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고 사랑하라

베드로전서 강해 시리즈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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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에 오신 성도님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어제는 고난이 죄를 끊어냄으로서 고난 받는 우리가 승리한다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어제 같은 경우에는 세상 가운데서 일어나는 일을 말하고 오늘은 우리가 교회 안에서 어떻게 기도하고 섬겨야 할지에 대해 말씀합니다.
1- 종말의 때에 절제와 이성을 가지고 기도하라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은 종말의 때에 절제와 이성을 가지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7절부터 보시면 만물의 마지막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알려줍니다. 만물의 마지막은 종말을 말합니다. 종말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를 종말이라고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고 종말의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이 종말의 시간 가운데 사도 베드로는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말합니다.
7절을 원문과 가깝게 번역하면 “모든 것의 끝이 가까이 왔으니 너희의 기도들을 위해서 스스로 절제하고 냉정하라”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위해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할 것을 이야기합니다. 우리 삶의 태도가 우리 기도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7절에 정신을 차리는 것은 원문상으로 자기 자신을 잘 조절하고 절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덜 더 운동을 하고 있지만 자기 자신을 조절하지 않으면 절제하지 않으면 기도할 수 없습니다. 나의 일상을 조절하지 않고, 나를 위한 시간을 절제하지 않으면 기도를 하는 것이 참 힘듭니다. 우리는 종말의 때를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생활을 잘 절제해서 기도의 시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 다음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근신하는 것은 원문상으로 신중한 것을 말합니다. 이성적인 것을 말합니다. 기도에 있어서 감정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이웃을 향한 긍휼이 있어야 하고 이 시대를 향한 가슴 아픔이 있어야 기도가 나옵니다. 이 감정만큼 중요한 것은 이성적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감정은 기도하고자 하는 의욕을 불러일으키고 이성은 기도를 더 구체적이고 풍성하게 만듭니다. 어떻게 기도하면 이성적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까? 우선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온 교훈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을 근거로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이 우리 기도를 붙들지 않으면 우리 기도는 고삐 풀린 말처럼 종횡무진 하게 됩니다. 오히려 기도시간에 사탄이 틈을 타서 분노에 감정에 더 사로잡히고 우울한 감정에 더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7:5을 보시면 원래 부부는 원칙적으로 각방을 쓰면 안되지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얼마 동안은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이유는 절제하지 못함으로 사탄이 시험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사탄이 우리의 감정과 욕망을 사용해서 우리를 기도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정말 싫어하기 때문에 기도의 자리에서 더 안 좋은 생각이 떠오르게 하고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감정이 더 우리를 지배하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말씀의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말씀의 지도 가운데 기도할 때 우리의 기도는 올바르고 이성적인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이성적인 기도를 하기 위해선 우리 삶을 관찰하는 태도가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 나온 기도가 원문상으로 복수형입니다. 기도들을 하라고 그렇게 말씀합니다. 기도들이라고 복수로 표현한 것을 보아 일상생활 가운데 구체적이고 다양한 여러 가지 기도제목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할 때 뜬구름 잡는 말, 각종 신앙적인 미사여구로 장식된 말들 말고 우리 삶에서 끌어올린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우리 기도제목에 이웃의 땀과 눈물이 배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려면 우리가 나의 삶과 이웃의 삶을 잘 살펴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 내가 혹시 다른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았는지, 내가 섬길 수 있음에도 피하지 않았는지 살펴야 합니다. 내 이웃의 삶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무심코 지나칠 뻔 했던 동료의 표정에서 기도제목을 찾을 수 있고 동역자의 우울하고 힘 없는 말투가 기도제목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의 기도는 내가 어떤 종교적 경지를 달성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나와 이웃의 삶을 담아내는 그릇입니다. 이 삶들이 담긴 그릇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회복되고 영광되게 해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우리의 삶을 담아내지 못하면 우리 기도가 허공에 붕붕 뜨는 기도가 되고 그냥 감정을 해소하기만 하는 그런 기도가 됩니다. 기도가 하나님 앞에서 많은 삶들을 담아낼 때 그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뤄지는 일이 일어납니다.
기도는 그냥 이거 해주세요 저거 해주세요가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 나라를 삶의 현장 가운데 이루기 위한 설계도면입니다. 이 설계도에 우리 가정이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 나의 직장이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 교회가 더욱 든든히 서는 것 이런 내용들이 있습니다. 기도가 이렇게 설계도를 작성하는 것이라면 우리 기도는 이성적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설계도면을 주셨는데 이 주기도문에 우리 구체적인 삶을 대입해서 우리가 기도를 통해 삶 가운데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그리도록 해야 합니다.
(증명) 종교개혁 이전의 기도는 예배 때 사제의 기도를 그저 듣고 쳐다보기만 하는 기도였습니다. 예배 때 쓰이는 기도문들이 라틴어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라틴어를 모르는 일반인들은 라틴어로 된 기도문을 외우기에 바빴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잃어버린 기도를 되찾았습니다. 미사 때 사제가 하는 아주 긴 기도를 될 수 있으면 축약했습니다. 예배시간에 함께 기도하도록 했고 회중이 함께 회개 기도하는 시간도 만들었습니다. 종교개혁이전의 로마카톨릭의 기도는 회중의 입을 닫게 하는 기도였지만 종교개혁의 기도는 회중의 입을 여는 기도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카톨릭의 기도는 라틴어로 된 기도를 그저 듣기만하고 그저 달달 외는 비이성적인 기도였고 삶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기도였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되찾은 기도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언어로 자기 삶의 형편에 맞게 드리는 그런 기도였습니다. 일이 바쁠수록 기도 시간을 더 많이 확보했다는 마틴루터가 기도에 대해 쓴 아주 짧은 분량의 책이 있습니다. “단순한 기도”라는 책인데 빨리 읽으면 30분 만에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 마틴루터는 사도신경, 주기도문, 십계명을 가지고 기도를 하는데, 삶의 구체적인 내용을 가지고 기도하는 방법을 이야기 합니다. 누구나 보고 바로 쉽게 따라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책을 한 번 읽으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단순한 기도”라는 책입니다.
정리하자면, 종말의 때에 우리 생활을 절제함으로 기도의 자리를 확보하고 우리가 이성적인 태도로써 말씀의 지도를 받는 기도, 삶을 담아내는 구체적인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뜨겁게 사랑하고 은혜로 섬겨라
(설명) 그다음으로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교훈은 뜨겁게 사랑하고 은혜로 섬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말의 때에 자리에 앉아서 기도만 하지 않습니다. 우리 삶에 사랑과 섬김이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일상이 사랑과 은혜로 충만하게 되기 위해 말씀의 지도를 받는 구체적인 기도를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8절에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은 그냥 감정적인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열심을 내어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그저 호감의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여야 합니다. 내가 사랑할 수 없는 상황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일지라도 나의 감정과 상황을 극복해서 섬기는 것입니다. 당장 호감이 생기지 않더라도 열심을 내서 진심으로 그 사람을 그 모임을 아끼려고 애써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을 수 있습니다. 내가 호감을 가지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사랑으로는 절대 죄를 덮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공동체 안에서 죄가 더 생길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야고보서에서 나오지 않습니까? 교회 공동체에 돈 있는 사람을 다른 이들보다 더 환대한 것 때문에 야고보가 꾸중하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더라도 교회는 달라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스승노릇을 합니다. 참된 사랑이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가 먼저 세상에게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 줘야 합니다. 사랑이 죄를 덮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교회가 사랑으로 죄를 덮는 것을 보여줄 때 세상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인류의 죄를 해결했다는 진리를 신뢰할 것입니다.
세상의 사랑이 얼마나 타락했습니까? 세상의 사랑은 쾌락이고 탐욕입니다. 이기주의고 어쩔 땐 폭력으로 표현됩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왜 침공합니까? 자기 나라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우크라이나가 자기 나라 뒷마당 역할을 하고 서방세계 진출을 위한 발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우크라이나는 계속 친서방정책을 펼치고 소련체제가 붕괴된 이후에 러시아의 서방진출을 막으려고 생긴 나토라는 연합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거기 가입하려고 애쓰고 있었습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왜 우리를 사랑하지 않지? 왜 유럽편들어? 이렇게 해서 화가나서 침공을 한 것입니다. 세상의 어긋난 사랑은 사랑을 위해 사랑이라는 행위와 가장 먼 폭력을 사용하는 모순적인 일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사랑으로서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는 모습을 세상에게 보여주고 가르쳐야 합니다. 교회가 사랑의 선지자 노릇을 해야 합니다.
9절과 10절에는 어떻게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지에 대한 예시가 등장합니다. 9절에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대접은 환대를 말합니다. 이 환대는 순회전도자를 위해서 식사를 대접하거나 숙소를 제공하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예배의 상황에서 애찬을 나누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성경의 명령대로 나그네나 소외된 자들에 대한 환대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건 이 환대는 기독교의 역사와 신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섬김입니다. 환대는 어떻게 보면 골치 아픈 일입니다. 집에 누가 온다고 하면 얼마나 신경이 쓰입니까? 식사를 뭘 어떻게 대접해야 할지 숙소를 어떻게 제공해야 할지 굉장히 신경이 쓰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하면 원망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원망이라는 단어는 수군거린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지난 번에 내 차례라서 식사를 대접했는데 차례를 왜 이상하게 정해서 또 내 차례야 이렇게 빨리 온 거야?” 이렇게 원망하며 수군거린다는 것입니다. 교회일을 하다가 보면 누가 못하는 상황이 생겨서 다른 어떤 이가 대신 담당해야 하는 상황이 오게 됩니다. 항상 봉사가 하는 사람들한테 몰립니다. 제가 처음 신앙생활한 교회가 70-80명 정도 됩니다. 첫 사역지가 만 명 다되는 교회교 그 다음에 300명 되는 교회에서 사역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들이 숫자랑 관계없이 다 희안하게 봉사하는 사람만 계속 합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지치고, 지치고 보면 불평이 나옵니다. 봉사를 최대한 나눠주고 함께 보람을 가지고 섬기도록 하는데 현실적으로 참 잘 안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당시의 환대도 그렇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환대도 8절 말씀에 근거해서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수군거리려고 해도 말을 절제하고 헌신하게 됩니다. 불평하거나 싸우거나 하는 죄 짓는 일 없이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됩니다.
10절에 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은사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 재능을 말합니다. 각각 은사를 받았다고 할 때 각각을 말하면서 은사는 단수로 말하는 것으로 보아서 사람마다 받은 은사가 다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은사는 다양합니다. 다양한 은사가 있기 때문에 교회가 더 아름답게 세워집니다. 넓은 정원에 한 종류의 꽃만 심겨져 있으면 얼마나 밋밋하겠습니까? 여러 가지 색의 꽃이 심겨져 있으면 정원이 더 아름다워보일 것입니다. 은사가 각각 다양하기 때문에 교회가 아름답게 세워집니다.
이 은사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사 가진 성도들을 하나님의 은혜를 맡은 청지기라고 묘사합니다. 은혜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지만 교리적으로 은혜는 하나님의 행위를 뜻합니다. 우리가 설교를 통해 은혜 받았다고 할 때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우리 마음과 생각이 바뀝니다. 지속적으로 은혜를 받으면 행동이 바뀌고 삶이 바뀝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행위, 하나님의 일하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행위,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은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공급해주는 청지기 역할을 합니다. 청지기는 아시는대로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종을 말합니다. 우리의 은사는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인데 우리가 잠시 맡았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서 대요리문답에서 설교하는 것을 은사라고 말합니다. 설교할 수 있는 이 능력이 제가 공부 열심히 해서 생긴 저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7년동안 신학을 전공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갈고 닦은 것이고 설교자가 되기 위한 증명에 불과합니다. 설교는 하나님이 주신 은사고 저는 그걸 맡은 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으로서 은사를 맡아서 해야 할 것은 서로를 섬기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서로라는 말이 자주 등장합니다. 서로 뜨겁게 사랑하고, 서로 원망 없이 대접하고 은사를 가지고 서로 섬깁니다. 이렇게 서로 서로를 섬기는 것을 통해서 나타나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11절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11절을 보시면 누가 말을 하면 하나님이 말하는 것처럼 하고 누가 봉사하면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셔서 봉사하는 것처럼 하라는 말이 나옵니다. 8, 9, 10절에 나오는 것처럼 서로 사랑하고 대접하고 봉사하고 하는 것들을 행할 때 내가 한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하신다고 하고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이 대접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섬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고 대접하고 봉사하는 것을 통해 드러나야 하는 것이 결국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 빛나야 하는 것은 사람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종말의 때에 많은 사람들이 서로 섬기기를 싫어하고 섬긴다고 해도 자기 영광을 위해서 하는데 성도는 서로 열심을 품고 섬기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야 합니다.
(적용) 섬김이라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섬기는 일은 노동의 관점에서 어려울뿐더러 자본주의 사회에서 섬김은 쉽게 돈으로 대체되기 때문에 “돈도 안 받는데 왜?”이렇게 되어버립니다.
섬기는 것 자체도 어려운데 섬긴다고 해도 섬기고 나서 그것을 온전히 하나님께 영광으로 돌려드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다 말로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 이 섬기는 과정에서 내가 생각하는 어느 정도의 인정을 받고 영광을 취하지 않으면 얼마나 서운하고 불안한지 모릅니다. 저 같은 설교자는 설교에 은혜 받았다는 이야기를 얼마나 듣고 싶어 하는지 모릅니다. 그런 욕망을 절제하려고 해도 끊임없이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올라옵니다.
이런 마음이 들 때마다 우리는 7절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되면 우리가 받는 인간적인 인정들은 의미 없는 것들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에 나온 것처럼 썩어지고 더러워지고 쇠하여지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가치를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려드리는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결론
설교를 맺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날부터 다시 오실 때까지 교회는 종말의 때를 살아갑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점점 다가옵니다. 우리는 종말의 때에 절제와 이성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절제로서 기도의 자리를 확보하고 이성으로서 말씀을 기준으로 현실 가운데 기도제목을 찾아 하나님의 나라를 설계해야 합니다. 그다음으로 우리는 종말의 때에 뜨겁게 서로 사랑하며 섬기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종말의 때입니다. 더 기도하고 더 사랑하며 섬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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