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예수의 제자 요19: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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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 여러분은 고난주간을 30여일 전부터 목사님의 매일 묵상의 말씀을 통해서 접하고 계셨을 겁니다. 오늘은 수요일이고 마가에 따르면 14장에 유월절 이틀 전 여자가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사건과 유다가 배반을 약속하는 기사를 다루고 있는 날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조금 더 앞서 본문의 말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이미 죽으신 후에 그리고 안식일 전날의 내용을 다루는 본문입니다.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요한이 보는 시각입니다.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을 잘 정리해주었습니다.
요한복음 20:31 NKRV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생명을 얻는 다는 주제는 이번 주에 있을 부활과도 잘 연결되는 주제입니다. 오늘 본문 전에 예수께서 33절 이미 죽으신’ 상태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것처럼 다리를 꺽지 않았고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피와 물이 나왔다고 말함으로써 예수의 죽으심이 확실한 것 그리고 그러한 일이 36절에 ‘성경을 응하게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37절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요19:37
요한복음 19:37 NKRV
37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여기에 또다른 성경이란 어디일까요 계1:7
요한계시록 1:7 NKRV
7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다루기전에 5절을 할예하여 두 사람을 다루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많은 교회가 고난주간을 지나면서 마태와 마가복음을 중심으로 고난주간을 다루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고난 주간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에 참여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도 있고 그들의 감정을 나타내는 표현들도 있기에 고난 주간을 통과하는 성도들에게 유익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반면 요한은 사실을 전하면서 오히려 실패한 유다와 베드로에 대한 이야기라든가 빌라도의 이야기에 더 집중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렇습니다. 아리마대 사람과 니고데모의 이야기를 넣었습니다. 왜 일가요?
그럼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중요시 여기지 않았다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십자가의 대속의 사건은 바로 하나님께서 응하게 하려 하신 것이라고 처음부터 대놓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제자였던 가룟 유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빌라도 역시 결국은 예수님을 못박는 결정을 함으로써 인간 재판관도 무죄함을 알면서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요한의 말을 풀어본다면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거 이 부분이 대단히 중요한데 우리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라는 고백을 하지만 그것이 내 삶의 실재와 그리고 그 다음에 이어지는 구현화까지 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 그 삶을 살아내는 두 사람을 소개하겠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라는 사람이고 또 한사람은 니고데모라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요한복음을 시작하면서 보아왔던 니고데모라고 하는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특히 여기 요셉이라는 사람은 다른 복음서 모두에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이 기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요한은 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을 예수의 제자라고 소개를 합니다.
다른 복음서를 비교해 보니까, 마태복음에서는 부자이고 예수의 제자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마27:57
마태복음 27:57 NKRV
57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마가는 막15:43
마가복음 15:43 NKRV
43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이 사람이 존경 받는 공회원 신분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는 표현을 통해서 예수의 제자는 곧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3:50–51 NKRV
50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51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누가역시 공회원이라고 소개하며 그기 선하고 의로운 자라고 소개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를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고 더 소상하게 설명하면서 역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고 소개합니다.
그러니 공간복음의 소개에 비하면 요한의 소개는 좀 박한 편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그가 예수의 제자였다는 것을 먼저 밝힘으로써 오히려 요한은 세상에서의 가치보다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는 요즘 말로 그리스도인 이라는 말이 더 집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여러분을 소개하는 다양한 말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의 제자’라는 것이 더 우리를 소개하는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바로 이 제자인 요셉은 자신이 제자라는 사실을 숨겼다고 말합니다. / 그 이유는 유대인을 두려워 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신분은 공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행동을 보십시오.
그가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요구는 몰래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죄목은 반란선동죄이기에 그대로 두어 독수리 밥이 되게 함으로 최대한의 수치를 보이는 것이 로마가 죄인에게 그것도 반란죄를 당한 예수께 행해야 하는 관례였습니다. 그러니 관례에 맞지 않는 일종의 무리한 요구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행동은 아마도 순식간에 공회원에게 알려졌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않으려고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꺽어 시체를 치워 달라고 31절에 말함으로써 가족이나 조상의 묘가 아닌 범죄자를 위한 매장지로 옮기는 것이 보통인 것입니다. 이런 행동은 소위 말해서 티가 너무나 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마가는 ‘용감히’라고 말함으로써 그 행동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나서야 하는 시점이었습니다. 요한은 ‘이 일들 후에’라고 기록하지만 마가는 그 시급함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막15:42
마가복음 15:42 NKRV
42 이 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 때에
개혁개정에는 그 의미가 잘 안사는데 개혁한글에는 ‘이미 저녁이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예수의 시신을 가까이 하면 부정하게 될 상황에 놓이고 그렇게 되면 유월절에 참석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는 이런 시급한 상황에서 그 진가가 발휘되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어쩔수 없다고 그냥 넘길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적당하게 핑계되면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유대인의 무서워함을 넘어서 용감한 행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이 바라보는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의 표현에 따르면 그는 ‘그들의 결정과 행동에 동참하지 않았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많은 사람이 가는 길을 따라 가는 것이 현실적이고 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고 제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그들의 결정과 행동에 동참하지 않는 용기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위해서 한 사람을 죽이는 결정이 옳다고 말하는 사람들, 예수를 비호하면 로마의 폭정이 더 심해지기에 그를 반란자로 고발하는 다수의 사람들의 결정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고 따르지 않는 용기를 가진 사람입니다.
로마서 12:2 NKRV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던 요셉은 하나님의 나라를 지금 경험하고 이있는 것입니다.
이제 두번째 사람 니고데모입니다.
39절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찾아왔습니다. 아리마대 사람은 유대인이 무서워서 숨겼던 사람이고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지도자라 불렸지만 요한복음3:2절에 ‘밤에 예수께 왔다’고 말합니다. 특히 니고데모가 요셉과 함께한 내용은 요한복음에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의도적으로 두 사람의 처음이 부정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랬던 니고데모는 어떤 행동을 했습니까.
39절에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한 리트라가 327그람이니 백 리트라는 32,700그램인 셈이고 같은 단위인 근은 마리아가 순전한 나드 한근을 드렸던 사건을 기억해보시면 백 근 이라는 없청난 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사이 니고데모는 예수를 만나고 변하였습니다. 무서워서 두려워서 숨겼던 요셉은 용감히 나서서 시체를 요구했고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는 밤이 아닌 시간에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몰약과 침향 썩은 것을 준비하여 찾아왔습니다.
이제 우리도 며칠 후면 부활의 기쁨을 예배로 드립니다. 용기를 내어 교회에 첫발을 디딜 수도 있고,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할 수도 있으며 작년 보다 성숙한 모습으로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신앙의 모습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장례를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했습니다. 로마의 관습은 시체가 썩도록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숨어 있던 주님의 제자라 불리는 이들은 예수님의 장례를 통해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치룸으로 최종적인 모욕을 당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뿐만아니라 새 무덤에 장례함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포함되어 있는 수치를 해소하고 명예를 지키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일은 결국은 알려지게 됩니다.
마태는 새 무덤이 요셉 자신을 위해 준비한 무덤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마태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 무덤을 지켜달라고 요구하는 내용을 기록해 둡니다.
마태복음 27:62 NKRV
62 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마태복음 27:63 NKRV
63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직역하면 ‘ 주여, 저 거짓말쟁이가 아직 살아 있을 때 내가 사흘 후에 살아날 것이다’라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는 것이고 그래서 그 무덤을 셋째 날까지 안전하게 지키도록 명령해 달라고 빌라도에게 요구합니다.
예수님의 장례에는 제자들이 없었습니다. 막14:50
마가복음 14:50 NKRV
50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얼마나 급했던지 한 청년은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혔고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제자로 불렸던 이들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숨어 있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드러났다고 요한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난주간을 지나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고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의미를 되새기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요한은 하나님의 나라의 제자는 이런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처럼 용기내어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또한 말씀으로 성장하여 밤에 다녔던 어둠에서 빛 가운데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들이 하나님 나라에 맞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안타깝게도 방역에 반대하고 교회에 나오는 것을 용기라고 말합니다. 말씀으로 성장하여 일군이 되는 것이 아니라 물질로 봉사하는 것을 최고라고 말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를 위하여 고난 받는 일에 동참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일원이 되길 바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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