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410저녁] 당신은 Fan 인가, 제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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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151 [만 왕의 왕 내 주께서]
기도
본문 마21:1-11
서론
서론
우리 남자들은 평생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날이 있다. 언제인가? 바로 결혼기념일이다. 저도 절대 잊어서는 안될 그 날을 꼭 기억할 수 있도록 결혼을 12월 12일에 했다. 1212. 사실 생각해보면 그날 새벽부터 어떻게 하루가 지나갔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뭔가 정신없이 있다보니 어느순간 식장에서 선서를 하고 있었고, 뭔가 정신없이 있다보니 신혼여행 비행기 안에 있었다. 그 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기억나지는 않아도 우리는 그 날을 기념한다. 하나님 안에서 한 가정을 이루게 하신 그 날, 더욱 하나님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더욱 헌신하고 사랑할 것을 다짐하는 날이 결혼기념일이 아닌가. 이처럼 ‘기념일' 이라는 것은 뭔가 축하하거나 기릴만한 일이 있을 때, 매년 그 일이 있었던 날을 기억하는 날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여러 절기들을 제정하시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절기를 지키게 하셨다. 그 중의 하나가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유월절이었다. 모든 이스라엘 남자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매년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와야 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추석명절때 민족대이동이 일어나는 것처럼, 모든 이스라엘 남자들이 전국각지에서 예루살렘으로 순례여정을 오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예루살렘 성이 그들을 다 포용할 수 있겠는가? 당연히 없다. 그러다보니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숙박업이 발달하기 시작한다. 숙박업이 발달하면 당연히 무엇도 함께 발달하겠는가? 식당이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베들레헴인데, 베들레헴의 의미는 떡집이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맛집거리이다.
1절을 보면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은 벳바게에 도착했다. 벳바게는 베다니 옆 마을이었고, 베다니는 예루살렘 3km 떨어진 동네였다. 이제 주님께서 입성하실 예루살렘은 눈에 보일정도의 거리까지 다가온 셈이다. 이제 주님께서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으로 입성하시게 될 것이다. 이 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외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 날을 기념하여 오늘날까지 종려주일로 지키고 있다. 그리고 종려주일을 기점으로 고난주간이 시작된다. 오늘이 바로 종려주일이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그 날을 기념하며, 이 시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길 바란다.
배경설명
배경설명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벳바게에 도착하시고, 여기서 두 제자를 보내시어 예루살렘 입성을 위한 나귀와 나귀새끼를 데려오게 하신다. 그리고 만일 묶여있던 나귀와 나귀새끼를 풀어 데려가려 할 때 누군가가 뭐라고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 하신다. 실제로 동일한 사건을 다루고 있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 나귀의 주인은 이의를 제기하였고, 이때 제자들은 주님께서 가르쳐주신대로 대답했을 때 주인은 나귀를 내어주게 된다. 이전에 주님께서는 이적을 베푸시며 자신의 메시야되심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다. 그러나 이제는 공공연하게 그분의 지위를 드러내신다. “주가 쓰시겠다" 이는 공생애의 절정의 때, 곧 고난과 죽임을 당하실 그 때가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주님은 하필 나귀를 타셨을까? 예루살렘까지 불과 1시간이면 걸어갈 수 있는 거리임에도 왜 주님은 나귀를 타셨는가? 그것도 승리의 상징인 백마를 타지 않고 하필 초라한 나귀를 타셨는가? 주님께서 나귀를 타신 이유는 구약에서의 메시아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함이다. 슥 9:9 말씀에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라고 예언되었다. 이 예언은 예수님께서 세상 권력을 심판하기 위해 임하시는 군사적 지도자가 아니라, 구원을 베푸시는 의로우신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고대근동 사회에서 나귀는 훌륭한 교통수단이었기 때문에 지체높은 사람들이 자주 타던 짐승이었다. 그러나 솔로몬시대 이후로 유대인들도 말을 기르기 시작했고, 그 이후로 나귀는 가난한 자들만 타기 시작하고, 거의 대부분 짐을 나르는 용도로 길러졌다. 주님은 당시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정치적, 군사적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의 죄의 짐을 대신 짊어지기 위하여 오셨고, 무거운 멍에를 짊어지고 걸어가는 나귀와 같은 고난의 여정을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학수고대하며 기다려오던 메시아가 나귀 따위를 타고 입성하실 것을 상상할 수 없었겠지만, 스가랴 선지자는 이에 대해 분명하게 예언하였다. 그리고 주님은 그분에 관한 예언들을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지지 않으시고 다 이루신다. 언제까지? 십자가위에서 “다 이루었다" 하시기까지.
무리들의 반응
무리들의 반응
주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려고 감람산에서 내려가신다. 그리고 이 때 8절 말씀처럼 ‘무리의 대다수'가 주님께로 몰려들기 시작한다. 그들은 메시아께서 가시는 길에 자기 옷을 펴서 깔기 시작한다. 또 어떤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주님께서 가시는 길에 뿌려놓는다.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이 나뭇가지들이 종려나무의 가지들이었음을 밝힌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종려나무는 기쁨과 승리를 상징한다. 그들은 입성하시는 주님 곁에서 함께 뛰며 함께 즐거워하며 함께 승리를 자축하며 행진하고 있다.
예전 2002년 월드컵 때 우리는 얼마나 열광했었던가? 온갖 사람들이 함께 모여 응원하며 소리지르며 골을 넣었을 때 서로 얼싸안고 기뻐하지 않았던가. 군중이 함께 모여 기뻐하는 것은 쉽게 자제되지 않는다. 하물며 주님을 따라 함께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자들은 어떠했을까? 그들의 격양된 감정들은 고조에 달했다. 9절 말씀처럼 주님을 앞서가는 자들과 주님의 뒤를 따르는 자들이 함께 소리를 높여 외친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호산나 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음역한 것인데, “지금 구원하소서" 라는 의미이다.
나귀타신, 볼품없고 초라한 예수님과 대조적으로 온 무리들은 아주 큰 기쁨의 축제의 장이다. 마치 2002년 월드컵때 극적인 골을 넣었을 때처럼, 온 회중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이처럼 기뻐하고 환호하였다. 어느 역사학자는 이 날 예루살렘 성 안에 이미 270만명 이상이 모여있던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는데, 이 거대한 무리들이 함께 ‘호산나!’를 외친다고 생각해보라. 온 성이 요동할 정도였을 것이다.
예수님은 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는가?
예수님은 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는가?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보라. 왜 이리도 사람들이 주님의 입성에 열광하고 있는가? 왜 그들은 자신의 옷을 깔며 초라하게 입성하시는 예수님께 복종하겠다고 엎드리는가. 왜 그들은 나귀타신 주님 앞에 승리와 기쁨을 상징하는 종려나무 가지를 깔며 자축하고 있는가? 왜 그들은 “호산나(지금 구원하소서)”를 외치며 주님을 쫓아가고 있는가?
이미 로마로부터 극심한 압제를 당하던 유대인들에게는 메시아를 고대하던 신앙이 아주 깊게 자리잡고 있었다. 메시아께서 오시면 장차 이스라엘을 천하 만국 중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나라로 우뚝 세우실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다. 그래서 극심한 탄압과 압제 속에서도 그들은 메시아께서 오셔서 자신들을 구원해주시길 간절히 기다려왔다.
적지 않은 무리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이적에 대해 직접적으로 혹은 소문을 통해 들어왔을 것이고, 그들 중에는 분명 주님과 직접적으로 만남이 있었던 자들도 있을 것이다. 이 거대한 행렬에는 제자들을 포함하여 갈릴리에서부터 주님을 따르던 마리아나 마르다 같은 여성들의 무리도 있었을 것이고,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을 때 믿음을 가졌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며, 그런 이적들을 듣고 호기심에 그 대열에 합류한 자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절기 중 하나인 유월절 절기가 찾아왔다. 이 절기로 인하여 각국에 흩어진 모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몰려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쫓아, 아니 더 정확하게는 자신들의 꿈과 야망을 이루어주시기 위해 예수께서 입성하신다고 착각한 나머지, 광기어린 신도가 되어 주님 곁에서 환호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여! 속히 가서 친로마인사들을 보좌에서 끌어내리소서! 예수여! 속히 가서 선민 이스라엘을 압제하는 저 로마를 완전히 밟아 무너뜨리소서! 예수여! 속히 우리를 세계 최고의 하나님 나라로 세우사 만국이 우리 앞에 굴복하게 하소서! 예수여! 속히 우리의 꿈과 야망을 이루시기 위하여 보좌에 오르소서!”
그러나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슨 이유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는가? 이성을 잃고 광기어린 이 무리들의 생각처럼,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독립시키고 막강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함이었던가? 아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속사역의 정점을 이루시기 위해 입성하신 것이다. 나무에 달려 하나님께 온갖 저주를 받으사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 마치 나귀 위에 수많은 짐들을 지우게 한 것처럼, 택하신 백성들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그 모든 죄의 값을 자신의 피로 사하게 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것이다.
시편기자는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였다'고 기록하였다. 죄에 묶인 죄인들이 이와 같다. 모든 죄인들이 사망의 권세에 매여 있다. 누구도 여기서 자유할 수 없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끊어낼 수 없는 사망에 매인 쇠사슬을 자신의 피로 끊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값을 자신의 피로 완전히 값을 치루시며, 죄와 사망의 종이었던 우리를 그분의 피로 사시사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과 권세를 허락하시기 위해, 친히 자기 몸을 화목제물로 올려드리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고 계시다. 어떤 사람들의 생각처럼 영광과 존귀의 자리로 오르시기 위하여 입성하시는 것이 아니라 수치와 저주와 모멸과 처형을 당하시기 위하여 그 길을 걸어가시는 것이다.
무리들과 제자들
무리들과 제자들
여러분, 여기서 너무나도 충격적인 것이 무엇인줄 아는가? 이 거대한 행렬에 주님의 제자들도 있었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부르짖는 호산나의 의미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채로 주님의 입성을 환호하고 있다. 제자들은 주님의 부르심으로 제자가 되었고, 주님께서 친히 말씀을 가르치셨고, 베푸시는 이적들도 눈 앞에서 목격했던 자들이다. 주님께서 나귀를 준비시키던 일에도 주님의 주권 아래에서 진행되는 일들을 지켜보았던 자들이다. 주님께서 입성하실 때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께 경배하는 이 놀라운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예루살렘 성이 흔들릴정도로 요동하는 큰 환호 속에서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라는 타이틀에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자부심을 느끼고, 자랑스러워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만큼은 무리들과 달라야 했다. 이성을 잃고 마치 광신도마냥 부르짖고 있는 저 무리들과는 다르게, 그들은 끝까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어야만 했다. 오랜 시간 예수님과 함께 하며 주님께서 앞서 세 차례나 말씀하셨던 십자가 수난의 일이 이제 곧 일어나겠구나, 곧 주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임당하시겠구나 기억하며 묵묵히 그분의 곁을 지켜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그간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며 치열하게 논쟁했던 것처럼, 이제 출세와 성공과 명예의 순간이 머지 않았다고 착각했는지 모른다. 결국 제자들도 이 열성분자들과 다를 바가 없더라는 것이다.
제자들을 둘러싼 수많은 무리들은 지금 당장은 천한 동네 나사렛에서 나타난 '선지자 예수'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자신들의 소원대로 메시아께서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할 권세자로 임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열성적으로 열광하고 있지만, 머지않아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으라며 분란과 소동을 일으킬 자들이다. 제자들은 이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로마지도자들을 끌어내리고 왕위에 오르실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자랑스럽게, 우쭐대며 주님 곁에서 입성하고 있지만, 머지않아 주님이 잡히실 때 그토록 따르던 제자들도 주님을 버리고 도망할 것이다.
제자들을 비롯한 무리들은 각기 마음의 소원대로 주님을 바라보고 있고, 주님께서 자신의 기대치를 충족시켜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대열에 동참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야망은 주님의 목적과는 달랐다. 머지 않아 그들이 각기 가진 기대치와 너무나도 동떨어진 주님의 모습을 보게 될 때, 그들은 주님을 떠날 것이고, 그들은 주님을 배반할 것이며, 그들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요동할 것이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의 현장에 셀수 없이 많은 수많은 인파들이 몰렸지만, 그 중 누구도 주님의 편이 없었다. 열광하는 사람들 틈속에 둘러 쌓이셨으나 예수님은 지독한 고독함과 외로움 가운데 그 길을 홀로 걸어가셨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주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시며 그 성에 가까이 이르실 때, 그 성을 보시고 우셨다고 기록한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비롯한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무리들의 민족적 야망과 변덕을 아셨다. 지금은 주님을 정치적인 왕으로 오해하여 환호를 지르는 눈앞의 허다한 무리들이 며칠도 지나지 않아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고 요동하는 대적자들이 되리라는 것을 아셨다. 그래서 예루살렘 입성 전, 그 도성을 바라보시며 우셨던 것이다. 지금 그들의 열광적인 모습들은 머지 않아 싸늘한 적개심으로 뒤바뀔 것이다. 자신들이 그토록 원하던 정치적인 왕,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왕이 아님을 깨닫고, 완전히 돌아서서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열광하는 군중으로 변해버리고야 말 것이다.
당신은 Fan 인가 제자인가
당신은 Fan 인가 제자인가
영어 숙어구 중에 “Fair weather friend”라는 표현이 있다. 한글로 번역하자면 “비온 뒤 갠 날에만 친구”라는 의미로서, 뭔가 좋은 일이 있을 때만 친구, 뭔가 일이 잘 풀릴 때만 친구가 되는 사람이다. 이러한 자들은 일이 자기 뜻대로 진행되지 않을 때, 뭔가 안좋은 일이 일어날 때는 반드시 그 사람을 버리는 자이다. 본문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군중들, 그리고 예수님의 최측근으로서 함께 동행하고 있는 제자들이 바로 이런 부류이다. 그들은 죽음을 향하여 한발 한발 나아가시는 주님과 동행하며, 그 주님 곁에서 다른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 본문을 묵상하면서 이 책이 떠올랐다. 영어 원서의 제목은 ‘not a fan’, 우리나라에는 ‘팬인가 제자인가' 라는 책으로 번역되었다. 이 책의 내용은 주님을 따르는 신자들이 단지 주님께 열광하고 환호하는 Fan으로 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함을 일깨우는 내용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Fan의 특징들을 잠시 소개하자면 이렇다. ‘Fan은 단순한 열광을 진정한 헌신으로 착각한다. 예수님에 관한 지식을 깊은 친밀함으로 오해한다. 행동하지 않고 말로만 때우려고 한다. Fan의 가장 흔한 증상 중 하나는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절대적으로 확신한다는 것이다.’
여러분, 실로 그러하지 않은가. 당시 바리새인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을 생각해보라. 그들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 있어서 으뜸인 자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에 관하여 모르는 게 없었지만, 정작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주님을 따르던 수많은 무리들도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은 주님 곁에서 천국복음의 말씀을 들었고,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였지만, 결국 그 모든 열광들이 적개심으로 돌아서는데에는 며칠도 걸리지 않았다. 주님은 이러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여러분, 이러한 군중들의 모습이 혹시 우리들 안에서도 보이지 않는가. 교회에 왔다가며, 기독교의 문화를 접하며, 예수님에 대해 알고, 듣고, 배우면서, 주님에 대해서 지식적으로는 누구 못지 않게 잘 아는데, 정작 주님을 알지 못하는 본문 속의 무리들이 오늘 바로 저와 여러분은 아닌가? 그저 교회의 울타리 안에 머물며 때에 따라 열성적인 팬 정도로 살아가는 나는 아니던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며 주님을 쫓는 제자의 삶 대신, 내가 좋을 때만 주님을 따르며 언제든 주님을 배반할 수 있을 “Fair weather friend” 로서만 이 땅을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고귀하신 분께서 왜 이 땅에 내려오셨고, 왜 지금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채로 그저 나의 사리사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주님을 좇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그저 내 생각이라는 틀에 하나님을 끼워맞춰넣고, 내 기준안에 하나님을 세워두고서 그 틀 안에 있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 기준위에 놓인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섬긴다 하면서도 자기 우상을 섬기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은 자기 생각과 자기 기준과 자기 목표가 기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러한 소원들을 들어주실 때에는 평안한 것처럼 보여도, 때로 그것에 맞춰주지 않으실 때 쉽게 돌변하여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주님을 가장 잔혹하게 사형시키라고, 주님의 살을 채찍질로 찢어버리라고, 요동치는 광란의 무리들로 변할 수 밖에 없다. 과연 여러분은 Fan인가, 주님의 제자인가.
결론
결론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여러분, 오늘은 종려주일로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날이다. 오늘은 허다한 무리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기의 꿈과 이상이 실현되는 날이 아니다. 기쁨과 축제와 잔치의 날이 아니다. 환호와 열광으로 보낼만한 날이 아니다. 왜그러한가? 우리 주님은 죽으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기 때문이다.
지금 주님을 둘러싼 수많은 군중들은 주님을 버릴 것이다. 심지어 성부께서도 주님을 외면하실 것이다. 지금 주님을 둘러싼 군중들은 주님을 칠 것이다. 심지어 성부께서도 주님을 십자가 위에서 치실 것이다. 군중들은 주님을 조롱하고 저주를 퍼부으실 것이다. 성부께서도 나무 위에 달린 주님을 저주하실 것이다. 군중들은 결국 주님을 죽일 것이다. 성부께서도 우리의 죄를 전가받으신 예수를 죄인으로서 죽이실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의 죄가 사함 받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우리가 구원받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우리가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러분 기억하라. 주님 곁에서 호산나 외치던 열성분자들과 같이 되지 않기 위해 매순간 기억하라. 영광스러우신 그분께서 무엇 때문에 낮고 천한 이 땅 가운데 내려오셨는지. 전능하신 그분께서 무엇 때문에 머리둘 곳 없이 사셨는지. 가장 영화로우신 그분이 무엇 때문에 예루살렘 성에 볼품없는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셨는지. 무죄하신 그분께서 무엇때문에 수모를 당하시고, 채찍질을 당하시며, 조롱을 받으시고, 이방인의 손에 넘겨져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무엇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수치스러운 죽임당하셨는지를 말이다.
[찬송가280장 2절]
전부터 계신 주께서 영 죽을 죄인을
보혈로 구해 주시니 그 사랑 한 없네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 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주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로 구원받은 여러분, 이제 고난 주간이 시작되었다. 주님의 낮아지심, 주님의 고난받으심, 주님의 수치와 능욕 당하심, 버림받고 저주받으시며 죽임당하심이 바로 나 때문이었음을 기억하라. 그 모든 고통과 죽음과 희생을 기억하며 단지 주님의 Fan 으로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진 채로 앞서 가신 주를 따르는 모든 주님의 양무리 여러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말씀을 기억하며 기도하자.
1. 혹 내 안에도 그 허다한 무리들과 같이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주님께 열광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내 생각과 기준과 틀 안에서 만든 우상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죄악을 범하지는 않은지. 수치와 모멸의 십자가와는 상관없는 영광과 번영의 십자가만을 좇아 살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안에 이와 같은 모습들이 있다면 회개하게 하시고, 내려놓게 하시고,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으로 이 땅에 내려오시고, 찢기시고, 죽임당하신 진정한 그리스도 예수를 기억하며, 오직 그 믿음 가운데 바르게 세워져가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2. 이제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이 시작되는데, 세상의 정욕과 쾌락과 즐거움들을 잠시 멈춰두고, 주님의 고난과 사랑을 묵상하는 남은 날들이 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