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빈 가슴 무엇으로 채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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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빈 가슴 무엇으로 채울까?/고통의 삶 속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헤세드를 베풀어 자신의 뜻을 이루신다.
[서론]
우리는 밥 한끼를 먹는데에도 많은 사람들의 손길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잊고 살아갑니다.
농부의 손길도 있고, 그것을 수확하는 사람의 손길, 배달하는 사람의 손길 등 여러 사람들의 손길이 더해져 우리가 숟가락으로 밥을 먹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어떨까요?
우리가 사는 일상 속에도 하나님의 다양한 손길은 숨겨져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부릅니다.
‘섭리’란 영어로 ‘providence’ 즉, 라틴어로 pro가 미래를 의미하고 vidence가 보는 것을 의미하니까 미래를 보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눈 앞에서는 하나님의 배려가 전혀 없는 것같이 보이지만 하나님은 그 일을 미리 준비하시며 성취해가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가 볼 룻기에도 하나님은 거의 직접 등장하시지 않습니다.
룻기 속에서 하나님은 얼굴을 감추고 계십니다.
우리도 고통 속에서 하나님이 숨어계신다고 느끼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룻기는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섭리의 비밀을 깨닫게 하는 책입니다.
하나님은 얼굴을 감추신 듯 보이지만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섭리는 도대체 어떻게 작동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그냥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하나님의 섭리는 이루어질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삶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 지 깨닫는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
[본론]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봐야할 부분은 이 사건이 일어나는 시대입니다.
1절입니다.
‘사사 시대에 그 땅에 기근이 든 일이 있었다’
현재 이 사건이 일어나는 시간적 배경은 ‘사사시대’ 입니다.
우리는 사사기를 배웠기 때문에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점점 영적 타락으로 빠지더니 결국 사사기 마지막 부분에 레위인 첩이 강간당해 죽어서 지파들간에 큰 전쟁이 일어난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사사기 뒤쪽으로 갈수록 하나님이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스라엘의 영적인 암흑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사기는 이렇게 끝납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뜻에 맞는 대로 하였다.’
다시 말해서 사사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이 실종되어 자기 마음대로 행하던 시대였습니다.
이런 사사시대의 영적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일이 바로 이스라엘에 닥친 기근입니다.
그리고 등장하는 곳이 이스라엘의 작은 도시 베들레헴입니다.
베들레헴은 떡집, 빵집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베들레헴에 비가 오지 않아 흉년이 드니 빵이 없는 빵집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 시대가 바로 룻기의 배경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한 가정을 주목하십니다.
룻기가 성경책 구성으로 볼 때 사사기와 사무엘상하 사이에 끼어있습니다.
사사기도 그렇고, 사물엘 상하도 큰 역사의 줄기를 보여주는데 그 사이에 한 기구한 운명을 겪은 가정 이야기가 끼어있다는 게 참 오묘하기만 합니다.
먼저 이 가정의 남편 이름은 ‘엘리멜렉’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다’라는 의미입니다.
사사시대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입니다.
그리고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입니다.
‘즐거움, 달콤함’ 이런 의미입니다.
이름은 참 좋습니다.
그런데 이 이름과는 정반대의 일들이 일어납니다.
아이들의 이름은 어떨까요?
첫째 아들의 이름은 ‘말론’인데 ‘아프다’ 이런 의미입니다.
둘째 아들의 이름은 ‘기룐’인데 ‘끝나다’라는 의미입니다.
어떻습니까?
이런 아이들의 이름 속에도 이 가정의 불행한 운명의 그림자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먼저 이 가정은 베들레헴에 기근이 들자 이방 나라, 모압에 피난을 가게 됩니다.
아마도 기근을 피해 잠시 거주하다가 돌아올 예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살다보니 계획처럼 되지 않았습니다.
잠깐 산다는 게 점점 기간이 길어졌습니다.
그러다가 남편 엘리멜렉이 죽게 돼, 나오미가 미망인이 됩니다.
또한 아들 둘도 모압 여자들과 결혼했는데 아이를 갖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그 아들둘 모두 이름처럼 이른 나이에 자식도 없이 죽음을 맞이 했습니다.
그래서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고, 손주도 없는 시어머니와 며느리 두명만 남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남자가 한명도 없는 과부 셋만 남게 된 것입니다.
당시 씨족사회에서 과부의 지위는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것이었습니다.
대가 끊긴 것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에게도 대접받을 수 없는 위치였습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매우 취약한 소외된 계층이었습니다.
심지어, 자기 나라도 아닌데 누가 외국인 과부를 보호해줍니까?
과부가 무슨 일을 해서 먹고 살겠습니까?
생각해보면 최악의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참 기구한 인생 아닌가요?
자신에게 계속해서 불행한 일들이 일어나니 말입니다.
이름은 나오미, ‘즐거움’인데 반대로 ‘슬픔’만 가득한 인생입니다.
이름처럼 달콤한 인생이어야 하는데 쓰디쓴 인생입니다.
그래서 나오미가 이런 고백을 합니다.
13절 마지막 부분입니다.
‘주님께서 손으로 나를 치신 것이 분명하다’
불행한 일이 자꾸 일어나니까 이런 생각이 안드는 게 이상한 것이죠.
어쩌면 나오미는 모압이라는 곳으로 이사한 게 잘못한 일이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아들들을 모압 여자들과 결혼시킨게 잘못한 일이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모압에서 빨리 떠났어야 했는데 너무 오래있어서 그런건가? 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나오미는 자신이 했던 여러가지 일들을 후회하며 이 말을 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럼 우리 인생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언제가 내 인생에 흉년이 들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직까지 아니었다면 언젠가 반드시 인생의 흉년이 찾아올 것입니다.
어쩌면 누군가는 지금이 내 인생의 흉년이라고 생각할 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때는 사람들의 어떤 위로도 큰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나오미처럼 텅빈 가슴만 남아 후회와 자책만 남기도 합니다.
지금은 우리 곁을 떠난 소설가 박완서는 남편을 잃고 1년도 안돼 또다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었습니다.
딸 넷에 아들 하나였는데 그 외아들을 잃은 것이죠.
심지어 아들은 촉망받던 명문대 의대생이었습니다.
천주교 신자였던 그녀는 이 일을 겪은 후 자신의 수필집 ‘한 말씀만 하소서’라는 책에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당신은 과연 계신 것입니까?
계시다면 내 아들이 왜 죽어야 하는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말씀만 해주십시오.
왜 내게 이런 불행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특별히 남에게 모질게 한 것도 없고 그렇게 끔찍한 고통을 당할만큼 죄를 범한 것도 없는 내게 말입니까?”
이처럼 우리의 인생에도 예기치 않은 불행한 일들이 발생하곤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받아들이기 참으로 힘듭니다.
그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또다른 고통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고통이란 하나님의 신비에 속한 영역이라 한치 앞도 모르는 우리 인간들이 해석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 가운데서도 무엇인가 일을 하고 계십니다.
인생의 온갖 흉년을 겪고 있던 나오미에게 어떤 소식하나가 들립니다.
6절입니다.
‘모압 지방에서 사는 동안에 나오미는 주님께서 백성을 돌보셔서 고향에 풍년이 들게 하셨다는 말을 듣고, 두 며느리와 함께 모압 지방을 떠날 채비를 차렸다’
자기 고향 베들레헴에 ‘풍년’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이 빵집이라는 의미니까 이제 텅비었던 빵집에 빵이 채워지게 된 것입니다.
누가 하셨나요?
바로 주님입니다.
주님은 나오미에게 고향으로 돌아올 마음을 주시기 위해 이 소식이 그녀 귀에 들리게 한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백성을 돌보셨다’는 표현의 원래 의미는 ‘주님께서 백성을 방문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사사시대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 텅빈 그 땅에 주님이 다시 찾아오신 것입니다.
회복이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어떻습니까?
텅빈 흉년같은 우리 인생에도 주님은 찾아오지 않으셨습니까?
허기지고 갈급한 우리 인생에 주님이 찾아오지 않으셨습니까?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생명의 빵이 되신 예수님이 우리를 먹여주지 않으셨습니까?
우리 주위에 수많은 인생들이 허기지고, 목말라합니다.
그래서 다른 것을 찾아 허기를 채우고, 갈증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영적 빈곤함으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방황합니다.
사사기처럼 자기 생각에 옳은대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주님은 복된 소식, 복음을 들려주셨습니다.
생명의 빵되신 예수님이 너를 채워주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룻기 1장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돌아가라’는 히브리어 ‘슈브’입니다.
돌아가라는 말이 의도적으로 계속 등장합니다.
7절에도 ‘그들은 유다 땅으로 돌아가려고 길을 나섰다’.
8절에도 돌아가거라, 10절에도 돌아가겠다, 11절에도 돌아가라 등등 1장에서만 총 12번이나 나옵니다.
이 단어가 왜 중요할까요?
반전의 시나리오는 나오미가 베들레헴, 즉 하나님께 돌아갈 때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슈브’라는 단어는 원래 성경에서 회개의 의미로 자주 사용됩니다.
내 생각, 내 계획대로 살아가던 삶에서 주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내 마음대로 살아가던 삶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삶으로 돌이키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회복의 시작입니다.
이제 나오미는 자신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며느리들과 같이 고향으로 돌아가던중 나오미는 어떤 결심 하나를 합니다.
8절입니다.
‘길을 가다가,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제각기 친정으로 돌아가거라.’
갑자기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모압으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두 며느리의 고향은 모압이고, 부모님과 가족들이 모두 거기에 있거든요.
그런데 나오미가 왜 갑자기 생각을 바꾸었을까요?
이런 결정을 하는 것은 그녀에게 꽤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과부 혼자보다 세명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뭘 해도 세 명이면 더 나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 나오미는 더이상 두 며느리를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신도 다 잃고 과부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며느리들도 똑같은 처지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축복하며 보내주려고 합니다.
너희가 너희 남편하고 나를 한결같이 사랑해줬으니 주님도 그렇게 해주실 것이라며 새 남편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며느리들 입장에서는 어떨까요?
남편은 죽었고, 시어머니 혼자 남은 상황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 고배프고 앞날도 알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시어머니한테 이런 말을 들었다면 여러분들은 어땠을 것 같습니까?
겉으로는 ‘어머니, 너무 아쉽네요. 그렇지만 어쩌겠어요. 어머니를 위해 기도할께요.’
이렇게 말하고 속으로는 ‘아휴 다행이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구나. 다시 시작해보자’
이렇게 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이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는 정말 각별했습니다.
‘시월드’ 이런거 없었습니다.
가라고 하니까 뭐라고 합니까?
울면서 시어머니랑 같이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합니다.
시어머니 입장에서는 얼마나 고마웠을까요?
그래서 11절에 보시면 며느리들을 딸들이라고 말합니다.
평소 딸처럼 며느리들을 사랑하고, 며느리들도 친정 엄마처럼 시어머니를 사랑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어버이날, 어린이날, 스승의 날까지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돈 제일 많이 나가는 달이겠죠.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가정의 소중함을 기억하는 중요한 달이 되길 바랍니다.
가정의 달을 맞아 우리의 가정이 마치 룻의 가정처럼 사랑이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한편 나오미는 며느리들을 설득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나오미의 말을 들어보면 왜 이런 말을 할까 싶습니다.
11절 보시면 내 뱃속에 아들들이 들어 있어서, 그것들이 너희 남편이라도 될 수 있다는 말이냐?
12절에도 내가 재혼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재혼해서 내가 아이를 낳아도 다 클때까지 어떻게 기다리겠냐고 말합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이건 당시 문화적 배경을 모르면 이해하기 힘든 말입니다.
당시 사회에는 계대결혼이라는 게 있어서 형제 한명이 결혼 후 아들을 갖지 못하고 죽으면 다른 형제가 그 여성과 결혼해 자녀를 갖게 합니다.
그래서 나오미가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난 늙어 태가 닫혀 아이를 다시 갖지도 못하는데 너희들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그런 말입니다.
이게 지금 우리 정서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당시 사회는 씨족사회잖아요.
대를 잇는게 그 가문이 사는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며느리들도 자식이 있어야 앞날을 보장받을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이런 나오미의 설득에 결국 어떻게 됐을까요?
둘째 며느리인 오르바는 울면서 시어머니에게 작별인사하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첫째 며느리인 룻의 태도입니다.
룻은 죽어도 시어머니랑 같이 있겠다면서 더 달라붙습니다.
룻은 왜 이럴까요?
룻은 시어머니가 자신에게 베푼 사랑에 대해 보답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늙은 시어머니 혼자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는게 얼마나 걱정됐겠습니까?
자기 친정집으로 돌아가는 기쁨보다 시어머니에 대한 걱정과 사랑이 더 컸던 것입니다.
나오미의 며느리에 대한 사랑과 배려, 룻의 시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배려
어땠습니까?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그런데 여러분, 룻기는 단순히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사랑이야기가 아닙니다.
룻기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자비, 즉 히브리어로 ‘헤세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이런 ‘헤세드’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8절에 보면 나오미가 며느리들에게 ‘너희들이 너희 남편들과 내게 한결같이 사랑해주었으니 하나님도 너희들에게 그렇게 해주기를 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나오는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바로 헤세드입니다.
나오미는 주님께서 손으로 자신을 치셨다고 생각할 정도로 괴로운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녀의 많은 선택들 속에 실수나 죄악이 있었는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의 실수나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헤세드’ 때문입니다.
이것은 룻기의 결론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룻은 보아스라는 남자를 만나 아들 오벳을 낳게 되는데 그게 다윗왕의 할아버지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의 족보에 룻이 끼어 있습니다.
룻은 이스라엘 여자도 아닌 이방나라 모압 여인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룻을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처럼 기구한 한 가정의 이야기가 사사기와 사무엘상하 사이에 끼어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때문에 어떤 학자는 룻기를 사사기와 사무엘상하라는 딱딱한 조개껍데기 사이에 낀 진주라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기구한 운명의 여인에게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된 것일까요?
나오미의 고통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남편이나 아들들이 죽지 않았다면 과연 그녀가 돌아왔을까요?
10년 넘게 살았는데 그냥 정착하지 않았을까요?
나오미가 며느리들에게 모압으로 돌아가라고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그럼 하나님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오미가 며느리들에게 선한 마음을 베풀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선한 마음이 바로 헤세드입니다.
룻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룻은 시어머미 나오미에게 선한 마음을 품었기 때문에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서로가 갖고 있던 선한 마음들이 모여 하나님의 섭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결론]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가 찾던 답이 나왔습니다.
인생의 비밀과도 같은 하나님의 섭리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복잡한 인생사에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섭리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해야할 일은 하나님의 선한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때일수록 선한 마음을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나오미, 룻 둘다 상식적이지 않는 행동을 했습니다.
조금만 이기적인 마음을 품었더라면 이렇게 행동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선한 마음으로 그렇게 행동한 것입니다.
그 행동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오미와 룻의 선한 마음을 통해 일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어떴습니까?
힘들고, 어려울 때일수록 하나님의 선한 마음을 품어야 하지 않을까요?
상식적이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한 마음을 품는다면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의 삶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고통과 아픔 뒤에 숨겨진 하나님의 손이 우리의 삶을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 텅빈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서 가득 채워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