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

사도신경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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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2. 가장 강력한 고백 3.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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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강력한 고백

지난 주 설교를 마무리 할 때 여러분에게 했던 질문이 있었어요. 이번 한 주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고민해보자고 했던 질문 혹시 기억나나요?
“나를 지탱하게 해줬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를 버티게 해주었던 버팀목은 무엇이었을까?”
에 대해 계속해서 스스로에 물어왔을 것이라 생각해요.
그것에 대한 답을 찾았나요? 여러분을 버틸 수 있도록 해주셨던 그 분이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었기를 바래요.
오늘은 예수님을 향한 고백에 대해 살펴보려 해요.
사도신경은 성부 하나님을 향해서는 한개의 고백을 하고 성자 예수님을 향해선 6개의 고백을 해요.
6개의 고백 중 1번 고백. “유일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6개나 되는데요. 여기에서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있어요. 성자 예수님이 성부,성자,성령 중 가장 중요해서 6개의 고백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혹시라도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많으니까 가장 소중한 분이야! 라고 오해하면 절대 안돼요.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가장 많은 이유는 성자 예수님에 대한 공격과 의문이 가장 많았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은 인간이 몸으로 이 땅에 오셨죠.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사셨어요. 그리고 그 분은 극악무도한 죄인으로 몰려 갖은 조롱과 수난을 당하다 십자가에 달려 죽었어요. 우리 인간과 똑같은 모습이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부활하셨죠. 우리 인간처럼 죽으면 끝!이 아니라 부활로 자신이 신이라는 것을 모두에게 보여주셨어요.
사실 사람이 부활한다는 것 우리도 쉽게 이해하고 믿기 어렵잖아요? 당시 사람들도 이 부분에 대한 의문이 있었던 것이에요. 나처럼 음식도 먹고 잠도 자고 화장실도 가고하는 똑같은 사람인데 어떻게 신이야? 어떻게 다시 살아나? 라는 의문을 계속 가졌어요.
근데 진짜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것을 본 사람이 많았던 거에요. 하지만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이 가졌던 의문에서 답을 찾아가기 시작해요.
그런데 자신들의 생각의 범주를 넘어선 사건이니까 각자 뇌피셜로 그 답을 써내려갔어요. 예수님에 대해 오해하고 마음대로 생각하고, 하나님 말씀을 막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기 시작했어요. 그 결과? 수많은 이단과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오해가 사람들 사이에 퍼지기 시작했어요.
왜 좋은 이야기의 소문은 잘 전달이 안되는데, 나쁜 이야기 혹하는 이야기는 엄청 빠르게 전달이 되잖아요. 그것처럼 예수님에 대해 모두가 의문을 갖고 있는데 “이렇더래. 야 그거 알아?”라고 하는 말이 들리니까 순식간에 전달이 된거에요.
그러다보니 이제 막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사람들 혹은 예수님을 오랫동안 믿었지만 자신의 믿음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사람들의 멘탈이 흔들리기 시작한거에요. 그러면서 넘어지고 예수님을 오해하고 떠나는 사람들이 생긴거죠.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인성과 신성을 다 가진 그 분에 대한 확실하게 정리했어요. 그 정리가 6개의 고백으로 표현된 것이구요.
"유일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는 이 고백은 정말 강력하면서 중요한 고백이에요.
세상이 흔들어대는 나의 믿음을 꽉 잡고 버틸 수 있는, 지탱하게 해주는 엄청난 고백이에요.
이 고백을 믿고 신뢰하길 소망해요.
여러분 혹시 그런 생각해본 적 없어요? 저는 예수님의 진짜 이름이 뭐지? 라는 의문을 가졌던 적이 있어요. 누구는 예수님이라고 하고 누구는 나사렛 예수라 하고 또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고. 저 어렸을 때 예수님을 부르는 표현이 다 달라서 예수님의 진짜 이름이 뭐지? 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어요.
여러분은 다 알고 있었겠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님이라는 분을 설명하는 하나의 표현이에요.
예수 그리스도는 이 말의 줄임말이에요. “예수가 그리스도이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사도들의 고백이자 사도신경의 핵심. “예수가 그리스도이십니다.”의 줄임말이 예수 그리스도에요. 이름처럼 보이는 단순한 고백이에요. 예수 그리스도.
당시 사람들은요.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할 때마다 “내가 예수님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예수님을 사랑하는가?”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했어요.
왜?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받은 그 날부터 ‘이제부터 예수님을 위해,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겠습니다!’ 라고 결단 했거든요.
복잡하고 어렵고 나를 흔드는 세상 속에서 예수님을 위해 살아가겠습니다! 라고 고백했거든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단어가 보이거나 혹은 자신의 입으로 고백하게 되면 나는 잘 살아내고 있는가? 를 돌아 보았던거에요.
우리의 삶은 어떤가요?
예수님이 // 여러분의 삶에 어떻게 드러나고 있나요?
이 질문은 무조건 양보하고 참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도 때론 화도 내고 자신을 드러내야죠.
그래야 우리도 그렇고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무시 당하지 않으니까요.
제가 여러분에게 하는 질문은 “여러분의 삶의 다양한 부분에서 // 예수님이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에요.

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 고백에는요. 주. 예수. 그리스도. 라는 각각의 표현이 합쳐져 있어요. 먼저 주에요.
“주"는 한자로 주인 주. 주인을 말하죠. 당시 “주. 헬라어로 큐리오스"라는 표현은 딱 한명에게만 허락되었어요. 절대 지존자 로마 황제. 오직 그에게만 쓸 수 있는 단어 “주"였어요. 그런데 초대교회 사람들은 예수님을 “주"라고 불렀어요.
우리에게 주인은 오직 한분이시다. 예수님이다.
다른 주인은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예수님보다 위에 둘 수 있는 것은 없다.를 초대교회 사람들은 고백했어요. 우리의 큐리오스는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
그들이 예수님을 큐리오스. 주라고 고백하면 할수록 그들의 삶은 더 힘들어졌어요. 그들에게 일거리를 주지 않아요. 돈이 없으니 먹을 것을 살수도 없고 살아가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져요.
그래도 그 아랑 곳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그들의 삶의 유일한 주인 큐리오스. 예수님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이러한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요.
예수님이 자신들의 삶을 책임지신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주인되신 그 분이 자신들을 반드시 책임지신다는 확신이 있었던 것이죠.
시편 23편을 보면 양들을 책임지는 목동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요. 저는 지금까지 목동이 양을 치는 일이 그렇게 힘든지 몰랐거든요? 그런데 공부를 하다보니 왜 다윗이 예수님을 목자로 자신을 양으로 비유했는지 알겠더라구요.
양들의 삶은요. 진짜 우리의 삶이랑 똑같아요. 알면 알수록 진짜 뭐 이렇게 우리의 모습이랑 똑같을까 싶어요.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이 어렵다고 우리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시편 23편을 보면요. 우리가 예수님때문에 겪는 어려움은 진짜 아무 것도 아니더라구요. 우리랑 걸어가주는 예수님. 우리를 걷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겪는 어려움진짜 상상이상이에요.
우리의 주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진짜 극한직업 of 극한직업 같아요.
일단 목자는요. 24시간 내내 양에게 눈을 고정하고 있어야 해요. 이노무 양들이 얼마나 예민하고 피곤한 동물이냐면요. 양들은 필수조건을 충족시켜주지 않으면 절대 눕지 않는거에요. 절대 쉬지 않아요.
양들을 쉬게 하려면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양들 사이를 돌아다녀야 해요. 파리나 기생충이 있으면 양들은 눕지 않아요. 그래서 목자는 쉼없이 계속 돌아다니면서 파리를 쫓아내고 기생충을 제거해줘야 해요.
잠시라도 한눈을 팔아서 기생충을 제거해주지 못하면요. 기생충이 양의 코로 들어가요. 양의 코는 끈쩍끈적한 액체가 있는데 그곳에 기생충이 붙으면 바로 뇌로 들어가요. 그래서 뇌를 망가뜨려요. 그렇기 때문에 목자는 계속 돌아다니는 와중에 또 특별히 제조한 물약을 만들고 그것을 코에 발라줘요. 기생충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한마리 한마리 케어해야 하는거죠.
그리고 배가 터지도록 먹여야 해요. 광야에 푸른 목초지가 많으면 얼마나 많겠어요. 또 나만 양키워요? 옆집도 앞집도 다 양을 키워요. 목자는 돌아다니면서 틈틈히 목초지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그곳으로 양들을 데리고 가야해요. 그렇게 목초지를 찾았다고 해도. 그게 끝이 아니에요. 푸른 풀밭 옆에 흐르는 물이 조금이라도 소리를 내면 양들은 그 근처도 가지 않아요.
물을 마시지 않으면 죽잖아요. 양의 건강을 비롯한 모든 상태를 결정짓는 필수요소인데요. 양들은 잔잔한 물이 아니면 절대 마시지 않아요. 물에 한번 빠지면 양털이 스펀지처럼 물을 빨아드려서 가라앉게 만들어요.
그래서 본능적으로 흐르는 물. 소리가 나는 물 근처도 가지 않아요. 사막이나 광야에 물이 많아봐야 얼마나 많겠어요. 힘들게 푸른 풀밭으로 데려왔는데 물이 흐르는 소리가 나면 양들이 쉬지 않는거에요. 먹지 않는거에요.
이놈들이 배가 불러야 눕는데, 누워야 목자도 잠깐이라도 쉬는데 도무지 쉴 틈도 주지 않아요.
그래서 목자들은요. 자신들이 자주 가는 목초지 근처에 땅을 파고 물 저장고를 만들었어요. 혹시 비가 오면 물을 받아두기 위해서 땅을 깊이 파서 지하 저수조까지 만들었어요.
어때요. 목자 극한직업이죠? 앉아 있을틈도 없이 돌아다니면서 파리나 기생충 제거하고 약물 만들어서 발라주고, 양들을 데리고 이동해서 풀을 먹여야 하고 땅을 파서 저수조도 만들어야 해요. 진짜 양을 치는것 끔찍해요. 말만 들어도 힘들어요.
그런데 미안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에요.
양은요. 우묵하게 파인 곳을 보면 약간 눈이 돌아요. 가서 몸을 기대요. 그렇게 예민해서 잘 눕지 않는 양이 우묵한 곳만 보이면 몸을 기대요. 그리고 쭈욱 미끄러지면서 뒤집어져요.
여러분 혹시 곱슬머리 있어요? 저는 파마 했냐는 소리 많이 듣는데 곱슬머리거든요? 하나님이 말아주신 곱슬머리인데요. 곱슬머리만 할 수 있는 특별한 은사가 있어요. 이거 되는 사람 많이 없을 것 같은데, 여러분 부러워하면 안돼요. 저는 제 머리카락 속에 볼펜을 숨길 수 있어요. 넣으면 고정이 되어요. 뭐가 들어가면 잘 안나와요. 지금은 드라이해서 이렇지 안하면요. 진짜 장난아니에요. 폭탄맞은 것 같은 제 머리처럼요.
양털은 꼬불꼬불해요. 그래서 먼지도 들러붙고 흙도 붙고 불순물들이 붙으면 잘 안떨어져요. 털이 찐다고 하죠. 털이 찌면 양은 자신의 몸을 잘 가누지 못해요. 우묵한 곳에 가서 기대다 미끄러지면서 뒤집어지잖아요?
지금까지 목자가 했던 것은 일도 아닌게 되어요. 미끄러져서 뒤집어진 양을 보면요.
당장 달려가서 다시 바로 세워야 해요. 늦게 발견할수록 양이 살아날 확률이 적어져요. 뒤집어진 순간부터 양의 배속에 가스가 차기 시작하거든요. 가스가 차면서 혈액순환에 문제가 생겨요.
혈액순환에 문제가 생긴 양은? 사지가 굳어가면서 곧 죽어요.
뒤집어진 양을 발견한 목자는 달려가서 양을 바로 세워주고 마비된 양의 사지를 계속해서 마사지 해줘야해요. 이때 양이 엄청 울거든요? 목자는 양의 다리를 마사지해주면서 동시에 양에게 “괜찮아. 괜찮아. 내가 있어. 괜찮을거야"라고 위로하는 말까지 해요. 마사지를 받고 혈액이 다시 순환되기 시작하면? 그제서야 양은 자신의 힘으로 다시 서서 걷게 되어요.
진짜 극한직업 of 극한직업이죠? 뭐 쉴수가 없어요. 먹이고 재우고 마사지도 해주고 부드러운 말도 해줘야 하고 땅도 파야해요. 진짜 목자는 아무나 하는게 아닌 것 같아요.
우리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이 지금 이런 일을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어요. 지금도 여전히 우리 곁에서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고 계셔요. 우리가 두려워하면 옆에서 위로하시고 여러 일들을 막아주시고 해결해주셔요.
초대교회사람은 목자처럼 예수님이 나의 모든 삶을 책임져주신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마치 배에 가스가 차 혈액순환이 되지 않아 죽어가는 그 양을 보고 달려가 마사지를 해주는 목자처럼,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어려움과 고난을 보고 계시는 예수님께서 나를 가만두지 않으신다.
나에게 괜찮다 말씀하시며 결국 내가 다시 내 발로 일어설 수 있도록 나를 붙들어주신다!
그렇기에 나의 주인은 오직 한분이다! 를 외쳤던 것 이죠.
여러분은 어떤가요? 여러분의 삶에 주인은 누구인가요?
여러분은 무엇을 중심에 두고 살아가고 있나요?
예수
두번째 예수에요. 사실 예수님이 언제 태어났는지 정확히 알 수 없어요. 하지만 성경을 통해 그분이 어떤 삶을 사셨는지는 알 수 있어요. 예수라는 이름은요. 당시에 정말 흔한 이름이었어요. 구약에 나오는 여호수아가 예수는 같은 단어에요. 정말 흔했던 이 이름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 잘 사용하지 않게 되었어요.
우리처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는 상당해요. 우리에게 이 이름은 정말 소중하죠. 이름을 묵상하기만 해도 은혜가 돼요.
하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라는 이름은 십자가에서 죽은 최악의 사형수의 이름이에요.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은 최악의 사형수가 아니죠. 하나님이 직접 주신 이름이에요. 저번에 야곱은 사람들이 자신을 부를 때 사기꾼!이라 불리는 것 같았다 했죠.
예수님은요.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예수라고 부를 때마다 자신이 해야하는 그 일. 죽음과 부활에 대한 소명을 계속해서 떠올렸을 거에요.
최초의 사람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를 저질렀어요. 우리 인간을 대표하던 첫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반기를 들고 죄를 지었어요. 하나님께 지은 죄이기에, 그 죄에 대한 용서는 하나님만 할 수 있어요. 여러분이 강도사님한테 실수하고 저한테 와서 사과를 한다면? 저는 그 실수를 용서할 수 없겠죠. 그것처럼 죄에 대한 용서는 당사자만이 할 수 있는거에요.
최초 사람 아담이 죄를 지었어요. 대표자가 죄를 지었기에 그 죄가 계속해서 되물림되었어요. 이 죄를 끊어내려면 인간을 대표하는 사람이 있어야 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죄인이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지어줄 수 없다는 것이죠. 각자가 지은 죄가 다양한데 그것을 어떻게 대리해서 용서를 받겠어요.
그래서 죄가 없는 사람이 필요했어요. 인간의 모습은 갖고 있지만 죄가 없는 사람. 그런데 그런 사람은 없죠.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기로 작정하신거에요. 하나님은 죄가 없으시니까.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죄를 지었으니까. 그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는 것을 선택하신 것이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처럼 하나님. 말씀은 인간이 되어 오셨어요. 그리고 자신을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로 나타내셨어요. 여기에서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되는 것이 하나 있어요.
유일하신 아들. 독생자라고 표현이 되었다고 해서 진짜 아들이라는 개념으로 받아드리는 오해를 해선 절대 안 돼요. 그렇게 생각하면 하나님과 예수님을 서로 떨어져 있는 다른 존재라 생각할 수 있거든요.
외아들. 독생자라는 표현은요. 모노게네스라는 헬라어인데. 이것은 비유적인 표현에 불과해요. 진짜 아버지 하나님. 아들 예수님 이렇게 독립적인 존재가 아님을 알려주는 단어에요.
모노게네스는 유일한과 존재하다가 합쳐진 단어에요. 유일하게 존재하신 하나님을 모노게네스라 부르는거죠. 유일하게 존재한 하나님을 뜻하는 이 단어를 예수님에게 붙인거에요. 독립된 존재가 아닌 하나님 그 자체가 인간이 되어 오셨다. 예수님은 하나님 그 자체이다.
독생자. 그 외아들은 비유적인 표현이에요. 우리는 그 비유적인 표현을 나의 신앙으로 받아드린 것이구요. 어렵고 심오한 삼위일체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강도사님보고 여러분에게 하라고 할게요.
여러분의 머리 위에 떠있는 ? 처럼 당시 사람들도 이 부분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던거에요. 그래서 사람들이 멋대로 해석하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 가기 시작했어요. 성경은 그들을 속이고 미혹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해요. 지금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바로 이단이죠.
교회사를 통틀어 수없이 많이 등장한 이단의 유형은요. “내가 그다.” “내가 예수다.”라는 교주들이에요.
우리 나라에도 이런 이단들이 참 많죠. 백마를 타고 흰 정장을 입고 나타나며 스스로를 예수라 외치는 신천지의 교주 이만희.
스스로를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이삭 멜기세덱이라 외치는 교회 근처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의 교주였던, 부활한다 말했으나 이미 죽은지 오래된 자칭 예수 안상홍.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인하면서, 성경을 마음대로 해석하며 자신이 예수라 외치는 JMS 정명석 등.
우리나라에도 정말 “예수님"이 많아요.
이렇게 속이고 미혹하는 자들이 정말 예수님 부활 이후에 정말 많이 등장했어요. 단순히 잘 몰라서 사이비가 될 수 있어요.
정말 큰 문제는 이러한 이단. 스스로 예수라 말하는 사람들. 그들의 속임의 모든 결론이 영원한 파멸이라는 거에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우리. 하나님이 사랑하는 우리 신앙인들의 생명을 가져가고 영원한 지옥으로 밀어넣는다는 것이 정말 큰 문제에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도 조금만 눈을 돌리면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영혼을 강탈해서 괴롭게 하는 악한 마귀의 공격을 마주하며 살고 있어요. 당시에도 이러한 공격이 너무 많았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진짜 그리스도인. 진짜 신앙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하나의 암호와 같은 문양을 만들었어요.
요즘엔 잘 보이지 않는데. 여러분 혹시 자동차 뒤에 물고기 모양 스티커 본 적 있어요? 한 때 우리나라도 그리스도인들이 자동차 뒤에 물고기 모양 스티커를 붙이고 다녔어요. 그것을 볼 때마다 “어 저 사람 예수 믿네"라고 생각했어요.
이 물고기 모양의 스티커는 ‘익투스'라고 해요. 여기에 써있는 이런 글씨는요. “예수스 크리스투스 데오스 휘오스 소테르”의 줄임말인데요.
직역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구주. 라는 뜻이에요. 이들은 이 암호를 보면서 진짜 신앙인이구나 아니구나를 구별했어요. 너무 이단이 많이 돌아다니고 또 그 이단들과 여러 이유들로 계속해서 핍박을 받으니까 이런 암호를 표시하고 다닌거죠.
이 물고기 암호를 들고 다녔던 사람들은요. 그리스도인이었어요. 당시에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너 예수쟁이야?”라고 했어요. 그런데 이들은 예수쟁이. 라는 어떻게 보면 자신들을 폄하하는 것같은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감격했어요.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을 닮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 그들에게, 너 진짜 예수쟁이다. 라는 말은. 너를 통해 예수님이 보여. 라고 인정받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에요.
그리스도인은요. 예수님의 뒤를 이은 사람들이죠.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중보자의 역할을 감당하셨어요. 끊어져있던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해의 길을 만들고 관계를 회복시키는 중보자의 일을 하셨어요.
그들에게 “너 예수쟁이지!”라고 하는 말은, 그들에게 “내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서서 예수님처럼 중보하는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구나! 나도 예수님처럼 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있는 사람이구나!”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말이었다는거죠.
그리스도인. 예수쟁이 라는 단어는 초대교회 사람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도 정말 세상 중요한 단어에요. 그들도 저도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사람.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서 예수님처럼 중보하는 사람.임을 확인 시켜주는거든요.
여러분은 어떤가요? 여러분도 예수쟁이인가요?
그리스도인. 교회 다니는 사람. 이라는 말을 들으면 웬지모를 부끄러운 감정이 느껴지거나 부담이 되나요? 아니면 내 삶에 예수님이 드러나고 있구나! 라는 감사함이 느껴지나요.
그리스도
마지막 그리스도에요. 그리스도는 성도 이름도 아니에요. 그리스도는 말 그대로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보낸 분을 표현하는 하나의 단어에요. 그리스도의 뜻은 메시야에요. 메시야. 구원자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죠.
저와 여러분도 기름 부음을 받은 자에요. 구약시대에는 기름 부음을 받는 것은 정말 큰 은혜의 표현이었어요. 선지자, 제사장, 왕만 머리에 기름 부음을 받을 수 있었거든요.
우리가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에 여러분 자랑스러워 해야 해요. 큰 세상 속에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아주 작은 존재처럼 보이는 나. 여러분이요.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정말 크고 중요한 존재라는 의미거든요.
기름 부음을 받은 자.
하나님이 직접 선택한 사람.
하나님이 혼자 하셔도 되는 일을 함께 하기 위해 선택해서 옆에 세워주신 사람
내가 나를 바라봤을 때 정말 부족해보이고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보며, 나와 함께 팀플 하기에 더할나위 없이 좋은 사람! 이라 생각하신거에요
그 사람이 바로 여러분이에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리스도. 메시야라고 하는 것은 아니에요.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함께 나누는거에요.
예수님은 기름 부음을 받는 자였어요. 기름 부음을 받은 메시야였어요.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는, 하나님과 동역해야 하는 소명을 가지신 분이었어요. 하나님과 동역해야 하는 소명은 바로 십자가에 매달리는 것이었죠. 인간의 모든 죄를 용서하는 구원을 이루는 것이 예수님의 소명이자 하나님이 하셔야 하는 일이었어요.
저는 진짜 십자가 사건을 묵상할 때마다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아하기도 해요. 아니 굳이 왜? 도대체? 그렇게까지 하셔야 했을까? 하는 마음이 들어요. 아니 천지를 지으셨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인데. 굳이 스스로에게 제약을 걸고 인간이 되어야 하셨을까? 하는거에요.
아마 제가 에베소서 3장 제자훈련을 할때 이야기 했던 것 같은데요. 저는 고등학교 야자시간에 열심히 책을 읽었어요. 교과서를 책상에 이렇게 쌓아두고 보이지 않게 무협지랑 판타지 소설을 정말 많이 읽었어요. 진짜 심취할 정도로 많이 봤어요. 성경을 그렇게 봤어야 했는데.. 휴..
무튼 무협지나 판타지를 보면 스스로에게 금제를 거는 등장인물이 나와요.
무협지를 예로 들면 정말 내공이 너무 뛰어난거에요. 그런데 자신의 위치가 그렇게 높지 않아요. 그러면 자신의 실력을 숨겨요. 괜히 얻어 맞고 무시 당해요. 왜냐하면 자기가 능력을 드러내는 순간 모두에게 공공의 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죠. 눈높이를 맞추어서 생활하는거죠.
판타지 소설 같은 경우는 이제 가장 강력한 캐릭터가 있는데요. 바로 드래곤이에요. 드래곤은 진짜 막을 수 없는 존재인데, 인간의 몸으로 폴리모프를 하면 원래 갖고 있던 능력을 다 발휘하지 못해요. 사용할 수 있는 힘의 제약이 걸리는거죠.
무협지나 판타지 소설에서 등장하는 이렇게 자신의 능력을 제한하던 인물들은요. 결정적인 순간에 봉인했던 자신의 힘을 풀어서 모두에게 보여주는 장면이 꼭 등장해요. 왜냐하면 주인공이잖아요. 주인공이 죽으면 안되잖아요. 그러니까 봉인해제를 하면서 자신의 강력함을 보여주고 다시는 주위에서 무시하지 못하도록 하는거죠.
말도 안되는 내용의 이런 소설들과 우리 현실에 비슷한 것이 있어요. 만만하게 보이면 무시당한다는 거에요.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그것을 보여주지 않으면, 계속 숨기고 있으면 만만하게 보고 무시 당해요.
나의 강한 능력을 보여주어야! 사람들이 인정하고 함부로 깔보지 않아요.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도 그렇잖아요.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려 마음 먹고 그에게 선의를 베풀면 아주 사람을 우습게 보고 만만하게 보잖아요. 그래서 때론 강력한 어떤 모습을 보여주기도 해야 할 때가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신거에요. 스스로 능력에 제약을 거셨는데도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강함이 있으셨어요. 하나님으로써 보일 수 있는 기적이 많으셨어요. 폭풍도 잠재우시고 귀신도 쫓고 아픈 사람도 회복시키고 죽은 나사로도 다시 일으켜 세우셨어요. 그랬던 분이 자신을 잡으러 오고 죽이려는 사람들 앞에선 잠잠하셨어요.
자신의 강함을 드러내지 않으셨어요. 참고 그 길을 가셨어요.
하나님은요.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해 외아들. 아니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매다는 것을 선택하셨어요. 강함을 드러내 존재감을 보이기보다 자신이 매달리시는 것. 생명을 버리는 것을 택하셨어요. 이게 가능한 일인가요?
사람들이 만든 수많은 신들이 있죠. 도대체 어떤 신이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며 목숨을 버리는 선택을 할까요? 인간의 것들을 빼앗아갔으면 갔지, 인간을 괴롭혔으면 괴롭혔지 세상의 그 어떤 신들도 인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지 않았어요.
신이 자신의 능력을 제한하고 생명을 버릴만큼 여러분을 사랑하신거에요. 애절하신거에요. 이대로 둘 수 없다는 하나님의 마음. 나를 닮은 사랑스러운 모든 인간을 이렇게 둘 수 없다는 그 절박감. 절대 가늠 할 수 없는 그 사랑의 마음이 표현된 곳이 십자가였어요.
오늘은 부활절이죠.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예수님이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신 날. 부활절의 기쁨이 여러분에게 있나요? 아니면 매년 마주했던 습관과 같은 하나의 주일인가요?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도 잘 알겠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것도 부활하신 것도 잘 알아요. 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때가 종종 있어요. 그 기쁨이 크게 와닿지 않을 때가 있어요.
내 삶이 빡빡하다 느껴질 때
내 삶이 좀 답답할 때
괜히 혼자 있다 느껴질 때.
하나님의 은혜도, 부활의 기쁨도 나에게 영향을 주지 못한다 느껴질거에요.
정말 한숨만 나오고 이유 모를 답답함이 있을 그 때 여러분이 했던 이 고백을 떠올려 보세요.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습니다.”
이 고백에는요.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인정합니다. 라는 여러분의 마음이 담겨 있어요. 그리고 동시에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어요.
“너는 절대 외로울 수 없다.”
“실패와 그에 따른 허무함은 너와 함께 할 수 없다.”
“너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단순해 보였던 이 한 문장은 여러분이 답답함 속에서 숨을 쉬도록 해주는 인공호흡기와 같았어요.
여러분의 마음과 삶을 잡고 통채로 흔들기를 원하는 세상을 견뎌내고 이길 수 있게 해주는 최종 무기였어요.
우리 또 한 주 허락하신 자리에서 치열하게 살아가게 될거에요. 힘들고 지칠 때마다 우리 이 문장을 함께 말했으면 좋겠어요.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습니다.”
이 고백을 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도 버림 받지 않아요.
이 고백을 하는 사람은 그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어요. 왜냐하면 이 고백은 정말 강력한 고백이거든요.
나같은 사람을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예수님을 떠올리게 하는 강력한 고백이거든요.
아기로 오셔서 엄마 아빠가 해주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극한의 무력한 상태가 되신 분
우리 인간과 똑같은 슬프고 힘들고 아프고 괴로운 감정들을 다 경험하셨고
제자에게 배신당해 잡혀가 무기력하게 얻어 맞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쓰고
결국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
실패한 듯 보였지만, 마귀에게 영원한 패배를 당한 듯 보였지만,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나의 마음에, 삶에 초대한다강력한 고백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습니다.”
이 고백이 여러분의 마음에 부활의 기쁨을 다시 되찾게 해주길 소망합니다.
이 고백이 침체되어 있다 여기는 나의 마음에 불을 지피는 고백이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 고백이 여러분을 다시 숨 쉬게 하는 소망의 고백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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