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을 꿈꾸며 현재를 견인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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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0장 우리들의 싸울 것은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M1. 문제 제기
M1. 문제 제기
우리는 어제 성도의 견인의 삶에 대하여 두 가지를 살폈습니다.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사는 삶이 바로 죄와 싸우는 성도의 견인임을 확인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또 하나의 견인에 대해 함께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이는 미래를 묵상하며 현재를 견인하는 삶입니다. 성도에게는 놀라운 미래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죄가 없고 악이 공존하지 않는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미래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도는 항상 이 미래를 꿈꾸고 푯대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이는 성도로 하여금 미래만을 꿈꾸게 하지 않습니다. 성도는 미래의 소망 안에서 현재의 죄와 싸우는 견인의 삶을 살고 미래로부터 오는 약속의 위로를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M2. 죽음을 소망하는 삶
M2. 죽음을 소망하는 삶
미래를 꿈꾼다는 말, 혹은 미래를 묵상한다는 뜻은 죽음을 소망하는 삶을 말합니다. 이는 죽음을 예찬하여 빨리 자살하자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이런 악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가벼이 여기고 세상에서의 삶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낙관적 기대를 가지고 생명을 가벼이 여기는 이들이 있습니다. 종종 이단들은 미래의 천국을 과도하게 홍보하며 지상에서의 삶을 무시하고 집단으로 목숨을 앗아가는 악한 일들을 하곤 합니다. 죽음 이후는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만나 영생을 보장받지 않는다면 심판의 저주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진정한 미래는 오직 이 땅의 삶에서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믿음의 은혜와 그 열매인 회개의 삶을 사는 것을 통해 보장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종종 사도들은 죽음을 소망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빌립보서는 특히 사도 바울의 죽음을 향한 갈망을 소개합니다. 빌립보서 1장 23절을 봅시다.
빌립보서 1장 23절
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사도 바울은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미래를 더 좋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하고 싶다고까지 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는 세상보다 더 좋은 천국을 소망하며 죽음을 꿈꾸고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단순히 죽음 예찬론자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3장에서 자신이 그렇게 죽음을 사모하는 이유를 밝힙니다. 빌립보서 3장 10, 11절을 봅시다.
빌립보서 3장 10, 11절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바울이 죽음을 사모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고난과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고 싶은 신앙적 열정 때문입니다. 더하여 신앙인에게 있어 죽음은 바로 부활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부활은 종말의 날에 오는 영광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볼 때 사람이 죽으면 곧 낙원에 이르고, 낙원은 하루가 천 년같고 천 년이 하루같은, 시간을 초월한 영원한 현재의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의 입장에서 보면 낙원의 삶은 시간이 없는 삶입니다. 이는 성도에게 죽음은 곧 종말의 부활과 맞닿아 있는 영원한 비밀의 은혜인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15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부활을 설명합니다.
고린도 전서 15장 51, 52절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사도는 죽은 자들은 순식간에 마지막 나팔 소리를 듣고 다 변화되어 썩지 않을 몸으로 부활하고, 살아있는 자들도 부활의 몸으로 변화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날은 끝날이 아니라 곧 종말의 날이고 부활의 몸으로 변화되어 부활의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는 새로운 삶의 시작의 날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죽음을 소망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M3. 미래를 묵상하는 삶
M3. 미래를 묵상하는 삶
이는 오늘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미래의 영광을 묵상하게 하는 놀라운 소망의 선언입니다. 회심을 설명하면서 개혁 교회의 선배들인 영국의 청교도들과 유럽의 신앙인들이 회심을 신앙고백으로 믿고 살았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 회심을 통해 중생을 체험하는 삶을 설교했다는 사실을 알려 드렸습니다. 바로 이들 신앙의 선배들은 자신들이 사역하며 회심을 권할 때 그들은 세상에 대한 소망이 아니라 죽음의 날을 소망하며 살았고 그것을 전했습니다. 죽는 날이 오기를 준비하고 그 날이 주는 영광을 묵상하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다리며 사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들 신앙의 선배들의 삶은 바로 사도 바울의 삶과 일치합니다. 사도 바울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의 죽음의 날을 푯대로 삼고 살았습니다. 오늘 본문 13, 14절을 봅시다.
빌립보서 3장 13, 14절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사도는 자신의 죽음의 날을 향해 달려가면서 앞에 있는 죽음의 날이 자신의 푯대이며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신 그 은혜의 상을 받을 날로 알고 달려간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성도의 견인의 삶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을 사모하거나 이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아야 합니다. 오히려 성도는 미래의 날들을 묵상해야 합니다. 미래를 소망으로 알고 죽는 날을 소망하며 견인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M4. 현재를 경멸하며 자신을 낮추는 삶
M4. 현재를 경멸하며 자신을 낮추는 삶
성도가 미래를, 혹은 죽음을 소망한다면 현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미래를 꿈꾸며 사는 성도의 현재적 삶에는 어떤 특성이 있을까요? 사도는 자신이 죽음을 소망하지만 이 땅에 더 머물게 될 것임을 성도들에게 공포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것이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성도들을 위한 것임을 알려 줍니다. 빌립보서 1장 24절을 봅시다.
빌립보서 1장 24절
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사도는 자신이 죽지 않고 이 땅에 사는 것이 성도들, 혹은 교회를 위해 더 유익하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이 땅에 남겨 두시면서 그가 그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살지 않고 교회의 유익을 위해 살게 하십니다. 사도는 죽음을 소망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미래를 더 갈구하지만, 이 땅에 남여 주의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일에 자신이 쓰임 받을 것임을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이런 삶은 성도를 존중하는 낮아짐을 통해 잘 드러납니다. 빌 3장 15절입니다.
빌립보서 3장 15절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바울은 푯대를 향해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죽음의 날을 향해 달려가는 삶을 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 땅에 남아 함께 사역하는 교회를 자신의 생각으로 억압하거나 누리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생각이 다르면 그 또한 아버지의 뜻으로 받고 그 이유의 근원되신 아버지의 뜻을 기다리겠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이 사도로서의 권위와 권세를 의지하지 않고 성도들의 마음의 생각들을 존중할 것을 다짐하고 빌립보 교회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어떻게 이런 낮아짐이 가능할까요? 우선 이런 삶을 우리는 성도의 견인이라고 말합니다. 현재의 삶에서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높이면서 나의 권위와 나의 위치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런 견인의 삶은 오직 현재를 높은 가치에 두지 않는 연습으로 이루어집니다. 물론 이것이 현실을 부정하거나 현재를 미워하는 것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현재의 세상의 관계들과 세상의 가치들에 무게를 두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경멸한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삶에 지나치게 무게를 두지 않는 것입니다.
왜요? 우리에게는 죽음의 날이 소망의 날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 죽음의 날의 가져다 줄 영광은 오늘 이 땅에서의 가치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도는 미래의 영광의 날의 가치들을 묵상하고 소망하는 삶을 살기 때문에 눈 앞에 있는 것은 고난일찌라도, 낮아짐일찌라도 기꺼이 그것을 선택하지 세상에서 높아지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사신 삶이 바로 이런 삶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 히브리서 12장 2절 말씀을 봅시다.
히브리서 12장 2절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주님의 삶은 한마디로 미래의 보좌 우편의 영광을 위해 십자가의 수치를 개의치 않으신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는 세상에서의 영광을 개의치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의 고난도 개의치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미워하고 혐오하지는 않지만 경멸하며 가벼운 것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래의 영광의 날이 오늘의 소망이 되고, 위로가 되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성도가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회개의 삶, 곧 견인의 삶인 것입니다.
M5. 적용과 결단
M5. 적용과 결단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미래를 보시고 현재의 고난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미래의 날을 푯대로 삼고 현재의 교회 안에서 영광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교회의 머리이시고, 바울은 주님의 사도로서 일하면서 두 분 다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견인의 삶이 있습니다. 이는 현재를 무겁게 보지 않고 사는 삶입니다. 오늘 사람들 앞에서의 영광을 그렇게 존귀한 것으로 보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두 분 다 미래의 영광을 더 크게 보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머리 둘 곳 없이 사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고, 교회에서 사도로서 혹은 목회자로서 분명한 권세를 가지고 있었으나 모든 성도들과 자신을 동등하게 여기고 살기로 작정하며 사신 분이 바울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사람이 현재의 재물과 현재와 미래 모두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입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길은 이 땅의 재물보다 미래의 영광을 묵상하고 현재를 가벼이 보는 삶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참된 견인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회개한 사람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소망하며 이 땅이 아니라 천국의 영광을 꿈꿉니다. 물론 오늘을 무책임하게 살아도 되는 것은 안됩니다. 오늘이 주는 영광을 가볍게 여기고, 미래에 주시는 영광을 소망하며 참된 회개자의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우리 모두가 힘써야 할 견인의 삶임을 주지하고 참된 견인의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