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419새벽] 정죄 없다는 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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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70[피난처 있으니]
본문 롬8:1-2
자비하신 하나님, 오늘 이 새벽의 시간에도 사랑받는 자녀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오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늘 부족하고 연약하여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합니다. 늘 실패하고 넘어져도 하나님의 인애와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래 참으사 우리의 구원을 신실하게 이루어 가시니 감사드립니다. 나 행한 것은 죄 뿐이나 이러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하게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음을 늘 확신하게 하여 주시어, 언제나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붙들며 그분께로 나아가는 우리만 되게 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확신' 이라는 말을 참 많이 사용한다. 구원의 확신, 믿음의 확신 등등... 확신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무엇인가? 확신이란 확고부동하여 흔들리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확신이 있으면 힘이 생긴다. 반면 확신이 없으면 하는 일에 힘을 낼 수 없다. 확신이 있으면 왠만한 일에 흔들리지 않는다. 반면 확신이 없으면 아주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거나 넘어진다. 확신이 있으면 평안하다. 반면 확신이 없다면 늘 불안하고 초조하다. 신자에게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신자의 확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믿음에서 나온다. 신자가 가져야 할 중요한 확신에는 2가지가 있다. 첫째는, 구원의 확신이요 둘째는 승리의 확신이다.
구원의 확신은 어떠한 문제가 있어도 마음의 평안을 지켜준다. 형통할 때에나 뭔가 승승장구할 때에나, 반대로 뭔가 잘 풀리지 않거나 어려움을 겪을 때에도 구원의 확신은 늘 우리에게 평안을 가져다 준다. 또한 승리의 확신은 궁극적인 승리에 대한 확신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 날, 죄와 사망의 권세를 완전히 정복하실 것이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궁극적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진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탄과 죄의 세력을 능히 이길 수 있다.
구원의 확신과 승리의 확신을 가진 채로 신앙생활하는 사람과 이 확신들이 없이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은 정말로 천지차이가 난다. 확신을 가진 채로 살아가는 신자들은 매사에 힘이 있다. 능력이 임한다. 열정적이다. 평안에 사로잡혀 살아간다. 그러나 확신이 없는 자들은 매사에 수동적이다. 의기소침하다. 형식은 취하는 것 같은데 능력이 임하지 않는다. 늘 불안하고 초조하며, 쉽게 좌절하고 우울해 한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신앙생활에 힘이 없다면 확고부동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본문 말씀은 성도들에게 큰 확신을 주는 말씀 중 하나이다. 오늘 본문은 로마서 8장인데, 영국의 대표적인 복음주의 신학박사인 마틴 로이드 존스는 로마서 8장을 강해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 몸의 지체 중에도 더 위대하고 중요한 지체가 있듯, 성경에서도 가장 빛나는 보석으로 가득 차 있는 성경이 로마서 8장이다”. 또한 신학자 필립 스펜서는 말하기를 “성경이 반지라면 로마서는 그 반지의 보석이며, 그 중에서도 8장은 반지에 박힌 보석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부분이다”라고 했다. 그만큼 본문의 말씀이 참으로 귀하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는 놀라운 말씀을 선언한다. 이러 이러한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선언이다. 정죄함을 받지 않는 이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다. 1절 말씀을 보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죄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정죄함이 없다는 말이다. 죄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죄의 법으로부터의 해방이다.
특별히 8장의 시작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한다. 여기서의 '그러므로'라는 말은 1장부터 7장까지의 모든 내용을 결론짓는 '그러므로'이다. 1-7장까지의 내용은 무엇인가? 모든 사람은 각기 마음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일반적으로 안다. 그 누구도 이를 부인할 수 없다. 그렇게 하나님 아는 빛을 희미하게나마 모두가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을 합당하게 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온갖 악을 행하기에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방인이라고 심할 것도 없고 유대인이라고 더 나은 것도 없다.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서 받은 증거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속량, 곧 죄사함의 은혜이다. 이 구속함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아브라함처럼 오직 믿음으로서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피로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다. 그러나 문제는 예수를 믿어도 아직 우리가 죄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다. 구원받은 신자라고 해서 더이상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새 사람,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에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의와 생명의 종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죄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어 사는 존재는 아니다. 늘 우리의 삶에 죄에 대한 갈등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 7:24)”라고 탄식하지 않았던가.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난 신자라 하더라도 여전히 그의 죄성으로 인하여 수시로 넘어지고, 실패하고, 좌절하고, 죄로 인하여 움츠려들고, 계속된 실패로 인한 패배감과 무력감, 그리고 신자로서 낮아지는 자존감 등 우리 안의 패배의식과 같은 문제들은 내 방법, 내 노력, 내 의지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 안의 모습들만 보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가 없다. 구속의 은혜를 입었음에도 여전히 내 안의 죄성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죄가 주는 비참함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1절을 보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선언인가. 여전히 나 자신만 놓고보면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여전히 죄로 넘어지고, 실패하고 좌절하고 낙심한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시절과 지금을 비교하면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뭔가 엄청난, 뭔가 극적인 반전이 이루어졌다. 그리스도 밖에 있었을 때에는 정죄함만 남아있었다. 마치 백화점에 진열된 옷에 상품 태그가 붙어있는 것처럼, 우리 뒤에는 온갖 죄목만 덕지덕지 붙어서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의 심판을 받아 마땅했던 존재였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분 안에 거하기 시작한 뒤로는 우리를 수식하던 모든 죄와 사망의 태그가 끊어졌고, 모든 정죄함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모든 정죄함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 뿐이다. 우리가 앞서 찬송했던 가사의 고백처럼 “피난처 있으니 환난을 당한 자 이리 오라 땅들이 변하고 물결이 일어나 산 위에 넘치되 두렵쟎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여러분, 이 사실을 믿으시는가? 이 세상 아무리 극심한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죄의 항목을 겹겹이 쌓아 올린다 할지라도 저와 여러분을 향하신 그리스도의 보혈보다 크지 못하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의 자비와 사랑은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인생 길을 가는 동안 넘어질 수 있다. 예수 믿어도 넘어질 수 있고, 죄 짓고 쓰러질 수 있다. 그 때, 도피성이 되시고, 피난처 되시는 예수님 안으로 들어오라. 주님의 십자가 보혈의 피를 의지하며 더욱 주님의 품 안으로 들어오라. 그 분 안으로 들어오면 결코 정죄함이 없다. 죄의 두려움에 시달리는 분이 있는가? 두려워 말고, 지금 당장, 우리의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 안으로 들어오라. 환난 날에 피할 바위가 되시는 주님께로 피하라. 허다한 모든 죄를 덮고도 남을만큼 거룩하고 아름다우신 주님의 보혈을 의지하여 주님께 나아가라. 그러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선언하신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 할렐루야!
그렇다면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정죄함이 없는 그 이유가 무엇인가? 2절 말씀을 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1절과 2절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사죄 선언” 이다. 하나님이 모든 죄를 용서하셔서 죄 없다 선언하셨는데, 세상 어느 존재가 “아닙니다! 잘 찾아보세요! 분명 죄가 있습니다다" 라고 그 판결이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 온 우주의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친히 무죄를 선언하시고 공판하셨는데 세상 어느 존재가 그 판결을 뒤집고 정죄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 말씀을 주의하여 들으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의 사죄선언이 나에게 이루어진 일이라고 착각하는 경우들이 있다. 평소 죄에 대하여 아무런 경각심도 느끼지 않으면서, 거룩과 성화에 대하여 아무런 몸부림이 없으면서, 자기 자신을 아무 거리낌없이 불의와 더러움에 내어주면서도 어떠한 가책도 느끼지 못하는 자들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내가 예수 믿어 천국행 티켓을 확보했으니 이후로는 무절제와 방종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도 여기에 해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받는 자는 누구인가?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이다. 예수 안에 참되게 거하는 자들이 어찌 방종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 예수께 제대로 접붙여진 자들이 어찌 죄의 결실들을 계속해서 맺어갈 수 있는가? 따라서 이 말씀 속에 숨겨진 귀한 보물을 발견하는 자들은, 자신의 죄성으로 인하여 처절하게 몸부림치던 자들이다. 내 안의 연약함으로 인해 괴로워하고, 죄로만 기울어지는 나의 성향을 애통해하며, 우리의 주 되시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내 안에 담아내기 위하여 온 힘과 정성을 쏟아내는 자들, 어제보다 오늘 더 거룩의 열매를 맺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자들만이 이 말씀의 무한한 가치를 깨닫고 그 안에서 참 위로를 경험하는 것이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정리하면 이렇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택하시고, 독생하신 아들의 피값으로 구속하신 자들은 하나님께 무죄판결을 받은 자들이다. 분명 연약한 죄인이지만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완전히 덮어주셔서 그 피로 인하여 의롭다고 여기신다. 그 피로 우리의 모든 죄의 값을 지불하셨다. 그 피로 우리를 자유케 하셨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우리를 옭아매고 있던 죄와 사망의 법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해방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함께 봉독한 1절과 2절에서 공통적으로 강조되고 있는 부분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 는 말이다. 그렇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 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불확신 가운데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고,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죄사함을 불신하게 만드는 사탄의 유혹에 흔들리지 말고,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자에게 이러한 놀라운 축복이 임함을 기억하라. 이 말씀을 믿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우리의 영원한 피난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오직 그분께로만 가까이 가며, 오직 그분의 피로 우리에게 주어진 죄사함의 은총을 확신하는 이 자리의 모든 성도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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