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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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은 21장까지 있지만 사실상 20장이 마지막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증거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먼저 목격한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와 그 후에 주님께서 제자들을 만나셔서 그 부활하신 몸을 친히 보여주시며 사명을 주신 모든 일이 기록되고 있거든요. 그리고 20장 끝에는 요한 자신이 이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이심을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죠. 한 마디로 우리의 신앙은 그분을 믿고, 그분의 생명을 받아 누리는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런 우리의 신앙을 주의해야 할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신앙에는 세 가지가 함께 어우러져야 합니다. 지식과 사랑과 믿음. 신앙에 이 세 가지를 겸비하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온전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뭔지 나오죠. 뭔가 많이 알고 있지만 그 속에 믿음이 없고.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섬기기는 하지만 그 속에 지식이 없는 지식이 빠진 사랑, 사랑이 빠진 믿음, 믿음이 빠진 지식...이처럼 우리의 신앙을 반쪽짜리로 만드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지식이 없는 사랑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지식이 없다면 그 사랑의 수고와 정성 차제로는 칭찬받을 일이지만 헛된 수고로 이어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빈 무덤에서 찾는 수고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마리아와 제자들은 무덤을 찾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그들의 사랑은 놀라운 것이지만 부활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랑이었어요. 그 사랑의 수고는 헛수고였습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은 고귀한 것이지만 주님의 부활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보고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깨닫지 못했어요. 빈 무덤을 통해서 하나님이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보여주셨지만 제자들은 아직도 성경에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는 말씀을 알지 못합니다. 자신들의 경험과 이해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계시가 분명한 증거로 나타났음에도 받아들여지지 않던거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부활이라는 개념이 아직 제자들의 인식 속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자기 나름의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혹은 오래된 나무나 혹은 밤하늘에 뜬 달을 보고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섬긴다면 이 섬김은 헛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도 그 죽음이 우리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이요,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 할 일임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저 예수님이 죽으셨으니 슬프다는 식의 인식은 수고, 정성은 들이지만 헛수고로 빈무덤을 찾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정성을 바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믿음이 없다면... 어떨까요?
#믿음 없는 지식
주님의 부활의 소식이 분명히 전해졌을 때 도마는 만져보겠다고 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았다고 해도 도마는 헛것을 봤다고 생각한 치부했습니다.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분명히 손과 옆구리에 난 못자국과 창자국을 보여주셨지만 도마는 제자들이 보기만 했지 직접 만져보지는 못했기 때문에 환상이라고 생각했죠. 갓 태어난 아이는 모든 것을 입으로 가져갑니다. 그때는 눈으로 보는 것보다 입으로 빨아보아야 확신이 오기 때문이죠. 그러면서 점점 눈으로 보는 것을 인정하고 확신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눈의 감각이 마비됐다면 그 사람은 귀로 듣는 것이나 손으로 만지는 것을 의지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감각이 마비되어 있으면 도마처럼 자신의 경험할 수 있는 몸의 감각을 의지하게 됩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다는 것은 나의 감각보다 하나님의 계시를 더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도마는 자신의 이해와 감각이 설득이 되지 않기 때문에 믿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결핍된 신앙은 우리를 늘 의심에 빠지게 만듭니다. 그로부터 여드레가 지난 안식 후 첫날, 즉 오늘의 주일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때야 비로소 도마는 고백합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그는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함으로써 부활의 사건에 대해서 믿지 못했고, 예수님을 직접 만나자 이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런 도마의 고백에 대해서 예수님은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는 말씀을 덧붙임이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복된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영적인 세계에는 본다고 해서~ 알고, 깨닫는 세계가 아닙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알고, 믿음으로 보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알아보고, 그 능력을 힘입는 세계는 이처럼 육에 속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오직 믿음의 눈으로 경험하고 바라보게 됩니다. 우리 신앙에 지식과 사랑과 믿음 이 세 가지를 겸비하려면 우리의 힘으로는 온전히 이룰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님을 의지해야만 합니다. 온전한 지식이나 온전한 믿음이나 온전한 사랑은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 성령을 받으라
여기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하시며 사도로서의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이것은 창세기 2장의 인간 창조를 연상시킵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성령을 받는 것이 새로운 창조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부활 이후의 주님의 사역을 이제 제자들이 이어받기 위해서 성령을 받는 것이 필요함을 말합니다. 지금까지는 임마누엘이신 예수께서 하시던 일을 이제 보혜사 성령께서 이어받으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즉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로 가시면 성령이 오심으로써 이제는 예수님과 믿는 자들이 더 온전하게 연합되고,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으므로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신앙을 가진 성도라면 그 생명을 누리는 사람답게 주님을 알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믿는 온전한 신앙을 겸비해야 합니다. 우리는 늘 의심하며,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 반쪽짜리 신앙으로 살 때가 더 많지만... 그러기에 우리에게 약속하신 성령님을 의지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