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417 부활하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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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눅 24:25-36
누가복음 24:25–36 (NKRV)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28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29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33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36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기독교인인데 부활을 안 믿어요.
25절입니다.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기독교인인데 부활을 안 믿어요.
왜냐하면 눈이 안 보이기 때문입니다.
31절에 보면 그들의 눈이 밝아졌다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그 전에는 눈이 밝아지지 않았다는 말 아닙니까?
부활의 역사성에 대한 증거로 ‘다중 출현’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다양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시간대에, 다양한 장소에서 나타나셨다는 것이죠.
어떤 때는 여자들에게
어떤 때는 남자들에게도
어떤 때는 한두 사람에게
어떤 때는 열두 명이 모인 장소에서,
심지어는 500명이 넘는 사람이 모인 장소에서
다양한 시간 대에, 다양한 방법으로, 다양한 장소에서 나타나셨다는 것 자체가,
예수의 부활하신 것을 역사적으로 증거하고 있단 말입니다.
또 정황상의 증거가 있는데,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이후에 상당히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엠마로오 가는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실망한 모습이 역력해요.
와, 믿었는데, 죽어뿌네 하면서 실망합니다.
그런데 그랬던 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예수님이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 안 죽었네
아니 죽었는데, 우리가 봤다. 이거 다시 살아나신 거 아니냐?
하면서 예루살렘으로 열심히 되돌아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게 정황상의 증거에요.
실제로 베드로도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었어요.
나 예수 모른다. 나는 예수님과 상관 없다.
이렇게 말했었어요.
그런데 사도행전 나중에 읽어보세요.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성령의 선물을 받으면 구원을 받지만,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받을 것이다. 하면서 베드로가 변했어요.
이게 정황상의 증거입니다.
2.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면 사람이 변합니다.
죽음에 대한 생각도 바껴요.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했어요.
절대 이길 수 없는 게 죽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죽으면 끝이다.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리스도 사람들은 죽어야 행복이 시작된다고 생각했어요.
더러운 현실, 힘든 현실, 죽고 나면 모든 것이 끝이다.
죽으면 영혼의 자유를 얻는다.
그러면 더 행복해진다.
그러니까 죽자, 죽어야 한다 이렇게 생각했어요.
이 사람들은 천국도 안 믿고 지옥도 안 믿으니까, 그냥 죽으면, 영혼이 육신에서 해방되어서 참 자유를 누릴 수 있겠거나, 막연하게 생각했다는 거에요.
그런데 여러분 그렇지 않아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한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서는 누구도 죽음 이후에 천국을 누리지 못합니다.
아무도 천국에 가지 못해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천국에 가는 거에요.
3. 강도사님도 어린 시절에 정말 죽고 싶다. 너무 힘들다.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그런 생각을 한 이유가 뭐겠어요?
정말 제대로 살고 싶다. 정말 행복하게 살고 싶다. 어떻게 인생이 이러냐?
남들은 다 행복하게 잘 사는 거 같은데, 나는 왜 안 행복하냐?
뭐 이런 생각 때문에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여러분, 죽고 싶다, 살기 싫다.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아, 내가 정말 행복하지 않아서 그렇구나. 행복한 삶을 살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그렇구나.’하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강도사님은 어린 시절에 힘든 문제가 있어도 선생님이나 친구들에게 쉽게 이야기하지를 못했어요.
그러니까 더 많이 힘들었던 거 같아요.
여러분도, 여러분 이야기를 잘 하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마음이 더 힘들 수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 매달려야 해요.
힘들다고 그냥 힘들게만 있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 저 너무 힘들어요. 하나님 저 좀 도와주세요.
그렇게 기도해서 당장 변하는 게 없어요. 그래도 기도하셔야 되요. 하나님이 일하시는 타이밍이 있거든요. 그 타이밍을 기다리면서 계속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4. 아무튼 부활이 믿어지면 죽음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됩니다.
삶이 행복해지고 자유가 오게 되요.
내가 지금까지 살려고 열심히 살았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되요.
그러면서 더 이상 살려고 사는 삶을 살지 않고,
이미 받은 부활을 누리면서 사는 삶을 살게 되는 거에요.
내가 지금 사는 삶은 이미 주신 영생을 누리는 삶이고,
내가 죽는다고 해도 더 좋고 행복한 삶이 앞으로 기다리고 있으니까, 현실 문제에 대해서 덜 집착하게 되는 거에요.
옛날에는 시험 성적 조금만 안 나와도 죽고 싶고, 인간관계가 조금만 안 좋아지거나, 가정에 불화가 생기거나 엄마 아빠가 조금만 다투셔도 마음이 힘들고, 이런 집에서 살기 싫다. 이런 생각을 했었는데, 이제는 인생에 문제가 좀 생겨도, 별로 마음이 힘들어지지 않는 거에요.
오히려, 그렇게 세상에서 다투고 힘들어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안타깝고, 저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았더라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더라면, 저렇게 아둥바둥하면서 살지 않을텐데 하는 마음이 생기면서, 아버지나 어머니, 주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기도해주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 거에요.
5. 말씀의 결론입니다.
부활이 믿어지든 믿어지지 않든 역사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증거하고 있어요.
한글이 존재하는 것을 보면, 세종 대왕이 확실히 존재했었고, 한글을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죠?
그것도 마찬가지에요.
제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파하고,
놀랍게도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이 있는 것을 보면은, 아 확실히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세상을 다스리시고 계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경영학을 공부해보면 아무리 위대한 회사나 기업도 10년 20년을 꾸준히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그만큼 무언가가 오랫 동안 존재하는 게 힘든 거에요.
그렇게 강력했던 로마 제국도 500년이 지나니까 붕괴되고 무너지고 분열되잖아요.
그런데 그 조그마한 교회 공동체,
제자 공동체가, 모진 핍박과 시련이 있는 가운데서도, 조금씩 조금씩 자라나서, 지금의 교회가 된 건 놀랍기 그지 없습니다.
심지어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예수님이 살아계시다고 믿고 증거하고 있으니까 미친 놈 아니면, 정말 에수님이 살아계셔서 이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고 계시는 거에요.
오늘 부활주일을 맞아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이 믿음 달라고 기도하세요.
삶이 힘들고 고단할 때마다, 부활의 생명이 내 안에 가득하게 채워지게 해달라고 기도하세요.
문제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제를 대하는 나의 태도가 상당히 변화하게 됩니다.
여러분에게 이 믿음이 필요한 거에요.
이 믿음 주시도록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 함께 기도합시다.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기도도 참 좋습니다. 하나님 이 문제 해결해주시고 저 문제도 해결해주세요. 그런 기도도 참 좋습니다. 그런데 더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부활 생명이 내 안에 가득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여러분의 삶이 주님 안에서 좀더 가벼워지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본문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28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29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33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모티프
성찬 모티프
교사
동행
장소 : 예루살렘
개요
25-26 예수님의 책망 :
27 예수님의 설명 :
28 예수님이 행동 :
29-31 예수님과의 식사 :
32 제자들의 반응 :
34-35 제자들이 부활을 증언 :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
성경을 풀어 주심
제자들이 부활을 증언함
부활은 역사적 사실인가?
리 스트로벨
11.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속임수였는가?
혈한증 : 정신적 스트레스를 아주 심하게 받을 때 일어나는 일.
사람이 심하게 고민하면 땀샘에 있는 모세관을 파괴하는 화학 성분이 몸에서 나옵니다. 그 결가로, 땀샘으로 소량의 피가 들어오게 됩니다. 아주 작은 양입니다.
혈한증이 일어나면 피부가 매우 약해집니다. 그래서 다음날 예수께서 로마 군인들에게 채찍으로 맞으셨을 때는 피부가 극도로 민감해져 있었을 겁니다.
십자가에 수직으로 매달리게 되면 질식하면서 서서히 고통스럽게 죽게 됩니다. 질식하게 되는 이유는 근육에 충격이 가해지면서 횡경막이 가슴의 상태를 숨을 들이쉬는 상태로 만들어 놓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지칠 때까지 이런 식으로 계속되다가 결국 발을 세울 수 없게 되고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게 됩니다.
호흡 수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면 희생자는 소위 호흡 산독증-혈액 속에 있는 이산화탄소가 탄산으로 분해되면서 혈액의 산성이 증가하는 것-에 빠집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심장 박동이 불규칙적으로 됩니다. 아마 예수님께서는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뛰기 시작했을 때 죽음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아셨을 겁니다.
창은 오른쪽 폐와 심장을 꿰뚫었습니다. 그래서 창을 뺄 때 물처럼 보이는 액체-심낭삼출과 늑막삼출-가 나왔습니다. 요한이 복음서에서 증거하고 있는 것처럼, 물처럼 투명한 액체가 흘러 나온 다음에 많은 양의 피가 쏟아졌을 겁니다.
(심장 박동수가 증가하고, 심장과 폐 주위에 액체가 고이는 심낭삼출과 늑막삼출이 발생합니다.)
13. 출현 증거
애초부터 부활은 초기 교회가 선포한 메시지의 핵심이었다.
전설인가? 환상인가? 고린도전서 15장(부활장)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목격한 자들이 다 살아 있을 때에 기록된 것이다.
환상이라는 것은 개인적인 것이다. 집단적으로 목격하는 것은 절대 환상이 아니다.
다양한 배경과 다양한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몇 주 동안 여러 장소에서 모두 한꺼번에 환상을 경험했다는 것이 더 믿기 힘든 일이다.
14. 기타 증거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은 죽기까지 믿음을 지켰다. “예수가 주시다.”
카르디아 - 카이오
이영욱·누가복음 24:32에 나타난 kardi,a-kai,w의 의미 재고
프랑수아 보봉(François Bovon)은“그때에는 마음이 더디고 어리석었 지만(32절), 지금은 불타고 있다”
존 캐럴(John T. Carroll)도 두 제자의“믿지 못했던 마음이 불타 오르게 되었다”라며 마음이 변화된 것, 곧 긍정적인 느낌
로버트 스타인(Robert H. Stein)은 이 표현을 예수의 부활을 믿는 상태와 관련하여 이해
표상적으로, 그들의 마음이 불탄 것은 흥분(excitement)을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오, 어리석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더 디 믿는 자들이여”라는 예수의 일갈을 기억한다면, 타는 마음 (heartburn)은 그들이 예수를 믿지 못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을 표하는 것일 개연성이 더욱 크다(more probably).
고대의 역본들을 통해 우리는 kardi,a-kai,w의 의미에 대한 다양한 역 사적 가능성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덮여 있다’를 비롯하여‘무겁다’, ‘파괴된’‘두려운’ , ‘둔한’ , ‘어두운’ , 등은, 사본의 권위와 관계없이, ‘의 미의 역사적 가능성’을 형성한다
초기 기독교 역자들이 누가복음 24:32에 나타난 표현을 하나같이 부정적인 것으로 읽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스라엘의 속량(lutro,w)이란, “이스라엘의 회복(즉, 독립)을 가리킨다.
이들의 이해에 따르자면, 메시아는 이스라엘 위에 군림하 는 왕이기에 죽어서도, 고난을 받아서도 안 된다. 하지만 예수는, 이와는 반대로, 메시아가 고난을 당해야 한다는 것을 설명했다.
이러한 가 르침을 받았을 때, 두 제자가 느낀 감정이 바로 kardi,a-kai,w(양립한 상 황에서 느끼는 심적 갈등)이다. 다시 말해, 두 제자는 예수가 성경을 풀어 줄 때에 두 메시아관 사이에서 갈등했다.
이상의 연구들을 토대로 누가복음 24:32에 사용된 kardi,a-kai,w를 ‘충돌하는 메시아관 사이에서 느끼는 갈등’으로 보다 구체화할 수 있겠 다.
이는 마치 누 가복음 4:22에서“이 자는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는 질문이 결코‘그 는 요셉의 아들이다’는 의미만을 가지는 것일 수 없듯, 누가복음 24:32에 나타난“마음이 불타고 있지 않았는가?”라는 발화 역시 결코‘과거에 우 리의 마음에 갈등이 있었다’는 의미만을 전달하는 것일 수 없다.
두 제자는‘이전에 갈등이 있었다’는 수사 적 발화를 가지고서 자신들의 의식이‘현재’에는 변화되었음.
죽음에 대하여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죽음을 실질적으로 삶의 끝
소크라테스는 철저하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죽음을받아들였다. 왜냐하면 죽음이야 말로 육체에서 영혼을 자유하게 하여 주기때문이다. 죽음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를 이룰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 본 대로 유대권 밖의 고대 근동지방에서는 부활이란 개념이 나타나지 않는다. 인간은 죽음 이후에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고 믿었다. 그들은 죽은 사람의 육체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지하세계로 가는 길은 오직 한 쪽 방향으로만 가게 되어 있는 일방통행의 길로믿었다.
구약성경에서 죽음은 죄에 대한 형벌의 결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고대 근동문헌에서 보았던 것과는 다른 죽음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곧 죽음이 끝이라는 개념이 아니었다(창 47:30; 창 50:25). 유대인들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죄의 결과로 죽음을 선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속을 기다리고 있었다. 죽음 이후에 다시 자신들을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약속이었다(창 3:15)
구약성경에서 죽음은 죄의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창 2:17). 인간은 창조주하나님과의 계약에 불순종함으로 인하여 죄를 지었고 죽음은 피할 수 없는징벌이었다. 그러나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죽음 이후의 소망을 가지고 있는부분이 종종 나타나고 있다. 그들은 죽음을 야훼에 대한 불순종의 형벌로받아들이며 고통스럽고 불행한 삶으로 여겼다. 그러나 고통과 불행 속에서도 고대 근동문헌에서처럼 죽음이 끝이라는 생각은 없었다. 그들은 죽음이후의 삶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의 하나님께 대한 소망이었다. 그들의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들을 죽음에서 일으키시어 다시 회복시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구약에서는 고대 근동문헌에서와는 다르게 부활에 대한 기원을 찾아볼 수 있었다. 구약성경의 부활의 개념은 독자적인 사상으로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유일신인 야훼에 대한 신앙이었다.
묵시문학의 부활사상은 구약성경의 부활개념을 더욱 발전시키고 있다. 구약성경에서는 공동체적인 부활개념이었다면 묵시문학의 부활개념은 개인의 부활과 육체의 부활을 강조하고 있다.
누가복음의 예수 부활 연구
식탁은 예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 곳이며 또한 주의 함께 하심이 가장 친밀하게 다가오는 그런곳이기도 하다.
누가는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모든 자들이 하나님이 베푸시는 잔치에 초대되는 자격이 주어졌음을말하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고향을 향해 가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건은 누가의 신학적 관점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것과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 알지 못한 것을 책망하고 있는제자들의 모습을 대조시키고 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함 /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알지 못함.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것과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 알지 못한 것을 책망하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대조시키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제자들이 아직도 자신의선생인 예수의 부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임을 믿고 있었으나 그의 죽음으로써 메시아가 아님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구원하려는 계획이 실패했음.
이제 예루살렘에 들어오셨으니까, 본격적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활동을 시작하셔야 되는데, 시작도 못해보고 죽으셨기 때문에, 제자들은 실망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부활에 대한 소문은 그저 소문일 뿐.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잘못된 종말론에 대해 다시 수정해 주시고 있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는 그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하고 그들의 왕으로 등극하는 것이 아니라그들에 의해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하고 다시 살아나서 온 세상의 메시아가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자시들만의 메시아가 아니라 모든 열방의 메시아로 나타나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로 말미암아 메시아에 대해 기록되었던 구약의 모세의 글과 선지자들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그들은 마을 가까이 가서 예수께서는 더 가시려 하는 것을제자들이 강권하여 마을에 들어가 유하시기를 권하였다. 식사자리에서 예수께서 떡을 떼어 나눌 때 드디어 제자들의 눈이 밝아져 부활하신 예수를 알아보았다. 예수께서는 떡을 떼심으로 제자들에게 자신을 알리셨다. 예수께서 떡을떼시는 모습은 제자들에게 익숙한 모습이었다(눅 9:14; 막 8:20; 눅 22:19). 그들의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은 그들의 지식으로 인하여서가아니라 신적 수동태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주권임을 다시 한번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예수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부활체의 새로운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누가는 18장 34절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고난 받고 죽임을 당한 후에 다시 살아나신다는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셨지만 그 말씀이 감추어져 있으므로 알지 못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예수께서 맹인을고쳐주심으로 그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는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는 누가복음 18장의 모티브와 연결되고 있다. 제자들은 눈이 어두워져 예수이신 줄을 알아보지 못하였지만예수께서 말씀을 풀어 주실 때에 곧 해석해 주실 때에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식사자리에서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이신 줄을 보게 되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알아볼 수 있었던 방법은 해석된 말씀과 마지막 성만찬의 모티브인(눅 22:19; 9:16) 식사자리에서였다.
엠마오
Lexham 성경사전 (위치)
누가복음 24:13은 엠마오가 예루살렘에서 "60 스타디아"라고 기록한다. 스타디온의 길이는 지역마다 달랐다. 60 스타디아는 9.5–12.5km에 해당한다(Gulbekian, "Stadion", 359–63). 갈릴리의 위치는 예루살렘에서 96km 이상 떨어져 있으므로, 이 장소는 누가가 언급한 엠마오일 수 없다.
라이프 성경사전 (엠마오)
Ἐμμαύς(엠마우스) 히브리어 ‘하마’(חַמָה)에서 유래된 말로, ‘따뜻한 샘’, ‘온천’이란 뜻. 예루살렘 근처(누가는 ‘이십오 리’ 곧 약 10km 떨어졌다고 기록함)의 한 마을(눅 24:13). 정확한 위치나 거리는 불명확하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그날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글로바와 또 다른 한 명)가 예수님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고, 저녁 식사 시간 예수께서 떡을 떼어 주실 때에야 비로소 그분을 알아보았다(눅 24: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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