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197 viewsNotes
Transcript
부활의 진정한 의미
부활의 진정한 의미
마28:1-20, 막 16:1-20, 눅 24:1-53, 요20:1-21:25 본문의 위치
예수께서 다시 사셨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기독교에서 부활 빼놓고는 이야기를 할 수 없습니다. 오늘은 부활절이고 대부분의 교회는 다양한 말씀과 방법으로 부활의 의미를 되새기며 감사와 기쁨의 시간을 보낼 것입니다. 그럼에도 정작 부활의 깊은 의미를 온전히 알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마치 유명한 건축물이 있는 관광지에 가서 사진을 찍을 때 사진의 중심에는 내가 자리 잡고 있어야 하는 것 처럼 부활절에도 예수가 중심이기 보다는 그 외의 것들이 중심에 놓일 때가 많습니다. 부활의 중심에는 예수가 있야 합니다.
복음서를 기록한 4명의 저자는 그 내용에 있어 차이는 있으나 분명하게 예수가 중심에 있습니다.
마가는 역사의 현장에 갑자기 등장하신 것처럼 예수의 어린시절과 성장의 이야기는 없이 바로 복음의 시작을 알리면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신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마태는 긴 족보를 열거하면서 경배 받기에 합당한 그분이 왕이시라고 소개하고 십자가에서 유대인의 왕 예수로 죽으셨다고 기록합니다.
누가는 그런 예수가 우리와 같은 인성을 가지시고 하나님의 뜻을 묵묵히 순종하며 걸어가진 분으로
요한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그래서 모든 중심에 예수를 두고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 자신과 우리 교회 공동체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적용을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며 설교자의 몫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먼저는 성경이 말씀 하시는 예수를 전하는 것이야 말로 그 어떤 것보다도 우선되어야 하며 그 속에서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저는 4복음서의 부활을 살피보고자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부활의 의미를 먼저 찾고 오늘 우리 가운데 적용하고자 할 것입니다.
먼저 다시 사셨다는 사실은 인간이 갖는 모든 지식의 범주를 벗어나는 영적인 영역 곧 믿음의 영역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다시 사셨다는 사실을 어떤 지식이나 과학으로 입증하려 하지 않습니다. 복음서의 부활 기사는 무덤에 시신이 없다는 사실을 목격한 여성들을 중심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1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마가는 여기에 살로메라는 여인을 더하고 누가는 ‘그 여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녀들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마련한 새 무덤에 안식일 후 첫째날 일찍 찾아가서 발견한 빈무덤을 부활 기사의 첫 소식으로 전합니다. 부활을 기록하는 시작이 부활하셨다. 다시 사셨다가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된지 사흘만에 좌절과 슬픔속에서 예수께 향하는 그녀들의 시선을 따라 움직입니다. 그렇게 시작한 부활의 사건은 본문에서 마태는 지진이라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보여줍니다.
본문의 의미를 살려 읽으면 2절 ‘그런데 보라! 강한 지진이 일어났다. 왜냐하면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왔고 천사들은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았다고 기록합니다. 이것을 지켜본 무덤을 지키던 자들은 무서워했습니다. 다시 천사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전할 때 ‘말씀하신 대로 그는 살아나셨다’라고 선포합니다. // 이런 표현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다시 사심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된 것입니다.
마가는 힌 옷을 입은 청년이라고 했고 // 누가는 두 남자가 눈부신 옷을 입고 있다고 했습니다. // 요한은 아예 대놓고 그분이 예수시다 라고 선포를 합니다. // 마태와 마가 그리고 누가는 그녀들의 입을 통해서 ‘그는 살아나셨다’라고 선포를 했다면 // 요한은 아예 예수님을 알아본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서 예수의 다시 사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사셨다는 천사들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9절에 그녀들을 만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갈릴리에서 ‘나를 보리라’고 기록합니다. 부활의 소식은 이제 제자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전해집니다. 계속해서 마태는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의 시선을 좇아서 경비병들의 보고를 다루고 - 돈을 받고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갔다고 소문을 내게 했다고 기록합니다. 반면 마가와 누가는 제자들이 여자들의 말을 듣고도 믿지 못했고 누가는 제자들이 ‘헛소리처럼 생각되었다’고 그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다시 사심은 듣고는 믿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과 한편으로 경비병의 이야기를 들은 대제사장들은 이런 사실을 막기 위해 목격한 경비병들의 입을 돈으로 막고 증거를 조작하고 있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다시 사신 예수께서는 의심하고 믿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간 이들을 찾아 가십니다.
마가와 누가는 -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모습을 숨기시고 나타나신 장면을 기록했습니다.
누가와 요한은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자신을 보여주시는 기사를 기록한다. 예수님은 눅24:38-39
누가복음 24:38–39 (NKRV)
38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말씀하시면서 부활하신 존재가 단순히 영적인 것만이 아닌 그 이상이라는 것을 직접 만져보게 하시는 체험학습까지 시키셨습니다. 그런 경험을 통해 요한은 요20:21
요한복음 20:21 (NKRV)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고 그들의 사명까지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계속해서 요20:22
요한복음 20:22 (NKRV)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바로 성령은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는 능력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특히 도마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20:29
요한복음 20:29 (NKRV)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입니다. 믿음은 눈으로 본 것에 갇히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잘 아시는 말씀처럼
히브리서 11:1–2 (NKRV)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부활은 보는 것이 아니라 증인들의 증언을 듣고 믿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부활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도마처럼 믿음이 연약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럴 때 예수께서는 우리 마음에 완악함이 있다는 것을 아시고 꾸짖어 바르게 하십니다. 막16:14
마가복음 16:14 (NKRV)
14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지금까지 살펴본것처럼 부활은 이것이다 라고 몇마디로 정의내릴 수 없습니다.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는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히9:27 “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기 때문에 부활은 오로지 하나님 편에서만 깨닫게 하시는 놀라운 은혜입니다. 복음서에서 나타난 부활 사건을 경험한 증인들의 목격과 부활 후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변화된 모습은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몇 가지 의미를 발견하게 합니다.
1. 예수님의 부활은 절망 가운데 빠져 무덤을 찾던 여자들에게 기쁨의 소식이 됩니다.
마태복음 28:9–10 (NKRV)
9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10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절망 가운데 빠진 그녀들이 예수 다시 사셨다 라는 소식을 통해 천사들의 위로와 주님으로 부터 직접적인 위로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수님은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는 축복의 메시지를 받습니다. 그녀들은 무서움과 기쁨의 감정 가운데서 예수님의 위로를 받고 말씀을 듣게 됩니다. 우리는 여전히 예수를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그녀들과 달리 다시 오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으로 만주의 주로 심판하실 날 가운데 재림하셔서 예수믿는다는 이유로 당한 우리의 모든 고통에 신원해 주시는 예수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사셨다는 소식은 눈물을 기쁨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들이 코로나로 인해 또는 다양한 병마나 어려운 경제 문제로 인해 아니면 가족간이나 주변 사람들과의 불화 가운데 마치 예수님이 없는 것처럼 절망하거나 고통 가운데 있습니까? 절망은 사단의 세력이 우리를 예수로 부터 떨어 뜨리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가룟 유다가 절망의 늪에 빠져 자신의 목숨을 버렸습니다. 이런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슬픔이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기쁨의 소식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 그리고 다시 사심 속에서 슬퍼하며 고통받는 이들을 기억하시고 위로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죽음 앞에서 천국 부활소망을 굳게 잡는 것입니다.
히4:14-16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기도하셨던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다시 절망이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 모두가 상속받게 하기 위해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셨고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왜 우느냐고’ 우리의 사정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삶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워 절망할 만한 상황에 붙잡혀 있는 우리라면 오늘 ‘다시 사셨다’는 놀라운 소식이 위로의 시간이 새롭게 말씀을 받는 시간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2.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다시 온전히 세우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연약한 우리의 믿음을 다시 온전히 세우십니까?
첫 번째,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우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엠마오로 떠난 제자들에 모습을 숨기고 나타나셨습니다. 눅24:27
누가복음 24:27 (NKRV)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그러자 그들의 마음이 다시 믿음으로 마음을 뜨겁게 데우셨습니다. 눅24:32
누가복음 24:32 (NKRV)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그 결과 그들은 눅24:52-53
누가복음 24:52–53 (NKRV)
52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53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두 번째 깊은 교제로 다시 믿음을 세우십니다.
의심 많은 도마에게는 더 적극적으로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요20:27
요한복음 20:27 (NKRV)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세 번째 믿음 없음을 꾸중하시면 다시 세우십니다. 막16:14
마가복음 16:14 (NKRV)
14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책망하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다시 세우시기 위한 예수님의 방편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믿음 없는 것은 우리 마음의 완악함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더 깊은 절망으로 빠지 않기 위한 책망을 받으십시오. 그럼에도 이 자리의 목적은 책망이 아니라 함께 음식을 나누는 교제의 자리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럼에도 예수님은 책망보다 더 선호하시는 방법이 있습니다.
네 번째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 우리를 회복시키십니다. 어떤 제자들은 원래 자기 직업이던 어부로 돌아갔습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 예수님을 잘 믿다가 여러 사정으로 믿음을 잃거나 이로 인해서 다시 교회로 돌아오지 못하시는 분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이런 절망의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책망보다 더 깊은 인자하심을 베푸십니다. 요21:5-6
요한복음 21:5–6 (NKRV)
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예수께서는 이런 상황에 왜 포기하고 거기 있느냐고, 왜 그것 밖에 안되냐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그리고 “6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이것이 주님의 방법입니다. 혹시 여러분 주위에 오히려 교회를 떠나니 마음이 편하고 하던 일도 잘된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오늘 이 말씀을 선물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여전히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놀라운 은혜의 방편이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그분들에게 그 속에서 주님을 발견하게 되시길 바란다고 부활의 예수를 전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예수님은 이런 방법으로 연약한 믿음을 다시 온전하게 세우십니다. 그래서 베드로처럼 요21:7
요한복음 21:7 (NKRV)
7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서슴없이 바다로 뛰어 내리게 하는 전인격적인 마음의 변화를 이끌어 내십니다.
마지막으로 3.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다시 오심과 그때까지 사명이 있음을 알게 하십니다.
막16:15 “15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그래서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하십니다.
마태 역시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그들을 가리치라’고 하십니다.
누가는 다시 살아나신 예수 이름을 통해 눅24:47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이를 위하여 높은 곳으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때까지 그 성에 머물라고 하셨습니다.
요한은 21장에서 더 많은 내용을 기록합니다. 물고기를 잡는 사건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조반을 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긴 이야기의 주인공인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고 치라고 하시면서 이 땅의 교회가 주님의 사랑으로 양을 먹이는 일을 통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교회의 사명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부활의 기쁨은 베드로처럼 바다로 뛰어 내리게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감정이나 기분으로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부활을 경험한 사람은 능력으로 입혀질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행9:19-20
사도행전 9:19–20 (NKRV)
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20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즉시로’ 하나님의 아들을 전파했습니다. 하지만 큰 착각이었습니다. 강력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갈1:17
갈라디아서 1:17 (NKRV)
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바울은 아라비아로 가서 3년이라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서 사역을 하시기전에 광야에서 40일을 보내시면서 사단의 시험을 이겨내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의 학교에 입학한 학생입니다. 학생이 배우기를 힘써야 하는 것처럼 사명자로 세우신 주님의 말씀을 감당해야 합니다. 믿음은 우리를 움직이게 합니다. 특히 야고보 사도는 약1:5
야고보서 1:5 (NKRV)
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고 하셨습니다. 예수 다시 사심을 통해 위로를 받고, 연약한 믿음이 다시 세워짐을 받는 이들은 사명자로 세워 집니다. 이들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고 초대교회를 세우고 만방에 복음이 전파되는 놀라운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여전히 오늘 우리에게 능력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다시 오실 예수님을 소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명이 있는 자, 사명을 받은 자만이 다시 예수의 오심을 학수고대 합니다.
바로 초대교회 성도들은 부활신앙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사도 베드드로는 행2장의 신약 첫 설교를 통해 그리스도의 부활을 설교하였습니다. 그 설교를 듣고 많은 무리가 우리가 어찌할꼬 라고 마음이 찔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행2:38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역시 그의 첫 설교 행13장에서 행13:30 “30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신지라” 라고 부활을 설교하였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의미가 행13:38 “38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이 잉서 39절에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신칭의의 복음입니다. 그러니 이신 칭의복음의 핵심은 다시 사신 예수를 믿는 믿음입니다.
행17:30-31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말씀은 죽은 자 곧 십자가의 사건과 다시 살리신 것 곧 부활에 대한 ‘믿음 만한 증거’가 이런 사실이 역사적으로 분명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하면서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그리고 그런 사실이 고전15:5-6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라고 기록하면서 더욱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전15:14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그리고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성도 여러분 특별히 이번 부활절은 40일 전부터 말씀을 통하여 고난에 대하여 깊이 묵상할 수 있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고난과 영광 그의 죽으심과 부활은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초대교회의 많은 이들은 이 둘을 분리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 사역가운데 보여주신 것을 사도들은 그대로 전하였고 그 사도들의 복음위에 교회는 세워졌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십자가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에 교회는 존재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매주 사도신경을 통해 이것을 고백합니다. 새롭게 번역한 사도신경 두 번째 예수님에 관한 고백은 이렇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리구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라고 고백함으로써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이 역사적으로 분명한 사실임을 우리의 고백으로 삼는 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은 의미는 분명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고통과 좌절에서 기도를 끝내서는 안됩니다. 부활이신 예수님을 고백해야 합니다. 절망 가운데 희망을 노래하고 연약한 믿음 가운데서 다시 세우시는 부활을 경험하고 그리고 다시 사심을 통해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가 됩시다. 이런 모든 성도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그 누구보다 애타게 기다리는 믿음의 소유자가 될 것입니다.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 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