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을 인식하라
02-04-07 벧전 4:7-11 종말을 인식하라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고난과 시련의 시간을 만나게 됩니다. 누구나 이처럼 역경의 순간들을 경험하기에, 우리 인간은 어떻게 이 세상의 모든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특별히 우리 믿는 자들은 자주 고난을 받게 됩니다. 직장과 사회에서 심지어 가정에서도 예수 믿음으로 인해 온갖 형태의 핍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우리에게 닥친 고난과 시련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그 해답을 본문은 이렇게 제시합니다.
바로 역사의 절정, 즉 종말론적인 역사관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역사의 마지막을 의식하며 사는 것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다는 것을 알고 살아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이 곧 극에 달하게 된다. 역사의 마지막이 임박했다. 부패하고 악한 이 세상의 모습들이 곧 소멸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다시 오실 것이고, 우리는 모든 고난과 시련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것이다. 우리 믿음의 완성이 이루어질 것이고,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특권을 받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종말론적인 인식을 가지고 마지막을 의식하며 살아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을 의식하고 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행함을 의미합니까?
마지막이 눈앞에 있기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그 구체적 행함을 본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7절을 보십시다.
(7)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종말을 의식하고 산다는 것 첫 번째는,
1. 정신을 차리고 살아야 함(7절)
첫째는 ‘정신을 차리고 살아라’ 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흔히 그럽니다. 니가 제 정신이냐? 도대체 정신이 있는 사람이냐?
오늘 본문에서 쓰인 정신을 차린다는 동사를 희랍어로 ‘소프흐로네사테’ 라고 하는데,
이것은 진지하고 건전한 생각을 가지고, 자신을 절제하고, 차분하고 지각있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가 언젠가 말씀드렸다시피 이 희랍어는 복합적인 의미와 아주 구체적인 의미를 반영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정신을 차리고 산다는 것은
a. 첫째는 매사에 진지하고 건전한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깊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저 경박하게 먹고 놀고 즐기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의미있는 것이고 소중한 것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자신이 처해 있는 환경 속에 무엇이 중요한 지 그 중요성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소중한 것의 가치를 바르게 알고 그 소중함을 귀하게 생각하고 귀하게 다룰 줄 아는 사람입니다. 가정과 교회와 사회 속에서 무엇이 소중한 것인가를 분명히 아는 것이 진지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소중함을 모른다는 것은 그 소중함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임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돼지에게 던져진 진주를 안타깝게 바로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을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욕망과 정욕을 자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과도한 욕심에 굴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나친 욕망을 조절하고, 가족과 직장과 사회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쉽게 동요하지 말아야 합니다. 중심에 늘 종말이 다가왔다.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지하고 건전한 생각으로 정신을 차리고 사는 것입니다.
종말을 의식하고 산다는 것 두 번째는,
2. 근신하고 기도하며 살아야 함(7절)
‘근신’ 그러면 엣날 고교시절의 한 친구가 생각납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보통 이 고등학교 후문쪽에 가면 만화가게가 있어요. 그런데 그 만화가게가 비리의 온상입니다. 만화만 보고 떡볶이만 먹는 것이 아니라, 양담배를 팝니다. 그리고 이 학생들이 소위 말하는 월담을 해서 이 만화가게에서 땡땡이를 치는 겁니다. 이 친구 그날도 땡땡이를 치다고 체육선생님한테 현장에서 담배를 물고 있다가 걸렸습니다. 귀가 붙들린 채 교무실로 끌려들어왔어요. 실컷 맞고 일주일 ‘근신’을 받았습니다. 정학은 학교에도 못나오는 것인데, 이 근신은 학교에 나와서 매일 반성문을 쓰는 겁니다. 그런데 이 친구 상담실에서 반성문을 쓰다가 상담선생님이 피고버린 꽁초를 재털이에서 꺼내서 피다가 또 걸린겁니다. 도저히 구제불능이죠.
당시 학생들 사이에는 정말 웃기는 이야기였습니다. 당시 상담실에는 다른 한 학생이 같이 있었는데, 그 학생 왈, 상담실에서 꽁초를 피다가 선생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얼른 꽁초를 버렸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들어오시자 꽁초는 해결을 했는데 힘속에 있는 연기는 해결을 못한 겁니다. 힘을 꽉 물고 있는데, 선생님이 눈치를 채시고 이 학생의 배를 툭툭 치니까, 연기가 솔솔 나오더랍니다. 한번 용서가 되었어요 그런데 또 그래요. 그러면 가중처벌이 붙죠. 그래서 무기정학이 되었어요. 퇴학 안 당한게 다행이지요.
근신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근신이라는 의미는 ‘말이나 몸을 삼가고 조심함’ 입니다.
인간관계 속에서 파생되는 대부분의 문제들은 이 말에서 비롯됩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말에 실수가 없어야 합니다.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할 입이 문제를 일으키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함부로 비판하고, 판단하고, 비방하고, 이리저리 말 옮기고, 없는 말 지어내고, 보태고…
자신이 잘못한 것은 모르고 상대를 끌어내리려고 없는 말을 지어내는 것, 이것처럼 야비한 것은 없습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이와 같은 일들을 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혀는 자라서 열매를 맺게 되는 씨와 같습니다. 어떤 씨를 심느냐에 따라서 그 열매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진실의 씨는 진실의 열매를 맺을 것이요, 거짓의 씨는 거짓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는 몸을 삼가야 합니다.
자신의 몸이 주님께서 주신 것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육체와 정신을 마약이나 술로 마비시키고, 현실을 도피하려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의 몸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자신의 몸을 부부생활 이외의 관계 속에 더럽혀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살전 5:6-살전 5:8]
(6)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7)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8)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믿는 자는 밤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낮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는 말이나 몸을 삼가고, 대신 항상 깨어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졸린 눈과 게으름에서 벗어나서 주님을 찾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가운데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장차 올 구원의 완성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종말을 의식하고 산다는 것 세 번째는,
3. 열심으로 사랑하며 살아야 함(8절)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곧 '사랑' 이시기 때문입니다(참조, 요일4:8). 따라서 성경은 사랑이 없는 자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열심으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이기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은 열심으로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마 22:37절을 봅시다.
마 22:(37)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하셨으니
열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 한 사람이 한 사람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 모든 가정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열심으로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정이란 어떤 가정입니까?
1) 하나님을 가장으로 모신 가정입니다.
가장이란 그 집안의 주인이며 모든 일에 최종적으로 책임을 지고 그 가정을 이끌어 가는 사람입니다. 보통은 아버지가 집안의 가장입니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정은 하나님이 가장입니다. 아버지가 하나님의 뜻대로 가정을 이끌어 나간다면 그 가정은 형통함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집의 주인이 되시어 책임을 져주신다면 부족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2) 말씀을 가훈으로 삼아야 함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정은 또한 그의 말씀을 사모하는 가정입니다. 규모 있는 가정은 가훈을 두고 그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하나님의 가정은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등불이요 빛으로(참조,시119:105) 우리가 가야 할 바른 길을 보여 줍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살 때 그 집안이 형통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하나님을 가장으로 모시고 하나님 말씀을 가훈으로 삼아 사는 가정에서 자란 우리 아이들 역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아가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가정을 꾸려 나갈 것을 저는 분명히 확신합니다.
두번째 사랑은 하나님 사랑을 우리 삶속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즉,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2. 서로가 사랑하는 가정(요일4:20)
(20)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형제와 가족들간에 사랑이 없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거짓말이라고 본문은 단호히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형제와 가족간에 사랑이 넘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자기 주장을 버려야 함
먼저 자기 주장을 버려야 합니다. 아무리 피로 맺어진 식구라 하더라도 각자의 생각은 다른 법입니다. 그러므로 서로가 자기만을 생각하여 고집한다면 사랑은 고사하고 다툼이 그칠 날이 없을 것입니다. 내 생각을 주장하기 전에 먼저 상대의 생각을 들어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이해하여야 합니다.
2) 서로 이해해야 함
자기의 고집을 버린 후에 상대를 이해하려는 적극적인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자신의 고집을 버리지 않는 한 이해는 불가능합니다. 부모와 자식간에, 그리고 형제들끼리 이해하는 것이 바로 사랑의 시작인 것입니다. 이해하는 것은 받아들인다는 것, 용납한다는 뜻입니다. 자신이 그 밑에 서는 것입니다. under stand 니까요. 가족간에 서로 서로의 생각과 성격을 이해하고 용납할 때 그 가정에 사랑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자기 주장을 버리는 것은 소극적 의미의 사랑이며 상대를 이해하는 것은 적극적 의미의 사랑인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선행될 때 그 가정에 사랑이 넘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부부간에 가족간에 이기고 짐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종말을 의식하고 산다는 것 네 번째는,
4.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없이 하며 살아야 함(9절)
하나님을 사랑하고 가족간에 사랑을 한다고 해서 사랑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랑을 나누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래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작은 것도 나누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주는 마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늘 받으려고 만 하는 사람은 결국 받지도 못하고 인간 관계 속에서 왕따를 당하게 되어있습니다. 친구가 없습니다. 주변에 사람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한번 주위의 사람들을 보십시요. 친구가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공통점이 꼭 있어요. 주지 않는 사람입니다. 아니 주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요일 3:16-요일 3:18]
(16)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17)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18)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있는 사람들은 욕심이 많아 못 주고, 없는 사람들은 없어서 못 준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물질이 없어서 못주는 것이 아닙니다. 주어야 할 것은 마음인데, 그 마음이 없기에 물질이 따르지 않는 것이지요. 주님은 그 마음을 확인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보고 그 사람을 평가하지요.
종말을 의식하고 산다는 것 마지막은,
5. 은사를 사용하며 사는 것입니다(10-11절)
[벧전 4:10-벧전 4:11]
(10)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11)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이 은사(카리스마)는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매우 특별한 능력을 의미합니다. 이 은사라는 것이 그저 타고난 재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은사는 서로 섬기는 일에 쓰여지는 것이 본래의 목적에 상응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자원하여 봉사하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구성되어지는 것이고,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들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이 교회가 나아가야 할 길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 각 지체들이 주님께서 주신 은사들을 서로 활용하는 가운데 조화를 이루어 하나님의 일이 달성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 십일조가 신앙의 척도가 된다는 것을 함께 묵상했는데요,
이 은사도 우리의 신앙생활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을 경우를 언급하면서 임용웅 집사님의 고백을 예로 들면서 직접 거두어 가시는 하나님을 생각했는데, 이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은사도 하나님께서 영적인 일들을 위해서 주셨건만, 우리가 제대로 그 은사를 사용하지 않으면 도로 거두어 가신다는 말씀입니다.
은사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가지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도 문제지만, 은사를 받았는데도 자신의 은사를 부정하는 것은 더욱 문제입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항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신령한 것에 대하여 생각하고 말과 행동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가운데 주신 은사를 우리가 제대로 활용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성령의 능력이 소멸되고 맙니다. 달란트, 즉 은사를 제대로 활용하지 않기 때문에 도로 거두어가신다는 말씀입니다. 땅 속에 뭍어 두면 빼앗아 간다는 성경적 진리를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청지기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자. 우리는 주인이 아니라 관리자란 사실을 알자. 청지기에게는 관리 능력이 문제다.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그러므로 충성을 다하자. 정직하지 않은 청지기는 도둑이나 다름이 없다. 정직은 청지기의 제일 덕목이다. 아주 작은 일에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큰일에도 거짓말을 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알지 못하는 자가 되지 말고 청지기의 사명을 온전히 이루지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에게 고난과 역경의 시간이 있습니까?
역사의 마지막을 인식합시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고, 부패하고 악한 이 세상의 모습들이 곧 소멸될 것임을 인식합시다.
마지막을 의식하고
우리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삽시다.
매사에 진지하고 건전한 생각을 갖고, 무엇보다도 자신을 절제하며, 근신하고 기도하면서,
열심으로 사랑하며 살아갑시다. 그리고 더욱 서로가 서로를 대접하며 섬기고, 자신의 은사로 봉사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그때 우리 앞에 닥친 역경과 어려움은 주님께서 주신 기쁨과 소망으로 바뀌것이며, 새로운 희망으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볼 것입니다.
가정의 위기와 건전한 가정
시편 128: 1 – 6
신비로운 눈
어떤 부부가 있었는데 하루는 부인이 남편에게 투덜댑니다."당신은 결혼 전이나 결혼 후에나, 나를 위해 꽃 한 송이를 사올 줄 모르는군요." 무뚝뚝하기로 소문난 남편이었지만, 아내의 서운한 마음을 헤아리며 퍽 고심하다가 며칠 후 남편은 큰마음을 먹고 퇴근길에 꽃가게에 들러서 빨간 장미꽃 백 송이를 샀지만 그것을 들고 집에까지 갈 것을 생각하니, 도무지 엄두가 나질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장미꽃 백 송이를 들고 가는 모습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쑥스럽고 낯간지럽다는 생각이 들어서 주인에게 신문지로 꽃이 보이지 않도록 포장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두툼한 신문지로 가려진 꽃다발의 모양새가, 마치 신문방망이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집에 가지고 와서는, "이거 받아요" 하며 무심한 듯 아내에게 건네주었습니다.
그것을 받은 부인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그 반응을 두 가지로 나눠봅니다.
첫째는 장미꽃 백송이 보다도, 그걸 포장한 신문지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 맛있는 음식을 개밥그릇에 담은 것처럼 느끼면서 장미꽃 백 송이를 받고도 기분이 나빠지는 것입니다. 둘째는 포장한 신문지를 보기보다는, 내용물인 장미꽃 백 송이를 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튀는 것을 쑥스러워 하는 남편의 투박한 성격을 헤아리며 씽긋 웃으면서 그 장미꽃 선물에 대해 아주 기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에 더 가까운가요? 비록 포장은 거칠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내용물을 보시나요? 아니면 포장을 거칠게 할 수밖에 없는 남편의 성격을 이해하며, 다만 그 안에 담겨있는 정성만을 보시나요? 아니면 포장의 거친 것이 먼저 눈에 들어오며, 기분이 나빠지는지요. 다시 말해서 상대방의 속마음을 보십니까? 아니면 겉에 드러나는 모습을 보십니까? 남편이 신문지로 포장을 한 것은, 그의 속마음이 아니라 그의 성격입니다. 사람들에게 튀는 것을 쑥스러워하는 성격, 투박한 성격입니다. 여성에 비해 남성들에게, 상대적으로 그런 면이 있지 않습니까?
물론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포장도 예쁘면 더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에게 그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남편이 큰마음을 먹고 장미꽃 백 송이를 샀다는 사실입니다. 사실은 그 일조차도 남편에겐 쉽지 않은 일입니다. 아내에 대해 사랑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런데 아내가 서운해하는 마음을 헤아리며, 큰마음 먹고 자신의 애정을 표시한 것입니다. 남편이 애정을 표시하는 그 마음,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 마음을 만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거친 포장을 물고 늘어져서, 잔소리를 하고 바가지를 긁는다면, 그것은 부인 자신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고 부부관계를 위해서도 좋지 않은 일입니다. 지혜로운 부인은 결코 그렇게 반응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혜로운 부인은 남편의 거친 겉모양 속에 담겨있는, 자신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만나려 하면서 부인은 행복해질 것이고, 부부관계도 한층 나아질 것입니다.
이는 부부관계뿐만 아니라, 모든 대인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를 겉모습으로 만나지 않고, 그의 속마음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대화할 때도, 상대가 표현한 말보다 그 속에 담겨있는 마음을 잘 헤아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 문제를 인생 전반의 차원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을 보는가? 어떻게 보는가? 하는 이것이 인생의 질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두 물동이의 비교
서로 친한 물동이 두 개가 우물가에서 만났습니다. 그런데 한 물동이는 시무룩한 표정이었고, 다른 물동이는 무척 밝은 표정이었습니다. 밝은 표정을 가진 물동이가 친구 물동이에게 묻습니다."잘 지냈니? 그런데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얼굴이 왜 그렇게 어두운 거지?" 그러자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던 물동이가 한숨을 내쉬면서 말합니다."어휴! 나는 이제 이 우물에 끌려오는 것에 질렸어. 어째서 매일 여기서 물을 채워가도, 돌아올 때는 꼭 비어서 오는 거지?" 그 말을 들은 밝은 물동이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그건 말이지, 생각하기 나름이야. 나는 언제나 빈 통으로 이 우물에 왔다가, 돌아갈 때는 가득 채워서 간다고 생각을 하니까, 늘 기분이 좋아."
자, 이 두 물동이가 처한 조건이 똑같은데 우울한 물동이는 집에서 우물가로 오는 과정에 초점을 맞춰 문제를 보면서 늘 비어있는 상태, 곧 헛수고로 지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밝은 물동이는 우물가에서 집으로 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춰서 문제를 보니까 늘 가득 찬 상태, 곧 성취감으로 지각하는 것입니다. 정확히 똑같은 조건에서 한 물동이는 헛수고로 지각하여 우울하고, 다른 물동이는 성취감으로 지각하여 밝은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인생에서 풀어야 할 중요한 화두입니다. 이 화두를 잘 풀어 인생을 살면, 대체로 넉넉하고 밝은 마음으로 삶을 누릴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화두를 잘 풀어낼 수 있을까요? 바울이 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바울이 이 말을 한 원래 취지를 확대하면, 인생의 모든 문제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도 함께 보는 것입니다.
처음 이야기에서 육안에 보이는 것은 신문지로 포장한 장미꽃입니다. 한 사람은 신문지를 보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속에 있는 장미꽃을 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은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육안에 보이는 것 중에서 어느 한 쪽을 의지적으로 선택하여 보는 문제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장미꽃을 보는 사람은 단순히 장미꽃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장미꽃을 사는 남편의 마음을 보는 겁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남편의 마음, 그것을 보는 겁니다. 먼저 눈에 보이지 않는 그것을 볼 수 있을 때, 이제 눈에 보이는 것 중에서 장미꽃을 보는 일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남편의 마음을 볼 수 없으면, 신문지를 보게 되는 것이 자연스런 일인 것입니다.
물동이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은 빈 상태입니다. 우물가를 중심으로 하여 보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밝은 물동이는,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 가득 채워진 상태를 미리 보는 겁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과연 능력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특별한 초능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린 마음으로 인생을 대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가능한 능력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영혼의 성장을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을 키워나가는 일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은총을 확실하게 신뢰하는 것, 이것은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그분의 은총을 믿는 것을 넘어서서, 그것을 아는 것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아직 보지는 못하는 것인데 그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을 때, 그것은 아는 것입니다. 믿음보다 아는 것이 더 높은 수준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믿음에서 아는 것으로까지 성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날마다 이렇게 외칩니다."난 알아요! 그분의 은총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사람, 그는 속사람이 나날이 새로워지고 영혼이 나날이 성장합니다. 그리하여 신문지로 투박하게 포장한 장미꽃을 받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매번 빈 상태로 우물가로 오지만, 그러나 늘 밝은 표정을 지으며 그 분의 은총을 감사하며 날마다 외칩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을 구비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 그것은 신비로운 눈입니다. 그 신비로운 눈은 행복합니다. 그 신비로운 눈을 위해 기도하시며 날마다 이렇게 외치시기 바랍니다. “난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 신비로운 눈을 열어주실 것을!"
건전한 가정의 형성
성경에서 가르치는 건전한 가정은 동양의 가정의 개념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가정의 중심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가부장제를 말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자로서, 또 그 약속을 이어가는 자로서의 가부장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교적 전통의 가부장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본문 시편 128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의 행복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1절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고, 또 3~4절에서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며, 아들 딸 손자 손녀를 보면서 오래 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약성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가족 간의 관계를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재정립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주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와 같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듯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이고 부부간의 관계도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로 표현하면서 아내는 주님께 순종하듯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하였고,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자기를 내주신 것같이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가부장제를 말하지만, 이것은 권위와 힘으로 가정을 지배하는 자로서의 가부장이 아니라 오히려 섬김과 희생을 바탕으로 한 책임적인 가부장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교의 사상은 결국은 권위주의적인 데 반해서 기독교의 사상은 높고자 하는 자는 먼저 섬기며 희생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평등주의 사상입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신 것은 순전히 그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희생에 의해서 된 것이기에 거기에는 권위주의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철저한 봉사와 희생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질서입니다. 또한 부모가 자녀를 대함에 있어서도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하라고 하였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의 교육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세계가 다시금 가정의 중요성을 생각하며 그 가정을 올바로 세우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우리도 더 늦기 전에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가정을 올바로 세워 가야 하겠습니다. 바른 신앙에서 바른 가정이 이루어지고, 바른 가정들이 모일 때 그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올바로 이루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신 가정, 그의 말씀을 중심으로 생활하는 가정, 개인 위주의 삶에서 가족 공동체적인 삶으로 변화되는 가정이 되도록 노력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부관계는 게임이 아니다
결혼은 두개의 서로 다른 인격이 합쳐서 하나의 삶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들은 결혼을 통해 많은 것을 얻게 되는 기쁨도 있지만 동시에 많은 것을 포기하는 뼈아픔도 각오해야 하는데 인간은 자기의 것을 포기하기 싫어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그 본성이 부부들의 성공적인 결혼을 향한 영롱한 꿈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교훈집 탈무드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습니다. "행복에서 불행으로 가는 것은 한 순간이지만 불행에서 행복으로 가는 것은 영원한 시간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어떤 부부가 지금 이 순간, 행복에 젖어 있다고 하여, 그리고 서로의 장단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하여 서로에 대한 존경심과 관심을 가지는 일에 태만히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한 순간 안에 불행이 찾아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혼을 해서 인생이라는 차를 출발시켰다면 인생의 마지막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한시도 핸들을 놓아서도 안 되고, 바깥의 경치가 좋다고 해서 한눈을 팔아서도 안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우주와 전 세계를 소홀히 할지언정 서로에 대해서는 소홀하지 말라."
우리가 꼭 한 가지 전제할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부부관계에 철학이란 없고 또한 철학을 요구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부부관계의 성패는 노력에 있으며 그 노력으로 부부의 강한 연대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대개 성공적인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은 철학도 없이, 이유를 따지지도 않고 그저 상대방을 사랑했습니다. 이유와 원인을 중시하는 현대 인생들의 사고 체계로 말미암아 현대 부부들의 틈이 점점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러한 현대 사고방식 속에서도 아름다운 부부관계를 지속시켜 흐린 날 한 뼘의 푸른 하늘을 발견하는 기쁨을 선물하는 아름다운 부부들이 주위에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요?
무승부의 원리란 생명의 원리이다
무승부의 원리란 나도 살고 너도 사는 생명의 원리입니다. 부부란 타이틀 매치를 벌이기 위해 링에 올라가서 상대방을 어떻게 해서든지 이겨야 하는 권투 선수는 아닙니다. 사랑으로 이루어진 관계에서는 승자와 패자의 우열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히 남편들이 아내를 게임의 대상으로 삼고 꼭 이기겠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그것은 속좁은 옹졸함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렇게 노래한 적이 있습니다. “그대의 결혼이라는 사랑의 컵에서 사랑이 넘치게 하려면 그대가 잘못했을 때 시인하고 그대가 잘했을 때 침묵하라”
우리 인생들은 사회생활에서 항상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주장을 하며 삶의 승리자가 되려는 본능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잘못한 것은 합리화시키고 잘한 것은 드러내려고 하지만 사랑으로 맺어진 부부들에게는 잘못한 것을 시인하는 용기와 잘한 것에 침묵하는 겸손만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에는 높고 낮음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너의 높은 산이 깎이고 나의 낮은 골짜기가 메워져 평탄한 대로를 함께 걸어가는 것이 부부입니다.
위자료는 바로 당신
한 부부가 부부싸움을 하다 남편이 몹시 화가 났습니다. 화가 난 남편은 아내에게 소리를 질렀습니다."나가 버려!" 아내도 화가 나서 벌떡 일어서서 외치기를 "나가라고 하면 못 나갈 줄 알아요!" 하고는 집을 나갔는데 아내는 다시 자존심을 내려놓고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남편은 왜 다시 들어오느냐고 소리를 지르니까 부인이 말하기를 “가장 소중한 것을 두고 갔어요!”“그게 뭔데?”“바로 당신이에요!”남편은 그만 피식 웃고 말았습니다. 그 후 남편은 부부싸움을 하다가도 "우리가 부부싸움을 하면 뭐해? 이혼을 해도 당신이 위자료로 나를 청구할 텐데…" 라며 여유 있게 웃고 맙니다.
'결혼과 가정"은 너무나 아름답고 신비한 것입니다. 인간에게만 주어진 놀라운 선물이요 축복인데 우리의 죄성과 이기심 때문에 문제와 고통 그리고 상처투성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가정, 완벽한 남편, 완벽한 아내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죄성을 지닌 인간으로 ‘쫓겨나서 사는 삶’을 살고 있기에…. 그러나 화목제물이 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서와 화해가 가능하고 우리에게 약속하신‘풍성한 삶’을 맛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가족관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소풍을 나온 인생으로 살자
가족관계란 잘잘못을 따지는 관계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은혜와 사랑의 관계이기 때문에 서로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서로의 존재 자체를 소중히 여길 때, 우리 마음에는 천국이 이루어지고 우리의 가정과 교회에도 천국의 기쁨이 가득해서 영원한 가정 천국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순례자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 소풍을 나온 셈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에서의 모든 경험은 영원한 가정, 천국에 가면 모두가 추억이 될 것입니다. 아름답고 즐거운 경험뿐만 아니라 고통스럽고 아프고 슬픈 경험들까지도….
가정과 예수
(본문 : 마 13:55)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오늘 아침 저와 여러분은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중요한 내용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성경에서 오해하기 쉬운 내용이 있는데 바로 가정에 관한 예수님의 행사입니다. 예수님을 가정에 관해서 그다지 크게 중요하게 생각지 않으신 분으로 인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아예 가정생활과는 거리가 먼 분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로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하며 그분의 공생애를 강조하 성경의 내용과 가정에 관한 예수의 교훈 중에 곡해하기 쉬운 부분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처럼 가정생활에 충실하고 관심이 많으며 가정을 귀히 여기고 계신 분도 드물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제 그와 같은 내용을 함께 살펴봄으로써 가정의 달을 새로운 마음으로 맞으시기를 빕니다.
1. 예수의 가정 생활(요:42)
1) 순종과 배움의 생활을 함
성경에는 예수의 어린 시절, 성장 시절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성장기를 짐작할 수 있는 자료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눅2:40에는 예수가 성장하는 과정에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는 증언이 있는데 이는 예수의 성장기를 지켜 본 증인들의 말을 누군가가 인용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는 사람' 이라는 표현은 '의롭고 참된 사람'을 지칭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칭송 표현입니다. 예수가 부모님께 불순종하는 버릇 없는 생활을 아셨다면 그와 같은 뭇살마의 칭송은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둘째, 예수는 사람들로부터 '목수의 아들', 또는 '목수' 로 불렸는데(막6:3) 이는 예수가 그 의부인 목수 요셉의 직업을 계승한 것을 말해 주는 사례입니다. 고래로 부친을 무시하는 자녀는 그 부친의 직업부터 경시하는 것이 상례인데 예수는 그 의부인 요셉의 가르침에 순종하며 그를 받들어 일을 도울뿐더러 그를 존경하여 목수직까지 계승했음을 반증해 주는 것입니다.
2) 봉양의 생활을 함
요셉이 일찍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자 예수는 그 모친과 여러 동생들을 부양 했습니다. 예수가 삼십이 넘은 나이에 공생애를 시작한 이유는 그 동생들이 제 몫을 할 수 있는 시기까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19:25-27에 잔치 자리에 모친 마리아를 모시고 간 예만 봐도 평소에 그 효성이 얼마나 지극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또 한가지 십자가에 달린 상태에서도 모친 마리아를 그 제자에게 부탁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유의해야 합니다(요19:25-27). 그 장면은 참으로 우리의 가슴을 찡하게 만드는 한 인간으로서의 예수의 효심을 무언으로 교훈해 주는 것입니다.
3) 가족의 모범이 된 생활을 함
예수는 동생들도 많았습니다. 초대 교회 사도가 된 야고보를 필두로 남자만 해도 네 명이나 되었는데 성경은 누이동생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많은 동생들과 모친을 누가 부양했겠습니까? 바로 예수였습니다. 그래서 서른이 넘어서야 공생애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동생들이 장성하여 제몫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예수는 목수일로 가족을 부양했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첫째 동생 야고보는 '교회의 기둥'(갈2:9)으로 불리는 대사도가 되었는데 바로 야고보서의 기자인 것입니다. 그가 자기 형 예수를 어떻게 평가했습니까? 약1:1을 보십시오. 예수를 그리스도, 즉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로 경배하고 자신을 그의 '종'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자신의 부인과 가족에게 목사로 인정받는 목사가 진정한 목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간한 행실적인 모범을 보이지 못하면 가족들에게 성직자로 인정받기 힘들다는 것을 말해 주는데 예수는 자기 동생에게 하나님의 아들이요 인류의 구세주로 신뢰받는 가정 생활을 한 것입니다. 참으로 흠잡을 데 없는 가정 생활을 하셨음을 우리는 인정치 않을 수 없습니다.
2. 예수의 가정관(눅15:20)
1) 최상의 안식처로 여기심
예수께서 가정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가정을 현세에서 사람들의 안식처요 축복된 단체요 하나님 사랑과 뜻이 실현되는 장소로 보셨음이 분명합니다. 눅15장의 탕자의 비유의 내용만 봐도 예수께서는 인간이 이 땅에서 찾아가야 할 최상의 안식처로 그 가정을 손꼽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버이의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비유하며 어버이의 자녀에 대한 애착을 귀중한 가치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또한 한 인간으로서 평범한 가정 생활에 대한 본능도 지니고 계셨음을 성경은 반증해 주는 데 전도사역의 어려움에 시달리는 중에 '여우도 참새도 보금자리가 있건만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구나'(마8:20) 하며 한탄하신 예만 봐도 그러합니다. 또 피곤하시고 외로우시면 베다니 나사로의 가정에 가서 그들과 대화하시고 여독을 푸셨던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공동체로 여기심
예수께서는 가나의 혼인 잔치에 동성하여 축복해 주시고, 장례식이 있는 가정에 가서는 그 가정의 이별을 함께 애석해 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많은 표적과 기적을 가정에 관한 일로 인해 베푸셨는데 나인 성 과부의 외아들을 다시 살리신 일,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일, 또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일 등등 가정의 불행을 구원해 주신 일이 많습니다. 이는 가정을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그 나라를 구현시키는 장소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객관적으로도 예수님의 가정관은 절대적이며 긍정적인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3. 가정에 대한 예수의 교훈과 언약(마7:24,25)
1) 가족의 본분을 다할 것을 가르침
예수는 구약에서의 가정에 대한 교훈이나 또는 일반 세계에서 가정에 관한 인식에 반하거나 다른 교훈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즉 가족 각자가 그 맡은 본분을 다 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부부 사이는 함부로 이혼하는 것을 금하셨으며 일부일처제를 권장하셨습니다(마5:27-32). 참되고 성결한 결혼생활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또 부모에게 효도하는 본분을 지킬 것도 명하셨는데 부모님께 드려야 할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핑계로 그 의무를 다하지 않은 바리새인들은 꾸짖으셨으며(막7:11), 그와 같은 불효는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엄중한 죄라고 정죄하셨습니다(막7:12,13).또 형제끼리 불화하는 일은 예배를 가로막는 죄이니 하나님께 예물 드리기 전에 형제끼리 먼저 화목할 것을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마5:23,24). 또한 당시 어린 자녀를 경시하는 풍조도 꾸짖으시고 어린아이들도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한 인격자로 대해 줄 것을 명하시기도 하셨습니다(마19:13-15).
2) 가정을 우상화하는 것을 금함
예수는 가정으로 인해 하나님까지 잃어버리는 잘못은 단호하게 경계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예수가 가정을 부정적으로 보고 경기한다는 오해를 일으키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오직 현세적인 사안들에 집착하는 무신론적 삶을 가정 일에 정신이 쏠려 현세에만 급급하는 군상들로 비유했으며(마24:28-39). 가족들로 인해 예수께 대한 신앙까지 저버리는 것을 경계하신 예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경계의 교훈은 가정의 가치를 비하시키거나 경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이외의 것을 우상화하는 일과 어떤 것 때문에 영생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당연히 경계하신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성도들은 가정도, 자녀도 또 물질도, 그리고 어떤 가치 있는 것이라도 하나님 대신 우상화하는 일은 결단코 피해야 합니다.
3)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심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 이 언약은 비단 교회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가정이 예수를 주로 삼는다면 언제나 함께 해 주시겠다는 언약인 것입니다. 내우외환이 끊이지 않는 가정일지라도 가정을 사랑하시고 귀히 여기시는 우리 주님이 함께하셔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에 우리는 안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가족끼리 문제가 있고 가정에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함께 모여 이 말씀을 의지하여 기도하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빕니다.
결론
"나의 이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니"(마7:24) 우리는 예수가 훌륭하고 참된 가정 생활을 하셨음을 살펴봤습니다. 그 생활을 우리 가정의 귀감으로 삼아야 합니다. 또한 예수가 참된 가정관을 제시해 주셨음을 배웠습니다. 그 말씀을 가정의 지표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 위에 우리 가정을 건축해 가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됩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 주님이 진실한 구세주 되심을 그분의 가정생활과 가정관을 통해 다시 확인했습니다. 이제 그분의 자취를 좇아 가정에서도 참된 역할을 할 수 있는 우리들 되게 하옵소서. 가정의 주인 되시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