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414 새벽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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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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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8:39–40 (NKRV)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
요한복음 19:1–6 (NKRV)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앞에 가서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으로 때리더라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
본문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인간의 모습은?
갈대와 같이 흔들리는 빌라도
갈대와 같이 흔들리는 빌라도
오늘의 본문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향한 세 번째 재판의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8절까지의 말씀을 보게되면 빌라도는 이제 예수님을 관정에 남겨둔 채, 다시 유대인들 앞으로 나아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요한복음 18:38 (NKRV)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사실 이것으로 사건이 종결되어야 했지만 빌라도는 바랬던 바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심문해도 죄가 없는 ‘예수님’을 석방하는 것, 그리고 지금 화가 잔뜩 나 있는 ‘유대인’들 달래는 것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다시 한 번 유대인들 앞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상기시키는 것이죠.
요한복음 18:39 (NKRV)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하지만 이러한 빌라도의 계획은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요한복음 18:40 (NKRV)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
지금 성난 군중들이 풀어달라고 외치는 바라바라는 인물은 죄수이며 살인자입니다.
공관복음으로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보시게 되면 바라바에 대해 ‘유명한 죄수’, 그리고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 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 빌라도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 이 자라면.. 지금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죄수이며 살인자인 바라바와 비교하면 예수님을 석방하라고 하지 않을까?’
하지만 결국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빌라도는 예수님을 채찍질 하라고 넘겨주게 되면서 네번 째 재판을 19장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전개가 되어집니다.
연극 중에 ‘빌라도의 고백'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 작품을 보면 중간에 빌라도가 이렇게 독백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는 예수님을 해한 적이 없는데, 왜 예배 때마다 고백하는 사도신경에서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라고 하는 것입니까? 저는 너무 억울합니다.”
빌라도는 유대를 다스리는 로마의 총독이었고, 그 나름대로 아주 공평하게 예수라는 인물을 재판하려고 애썼음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순간순간의 상황’에 영향을 받으면서 그의 마음이 마치 갈대와 같이 흔들렸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마음이 흔들리고, 결정이 바뀌어지게 됨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넘기게 되어집니다. 분명 빌라도가 재판을 통해 이렇게 백성들에게 선포했습니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다.”
이렇게 선포한 빌라도가 다시 백성들 앞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근데..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다.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분명히 이 사람에게는 죄가 없다고 무죄를 선포했음에도 다시 백성들의 반응에 의해 마음이 흔들리고 결정이 바뀌어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몇 가지의 이유가 있겠지만, 빌라도가 이러한 결정을 하게 된 원인에는 ‘총독으로서 백성들에게 인기를 놓치지 않기 위함’, 그리고 자신은 이 선택에 죄가 없기를 바라는 .. 이른바 ‘회피’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본문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참 안타까운 이 빌라도의 모습을 보면서 저도 잠시 제 삶을 오늘의 말씀에 비춰보게 되었습니다.
왜 빌라도가 처음에는 옳은 선택을 했음에도 계속해서 번복을 하며 그렇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넘겨주었을까...
여러가지 이유들을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결론적으로 내린 이유는 ‘지금 빌라도의 마음'이 어디에 집중되어져 있는가 였습니다.
매 재판마다 보시면 빌라도는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예수님에게는 죄가 없다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무죄를 결정하려 하는데.. 그 마음이 예수님이 아닌 백성들 앞에만 서게되면 흔들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계속해서 백성들의 반응, 자신의 입지 같은 것들에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빌라도는 예수님 앞에 서면 무엇이 진리인지 안다는 것입니다. 근데 군중들 앞에 서니까 자신이 이들에게서 받아야 할 환호, 인기, 그리고 백성들이 보기에 좋을 결정들.. 이런 것들이 보이면서 마음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우리 삶을 한번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말씀을 통해, 그리고 기도함을 통해 예수님이 주신 확신과 비전이 있습니다. 우리 삶에 이 말씀만 바라보고 가면 문제가 없는데 문제는 어디서 생기냐면 자꾸만 세상의 소리에 귀를 열고, 세상의 시선에 신경쓸 때 시작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주는 바른 결정이 아닌, 흔들리는 마음이 이끄는 욕심들로 인해 잘못된 결정을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주님이 주시는 말씀, 진리를 붙들었다면.. 끝까지 그 진리 붙잡고 고난주간을 보내기를 소망합니다. 말씀을 통해, 기도의 자리를 통해 주신 진리를 정확히 붙잡고.. 최후의 승리를 위해 끝까지 흔들림 없이 고난주간을 승리할 수 있는 우리 성도님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또 한가지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인간의 모습은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는 군중들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는 군중들
요한복음 19:5–6 (NKRV)
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
결국 빌라도가 예수님을 군인들에게 넘겨주게 되고, 예수님은 군인들에게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게 됩니다. 여기서도 빌라도는 마음이 계속해서 흔들립니다. ‘내가 지금 잘 하고 있는 것인가..’, ‘죄없는 이 사람을 내가 십자가 형으로 보내는게 맞는건가..’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4-5절에서 빌라도의 마음을 성경이 기록합니다.
요한복음 19:4–5 (NKRV)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빌라도가 예수님을 데리고나와서 성난 군중들에게 선포합니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이 모습을 좀 보십시오! 이 사람이 어떻게 죄인이란 말입니까?”
이 선포와 동시에 예수님이 가시관을 쓰시고, 자색 옷을 입은 채, 무리들 앞에 나타나십니다. ‘이러한 초라하고 비참한 모습을 보면 아마 무리들이 예수님을 놓아주라고 하지 않을까?’ 빌라도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습을 본 무리들은 더 흥분한 채, 소리를 질러 외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9:6 (NKRV)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지라...
오늘 예수를 보고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는 이 군중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로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실 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 예수님 환영합니다! 를 외쳤던 바로 그 백성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우리를 구원하실 왕이라며 그렇게 목이 터져라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환영했던 그들이 이제는 대제사장들 사이에서 몇 번의 재판을 보게 되면서 이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그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사람은 참 무서울 만큼, 적응을 잘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처음에는 서툴었던 그 일들도 이제는 며칠만 지나도 능숙하게 해내고, 도저히 적응이 안될 것 같은 새로운 환경에도 불과 며칠만 지나면 마치 내 집인듯, 잘 적응을 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도저히 적응할 수 없을 것 같아보이는 것들도 내가 언제 어색해했나? 생각할 만큼 금새 적응하고, 이건 못한다 생각하는 것도 어느새 능숙하게 해내는 모습을 봅니다.
근데 제 삶에 저조차도 무서운 것이 하나 있다면 이 은혜가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어제 받은 은혜가 그렇게 감격스러웠는데,, 그래서 그 은혜를 평생 잊지 못하고 살아갈 것 처럼 오늘을 살다가도.. 다음날 아침이 되면 이 은혜의 감격이 그저 그런 것, 당연한 것으로 되어질 때가 너무 많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시는 감격적인 순간을 목도하며 ‘호산나’ 드디어 우리를 구원할 메시야가 오셨다고.. 그렇게 외쳤는데, 그 다음날이 되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는 모습이 우리 삶에 너무나도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잊지 않고 늘 기도하는 몇 가지의 기도제목이 저에게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게 도와주시옵소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구원의 사랑을 값 싼 것처럼 여기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우리 성도님 여러분,
백성들의 이 모습을 보며 오늘 우리 삶을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혹시 내 삶의 어떠한 영역에,, 어제는 호산나 환영했다가 오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고 있는 이러한 변한 모습이 있지는 않은지 꼭 돌아보시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하루도, 변해버린 모습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어리석은 행동이 있었다면.. 이제부터는 내 삶에 오신 구원자를 노래하는 ‘호산나’의 감격을 잊지 않고 끝까지 그 은혜,, 그 감격을 찬양하는 우리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계속 되어지는 고난주간을 승리함으로 보내는 우리 성도님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