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복음 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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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다양한 측면
복음의 다양한 측면
지난 시간 위대한 작품일 수록 서로 다른 측면에서 바라보며 각각의 면을 음미할 때 더욱 그 진가가 드러난다고 했던 것이 기억나나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가장 위대한 작품인 복음 또한 마찬가지이며,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며 묵상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데에 동의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난 두 번의 시간에 걸쳐서 자유라는 관점에서 복음을 바라보았지요. 오늘은 또 다른 관점에서 복음에 접근해보려고 합니다. 오늘부터는 ‘은혜’라는 관점에서 복음을 바라보며 깊이 묵상해보도록 합시다.
성경 해석의 중요한 원칙
성경 해석의 중요한 원칙
‘은혜’라는 주제, 우리에게는 결코 낯선 것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가장 많이 듣고 사용하는 말 중에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지속적으로 경험하며 은혜에 대해 친숙하고 익숙해졌다는 것은 아주 바람직한 일로 여길 수 있지만, 이런 익숙함이 때로는 성경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익숙하게 여길 수록 그것이 일종의 선입견이 되어서 진리의 진정한 의미에까지 이르지 못한 채로, 아주 편협하고 제한된 이해에 그쳐버린 채로 그것이 전부일 것이라고 여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선입견은 오해와 편협함을 낳게 되는데, 성경을 읽을 때 선입견에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지켜야 할 중요한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성경을 들여다 볼 때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상황과 이해에서부터 읽기와 해석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기록한 저자와 하나님의 백성들의 상황과 이해에서부터 읽기와 해석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필 ‘은혜’라는 주제에 이 말을 적용해보자면, 지금 우리가 이해하고 사용하는 ‘은혜’에서부터 본문을 읽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바울과 교회에서 이해하고 사용했던 ‘은혜’에서부터 본문을 읽고 해석하는 것이 되겠지요.
이러한 성경 해석의 원칙을 학문적으로는 “Sitz im leben” 즉, 삶의 자리를 살핀다라고 말하고, 우리에게 조금 더 익숙한 말로 바꾸어서 말하면 맥락을 살핀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삶의 자리를 살핀다는 것, 맥락을 살핀다는 것이 결코 간단한 과정은 아닙니다. 반드시 많은 사항들을 고려해야 하는데요, 예를 들어, 누가 그 구절을 말했는지, 그들이 삶에서 맡고 있었던 역할은 무엇인지, 청중은 어떠한 특징을 지니고 있었는지를 비롯한 여러 사항들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읽는 성경 본문이 갖고 있던 원래의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 구절이 지녔던 원래의 의미에서 벗어나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이러한 수고를 들여서 성경을 읽는 원칙을 잘 지켜가야 합니다.
1세기 상황에서의 은혜
1세기 상황에서의 은혜
보통 ‘은혜’라고 번역되는 단어는 본래 헬라어로 “Χάρις”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 단어는 바울과 그의 공동체가 살아가던 1세기 상황에서 “혜택”, “호의”, “선물”을 뜻하는 아주 일반적이고 일상적인 단어인데, 당시 로마라는 사회의 문화 속에서 이 카리스 즉, 선물은 사회적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선물을 주고받고 보답하는 것은 당시 사회 생활의 근본적인 원리였는데, 부자들 사이에서 주고받는 사치스러운 접대나 정치적 호의로부터, 가난한 사람들이 생존하도록 돕는 평범하고도 잘 드러나지 않는 교환이나 나눔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회 계층 속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일이었습니다.
당시 로마 사회에서 유명했던 격언 중에 이러한 것들이 있었습니다. “네 이웃에게 다정하게 대하라. 집에 문제가 생겼을 때, 이웃이 바로 그곳에 함께 있을 것이다.” “무언가를 주면, 무언가를 얻게 된다.” 이러한 격언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당시 로마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대함은 가장 좋은 보험의 형식이었고, 인색하거나 비협조적이라고 알려진 사람들은 병, 사고, 재정적인 재난을 불러오는 사별 등을 당했을 때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기 일쑤였습니다.
이러한 선물을 주고받고 보답하는 체계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만이 아니라 사람과 신 사이의 관계 또한 설명했습니다. 로마의 종교에서 신들은 인간에 대한 후원자로 여겨졌는데, 그들은 인간에게 자연, 건강, 안전, 성공을 제공해주었고, 인간은 제사와 경배로 화답해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요약해보자면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하던 당시의 로마는 모든 사회적인 관계가 선물을 주고 받고 보답하는 행위 속에서 형성되고 지속되었던 사회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 사회에서 비즈니스 관계가 상호 간의 공정한 계약에 의해서 형성되고 지속되는 것, 사회적 약자와의 관계가 공공기관의 제도적인 지원에 의해서 형성되고 지속되는 것과는 아주 판이하게 다른 사회였던 것이지요.
선물이 모든 관계를 형성하고 지속하던 로마 사화에서는 이 선물을 현명하고 분별력 있게 주는 것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보답할 것 같지 않거나 보답을 꺼리는 사람에게 선물을 주는 것에 대해 조심하였습니다. 평판이 좋지 않은 사람과 관계 맺기를 꺼려해서 선물을 거절하기도 하였고, 선물을 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분별되는 자들에게만 선물을 주려고 고심하였습니다.
1세기의 철학자였던 세네카는 당시의 선물을 주고받는 관계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선물은 사회를 하나로 묶어주기 때문에 잘 주는 것이 중요하다. 즉, 넉넉히 주는 것은 훌륭한 것이지만, 아낌없이 주더라도 대상을 조심스럽게 정해야 한다. 현명하게 주고 실망감이나 당혹감을 피하기 위해, 선물은 자격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져야 한다.”
선물을 받을만한 가치 있는 자들을 분별하는 것이 지혜롭고 덕스럽고 마땅하게 여겨지는 것은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장 지혜롭고 덕스러우며 이치에 합당하게 행동하는 로마의 종교에서 신들이 은혜를 받을만한 가치 있는 자들을 분별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겨졌습니다.
1세기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물 즉, 은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였을까요?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 널리 읽혔던 솔로몬의 지혜서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에서 밝히는 교훈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에 합당한 자격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지혜라는 선물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1세기 유대교 철학자 필론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각 사람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하나님께서 미리 알고 계신 것이 틀림없다. 이것을 근거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만한 가치 있는 사람을 선택하셨다.”
물론 이와 다르게 생각했던 유대인들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하던 당시의 유대인들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사람은 오직 유대인들 뿐이었구요.
1세기의 상황을 살펴보니 로마인들에게나 유대인들에게나 은혜는 은혜를 받을만한 가치 있는 자들에게 주어진다는 것이 공통적인 이해였습니다. 당시 그들이 이해하던 은혜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오직 자격있는 자, 가치있는 자들만이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은혜
바울이 말하는 은혜
그렇다면 바울은 은혜에 대해 어떻게 증언하였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이나 가치있음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고 선포합니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사실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이 없고 무가치한 존재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로마서의 첫장부터 쉴새없이 아주 일관되게 또 적나라하게 인간에 대해서 말합니다.
바울은 모든 인간이 피조물과는 비교할 수 없이 위대하고 높으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다고 선포합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기지 않고 그들의 마음이 원하는대로 자기 욕심대로 우상을 만들어 그것을 마치 하나님처럼 섬기고 있다고 선포합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죄에 빠져 죄 가운데 살아가고 있으며, 죄를 짓는 사람마다 심판을 받게 될 것을 알지만 애써 그것을 무시하려 자신들의 행동을 숨기고 변명하기에 급급하다고 선포합니다. 유대인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분이 어떠한 분이시며, 그분이 원하시는 삶이 어떤 모습인지 아는 유대인들조차 율법을 떠나 죄를 지으며 살아갑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2장에서 이렇게 힘주어 증언합니다. 롬 2:9-12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율법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유대인이건, 양심의 법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헬라인이건 모두가 다 죄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즉, 이 세상의 그 누구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을 갖추거나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죄악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의 준엄하심 앞에 스스로 설 자가 누구도 없으며, 단 한명의 인간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과 가치가 없음이 분명합니다. 우리에게는 정해진 심판의 운명을 뒤바꿀만한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비참한 운명에 처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은혜를 베푸셨다고 증언합니다. 롬 3:24-25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도 가치도 없는 죄인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독생자의 피와 죽음으로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르시고 우리를 값없이 의롭다고 선언해 주셨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은혜가 바로 이것입니다.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도 가치도 없는 죄인들을 위해 자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이요, 그 아들의 희생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1세기의 사회 속에서 비추어 보았을 때 정말 파격적인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런 자격도 가치도 없는 사람을 위해 그토록 큰 선물을 베풀다니요! 가장 지혜롭고 덕스럽고 이치에 맞게 행동하시는 하나님께서 즉,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이런 무분별한 선물을 베푸신다는 것은 당시의 사회 속에서는 세상의 질서를 해치는 어리석은 행동으로 여겨진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런 행동을 하셨다고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그리고 그 행동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즉, 가장 지혜롭고 덕스럽고 이치에 맞게 행동하시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드러났다고 분명하게 덧붙입니다.
파격적이지만 분명하고 정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은 자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면하자 자신의 자격없음과 가치없음이 여지없이 드러났습니다. 자신 안에 있는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지켜보고자 노력해보았지만 이내 하나님 앞에 항복하고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만을 간절히 바라고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이 증거하고,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증언하는 바 오직 구원은 자격없고 가치없는 자들에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만을,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의지하는 것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여전히 파격적인 은혜
여전히 파격적인 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