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421새벽] 예수님 잘 믿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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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312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본문 눅9:57-62
자비하신 하나님,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다시 살리시고 하나님 자녀 삼아주심에 감사합니다. 이 땅에서 천국을 향한 순례의 여정을 살아가며, 늘 우리의 영원한 본향을 바라보며 살아가게 하시고, 주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실 그 날까지 예수 잘 믿다 가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감사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몇달 전에 학생심방을 하면서 어떤 학생이 이렇게 고백하였다. “목사님! 저는 예수님 잘 믿다가 천국에 가고 싶어요.” 여러분, 생각해보면 이 학생의 고백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지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이 자리에 앉아있는 우리 대다수의 꿈이기도 할 것이다. 여러분, 실로 그러하지 않은가? 우리의 평생에 걸친 목표이자 우리의 궁극적인 소원은 죽는 그 순간까지 예수님 잘 믿는 것이다. 아멘인가?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이 중요한데, 그러면 예수님을 잘 믿으려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 오늘 본문 말씀에서, 우리는 그 대답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이 길을 가실 때에 3명의 사람들이 와서 예수를 따르겠다고 했다. 그 때 예수님은 세 사람에게 각각 한 마디씩 해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주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내가 어떻게 해야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인지를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이 말씀을 따라 오늘 이 새벽의 시간에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을 잘 따르는 것인지,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주를 잘 믿는 것인지를 말씀드리려 한다.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길 바란다.
예수님을 잘 믿으려면, 첫째로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으로 마지막 길을 가시고 있었다. 이 때 한사람이 와서 말했다. “주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겠습니다.”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내가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기특한 고백인가. 얼마나 칭찬할만한 일인가?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마땅히 칭찬하고 예뻐하실 것이라 생각했던 그 반응을 보이지 않으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58절에 “여우도 굴이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갑자기 이것이 무슨 말씀인가? 주님께서는 이 사람이 주님을 따르려는 의도를 아셨던 것이다. 이 사람은 왜 주님을 따르겠다고 했을까? 주님의 대답에서 그 사람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주님을 따라가면 좋은 일만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뭔가 일이 잘 풀릴 것 같다. 뭔가 성공할 것 같다. 그래서 주님께서 어느 영광의 자리에 오르시든 나도 따라가서 그 영광의 혜택을 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무슨 의미인가? 이 땅에서 주님을 온전히 따르고자 한다면 세상의 안일과 편안함, 세상 인기, 세상에서 대접받는 것, 다 내려놓고,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는 말이다.
여러분 생각해보라. 여러분 친구들 중에 모임에서 돈 잘 쓰는 사람들이 있다. 괜히 그 사람 곁에 있으면 얻어먹을 것도 많고 얼마나 좋은가. 돈 잘 쓰는 사람을 따라가기란 쉽다. 돈이 있기 때문이다. 권력있는 사람에게 충성하기도 쉽다. 권력의 부스러기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명예있는 사람을 따라 가기란 즐겁다. 같이 명예로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던 예수님, 이 땅을 살아가시며 돈도 없으셨고, 딱히 명예도 없으셨던 예수님, 세상의 권력이나 좋은 신분 혹은 좋은 학벌도 없으셨던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지금 주님은 무엇을 위해 이동하고 계시는가? 함께 읽진 않았지만, 51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승천을 위해서는 부활을 하셔야 하고, 부활을 하려면 일단 죽어야 한다. 따라서 지금 주님은 고난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이다. 그런데, 지금 이 사람은 단지 주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오르는 줄 알고 주님을 따르가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얼마나 어리석고 미련한가.
여러분은 왜 예수를 믿는가? 혹시라도 이 어리석은 자와 같은 마음은 아닌가?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세상적인 것을 얻으려고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여우도 굴이 있고 궁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그래도 따라 오겠느냐? 라는 것이다.
초대교회 때, 서머나 교회의 감독 폴리갑이라는 분이 있었다. 그는 사도 요한의 제자였고, 86세 때 아우텔리우스 황제에 의해 순교했다. 그 때 사형집정관은 최대한 예를 갖추어 말했다. “지금이라도 예수를 부인신다면 살려 드리겠소” 이에 폴리갑이 대답했다. “주님은 지난 86년간 나를 한번도 배신하지 않으셨는데, 내가 어찌 주님을 배신할 수 있겠소” 그렇게 그는 지금 당장의 생명보전보다 영원한 하늘나라의 상급을 선택하였다. 지금 예수를 팔아 잠시 잠깐 생명연장을 누릴 수 있을진 몰라도, 이것을 통해 얻을 이 세상의 부귀영화보다 장차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누릴 상급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귀한 것임을 그는 알았기 때문이다.
여러분, 주님께서도 말씀하셨다. 마5:11-12 에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주님을 따라갈 때 이 세상의 부귀영화가 따라온다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세상이 우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스를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럼에도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 우리에게 복된 이유는, 주를 따르던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도 그런 길을 걸었기 때문이요, 그보다 앞서 우리 주님께서도 그 길을 걸으셨기 때문이다. 수치과 모멸과 멸시의 길을 걸으신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우리에게도 이런 상황들을 마주하게 될 것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주님은 물으신다. “너희도 가려느냐” 이에 베드로는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 앞에 놓인 수많은 고난과 역경의 길들이 있을지라도, 주님을 따르는 삶이 바로 예수님을 잘 믿는 것임을 기억하길 바란다.
예수님을 잘 믿으려면, 둘째로 우선 순위를 잘 결정하여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뭐라고 반응하는가?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 때 예수님은 냉정하게 대답하셨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여러분, 주님의 이 말씀은 참 이해하기 쉽지 않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그 장례를 치루는 것은 세상 어떤 일보다 우선이 아닌가? 군대에서도 아버지 돌아가시면, 무조건 휴가를 준다. 그런데 주님의 대답은 그렇지 않으셨다. 장례가 먼저가 아니라고 하신다.
그렇다면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가? 여기서 두 번째 사람은 정말로 부친이 죽었는가? 대부분의 성경주석자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만일 실제로 이미 죽은 상황이라면 예수님께서도 그를 보내어 주셨을 것이다. 이 사람의 부친은 아직 죽지 않았다. 어쩌면 아직도 건장한 노인일수도 있고, 또 어쩌면 짙은 병색으로 인해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는 상황일런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두번째 사람이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 언제 일어날지도 모르는 막연한 일을 핑계삼아 주님을 따르는 일을 미루고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 예수를 잘 믿으려면 일의 우선순위를 알아야 한다. 우리 중고등부 선생님들께도 한번 말씀드렸던 적이 있는데, 우리는 누구나 동일하게 24시간을 살아간다. 어떤 사람에게는 25시간, 어떤 사람에게는 20시간만 주어지지 않았다. 동일한 시간, 동일한 조건 가운데 살아간다. 그런데 정작 살아가는 삶의 모습은 모두가 다르다. 똑같은 일과 시간, 똑같은 환경, 똑같은 상황을 살아가지만 어떤 사람은 그 가운데에서도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기도 하고, 쉬는 시간을 활용하여 기도에 힘쓰기도 하며, 운전을 하며, 길을 걸으며 찬송에 힘쓰기도 한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이 모든 경건생활들은 뒷전으로 미루고 시간이 남을 때마다 쇼핑을 하고, 여유가 있을 때마다 티비나 유튜브를 보며 시간을 허비한다.
분명 동일하게 주어진 시간과 환경 속에서 이 두 부류는 서로 다른 결과를 만들어낸다. 그것이 시간이 흐르고 습관이 되면, 이 두 사람의 신앙은 얼마나 차이가 나게 될까? 그리고 인생의 종말의 날, 주님께서는 이 두 부류에게 각각 뭐라고 말씀하실까? 마찬가지로 여러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동일하다. 동일한 시간과 환경 속에서 더욱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잘 활용해야 한다. 우선순위에 따라 우리의 활동들을 재배치 해야 하지 않겠는가.
예수님을 잘 믿으려면, 마지막으로 쟁기를 잡고 뒤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 주님의 초청에 세 번째 사람은 “네! 제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해 주십시오” 말한다. 이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예수님을 잘 믿으려면, 뒤를 보지 않고 전진해 나가야 한다. 쟁기를 붙들었으면 뒤를 보지 말아야 한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다가 소금기둥이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급에서 종살이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홍해 바다도 건너고, 가나안 땅을 향하여 갈 때, 광야 길을 가다가, 조금이라도 어려움이 오면,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뒤를 돌아보며, 애굽을 그리워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지 않았던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신자라면 이전 것들은 뒤돌아보지 말아야 한다. 구원받기 이전에 추구하고 갈망하던 것들을 더이상 바라보지 말아야 한다.
모세가 만일 자신의 왕자된 신분을 뒤돌아보며 애굽에서 누리던 많은 부귀영화를 추구하며 살았다면 그는 하나님의 큰 일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히11:24-26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즉 그는 이 인생길 마지막에서 자신에게 상을 주실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완주했던 것이다. 사도 바울도 빌 3:13-14 를 통해서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마치 결승선 푯대를 향하여 42키로를 달리는 마라톤선수와 같이, 오직 자신의 경주 앞에 놓인 유일한 푯대만을 바라보며, 뒤를 돌아보지 않고 오직 앞만 보고 달려가는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결론이다. 예수 잘 믿는 것이 무엇인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다시 살리신 그분을 따르기 위해 때로는 우리 앞에 놓인 고난도 각오하는 자들이다. 그분을 합당하게 섬기기 위해 우선순위를 잘 결정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여건들을 최적화하는 자들이다. 오직 그분께로만 달려가기 위하여 뒤를 돌아보지 않고 우리의 인생길 종착역에서 기다리는 주님께로, 주님만 바라보며 달려가는 자들이다. 저 천국을 향한 이 땅의 우리 순례여정 가운데 어제보다 오늘 예수를 더 잘 믿고, 오늘보다 더욱 예수를 더 잘 따르는 여러분들 되시어, 그 마지막 날 영광의 주께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실 때에 영광 중에 크신 상급을 받아 누리는 모든 복된 성도 여러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