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음을 회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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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366장 - 사도신경 - 성경봉독(교독)
찬송가 366장 - 사도신경 - 성경봉독(교독)
아삽의 시
하나님이여 이방 나라들이 주의 기업의 땅에 들어와서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이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나이다
그들이 주의 종들의 시체를 공중의 새에게 밥으로, 주의 성도들의 육체를 땅의 짐승에게 주며
그들의 피를 예루살렘 사방에 물 같이 흘렸으나 그들을 매장하는 자가 없었나이다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비방 거리가 되며 우리를 에워싼 자에게 조소와 조롱 거리가 되었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영원히 노하시리이까 주의 질투가 불붙듯 하시리이까
주를 알지 아니하는 민족들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나라들에게 주의 노를 쏟으소서
그들이 야곱을 삼키고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함이니이다
우리 조상들의 죄악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긍휼로 우리를 속히 영접하소서 우리가 매우 가련하게 되었나이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이방 나라들이 어찌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나이까 주의 종들이 피 흘림에 대한 복수를 우리의 목전에서 이방 나라에게 보여 주소서
갇힌 자의 탄식을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며 죽이기로 정해진 자도 주의 크신 능력을 따라 보존하소서
주여 우리 이웃이 주를 비방한 그 비방을 그들의 품에 칠 배나 갚으소서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
속도의 시대
속도의 시대
예전에 그런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의 의사가 과거로 시간 이동을 해서 우여곡절도 겪고 의술로 활약도 하는 그런 내용의 드라마입니다. 반대의 경우를 그리는 드라마도 있었습니다. 혹시 무슨 드라마였는지 제목이 생각나십니까?
한 번 상상해봅시다. 진짜 조선 시대의 사람들이 2022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시대로 시간 이동을 하게 되었다고 상상을 해보는 것입니다. 조선 시대의 사람들이 이 시대를 경험하고 난 후에, 자신들이 살았던 시대와 비교해서 이 시대가 가지고 있는 특징을 한 단어로 설명한다면 무엇이라고 할까요? 저는 “빠름”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선 시대에 비해 이 시대는 모든 것들이 빨라졌거든요. 조선 시대에는 대부분이 걸어서 이동했는데, 우리는 교통 수단들을 이용해서 수백, 수천배는 빠른 속도로 오가고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어디 먼 곳에 소식이라도 전하려고 하면 짧게는 몇 일, 길게는 몇 달까지도 시간이 걸렸는데, 우리는 1초도 채 걸리지 않아서 원하는 곳곳마다 소식을 보낼 수 있습니다. 조선 시대의 사람들이 손가락 몇 번 까딱하면 1시간 안에 온갖 산해진미를 맛볼 수 있는, 이런 왕도 못 누렸을 호사를 온 국민이 누리고 있는 것을 본다면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여러모로 “빠름”의 시대에 살면서 우리는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다 좋아지기만 하였을까요? 아닙니다. “빠름”의 시대를 살면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몇해 전에 상당히 인기를 끌며 베스트셀러가 된 책이 있습니다. 윌리엄 파워스 라는 사람이 쓴 “속도에서 깊이로”라는 책인데요, 윌리엄 파워스는 이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디지털이 가져다주는 마법과도 같은 일 덕분에 세상은 더 가까워지고 풍요로워졌지만 우리의 내면의 중요한 것을 잃었습니다. 우리의 내면에서 점점 깊이가 사라져갑니다.”
맞습니다. 모든 것이 다 빨라진 세상에서 우리의 삶 또한 빨라졌습니다. 모두가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이곳저곳으로 쉴 새 없이 이동합니다. 모두가 한 가지 일에 오래 집중하지 못하고 이것 저것 쉴 새 없이 일합니다. 이제 우리의 삶에는 해내야 할 것들 투성이가 되어서 정말 가쁜 숨을 내뱉으며 여유를 가질 잠시의 틈조차 없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완숙미보다는 효율성이 더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장인정신보다는 빠르게 적당한 성과를 낼 수 있는 기술을 갖추려고들 합니다. 일단 우리의 삶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해야 할 일들의 리스트를 하나하나 지워가는게 급하니까요. 무엇이든 하나에 집중해서 진득하니 파야 완숙미라는게 생기게 되는 것이고, 수십 년을 갈고 닦아야 장인이 될 수 있는 법인데, 이렇게 빠르고 효율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라이프 스타일에서 어떤 깊이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내면의 깊이가 점점 사라지면서 동시에 우리의 삶과 사회에서도 깊이가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성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빠름”의 시대를 살아가며 우리의 기도에서마저 깊이가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기도에 깊이가 사라지니 삶에도 깊이가 없어져가고, 과거와 비교해보았을 때 교회는 점점 더 초라하고 얕은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가 이러한 악순환에서 벗어나 깊이를 되찾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교회가 이전의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과 같이 깊이 있는 기도를 회복할 수 있을까요? 오늘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가 나아갈 길을 보여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아삽
아삽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에는 “아삽의 시”라는 제목이 붙어있습니다. 아삽은 다윗 왕 때에 성막에서 찬송의 직분을 맡은 사람이었는데, 그를 이어서 후손들은 대대로 성전에서 찬송의 직분을 맡았습니다. 찬송을 짓고, 찬송을 인도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었지요. 이 시편은 아삽의 후손이 지은 찬송입니다. 1절에서 이 시편의 기자는 이방 나라가 남유다를 침공해서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을 폐허로 만들어 놓았다고 합니다. 주전 587년에 바벨론에 의해 남유다가 파괴되는 사건을 경험하였던 것이지요. 그가 당시 겪은 참상은 어떻습니까? 그는 지금 무슨 기억을 떠올리고 있나요? 수많은 사람이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바벨론의 군대가 예루살렘의 주님을 학살하고 그 시체를 새와 들짐승들의 먹이로 주었습니다. 학살당한 사람들의 피가 예루살렘에 강이 되어 흘렀습니다.
바벨론의 침략으로 성전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학살을 당하고 예루살렘 성이 폐허가 되었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찬송을 인도하는 자로서, 이 절망의 때에 사람들의 입술을 통해 불릴 찬송을 지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찬송이라는게 하루 아침에 뚝딱하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찬송, 함께 고백하는 이들의 마음에 위로와 소망과 믿음을 불어넣어 주는 그런 찬송은 오직 그가 하나님 앞에 머물며 보낸 시간을 통해서만 탄생합니다. 참된 찬송을 탄생시키는 일에 빠르게 성과를 낼 수 있는 기술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직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는 수밖에 없지요.
그는 자기의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절망과 아픔으로 가득한 이스라엘 백성을 일으키기 위해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무너진 성전에서였을까요? 아니면 머나먼 타국의 낯선 골방에서였을까요? 그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이 일이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 어찌해서 이러한 일이 우리에게 일어난 것입니까?” 모세의 율법을 가지고 있을 법한 자들을 찾아 부지런히 율법을 묵상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자들을 찾아 자신들의 선조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죄를 저지르며 살아왔는지 듣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리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역하였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고 깊은 슬픔과 탄식 속에 회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솔로몬의 기도를 기억해냅니다. 왕상 8:46-50 “범죄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그들이 주께 범죄함으로 주께서 그들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적국에게 넘기시매 적국이 그들을 사로잡아 원근을 막론하고 적국의 땅으로 끌어간 후에 그들이 사로잡혀 간 땅에서 스스로 깨닫고 그 사로잡은 자의 땅에서 돌이켜 주께 간구하기를 우리가 범죄하여 반역을 행하며 악을 지었나이다 하며 자기를 사로잡아 간 적국의 땅에서 온 마음과 온 뜻으로 주께 돌아와서 주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신 땅 곧 주께서 택하신 성읍과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성전 있는 쪽을 향하여 주께 기도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그들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그들의 일을 돌아보시오며 주께 범죄한 백성을 용서하시며 주께 범한 그 모든 허물을 사하시고 그들을 사로잡아 간 자 앞에서 그들로 불쌍히 여김을 얻게 하사 그 사람들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게 하옵소서” 그리고 온 마음과 온 뜻으로 주님께 돌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자, 그리고 그렇게 되고자 하나님께 끝없이 간구합니다.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머물며 기도하는 그에게 마침내 하나님께서 의의 문을 여십니다. 이스라엘이 어떤 존재인지, 그들의 죄가 얼마나 깊은 것이었는지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기의 백성 삼아 찬송과 명예와 영광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어진 백성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통해 영광을 받으실 것을 기대하시며 하나님의 이름을 예루살렘에 두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지 않았습니다. 그 분의 이름을 존귀하게 여기며 온 땅으로 하여금 그 이름에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고, 온 땅으로 하여금 그 이름에 영광 대신 조롱과 비방을 돌리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저지른 죄는 단순히 어느 나라에나 있는 어겨서는 안될 법을 어긴 정도의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죄는 자신들을 택하신 하나님의 기대와 소망을 저버린 것이자, 온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하나님의 이름에 조롱과 비방을 돌린 것이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땅에 떨어뜨린 것이었습니다. 진정한 죄의 의미를 알고, 이스라엘의 죄가 얼마나 깊은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자, 이제 그에게는 자신들의 아픔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픔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징계 속에서 이제는 사랑하는 자녀, 사랑하는 신부 이스라엘에게 배신을 당하신 하나님의 아픔이 보입니다.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돌이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이 보입니다. 자신의 이름이 조롱과 비방을 당할지라도 자신의 백성을 위해서 끝까지 참으시고 인내하시는 하나님의 한없는 자비가 보입니다. 예루살렘 성이 폐허가 되고 성전이 무너진 것은 이스라엘에게도 아픔이었지만, 하나님께도 큰 아픔이었습니다. 자신의 영광이 땅에 떨어지는 일까지도 감수하신 일이었습니다.
비로소 시편의 기자의 기도가 달라집니다. 자신들의 비참한 신세도 가슴아픈 일이었지만 이제는 “너희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하는 이방인들의 조롱이 더욱 가슴아픈 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온통 자신들의 아픔과 고통을 호소하던 그가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 시편에는 깊은 묵상과 회개 끝에 변화된 그의 간구의 내용이 묻어납니다. 1, 2, 3, 8절과 9절을, 4절과 10절을 비교해서 잘 보십시오. 우리의 비참함을 주목하여 주시고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기도하던 그가 이제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 일하여 주옵소서 기도합니다. “우리가 이웃 나라들에게 조롱과 비방을 당하는 것을 보고 계시겠습니까?”하며 탄식하던 그가 “너희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는 이방인들의 비웃음을 보고 계시겠습니까?” 하며 부르짖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변화는 결코 빠르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시편의 기자는 온 마음과 힘을 다한 열심으로 기도하고 묵상하며 이런 변화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에게도 여러가지 다른 해야 할 일이 많았습니다. 성전에 바쳐지는 제물을 통해 삶을 이어갔던 그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생업에 뛰어들어 여러가지 일들을 함께 감당해야 했음에 분명합니다. 맡겨진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그에게 왜 적당히 하고 싶은 마음, 타협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시간과 힘과 정성을 쏟아부어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머물고자 최선을 다했습니다. 오직 이것이 그의 기도의 내용에 깊이가 생겨난 이유입니다. 그의 깊이 있는 기도문은 곡조가 붙어 절망하고 아파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애가로 불렸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한 페이지에까지 들어가 오늘날 우리에게 큰 교훈을 남겨주고 있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우리의 신앙 생활의 터전을 저 시편의 기자의 터전과 비교해보면, 우리가 훨씬 더 마음껏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는 터전임에 분명합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오늘날 우리 교회 안에서는 저 시편 기자와 같은 깊이를 찾아볼 수 없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죄가 무엇인지, 회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를 택하시며 거셨던 하나님의 기대와 소망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두셨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온통 나의 고통과 아픔을 호소하는 내용밖에는 없습니다. 저 시편 기자의 고통에 비하면 생채기에 불과한 자그마한 고통을 가지고서 하나님께 아이고 저 죽습니다 하며 부르짖습니다.
시간을 들여, 힘을 들여, 정성을 들여 하나님 앞에 머물지 않으니 하나님의 뜻과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주 앞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는 이들의 발걸음이 마치 성전 마당만 밟고 돌아간다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같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우리 삶에 너무 중요한 문제들이 가득하다는 이유로 적당히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와 묵상의 모습을 흉내낸 것으로 퉁치려 합니다. 이런 것들은 아무리 많이 반복해봤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변화되고 깊이가 생기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온 마음과 온 뜻으로 나아가는 자만이 그런 변화와 깊이를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최선을 다하는 그곳에서, 우리의 간절함을 쏟아내는 그곳에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열어보이시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누구에게나 그 문은 열려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아삽의 후손은 극심한 고난의 때에도 그러한 변화와 깊이를 이루어 냈습니다. 이 “빠름”의 시대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집중해서 머물지 못하게 하는 모든 일들을 뒤로하십시오. 빠르게 적당한 성과를 내고자 하는 그런 안일한 마음도 버리십시오. 그리고 온 마음과 온 뜻을 다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 머무십시오. 기도로 간절함을 쏟아내고 묵상으로 최선을 다해보십시오. 그때 여러분들에게 진정한 변화가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기도에 깊이가 생기고 삶에도 깊이가 생기게 될 것입니다.
기도
기도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에게는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에게는 분노와 진노를 베푸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비록 죄와 죽음이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며 악인이 득세하고 악인이 형통한 일들을 계속해서 경험하지만 여전히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심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세세토록 신실하게 세상을 이끌어가시는 지혜와 능력이 끝이 없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의인과 악인의 그 끝을 다시 한 번 듣게 하시고 보게 하시니 의심과 근심과 회의를 벗어 던지고 다시 하나님을 붙듭니다. 세상의 풍파 가운데 한데 휩쓸려 악인의 길로 치우칠뻔 하였던 우리의 발걸음을 고쳐 다시 말씀 위에 우리의 삶을 세워갑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이 험한 세상 속에서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하나님 늘 우리와 동행하여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특별히 아버지께 비옵는 것은 이 시간 위로가 필요한 이들에게 위로를, 지혜가 필요한 이들에게 지혜를, 용기가 필요한 이들에게 용기를 베풀어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함께 마음 다해 드리는 기도를 들으시고 이 교회에 복 내려 주옵소서.
예물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와 내 가정이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게 하소서
이 교회를 이끌어가는 담임목사님과 당회원들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주소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의 역사가 나타나 잠든 자들이 깨어나고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교회 되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