶과 비교가 됩니다.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자신에게 아들이 있을 것을 기대했었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 약속에 대한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그래서 하갈을 통해서 아들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그 아들은 약속의 아들이 아니었고, 사라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놀라운 능력으로 사라가 잉태하게 하셨고, 이삭을 낳게 하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사야가 기록한 이스라엘은 아들을 얻지 못한 사라처럼 약속에 대한 소망이 사라지고, 절망과 슬픔과 수치와 부끄러움만 남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죽음의 끝자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주시고 다시 세워주셨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서 하신 화평의 언약이 성취된 것을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라고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율법 아래에 갇혀서 죄의 종이 되었지만, 택하신 백성들은 화평의 언약 안에서 믿음으로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참된 자유와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28절에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이삭과 같은 약속의 자녀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사실 유대인의 입장에서 이삭의 자손은 자신들이고, 이방인은 이스마엘의 자손과 같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성령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된 모든 신자가 이삭과 같은 약속의 자녀이고, 자유자인 사라의 진정한 자녀라고 보는 겁니다.
이삭이 태어난 후에 이스마엘이 이삭을 괴롭히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사건을 연결해서 이스마엘이 이삭을 박해한 것처럼, 육체로 난 자인 여종의 자녀들이 성령을 따라 난 자인 자유자의 자녀들을 박해한다고 말합니다.
갈라디아에 와서 할례와 율법을 지키라고 가르친 거짓 선생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하겠지만, 바울은 거짓 선생들과 같이 율법을 주장하는 자들을 어린 이삭을 희롱하며 박해했던 이스마엘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육체를 따라 난 자들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합니다. 언약과 상관이 없는 자들은 언약의 자녀를 박해합니다. 이러한 개념은 구약성경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일들이고, 바울은 그런 개념을 사용해서, 성령으로 난 갈라디아 성도들을 박해하고, 괴롭게 만드는 거짓 선생들을 언약이 아닌 육체를 따라 난 자들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한 사건으로 인해서 결국 이스마엘과 하갈은 쫓겨나게 됩니다. 이스마엘이 하는 행동은 사라를 자극했고, 사라는 이스마엘이 이삭의 위치를 위협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스마엘과 하갈을 내보내게 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진정한 자손은 이삭이고, 아브라함의 복을 이어받는 것도 이삭과 이삭의 후손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계속 함께 살아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유업을 잇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30절의 말씀에서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는 말씀을 바울이 그대로 사용해서 모든 교회에서 여종과 그 아들, 즉 육체로 난 자들인 율법주의자들을 내쫓으라는 식으로 이해가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구약의 말씀을 인용했지만, 똑같이 거짓 선생이나 율법주의자들을 교회에서 내쫓으라고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 표현은 충분히 그렇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렇게 해야 할 필요가 있기도 합니다. 교회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면서 교회에 거짓 복음을 퍼뜨리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에게 계속해서 자비를 베풀 수는 없습니다.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는 거짓된 가르침을 전파하지 못하도록 입을 막고, 더 심할 때는 쫓아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갈라디아 사람 중에는 율법에 종노릇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을 다 내쫓으라는 식으로 이해된다면, 갈라디아 교회에 남게 될 사람이 얼마 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내쫓아내고 교회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에서 쫓겨나고 교회를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함께 유업을 얻지 못한다고 30절 중간 이후로 언급했습니다. 이것은 여종의 아들을 내쫓으라는 의미가 아니라, 여종의 아들처럼 율법에 매여 있으면, 유업을 받지 못하니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처럼 약속의 자녀가 되어서 아브라함의 복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즉, 내쫓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참된 길로 되돌아오고 복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다시 한번 강조하며 자신들의 위치가 무엇인지를 말해줍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에서 갈라디아 사람들을 향해서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 성령으로 시작,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라는 표현을 말하면서 갈라디아 사람들이 분명 약속 안에서 은혜를 받았음을 언급했습니다.
이런 말씀들을 보면, 갈라디아 성도들은 육체로 난 자들이 아니라, 성령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입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은 땅에 있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에 속한 자들입니다. 하늘 영광에 속해서 복을 누리는 사람들이, 땅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떨어지고자 노력한다는 것은 올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부모가 신자이기 때문에 자녀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집사나 목사나 장로는 직분을 맡은 자니까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그것도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직분이 구원의 확신을 알려주는 증거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신자여도 자녀는 육체로 태어난 하갈의 아들과 같을 수 있습니다. 직분자여도 육체에 속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부모가 목사이기 때문에 자녀는 자연스럽게 구원을 받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누가 되었든, 부모가 누구든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성취될 때 가능한 일입니다.
즉, 직분자여도, 부모가 대단한 성도거나, 대단한 사람이어도, 교회를 다닌 지 수십 년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는 이상 누구도 육체로 태어난 사람이라는 현실을 바꿀 수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모두가 육체로 태어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본성적으로도 율법주의자처럼 육체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고, 육체로 이뤄보려고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육체로 태어난 사람이어도, 성령님을 통해서 거듭 태어난다면, 그는 육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태어난 약속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면,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약속으로 불러주시고, 거듭나게 하셔서 그리스도의 종이 되게 하신 삼위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성도의 어머니를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라고 말하는 것은 종말론적인 의미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땅에 있는 예루살렘에 속한 자들은 여전히 과거의 잘못된 생각을 따라서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고 착각하면서 종노릇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위에 있는 예루살렘에 속한 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자유를 누리면서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됩니다.
물론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어도, 죄와 여전히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죄의 지배는 이미 성도들에게서 끊어졌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와 자유만이 확실히 보장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확실히 보장된 자유가 있는데, 그것을 버리고 종노릇 하는 자리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분명 잘못된 선택입니다. 종의 멍에를 메지 말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자유를 누리며,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모습입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은 분명히 성령으로 난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육체를 따라 난 자들처럼 율법의 행위로 되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전의 잘못된 모습 또는 믿음에서 벗어나 성령으로 은혜 안에 들어왔다가도, 다시금 과거 잘못된 모습이나, 헛된 믿음, 이상한 신앙으로 되돌아가려는 모습들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의 상태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항상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고, 살피며, 온전함에 이르기를 더욱 소망하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주 작은 유혹에도 우리는 넘어가서 잘못된 길로 되돌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짧게 언급된 내용이지만, 우리 신자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주제가 있습니다. 참된 하나님의 백성은 박해를 당해왔습니다. 여기에서 박해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기에 받는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받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때문에 받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도 항상 참된 성도들은 박해를 당해왔습니다. 반대로 박해를 하는 쪽은 세상에 속한 자들이거나, 거짓 종교에 빠진 자들이었습니다. 필 라이큰 목사는 자신의 설교집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신앙심이 깊다고 하는 사람이 소수자들을 압제하고 유대인들을 미워하고 동성애자들을 공격하는 자세를 보일 때마다 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그 일을 할지라도 참 기독교를 나타내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다. 조만간 그들은 또한 참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할 것이다.”
신앙의 이름으로 자신의 믿음과 반대되는 것을 혐오하거나 박해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잘못된 신앙을 거절하고, 왜곡된 가르침을 미워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분노를 거쳐서 폭력으로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모습은 불법에 대한 폭력이 아니라, 불법에 의한 박해이고 박해를 받는 것은 성도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 불법이 자리하고, 불법이 우리의 믿음을 위협할 때, 그것을 폭력으로 마주하지 말고, 우리는 박해를 대비하는 것이 옳습니다.
물론 가만히 앉아서 당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불법에 대해서 시민으로써 저항하기도 하고, 입법활동이나, 사회운동에 동참하기도 하면서 바른길로 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노력들이 열매를 맺지 못하고, 불법이 우리를 위협할 때, 도망치던지 아니면 박해받을 것을 준비하는 것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선택입니다.
우리가 언약의 백성이라면, 언약의 말씀인 성경의 가르침으로 인해서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불법이 지배하는 세상은 언약 백성을 그대로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박해를 받는 것을 기뻐하십시오. 하늘의 상이 큽니다.
하지만 박해를 하는 자리에 우리가 서 있지는 않은지, 항상 주의하며 자신을 살피도록 하십시오. 성경의 가르침에 죄라고 말하는 것을 하는 사람이 있어도, 우리가 심판하고 박해할 권한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을 향해 죄가 있음을 알려주고, 회개할 것을 요구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그 이상으로 넘어가서 폭력을 행사하며, 누군가를 박해하는 것은 교회가 보이는 모습이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육체로 태어난 자와 약속으로 태어난 자를 나눠놓으셨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육체로 태어나 육체로 살다가 육체 가운데 죽게 됩니다. 그러나 그중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랑 가운데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자들은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약속으로 태어난 자가 되게 해주십니다.
여러분 중에는 이미 그 약속으로 인해서 태어난 하늘의 예루살렘 백성이 있습니다. 자신이 그렇다고 확신하는 분들은 그 믿음 안에 거하면서 하늘의 열매가 자신의 삶에 나타나게 되기를 소망하십시오. 그러나 열매를 바란다고 육체로 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면서 약속 안에서 온전히 주님만을 의지하면서 순종하는 삶을 사십시오.
아직 약속으로 태어난 것인지 잘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죄인이고,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구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약속으로의 부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와 말씀을 가까이하면서 성령님께서 나를 거룩한 백성으로 자라나게 해주시기를 바란다면, 이미 약속으로 거듭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종노릇 하는 자리에 서는 어리석음을 가지지 않기를 바라십시오. 주님께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서 소망을 품고, 주님만을 바라면서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우리가 모두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