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밀한 관계를 막는 장애물들

요나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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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한 관계를 막는 장애물들/우리의 오만과 편견이라는 자기중심성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방해한다.
[서론]
‘편견은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오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든다.’
Prejudice prevents me from loving others.
Pride makes no one else love me.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에 나오는 유명한 말입니다.
누군가와 깊은 관계를 맺는데 있어 그만큼 오만과 편견이 장애물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을 곰곰히 생각해보면 결국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기 안에 있는 오만과 편견때문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라고 말합니다.
때로 성경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신랑이라고 하시고, 우리를 신부로 부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두 친밀한 관계를 의미하는 표현들 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생활은 그분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로 정의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데 장애물들이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그 장애물이 우리의 오만과 편견, 즉 자기 중심성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내 안에 장애물들을 제거하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누리기를 원합니다.
[본론]
오늘 말씀의 주인공은 요나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부르신 예언자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메신저로 부를 정도니까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과 심한 갈등을 겪는 그를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남녀 사이에도 밀당이 있듯 하나님과 요나 사이에도 밀당이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일을 누구보다도 충실히 해야 하는 요나는 무엇때문에 하나님과 이런 밀당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하나님은 이런 요나를 어떻게 다루실까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우리는 요나서 전체의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1장에서 하나님은 요나에게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요나는 그것이 싫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도망칩니다.
배를 타고 니느웨와는 정 반대 방향으로 도망갑니다.
요나에게 니느웨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괴롭힌 원수이며, 잔인하기로 소문난 민족이었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대영박물관에 가면 앗수르 민족이 얼마나 잔인했는 지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을 꼬챙이에 끼우기도 하고, 가죽을 벗겨 죽이기도 하고, 재미로 포로로 잡혀온 사람 배속에 고양이를 넣어 괴롭히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요나가 보기에 그 민족은 망해야 하는데 하나님이 가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경고를 전하라고 하니까 가기 싫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도망치는 요나를 가만두지 않으시고 뒤쫓으셨습니다.
태풍을 보내 요나가 탄 배가 뒤집어질 정도로 그를 위태롭게 만드셨습니다.
그러자 배에 함께 있던 사람들은 이 태풍이 요나때문임을 알게 되었고 어쩔 수 없이 요나의 요청대로 그를 바다속에 빠뜨리게 됩니다.
2장에서는 물속에 빠져 죽게된 요나를 하나님이 큰 물고기를 보내 구해주셨습니다.
그 물고기 뱃속에서 3일동안 요나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순종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그 기도에는 불순종했던 자신에 대한 진정한 회개는 빠져 있었습니다.
어찌되었든, 큰 물고기는 요나를 다시 뱉어냈고,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게 됩니다.
3장에서 요나는 니느웨를 돌아다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3일동안 니느웨 전역에 선포해야 하는데 겨우 하루동안만 선포합니다.
그리고 심판의 말씀도 겨우 몇마디만 전합니다.
앞뒤 맥락도 없이 ‘40일 후에 니느웨가 무너진다.’
이게 그가 전한 말의 전부였습니다.
억지로 순종하다보니 최소한으로 순종하는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말만 듣고도 백성들로부터 시작해서 왕, 심지어 짐승들까지 금식하고 회개했습니다.
그들은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간구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돌이켜 니느웨를 멸망시키지 않기로 하셨습니다.
그 다음 일어나는 일이 바로 오늘 요나서 4장의 말씀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것이 너무나 못 마땅해 화가 잔뜩 났습니다.
그는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이렇게 불평합니다.
2,3절입니다.
주님,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렇게 될 것이라고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내가 서둘러 스페인으로 달아났던 것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는 분이셔서 내리시려던 재앙마저 거두실 것임을 내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 이제는 제발 내 목숨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무슨 말입니까?
요나는 니느웨가 회개하면 하나님이 뜻을 바꾸실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어떻게든 니느웨에 가지 않으려고 도망친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니느웨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했으니 화가난 것입니다.
그가 화를 낸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자신이 굉장히 마음쓰고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마치 금속탐지기로 보물을 찾으면 삐삐삐 소리가 나듯이, 분노는 우리 마음속에 숨겨진 보물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 크게 화를 냅니까?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누군가 건드리면 크게 화가 납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내 우상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제 자존심을 건드리면 화가 납니다.
아내랑 크게 싸울 때는 거의 그런 이유입니다.
자존심이 제게는 우상인 것입니다.
제 안에 무너져야 할 우상은 남편으로서 그리고 목회자로서의 자존심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에 분노하십니까?
요나는 하나님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에 분노했습니다.
요나 마음의 보물은 결국 자기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줄 알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들의 원수인 니느웨를 용서하면 절대로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의의 하나님이시라면 니느웨는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니느웨가 회개하는 것 조차 죽고 싶을 정도로 싫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누군가를 너무 싫어하면 전도하기도 싫지 않습니까?
그냥 하나님 심판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하지 않습니까?
똑같은 마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정의의 잣대가 이스라엘과 자신에게는 한없이 너그럽다는 것입니다.
요나 당시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 치하에 있었습니다.
우상숭배가 넘쳐나고, 폭력과 불의가 판치는 매우 타락한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호세아나 아모스 선지자가 북 이스라엘의 멸망을 경고했던 시절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악은 봐주시고, 니느웨의 죄악은 심판하셔야만 하는 것인가요?
그것이 바로 요나가 가진 오만과 편견이었습니다.
자기 중심성이었습니다.
요나의 고백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는 분이셔서 내리시려던 재앙마저 거두실 것임을 내가 알고 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구절은 출애굽기 34장 6절에 처음 나오는데요.
이 구절이 나온 계기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숭배했을 때입니다.
하나님은 이 때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 그들과의 약속을 깨뜨리시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중재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시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자신이 누구신지 밝히시는 내용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역시 그들의 죄로만 따지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자신들의 죄악은 하나님의 성품때문에 용서를 경험해 놓구선 니느웨는 용서하시면 안된다고 말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내로남불이 아닐까요?
그럼 우리는 어떻습니까?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한없이 너그럽기를 기대하고, 남의 죄는 쉽게 정죄하는게 우리들 아닙니까?
내 들보는 쉽게 보지 못하고, 남의 티끌은 쉽게 찾아내는 게 우리들 아닙니까?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무엇인가 결정을 잘 못하면 신중한 것이라고 말하고,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결정을 잘 못하면 우유부단하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생각 안에 얼마나 나도 모르는 오만과 편견이라는 자기 중심성이 숨겨져 있습니까?
한편, 화가나서 자신을 죽여달라는 요나에 대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절입니다.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물고기 뱃속에 있을 때는 살려주셔서 감사하다고 찬양까지 해놓구선 이제는 죽여달라고 말하니 하나님이 기가 찰 노릇입니다.
‘저 같았으면 그래, 진짜로 한번 죽어볼래’하며 혼내줬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요나를 반드시 쓸 이유도 없었습니다.
말 죽으라고 안 듣는 자신의 예언자를 끝까지 참아가시면서 설득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말 잘 듣는 다른 사람 쓰시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요나를 계속해서 기다려 주셨습니다.
도망치는 요나에게 파도를 보내 혼내주셨고, 뱃사람들의 말을 통해 깨달을 기회를 주셨습니다.
또한 물고기로 그를 구원해주셨고,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를 통해 그에게 깨달을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무딘 요나는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또다시 놀라운 방법으로 그를 설득하십니다.
이제 5절에 보면 요나는 니느웨 근처 산 중턱으로 이동합니다.
요나는 40일 후에 하나님이 니느웨를 어떻게 하시는가 보려고 그곳에 올라간 것입니다.
솔직히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를 믿지 못했습니다.
‘사람 본성이 어디 가겠나’라고 생각하고 그들의 멸망을 지켜보려고 산에 올라간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은 고쳐쓰는 게 아니다.
사람 본성은 바뀌지 않는다.
이런 속설을 믿고 있지 않습니까?
저도 그런 것 같습니다.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고, 잘 믿지 않습니다.
옛날 유명했던 연예인 한 분이 개과천선해서 선교사가 되었다며 방송에 나오니까 속으로 ‘에이~사람이 어디 가나?’
이런 생각을 했는데 그 순간 오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도 니느웨의 회개를 믿어주시는데 내가 뭐라고 안 믿어주나?
하나님도 요나를 이렇게 기다려주시는데 내가 뭐라고 지금 판단하고 난리인가?
우리가 할일은 사람을 있는 그대로 믿어주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한편, 하나님은 니느웨가 망하는 것을 지켜보려는 요나를 위해 박넝쿨을 만들어주십니다.
심보가 나쁘니까 저같으면 내버려 두었을 것 같은데 주님은 그가 더위에 괴로워하지 않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에 요나는 너무나 기뻐했습니다.
이 작은 박넝쿨하나가 만들어준 그늘 하나로도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다음날 하나님은 다시 요나에게 벌레를 보내셔서 그의 박넝쿨을 다 사라지게 하셨습니다.
박넝쿨을 사라지게 하고 나서 이번에는 뜨거운 동풍을 그에게 보내셨습니다.
햇볕은 머리에 쨍쨍 쬐고, 더운 바람이 그를 괴롭히자 요나는 이제 또다시 차라리 죽여달라고 말합니다.
그냥 입에 붙은게 죽여달라는 말입니다.
이런 땡깡이 있을 수 있을까요?
우리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이 박넝쿨을 없앴다고 죽여달라고 땡깡부리는 요나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9절입니다.
박넝쿨이 죽었다고 네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가 대답합니다.
옳다뿐이겠습니까? 화가 나서 죽겠습니다.
여전히 요나는 하나님에게 마음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10절입니다.
‘네가 수고하지도 않았고, 네가 키운 것도 아니며,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식물을 네가 그처럼 아까워하는데 하물며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까지 않겠느냐?’
여기서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란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지금 우리 주위에 있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모두 이런 사람들이죠.
그런데 요나를 보십시오.
요나는 자신이 수고해서 키운 것도 아닌 박넝쿨 하나만으로도 기뻐하고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이 주셨다가 빼았았다고 하나님께 화내고 죽겠다며 난리를 칩니다.
그 식물 하나도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면서 니느웨 백성들의 목숨은 아무렇지 않게 여긴다는 것은 얼마나 큰 모순입니까?
마치 자기가 기르는 개는 소중히 여기면서 주변 사람은 함부로 대하는 그런 사람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자신의 작은 불편에는 난리를 치면서 남의 생명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이것이 그의 오만과 편견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예전 코로나 초기에 몇몇 한국교회가 보였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예배드리면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실 것이라고 착각하며 대면예배를 고집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코로나에 걸리든 말든 상관없고, 자신들만은 예배를 드려야 한다며 이기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 더 걱정하고, 더 조심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누가 사람의 생명을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에 더 어울린 행동입니까?
그들의 종교적 오만과 편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지적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기도도 매번 나를 위한 것 아닌가요?
내 가족, 내 목표, 내 어려움 모두 나를 위한 기도가 대부분 아닌가요?
우리 이웃의 어려움과 아픔에 대해서는 우리가 얼마나 무감각합니까?
하나님이 내 작은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면서, 우크라이나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유없이 죽어가는 것에 대해서는 왜 화가 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요나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왜 오만과 편견에서 벗어나야 하나요?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의 오만과 편견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원하신 것도 ‘내 마음 좀 알아다오’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심판은 심판을 위한 심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니느웨가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마음에서 그들에게 심판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는 결국 하나님 사랑의 또다른 모습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7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더 기뻐할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심판이 아니라 회개이고, 주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 할 대상은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은 니느웨의 케이스를 통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원하셨습니다.
악독한 니느웨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해주시는데 선택받은 백성인 이스라엘은 얼마나 더 용서하시겠느냐는 의미입니다.
니느웨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은 요나가 이스라엘에 대해 깨닫기를 바라셨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탕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탕자의 동생은 아버지의 모든 돈을 다 탕진하고 거지꼴이 되어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그에게 제일 좋은 옷과 신발을 주고, 반지를 끼워주시며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켜주십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 살찐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입니다.
그러자, 이를 안 형이 아버지에게 불만을 터트립니다.
자기는 평생 아버지 옆에서 잘 섬겼는데 자기를 위해서는 잔치를 벌여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깽판치고 돌아온 둘째한테는 그렇게 하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큰 아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자기 생각만 한 것입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는 것이 우리의 오만과 편견을 깨뜨리는 길입니다.
[결론]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하나님에게 더 어려웠던 것은 니느웨를 돌이키는 게 아니셨습니다.
요나를 돌이키는 일이었습니다.
요나를 인내하며 기다리시고 설득하는 일이셨습니다.
요나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요나를 끝까지 기다리신 것입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이스라엘에 가서 그 마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오만과 편견을 깨뜨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라는 것입니다.
심판받아야 할 성은 니느웨성이 아니라 실은 이스라엘입니다.
좌우 분간할 줄 아는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이 죄악을 저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너져야 할 것은 니느웨 성이 아니라 요나의 오만과 편견이었으며 그의 자기 중심성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방해하는 나의 오만과 편견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오만과 편견이라는 자기 중심성을 무너뜨리는 방법은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내가 내 생각보다 얼마나 큰 죄인인줄 깨닫고, 하나님이 내 생각보다 얼마나 긍휼과 사랑이 크신 분인지 깨닫는 것입니다.
그 차이가 더 크면 클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 말씀을 들으며 우리는 한 주동안 무엇을 순종해야 할까요?
1분 정도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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