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027수요] 감당하는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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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본문 빌4:10-20
(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말씀은 정말 유명한 구절이며, 신나는 구절이다. 그래서 늘 오해가 된다. 성경의 본래의 뜻을 저버리고, 오해되는 용어들이 종종 있다. 믿음, 영광, 축복, 능력... 등등을 잘못 이해하는 것을 본다. 예를 들어 요 12:23 말씀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하신다. 여기서 말하는 영광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영광이 아니라, 주님께서 십자가 지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영광과 주님이 말씀하시는 영광은 다르다. 진정한 영광은 세상 영광이 아니다.
오늘은 [능력]이란 단어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성경이 말씀하는 [능력]이란 어떤 것인가?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본문 13절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능력’의 의미가 무엇인가? 강한 힘이나 권세이다. 성경에서도 ‘능력' 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뒤나미스' 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에서 영어 단어 ‘다이너마이트’가 파생되었다. 즉, 능력이라는 것은 뭔가 폭팔적인 힘이다. 강력한 권세이다. 그런데 바울이 지금 이 단어를 사용하며 자신에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노라고 고백한다. 어쩌면 그의 말을 듣던 자들이 이런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바울이여, 그 능력으로 감옥에서나 나오고 얘기하시오”
그는 지금 로마 옥중에 있고, 그 곳에서 위문품을 받으려고 기다리는 형편임에도 '내게 능력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의 상식대로라면 그 ‘능력’으로 결박된 자신의 손과 발을 풀고, 옥문을 부수고 나올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어쩌면 지금 바울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말을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여기에 성경의 놀라운 점이 있는 것이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되어 있다. 구약은 많은 사건들을 기록하고 사건화하고 있고, 신약은 그 사건화 된 내용들을 정의하고, 규명된 단어들을 갖고 쓰여졌다. 예를 들어 믿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설명한 성경이 히브리서 11장 이다. 믿음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하여 구약의 사건들과 인물들을 열거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을 신약 성경은 아브라함을 예로 들고 있다.
여러분 생각해 보라. 사건과 설명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많은 내용을 담을 수 있는가? 설명이 더 많이 담을 수 있다. 사건은 하나 밖에 담을 수 없다. 설명, 편지, 논문이라야 내용을 풍성히 담게 된다. 문제는 내용을 담기 위해서 사용되는 단어들이 규명되지 않으면, 써 놓은 글이 오해되고, 딴 길로 가기 쉽다. 왜 구약의 그 많은 장수를 할여하여 사건들을 수록했는가? 단어들을 성경적 개념으로 이해시키기 위해서 사건, 사건 속에서 단어와 용어들을 하나씩 정립해 나간 것이다. 죄란 무엇이고, 타락은 무엇이며, 사랑은 무엇이고, 거룩은 무엇이며, 믿음은 무엇인지..
구약은 사건들을 통해서 보여 준 정제되고, 정의되고, 규명된 단어들을 가지고, 신약 성서를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은 구약보다 짧지만, 훨씬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구약에서 사건으로 정의되고, 정립된 용어를 이해하지 못하고, 신약 성경을 읽으면 엉뚱하게 되어 버린다.
또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성경을 해석할 때, 전후 문맥과 본문의 배경을 잘 보고 해석해야 한다.
왜 이단이 이단되는가?
성경 해석을 문맥에 상관없이 제멋대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오늘 성경 본문에서 문맥과 배경을 잘 보고 13절을 이해해야 한다. 본문의 배경은 사도 바울이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 있다. 그는 지금 궁핍한 자리에 있다. 외투도 필요하고, 양말도 필요하고, 생활 용품도 필요하다. 그래서 10절 하반절을 보면 ‘너희가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말씀한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서 바울이 체포되어 로마로 호송되어 왔기 때문에, 현주소가 이동되니까, 우편물을 보낼 수 없었다. 그래서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에게 위문품을 보내고 싶었으나, 기회가 없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드디어 현주소가 확정되었다. 로마에 있는 시위대 뜰안에 있는 감옥이다. 그래서 이제는 생활품, 위문품을 보내 줄 수 있게 되었다.
드디어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통해서 위문품을 전해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추워서 내가 내복이 없었는데 내복을 보내 주었구나. 내가 양말이 없었는데 양말을 보내 주었구나. 내가 외투가 없었는데 외투를 보내 주었구나. 그래서, 행복하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을 놓치면 안 된다.
11절을 보라. 빌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없었던 것을 받았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자족하기를 배웠고, 이어서 하는 말이 12절이다. 함께 빌4:12 를 읽어보자.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그리고 나서 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이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문맥상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능력이란, 옥문을 부수는 능력도 아니고, 암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도 아니고, 홍해 바다를 가르는 능력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슈퍼맨같은 그런 초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고후 11:23-27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우리가 생각하는 식으로 능력을 논한다면, 슈퍼맨처럼, 초능력으로 지구를 역으로 돌리고, 배가 3번 파선했지만, 나는 물 위에 떠 있었노라. 태창으로 3번 맞았는데, 태창이 다 부러졌더라. 40에 하나 감한 매를 5번 맞았는데, 나를 때리려 하면 몽둥이가 부러지더라. 한번은 돌에 맞았는데, 돌이 튕겨나가 돌 던지는 사람들이 맞아 죽었노라고 이렇게 말해야 맞는 것 아닌가?
그러나, 사도 바울은 지금 자신이 모두 당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돌에 맞았을 때, 죽도록 터져서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내다 버림을 당했다. 한번도 편안하게 지내지 못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능력 속에 있는 사람이 춥고, 굶주렸다. 우리 생각에 하나님의 능력 속에 있으면 안 먹어도 괜찮아야 하는게 아닌가. 그 중에서도 바울이 당했던 가장 쓰라린 고통은 동족의 위험이었다. 한 사회에서 매장되었고, 왕따 당했다는 말이다. 정말, 참기 어려운 것을 바울이 당했다는 말이다.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방백이 바울을 잡으려고 할 때, 광주리를 타고 들 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도망갔다. 마치 도둑이 도망가듯이 도망쳤다는 말이다.
정말, 사도 바울이 겪었던 고난과 핍박을 보며, 그의 간증을 들을 때,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 무엇인가? 오늘 본문인 빌 4장 말씀과 함께 생각해 볼 때,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그 무엇으로도 말릴 수가 없었다' 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의 걸음을 멈추게 할만한 수많은 요인들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를 막지 못했다는 것이다. 매를 수 없이 맞아도 말릴 수가 없었고, 감옥에 가두어 놓아도 말릴 수가 없었다. 동족의 손가락질로도 말릴 수 없었고, 춥고, 배고픔을 당해도 말릴 수 없었다. 돌에 죽도록 맞아도 그를 말릴 수 없었다.
본문인 빌 4:11-12 을 다시 보라.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이 말은 사도 바울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내가 배불러지면 그만두겠다거나, 내가 굶주려도 멈추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성경에는 없지만, (추가로 생각해 본 것은) 욕을 먹을 줄도 알고, 매 맞을 줄도 알고, 굶을 줄도 알고, 억울함을 당할 줄도 알고, 멸시를 당할 줄도 알고, 칭찬들을 줄도 알고, 높아질 줄도 알고, 인정받을 줄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는 것이다.
칭찬들을 줄 안다는 말은 칭찬받았다고 우쭐하거나 교만해지지 않는 것이다. 멸시당할 줄 안다는 말은 누가 욕하고, 멸시해도, 낙심하거나 분노하지 않는 것이 멸시를 감당하는 것이다. 바울이 지금 비천해진다고 해서 복음 전파의 일을 중단하지 않고, 그가 존귀해 진다고 해서,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방해받지 않는다. 바울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세상이 방해 놓을 수 없다는 말이다. 히브리서에서는 이런 믿음의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고 말씀하지 않았던가.
세상이 무엇으로 성도들을 방해하는가? 세상적인 좋은 것으로 유혹하고, 핍박으로 방해한다. 성도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세상이 우리에게서 빼앗아가는 것들이 있다. 세상 재미, 칭찬, 쾌락, 명예, 지위, 돈, 건강, 생명까지도 빼앗아 갈 수 있다. 세상은 이 모든 것들을 빼앗길 위기에 놓이면 뭐든 중단할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위협을 받는다면 그 누구라도 멈출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 다 빼앗긴대도 바울이 능히 멈추지 않았던 것은, 이 모든 것들 다 위협을 받는다 해도 바울이 능히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그토록 연약한 바울을 능력 가운데 붙들고 계시는 분이 계셨기 때문이다.
비단 바울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동일한 주님께서는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들을 붙들고 계신다. 오늘날에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붙드는 자들을 능력으로 잡아주신다. 세상은 이런 것들로 우리를 위협하나 신자들이 넘어지지 않도록 붙드시는 능력이 있다. 만일 신자들이 세상적인 것들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세상적인 것들을 빼앗기게 되는 날 그들은 예수님을 버릴 것이다. 하지만 신자가 세상적인 것으로 말미암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적인 것이 주어져도 넘어지지 않고, 세상적인 것을 빼앗겨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데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것들은 우리가 신자로서 이 땅을 살아가는데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다. 왜?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영원한 나라에서도 능력가운데 우리를 붙드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이다.
성도 여러분! 예수 믿는다는 일이 얼마나 굉장한 일인가? 세상적으로 발동되거나, 에너지화되지 않는다. 신앙생활은 돈이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명예가 있어서 되는 것 아니다. 힘, 권력이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돈이 있어야 예수도 믿고, 명예가 있어야 예수도 믿고, 지위가 있어야 예수도 믿고, 더 잘 믿는다고 착각하지 말라. 사도 바울은 그런 것, 다 빼앗겨도 무너지지 않았다. 그래야 진짜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께서 공생애 시작하실 때, 사탄에게 3가지 시험을 받으셨다. 첫째는, 돌을 떡 덩이 되게 하라는 것으로서 육신의 시험이다. 둘째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는 것으로서, 명예욕 시험이다. 셋째로, 사탄에게 경배하면 세상 권세와 영광을 다 주겠다는 권세 욕의 시험이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거절하셨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인가? 물질이나, 명예나, 권력으로 뭔가를 행하시기 위해서 였는가? 혹은 그런 것을 얻기 위해서 였는가?
여러분,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라. 여러분의 신앙은 무엇 때문에 발동이 걸리고, 무엇 때문에 힘이 생기며, 무엇 때문에 행복을 느끼는가? 참 신자는 세상이 준 것으로 발동되지 않고, 세상적인 것으로 원인되지 않는 길을 가는 자이다.
세상이 우리에게서 다 빼앗아가도, 빼앗겨지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유업으로 약속하신 천국이다. 그렇기에 믿음의 선조들은 결코 빼앗기지 않을 바로 이 상급을 위해 그토록 열렬하게 하나님을 사랑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이 세상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시키기 위하여 때로 우리에게 물질을 허락시기도 하고, 또한 허락하셨던 그것을 다시 빼앗아가기도 하고, 우리에게 건강을 주시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를 낮추시기 위하여 그것을 빼앗아가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다 당할 수 있다. 무엇을 하고,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해 되시는가? 풍부를 당할 수 있고, 가난도 당할 수 있다. 그런 것으로 넘어지지 않는다.
풍부를 주고, 명예를 주었다고 홀까닥 넘어지지 않는다. 세상이 아무리 나를 유혹해도 넘어가지 않는다. 배가 불러도, 혹은 굶고 주려도 넘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박해하고, 풀무불에 던져 넣는다해도 타협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대단함이 여기 있다. 이것이 신자의 삶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능력이다. 바울과 같이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비천에 처할 줄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울 수 있기를 소망한다. 바울은 13절을 통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다고 고백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멸시를 감당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업신여김을 감당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창피와 수모를 당할 수 있는가? 바른 믿음으로 말미암은 오해들을 감당할 수 있는가? 주님을 섬긴다는 이유로 당하는 소외와 증오와 멸시와 온갖 박해들을 감당할 수 있는가? 이 질문 앞에 저 역시도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더라. 어쩌면 우리 모두가 연약하기에 동일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보다 앞서 2천년 전을 살아내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모든 것들을 우리를 대신하여 다 겪으셨다. 우리를 사랑하시어 업신여김을 당하셨고, 우리를 사랑하시어 창피와 수모를 당하셨으며, 이 자리의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어 여러 오해들을 감당하셨고, 우리를 사랑하시어 소외와 증오와 멸시와 박해를 당하셨고, 바로 이 자리의 여러분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분은 자기 목숨 아끼지 않고 십자가에 내어드리셨다.
그리고 우리 믿음의 선조들 역시 우리를 대신하여 모두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오직 그분을 사랑하기 위하여 모든 것들을 능히 감당하였다. 주후117-180년 사이에 사도 요한의 제자 폴리캅에 의해 기록되었다고 알려진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편지" 라는 문서가 있다. 이 문서에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내기 위해 어떻게 살았는지 자세히 설명되어 있는데, 그 중 일부를 나누려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만의 도시에 사는 것도 아니고, 이상한 언어를 쓰는 것도 아니며 특별한 삶을 사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각자 주어진 삶에 따라 이방 도시들에 흩어져 살고 도시의 관습에 따라 옷을 입고 음식을 먹으며 삶을 영위합니다. 그들은 자기 조국에 살면서도 마치 나그네와 같습니다. 시민으로서 모든 의무를 수행하나 외국인과 같이 모든 것을 인내합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육신을 입고 있지만 육신을 따라 살지는 않습니다. 지상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들은 주어진 법에 순종하지만 그들의 삶은 그 법을 초월합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나 그들에 의해 박해를 받습니다. 그들은 실로 가난하지만 많은 이들을 오히려 부유하게 합니다. 그들은 능욕을 받을 때 능욕하는 자를 축복하고, 멸시를 당할 때 멸시하는 자를 존중합니다. 그들은 착한 일을 하는데도 죄인처럼 벌을 받고 벌을 받을 때에는 생명을 얻는 것 같이 기뻐합니다. 그들은 유대인에게도 공격을 받고, 헬라인에게도 핍박을 받으나 유대인과 헬라인은 정작 왜 그들을 미워하는지 모르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고난과 슬픔을 통하여 나로 하여금 무엇을 증거하고
싶어서, 나에게 어떤 배역을 맡겼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세요.
나중에 하나의 결말을 보기 위해서 잘 당해야 한다.
아카데미 주연상을 받기 위해서,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 배우처럼, 우리 인생길이 그와 같다.
우리는 각자의 배역만 있을 뿐이고, 각자의 무대가 있을 뿐이다.
각자의 무대에서 각자의 배역만 잘 감당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천국의 배우들로서 먼 훗날, 주님 앞에 서는 날,
잘했다 칭찬듣고, 상급받기 위해서 어떠한 형편에 처하든지
나에게 맡겨진 배역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잘 감당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결 론)
[그리스도인의 능력]이라는 말을 제대로 깨닫고 이해해야 한다.
슈퍼맨, 슈퍼우먼처럼 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일,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다.
♬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유혹과 핍박이 몰려와도,
주 섬기는 내 맘 변치 못해
(히 11: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 )할 수 있느니라.
( ) 의 답이 무엇인가? (감당)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잘 감당하는 능력이다.
그래서 세상이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유혹하든지, 핍박하든지,
어떠한 형편에 처하든지,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잘 감당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능력]이다. (아 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