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깨달음과 충만한 기쁨

요한복음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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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를 보지 못할 것 2.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 3. 이해하기 어려운 예수님의 말씀 4. 기쁨이 충만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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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의 시기

오늘 본문은 제자들과 예수님께서 나누시는 대화에 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16절입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 아멘
제자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서로 대화를 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 조금 있으면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데, 또 조금 있으면 예수님을 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라 서로에게 질문을 던지지만 그에 대한 해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마치 수수께끼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의 의미는 크게 2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번째 상반절의 의미는 예수님의 죽음까지 남은 짧은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해오셨으나 제자들은 그것이 크게 와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현실성이 떨어졌기 때문이죠.
16절 상반절.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라는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 한번 더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 내가 말하는 지금 이 시점부터 나의 죽음이 그리 멀지 않았다. 나는 곧 하나님의 계획대로 구원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한다. 죽음의 길을 가야 한다. 내가 그 길을 가게 되면 나는 너희 곁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조금 있으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두번째. 16절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 일어날 일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게 되면 이제부터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공동체인 교회와 그 교회 구성원들을 통해 예수님이 온 세상에 전해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나의 곁을 떠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사랑하고 따르던 사람들은 고통스러워하고 근심 속에 빠져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제자들은 정말 애통한 마음입니다. 자신을 이끌어주던 그리고 새로운 소망과 희망을 주던 분을 더 이상 만날 수 없으니까요. 정말 슬프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던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마치 귀신을 본 것처럼 충격도 받고, 꿈인지 현실인지 의심할만큼 충격적인 사건이 그들에게 일어난 것이죠. 지켜드리지 못한 죄책감과 또 아픔 그리고 슬픔이 있었던 그들에게 예수님이 다시 오셨어요. 어떤 느낌이었을까요. 가족끼리도 조금 떨어져있다 만나면 애틋한 것이 우리입니다. 죽었던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나와 같은 음식을 먹고 나와 대화를 하고 있어요.
예수님이 살아계셨을 때 좀 더 잘 해드릴걸. 말씀에 순종할걸. 믿음을 보여 드릴 걸. 하는 자책과 슬픔 속에 있던 그들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셨어요. 죄송한 마음도 있었겠지만 그 죄송함과 아픔은 곧 기쁨과 행복 즐거움으로 바뀌지 않았을까요? 부활 후 갖는 교제의 시간은 이전과 확연히 달라진 기쁨과 깊은 이야기들이 오고 갔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오신 그 사건은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계속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이만큼 사랑한다. 내 목숨을 바칠만큼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사건이죠. 사람들은 이전보다 더 친밀감을 느끼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께 나아가게 되는 사건이 바로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니"라 말씀하신 의미입니다.
20절은 앞으로 일어나게 될 사건의 반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잠시 우리의 곁을 떠나셨을 때 세상의 반응은 두가지로 갈렸습니다. 한 쪽은 정말 슬퍼하고 애통해했고 한쪽은 기뻐했습니다. 예수님을 반대하고 음해하던 소수의 무리들에 선동된 세상은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기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절대로 구세주로 인정 할 수 없는 유대인들. 그리고 자신의 권력을 계속해서 지키길 원했던 로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 앞에 자신들의 모든 꿈을 이룬 것처럼 기뻐했고 즐거워했습니다.
그들에게 선동된 다수의 사람들에 비하면 절대소수였던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고 따랐던 이들은 정말 슬퍼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진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헛된 것을 믿었던 것처럼, 실패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내 반전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간 유대인들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죽은 직후 그들은 불안해 하며 예수님의 무덤을 잘 지키라고 명령하고 부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그런 불안함은 적중하여 예수님의 시체가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을 이긴 것처럼 보였던 세상. 견고하고 파고들 틈조차 없어 보였던 세상의 권세에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세상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거든요.
예수님의 죽음을 기뻐하던 이들과 슬퍼하던 이들의 처지가 바뀌게 됩니다. 슬퍼하던 이들의 마음은 곧 기쁨으로 변했고, 위로하며 근심하던 마음에 기쁨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반전의 감정을 해산하는 어머니로 비유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저는 해산의 고통을 잘 모르지만, 해산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죽음 직전까지 가는 듯한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하더라구요. 그 고통이 너무 심해서 그 순간에는 더 이상 애를 낳고 싶어지지 않을만큼 힘들다고 하더라구요.
예수님께서 오셨을 당시에도 해산의 고통이 심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처럼 의학의 발달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고통이 더 심했을지도 모릅니다. 아이를 낳을 때 그 고통을 덜어줄 수단이 없었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아이를 낳다 산모가 죽는 일도 빈번했으니 그 고통이 엄청 났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산모는 아이를 낳기 위해 정말 큰 고난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이죠. 물론 그 고통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산모는 아기를 안게 될 것이고 고통보다 새로운 생명에 대한 기쁨이 더 크게 다가올 것입니다. 산모는 그것을 알기에 모든 고통을 참고 감수하며 아이를 낳습니다. 아기를 가슴에 안는 그 순간을 기대하며 참아보려해도, 그 고통의 강도는 그대로 입니다.
죽음을 앞둔 예수님도 그리고 예수님을 떠나보내야 하는 사람들도 앞으로 큰 고통과 아픔의 시간을 지내야 합니다. 하지만 그 고통과 아픔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부활하실 것이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담임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각자의 광야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제가 직접 가본 광야라는 곳은 정말 아무 것도 없더라구요. 아무 것도 없는 황폐한 곳. 모래밖에 없는 그 곳은요. 어떤 것을 떠올리고 의지하고 믿는 것조차 어렵더라구요. 뭐라도 보여야 의지를 하고, 뭐라도 있어야 그것을 보고 희망을 가질텐데 정말 끝도 없이 펼쳐진 모래 밖에 없더라구요.
우리가 광야의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바로 떠올리지 못하고 다른 것들을 의지하고 붙잡는 이유가 그와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모래밖에 없는 그 곳을 걷다가 선인장과 같은 나무들을 보았는데요. 저도 모르게 거기에 눈이 고정이 되더라구요. 정말 아무 것도 없던 그 곳에서요. 뭐가 보이니까 거기에 저도 모르게 눈이 고정이 되는데요. 그 선인장을 지나처 걸어갔는데도 돌아보게 되고 계속 생각이 나더라구요.
우리에게 허락된 광야의 삶에서 예수님을 붙잡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혼자 있는 것같은 외로움을 느끼고 또 지쳐서 그 속에서 힘들어 합니다. 하나님을 미쳐 떠올리기도 전에 모든 힘을 소진하고 쓰러져버립니다. 그래서 우리의 광야는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함께 한다면 그 광야는 다른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십자가는요. 죽음의 상징이었어요. 골고다 언덕에 십자가가 서있다. 그럼 아 저기에서 누가 죽었구나. 저기에 또 극악한 죄인이 달렸구나. 라고 사람들은 인식했어요. 십자가는 죽음을 상징했어요. 그 당시 살아가며 십자가와 비슷한 것을 보면 자연스럽게 죽음 그리고 곡하고 애통하는 장소라 생각했어요. 그들의 의식하지 않아도 십자가는 그들에게 죽음을 뜻했어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후에 십자가를 바라보는 시선, 그 평가가 완전히 바뀌어졌어요. 그 의미를 완전히 바꾸어 버리셨어요.
감히 그 누구도 상상해보지 못한 의미로 십자가가 완전히 바뀌어 버렸어요. 더 이상 십자가는 죽음. 곡하고 애통하는 장소가 아니에요.
예수님은 십자가를 사랑. 용서 그리고 영생의 의미로 완전히 바꾸어 주셨어요. 온통 부정적인 평가 밖에 없던 그 십자가가 이젠 사랑. 죄 용서. 구원의 의미가 된 것이죠. 그 누구도 감히 상상해보지 못했던 십자가의 변신이라고 할까요.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십자가는 가장 치명적인 괴로움 아픔에서,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해주는 기쁨과 소망의 의미를 갖게 되었어요. 끊어졌던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한 완전한 회복을 가져다 주었죠.
십자가에 대한 평가는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뀐 십자가의 평가가 우리의 삶에 모든 문제와 괴로움을 없애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광야의 자리에서 방향을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다 넘어지고 쓰러집니다. 때론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의 삶에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마치 조금 후에 제자들의 곁을 떠났던 예수님처럼 나에게서 예수님이 떠난 것은 아닐까, 혹은 하나님이 나를 포기하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할 때도 있습니다. 제가 그 어려움을 다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 한가지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 어려움과 고난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은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거든요. 아니 이미 우리 곁에 계시거든요.
나 혼자의 힘으로 살아내느라 그리고 눈에 들어온 무엇인가를 포기하지 못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그 예수님께서 옆에 계시거든요. 우리가 쓰러졌을 때 손을 내밀어 주시고, 부축해주시는 분 예수님이 계시거든요.
20절.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21절.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22절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우리의 근심을 기쁨으로. 고통을 기쁨으로. 근심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으로 바꾸어주실 수 있는 분이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는 한 지금의 어려움과 고난은 절대 영원할 수 없습니다. 그 부정적인 모든 영향들은 예수님과 절대 함께 할 수 없거든요.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24절을 통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을 것이다"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그 분의 이름으로 구하는 이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구하기만 받을 것이다. 내가 주겠다. 말씀하시는 그 분께 구하는 시간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삶을 어렵게 하는 것들은 절대 영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 분의 이름으로 구하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그 분의 이름으로 구하며 선포하며 나가도, 내 삶의 자리는 그대로이고 바뀌지 않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실제로 바뀌지 않을수도 있구요.
하지만 그것을 마주하는 우리의 태도와 마음의 분명한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온통 죽음밖에 없었던 십자가를 사랑과 구원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처럼 우리의 삶의 그 어려움과 고통을 기쁨과 사랑 그리고 은혜로 반드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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