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성찰(信仰省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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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9:25–27 (NKRV)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 보이지 않는 것을 가꾸는 시간
# 보이지 않는 것을 가꾸는 시간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 국가적으로 내려졌던 모임에 대한 통제가 조금씩 완화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주 부터는 모든 모임이 통제 없이 이뤄 질 수 있게 됐죠. 코로나가 이제 막마지에 다다랐다고 보고 싶습니다. 지난 주 17일자 중앙일보에 “호재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났습니다. 내용은요. 이제 코로나19에 대한 방역을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되면서 달라진 상황에 따른 소비행태를 두고 대형마트에서 긴급회의에 들어갔다는 거예요. 이제 곧 가정의 달인데다가 야외활동이 늘어나기 때문에 <포스트 오미클론>에 대한 대책을 간구하는 거죠. 그 중에서도 업계에서 고려하는 곳이 바로 교회예요. 왠지 아세요? 이제 현장예배 참석에 제한이 없어지면서 다시 교회를 찾는 사람들의 소비할지가 어디를 향할지 추측하는 거죠. 뭘까요? 이제 종교모임이 자유로워지면서 어떤 종류의 소비가 늘어날까요? 바로 패션의류&화장품입니다. 여전히 마스크는 쓰지만 사람들과 대면하는 자리가 가능하기 때문에 예쁜 옷도 좀 사고, 화장도 좀 하면서 자기를 꾸미는데 다시 주머니를 열거라고 생각하는거죠.
어떠세요? 정말 그런가요? 우리 서로를 향해서 이렇게 얘기 해줄까요. “안 꾸며도 예뻐!!” “겉 사람보다 속 사람이 더 아름답습니다”라구요. 진정한 아름다움은 우리 속 사람에 있습니다. 코로나로 약 25개월의 긴 시간 동안 많은 제한과 통제를 속에 있었습니다. 우리 예배도 그랬잖아요. 모이면 된다 안된다, 모여도 몇 명 이상은 된다 안된다… 소그룹 모임도 안되고, 함께 식사하는 것도 안되고… 이전에 물흐르듯이 자연스럽던 게 막혀버리면서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생각했어요. 하지만 오히려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예배의 본질과 신앙의 참된 모습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 있었어요.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우리의 신앙은 외적인 모습이나, 형식에 있에 구애받지 않고 우리의 중심을 통해 각자의 일상을 통해 이어진다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지금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우리 속사람을 꾸며야 하는 시간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지금까지의 답답함을 풀기 위해서 어디를 가고, 무엇을 입고, 무엇을 바르고, 무엇을 먹느냐를 고민하며 시간을 보낼 때. 나는 누구와 함께 이 길을 가는 것이고, 누구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며, 누구에 의해서 만족함을 얻을 것인가? 이 물음에 자문자답하며 자신의 속사람을 꾸며야 하는 시간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과 이것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는 삶
#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는 삶
사도바울은 모든 형식과 규칙을 초월한 사도 였습니다. 20-22절을 보면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을 구원코자 함이니"라고 합니다. 바울에게는 신앙의 어떤 형식이나 규칙이 없습니다. 모든 형식을 초월하는 것이 그가 가진 신앙의 원리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형식을 무시하지는 않았습니다. 바울은 형식을 초월한 것이지 무시한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교회가 선교를 하고, 구제를 하고, 전도를 하는데 그렇다고해서 교회의 본질이 선교, 구제, 전도, 예배, 이런 것들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묻겠습니다. '선교를 하면 다 교회인가요?' , '구제를 하면 다 교회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배를 드리면 다 교회다' 이것 역시 틀립니다. 무슨 소린지 의아하실 수도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 되는 것은 선교나 구제나 예배와는 하등의 상관이 없습니다. 교회의 본질은 예수님의 십자가이고, 그분의 부활입니다. 어떤 형식이나 규칙도 그 희생과 승리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정신 안에서 희생의 마음으로 모여진 그 무리. 그분의 부활의 승리를 나의 승리로 여기며 모인 그 무리가 바로 교회입니다. 이 희생과 섬김과 사랑과 승리가 무엇으로 증명되느냐. (선교로 증명되고, 구제로 증명되고, 예배로 증명되는 것입니까?) 삶으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 자체가 선교이고, 구제이고, 예배이고, 기도입니다. 이것이 형식을 초월한 사도 바울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기를 위한 초월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이것을 모른 채 섣불리 형식을 초월하려고 나서게 되면 오히려 자기의 편함을 위해서 형식을 파괴하려는 것과 다름없게 됩니다. 바울은 분명한 목표가 있었어요. 바울은 모든 것을 복음을 위해서, 복음에 참예하기 위해서 행했던 것입니다. 바울의 모든 목표와 관심은 오직 하나님이었습니다. 자기 속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행동은 오직 하나님이 중심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있습니까? 사람들은 신앙의 수준을 <행동의 여부>로 정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정해 놓은 신앙의 모습을 기준으로 해서 그 기준에 얼마나 도달하느냐의 여부를 가지고 ‘하나님을 가까이 한다, 못한다’로 결정지으려고 합니다. 행동과 행위.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내 속에 하나님이 함께하고 계시는지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고 계심을 잊는다면 그 순간부터 신앙생활은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안다’면 그 삶은 무엇을 중심으로 움직이게 되겠습니까? 자연적으로 하나님을 중심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사람이 자기를 위하여 사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기보다는 자기를 바라보고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중심보다는 자기 중심이기 때문에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 경계선 지능 - 경계에 선 우리의 신앙
# 경계선 지능 - 경계에 선 우리의 신앙
<경계선 지능>이라는 말 들어보셨을 거예요. <경계선 지능>은 지능지수가 평균보다 조금 낮게 측정되어서 지적장애와 비지적장애 사이의 경계선에 있다는 분류를 <경계선 지능>이라고 합니다. 일반인들 중에도 컨디션이 좋지 못하면 경계선 지능으로 분류 될 수도 있다고 해요. 지적장애 3급으로 분류되지만 일반인과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만큼 사회적인 관계에서도 상황에 따른 적절한 단어를 구사할 수 있고, 또 사회성은 조금 부족하더라도 인지와 대화가 가능해서 친구를 사귀는 게 전혀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가 이런 어려움을 갖고 있는지 부모도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모른채 아이를 습득이 느린 아이를 닦달하고, 폭언과 폭행으로 이러지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죠. 게다가 약은 사람들, 주변에서 이용하려고 드는 사람들에 의해서 피해를 보는 경우가 많이 생긴다고도 해요. 경계선에 있다는게 그렇습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확신하고, 하나님 중심을 중심으로 살면서도 늘 깨어있기 위해 몸부림 쳤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 27절에서 이렇게 고백하죠.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바울은 자신의 절제와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며 살았던 삶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 삶을 바울은 달음질하는 경주자와 격투를 하는 선수로 비유해요. 이 경기들은 자신의 삶을 대변하고, 나아가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합니다. 경주하는 사람이 목표도 없이 무작정 달리지 않습니다. 또 격투를 하는 사람도 주먹을 뻗어 쳐야 할 목표가 있습니다. 허공을 향해 주먹질하는 건 의미가 없기 때문이죠. 이기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이기기 위해서는 승리에 방해가 될만한 것은 스스로 거부하고 절제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도 마음대로 먹지를 못합니다. 우승을 위해서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라 해서 절제없이 마음대로 먹어버리면 우승은 점차 멀어지게 됩니다. 눈앞의 것 때문에 목적한 것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예로 들면서 경기하는 선수들이 썩을 면류관을 위해서도 그토록 자신의 자유를 절제하면서 우승을 위해서 행동하는데 하물며 영원히 썩지 아니할 면류관을 목적으로 사는 신자들이 절제없이 자기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진리를 알고, 복음을 알고, 하나님을 알았다면 그 삶의 목표는 분명합니다. 그런데 고린도인들은 하나님을 알았다는 것을 오해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았으면 그것으로 이미 구원을 얻은 자이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모든 일에 자유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위한 자유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신자가 주장하고 누리는 자유가 하나님의 일에 유익이 되지 않는 것이라면 결국 방향도 없이 달리는 경주자 같고, 허공을 치는 권투 선수와 같다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의 몸을 쳐 복종하게 했다는 것은 항상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자신을 끊임없이 살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자신의 구원을 염려해서 절제하는 사람을 산 것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만약 그렇다면 바울의 절제는 자기를 위한 절제가 되어버립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바울은 신앙이 좋으니까 별 갈등도 없이 신앙생활을 쉽게 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도 인간이 어떻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날마다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점검하고 살피지 않으면 한순간에 복음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는 인간임을 잘 알았습니다. 바울의 두려움은 구원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 되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바울이 가졌던 두려움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다는 두려움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너무도 담대하게 자기 멋대로, 하고 싶은 대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자꾸 세상으로 빠져 들어가는 자신을 고치면서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서 힘없는 자가 되는 것을 더 두려워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종의 자리에서 벗어나 있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목표없이 달려가는 경주자의 모습이고, 허공을 치는 권투 선수의 모습입니다.
# 윤동주 <쉽게 쓰여진 시>
# 윤동주 <쉽게 쓰여진 시>
윤동주 시인이 쓴 <쉽게 쓰여진 시>를 아실거예요. 시의 한 소절 중에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며 조국민들이 나라 안팎에서 일본에 의해 처참하게 죽임당하고 있는 시대에 본인은 일본에서 유학하며 일본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이렇게 쉽게 시를 쓰고 있다는게 한 없이 부끄럽고, 미안하고, 심지어 죄책감마저 들었던 그 감정을 잘 드러냈죠. 일본으로 유학을 가는 배에 오르려면 창씨개명을 해야 했는데, 실제로 윤동주 시인은 창씨개명을 합니다. 어쩌면 그런 자신의 무기력한 모습이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혔겠죠. 윤동주 시인 자신의 시 한편 한편을 결코 쉽게 쓰지 못했을 거예요. 그의 고뇌와 자기반성, 자기 내면을 성찰했던 모습은 그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이 땅에 살면서 우리가 가져야 하는 고뇌와 자기반성, 우리 신앙의 성찰이 어쩌면 이런거 아닐까요. 저항할 수 없을 만큼 거센 시대의 풍조와 세상의 질서 속에서 너무나도 무기력한 우리의 모습. 신앙의 양심과 가책, 밀려오는 부끄러움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그날 까지 내내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감당할 수 없는 괴로움을 견디며 자신을 성찰하는 것. 이것이 사도바울이 전해주고 있는 본문 속의 자기 성찰입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누렸던 참 자유가 여러분 자신의 자유가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 결론
# 결론
여러분, 사도 바울이 누렸던 참 자유가 여러분 자신의 자유가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시간 그 목표와 목적을 분명히 하시기 바랍니다.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목적, 교회로 나온 이유는 주님과 영원토록 함께 하는 것입니다. 정말 이것이 목표라면 우리의 할 일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일에 대한 염려와 걱정에서 벗어나서 오직 복음을 위해서 절제하고 양보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일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삶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복음을 위해서 절제하고 양보하며 사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살겠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속 중심에 하나님이 자리하고 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자신의 인생이 성공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생의 목표가 되어서 살아갈 때 가능한 일입니다. 때문에 우리에게는 날마다 나를 쳐서 말씀에 복종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 욕심을 따라 움직이지 않고 오직 복음을 따라 움직이도록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절제는 생명을 향한 목표가 있을 때 발생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더 소중한가를 바로 알기 때문에 포기할 것은 포기하며 주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포기할 것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로 인해서 신앙의 갈등을 겪고 살아간다면 아직까지 자신이 종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안다고 하더라도 종의 자리가 아닌 주인의 자리에서 종으로 자처하기 때문입니다.
종에게는 내일 일을 걱정하고 염려할 권리가 없습니다. 주인의 명령대로만 움직일 뿐입니다. 교회 부흥을 걱정할 권리도 없습니다. 그것은 종의 일이 아닙니다. 먹고 살 일을 걱정할 권리도 없습니다. 그것 역시 종의 일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것을 잘 알았기에 오직 종의 자리에서 절제할 것을 절제하고, 포기할 것을 포기하고, 초월할 것을 초월하며 오직 복음을 위해서만 행동했던 것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우리의 주 되신, 그분만 뒤따라가며 주님이 하신 대로 순종하며 살기를 간구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기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