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럽지 않은 이유(마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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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여러분, tv나 유튜브를 통해서 광고를 시청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마케팅에 있어서 기본적인 전략은 광고하는 제품 혹은 대상에 대해서 ‘부러움’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라고 합니다. 나도 광고에 나오는 제품을 사용하고 싶다, 나도 저기에 살고 싶다,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라는 생각을 들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광고는 ‘부러움'이라는 감정을 광고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광고를 보고 그 제품을 받아 사용하다보면 여지없이 또 다음 광고에서 다른 제품이 등장하면서 우리를 부러움의 늪으로 데려가 괴롭힙니다.
이러한 ‘부러움'이라는 감정은 ‘비교'라는 것으로 이미 우리 삶에 깊숙하게 들어와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숫자가 우리의 삶의 질과 위치를 결정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2등은 1등을 부러워하고 100만원은 1000만원을 부러워합니다. 10평대 아파트를 사는 사람은 20평대 아파트를 부러워합니다. 아이들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과시하며 부족한 것에 대해서는 부러움과 열등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이내 단순히 ‘부럽다’는 감정은 우리를 부추겨 우리를 목적도 없이 끝없이 높은 곳으로만 올라가려 하는 존재들로 만들어버립니다. 마치 창세기 11장 속 바벨론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 부러움과 비교라는 감정이 악하게 사용되었을 때에 사람을 얼마나 위험하게 만드는지 보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을 때의 주된 동기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에 그들이 우상숭배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이웃나라들처럼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 싶다’였습니다. 사사시대의 끝 무렵 이스라엘은 ‘왕’을 달라고 하나님 앞에 요구합니다. 이 때의 동기 또한 ‘이웃나라와는 있는데 우리나라만 없으니 우리도 따라해야겠다’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금하십니다.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며 오직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다른 우상들은 만들지도 말고 섬기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를 어기고 자신들이 부러워했던 이방민족들을 따라 왕도 세우고 우상숭배도 합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을 의지하고 정치제도를 의지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부러워했던 이방나라들을 쫓아가다가 하나님께서 그 이방나라들을 사용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우리는 아직 이 물질주의적인 시대, 부러움이 가득한 시대 가운데 그러한 문화를 가진 세상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 세상 속에서 우리는 빛으로서, 소금으로서 세상과 구별되어 하나님만 자랑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저와 여러분의 삶을 돌아보면 어떠십니까? 안타깝게도 자신을 자랑하고 또 이방 민족들이 부러워 자신과 비교하며 세상의 가치관과 문화를 따라갔던 이스라엘 백성과 우리가 별반 다르지 않음을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세상을 부러워하지 않는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아멘. 우리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을 본받지 않고 세상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서머나 교회처럼 우리는 환난과 궁핍을 경험할 지언정 실상은 부요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그러나 문제는 같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이 부러움과 비교의 감정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감정은 때로는 도전이 될 때가 있지만 하나님께 원망이 들 때도 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함께 다룰 본문 속에서 찾아보고 다룰 것이 바로 이 부러움과 비교의 감정입니다.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이 감정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보며 우리가 이 감정에 대해 어떻게 대해야 할까에 대한 은혜의 시간을 가지기를 소망합니다.

배경설명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해 가르치시며 말씀하신 비유의 말씀입니다. 성경에는 비유가 참 많이 등장합니다. 이 비유는 당시 사람들의 시대와 문화적인 상황을 알고 보았을 때에 원래 뜻을 더 잘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본문말씀은 예수님 당시 시기의 문화와 환경을 이해하고 보았을 때에 조금 더 쉽게 그리고 잘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전체적인 문맥을 살펴보았을 때에도 비유의 목적과 주제를 알 수 있습니다.
포도원 품꾼 비유가 나오게 된 이유를 문맥을 통해서 살펴보면 이러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물었던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무엇을 얻으리이까’ 이것이 베드로의 질문에 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대한 답변으로 예수님께서는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다고 말씀해주시며 이 비유를 들어서 설명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포도원 품꾼 이야기는 오늘날의 시각으로 봐도 조금 이상합니다. 한 신학자는 이 이야기의 제목을 ‘이상한 고용주'라고 붙였습니다. 고용주가 고용주다운 행동을 하지 않고 이상한 행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주인은 포도원에서 일을 할 품꾼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이른 아침에 그리고 오전 9시와 12시 그리고 3시 마지막으로 5시까지 다섯 번에 걸쳐서 품꾼들을 모집합니다. 그리고 해가 지고 6시가 되어 퇴근할 때가 되었습니다. 주인은 5시에 합류한 사람부터 이른 아침에 일을 한 사람까지 동일한 금액의 하루 품삯을 지급합니다. 이 결정에 이른 아침에 일을 한 사람이 항의하지만 포도원의 주인은 이미 하루의 품삯을 정했고 주는 것은 포도원 주인의 마음이니 문제가 없음을 말합니다.
왜 이상한 고용주인지 아시겠습니까? 제가 보기에 이 고용주에게는 도저히 경제관념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어 보입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당연히 1시간 일한 자들과 하루 종일 일한 자들의 품삯이 달라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합리성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이 이야기를 듣고 기대가 좌절되었을 것이고 한 발 더 나아가 마음이 상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베드로는 아침 일찍부터 한나절동안 일했던 일꾼이요, ‘먼저 된 자’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삶을 하나님 앞에 드렸던 자였습니다. 앞서서 예수님 앞에서 근심하며 떠났던 부자청년과는 다르게 자신의 모든 소유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작정했던 자가 바로 베드로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오시는 날에 자신에게는 남들보다 더 큰 상급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 사이에서도 나름의 비교의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더 크다 네가 더 크다 하면서 싸웠던 제자들이 있는가 하면 서로 자신의 충성심을 증명하며 보란 듯이 예수님 앞에 자랑하기도 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세상적인 관점을 갖고 자신을 따르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포도원 주인과 품꾼들

이 비유를 조금 더 깊이 뜯어보기를 소망합니다. 우선 각 등장인물들이 상징하는 대상이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부분은 천국은 포도원과 같으니가 아니라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다고 비유한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천국이 어떤 곳인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천국이 어떤 곳인지 천국에 대한 속성을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포도원의 주인이 상징하는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품꾼들은 우리입니다.
이 포도원 주인은 자신 대신 일할 수 있는 청지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포도원 주인이 일할 품꾼을 찾으러 갈 때에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직접 갑니다. 보통 주인이 직접 사람을 선발하러 가지는 않지요. 의미하는 대상을 넣어 보았을 때에 우리는 큰 은혜를 얻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품꾼은 우리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직접 찾으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주인은 일꾼이 있었고 자신은 놀면서 일꾼들을 향해 품꾼들을 좀 찾으라고 해도 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주인은 직접 품꾼을 얻으려 새벽부터 품꾼들을 만나러 가십니다.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를 찾으러 오신 것입니다.
주인은 총 다섯 번의 시간을 나가서 사람들을 데려옵니다. 그 시간은 이른 아침과 오전 9시 그리고 12시 세시 마지막으로 오후 다섯 시입니다. 그리고 오후 여섯시에 일괄적으로 퇴근을 시켰습니다. 이 때 당시에 주인이 사람들을 부를 때에 번역된 ‘놀고 서 있는'이라는 단어가 보이십니까? 이 단어는 단순히 오늘 일이 없으니까 놀고 있었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들은 하루를 벌어서 하루를 먹고 살아야 하는 자들이었고 일이 없으면 수입도 없는 삶을 살아갔었습니다. 그러니까 일을 쉰다는 것은 당장 하루의 삶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놀고 서 있다라는 단어의 원래 의미는 ‘무익한, 쓸모없는, 게으른'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포도원의 주인은 계속해서 장터에 나가서 선택함을 받지 못한 무익한 자들을 자신의 포도원에 들여보내려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여기에도 있습니다. 포도원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품꾼인 우리를 직접 부르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볼품이 없습니다. 무익하고 쓸모가 없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기에 합당하신 자들이라고 스스로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존경해마지않는 사도바울조차도 자신을 향해 무익하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무익한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를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하십니다. 이 포도원을 저는 감히 ‘하나님의 품', ‘공동체', ‘교회'라고 부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교회로 부르셨습니다. 그 때와 시는 다릅니다. 누군가는 처음부터이기도 하고 누군가는 죽기 직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포도원에 들여보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포도원의 주인은 그 품꾼을 고용함에 있어서 차별이 없습니다. 이른 아침이던 퇴근이 한 시간이 남았던 되도록 많은 자들을 포도원에 들여보내서 살아갈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주려 합니다. 포도원은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자들을 받아주는 장소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누구든지 어떤 상황이든지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주로 영접하면 그 시와 때와 상관없이 우리는 영생을 얻고 하나님 나라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름 받은 품꾼들 중에는 먼저 부름을 받은 자와 나중에 부름을 받은 자가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퇴근시간은 동일합니다. 포도원에서 주인에게 일당을 받으려면 내가 언제 와서 몇 시간을 일했는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포도원에 퇴근시간까지 일을 하는 것입니다. 포도원에 언제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해가 저물매 청지기에게 삯을 주라고 주인이 명령할 때에 내가 있었는가입니다. 그리고 해가 저물었을 때에 주인은 모두에게 빠짐없이 품삯을 지급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품삯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이 사실이 저와 여러분에게 소망이 되고 또 힘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열심과 우리의 섬김에는 언제나 끝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끝이 있으며 이 세상에도 최후의 심판 날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에 우리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품삯 즉 구원이라는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품꾼들, 불만을 품 다

이제 문제가 일어난 부분을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날이 저물고 퇴근시간이 되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청지기를 향하여 이렇게 명령합니다.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여러분 여기에서부터 무언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할까요? 어쨌든 제 십 일시에 온 자들은 한 데나리온씩을 받아갑니다. 한 데나리온은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로마의 은화로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쏠쏠하지 않습니까? 하루 일하고 노동자들의 하루 품삯을 받아가다니요! 그런데 더 신난 사람들은 그 전에 온 사람들입니다. 가장 신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아마 이른 아침부터 와서 일을 했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후에 이들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당연히 더 받을 것이라 기대했던 것이 무색하게 모두가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씩을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집 주인에게 원망합니다. 자신들은 더위를 견디면서 뙤약볕에서 열심히 일을 했는데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자들과 급여가 같은 것이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맞아 보입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포도원 주인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잘못한 것이 없다며 네 몫이나 가지고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부당하다 혹은 불합리하다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루 종일 일했던 자들은 12데나리온까지는 아니더라도 10데나리온 정도는 받아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모두가 한 데나리온이라는 품삯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시간 일한 자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을 때 이들은 그들과 그들보다 조금 더 일한 자신들을 비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처음 자신들이 포도원에 들여보내졌을 때의 감사함은 온데간데없이 자신들에게 일거리를 준 포도원 주인을 원망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과연 여기에서 주인이 나가서 30분만 일할 사람을 찾아 그들에게 포도원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고 해 봅시다. 그러면 한 시간 일한 사람들은 지금과 같이 감사함으로 한 데나리온을 받아갈 수 있었을까요? 아마도 아닐 겁니다. 이들도 분개하며 자신이 저들보다는 조금 더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아 부럽다.’ 이 부럽다는 감정이 곧 주인에 대한 원망을 불러일으켰을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요즘 정말 많이 유행하는 노래 중에 장기하씨의 ’부럽지가 않어’라는 곡을 아십니까? 처음에는 저도 생전 처음 들어보는 스타일의 곡이라 듣다가 왜인지 모르게 그 노래가 담고 있는 철학적인 메시지가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이 노래에서 시종일관 가수는 자신에게 부러울 것이 없으니 자랑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얼마든지 하라고 말합니다. 내가 100만원이 있다면 10만원이 있는 사람이 나를 부러워하며 짜증낼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1000만원을 가진 사람을 보면서 나는 그 사람을 부러워하며 짜증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부러우니까 내가 가진 것들을 자랑하고 그 자랑을 하다 보니 문득 내게 없는 것이 생각나서 부러워지고 이 생각들이 쳇바퀴처럼 도는 가운데 자신은 그 부러움에서 벗어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이 노래의 주제입니다. 이 부러움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저는 ‘비교의식'에서 벗어났다는 것으로 다가왔습니다.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나'이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에서 품꾼들은 서로를 비교하면서 부러움을 느끼고 결국은 주권을 가지고 있는 포도원 주인에게 원망을 합니다. 분명 자신은 한 데나리온을 받기로 약속하고 들어왔다면 받은 금액에 만족하면 되는데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며 받은 은혜마저도 보잘것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돈을 주는 권리가 자신에게 있지 않고 포도원의 주인에게 있는데 말입니다. 이 비유에서 하루 종일 일했던 품꾼. 먼저 된 자는 누구일까요? 이 비유를 듣고 있었던 베드로일 수 있습니다. 또 이 이야기를 듣고 보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생각으로부터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요? 세상으로부터 오는 유혹은 이겨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상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같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오는 그 부러움은 어떻게 다뤄져야 할까요?

우리는 상품이 아닌 작품입니다.

이 비유 속에서 가장 손해를 본 사람은 누구일까요? 맞습니다. 포도원 주인입니다. 그는 굳이 쓰지 않아도 될 돈을 썼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원망'입니다. 비유에 적힌 말씀대로 선한 사람은 포도원 주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돈을 쓴 것도 포도원 주인이었습니다. 결국 악한 사람은 자신의 것을 보지 않고 다른 사람의 것을 보고 부러움, 시기, 질투를 느끼며 주인을 원망했던 일꾼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포도원 주인은 포도원에서만큼은 세상의 합리성이 통하지 않기를 바랬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진정 원했던 것은 한 사람이라도 더 품삯을 받아 그 은혜를 누리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포도원의 규칙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포도원이 저와 여러분이 속해있는 가정이길 소망하고 또 교회이기를 소망하며 여러분의 삶이 속해있는 모든 곳이기를 소망합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마음에 들어온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작품'과 ‘상품'입니다. 여러분 작품은 그 고유한 가치가 있어 다른 대상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유일하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이 저 작품보다 낫고 낫지 않고가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상품은 어떻습니까? 끊임없이 다른 것과 비교가 되고 뜯어고쳐야 하며 새로운 것들을 내놓아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상품입니까 작품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아멘! 그렇기에 우리는 다른 사람과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많이 받았다고 해서, 나보다 더 적게 받았다고 해서 내가 그들과 비교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에게 약속된 바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쉽지 않음을 느낍니다.
그렇기에 필요한 것이 바로 ‘성령'님입니다. 서로 자신이 가진 것이 더 많기를 바라며 서로를 견제하던 제자들은 한 사건 이후로 송두리째 바뀐 삶을 살아갑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지난 주일에 나누었던 사도행전에 2장,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세우실 새로운 왕국에서 자리싸움을 하던 제자들은 잇달아 자신의 심장을 꺼내어 하나님 앞에 기꺼이 내어드립니다. 공로주의, 보상주의를 내세우던 제자들은 더 이상 내가 받는 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동일합니다. 우리에게도 눈의 초점을 세상을 보는 관점을 하나님으로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능력이 없으니 안경이 필요합니다. 그 안경이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의 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아야합니다. 성령의 안경을 끼고 나서 본 우리 자신의 모습은 상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작품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에 만족했을 때에 우리는 다른 사람을 보지 않고 우리에게 주어지는 한 데나리온을 보며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더 나아가 나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서 은혜를 입는 자들을 바라보며 그들을 향해 부러움과 시기 그리고 원망의 눈빛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그들에게도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결론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각각 때는 다르지만 포도원의 주인이 직접 포도원에 불러주신 자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부르심이 아니었다면 하루하루를 살아갈 힘을 얻지 못했던 무익한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포도원 주인이신 하나님의 계획하심 아래 우리를 불러주심으로 말미암아서 포도원에, 구원의 길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은혜는 저와 여러분 하나하나가 상품이 아닌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속 포도원의 품꾼들은 자기 자신을 상품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높이고 낮추었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저와 여러분의 오늘도 그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포도원의 규칙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은 세상의 가치관과는 다릅니다. 인간의 합리성, 정의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상은 때때로 불공평하거나 누군가에게 관대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것을 성령의 안경을 통해서 바라볼 때에 작품의 눈에서 작품이 빚어져 가는 과정이라 생각할 때에 부러움과 비교 원망과 질투 대신 사랑과 세움 감사와 찬양이 가득해 질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누군가에게는 먼저된 자요 또 누군가에게는 나중된 자가 됩니다. 이것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우리는 나중된 자요, 또 앞으로 가득 메워질 동서울광염교회의 새가족들에 비하면 먼저된 자들입니다. 이 가운데 저와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비교가 불가능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최고의 작품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포도원의 규칙, 하나님 나라의 규칙을 따르며 그 모든 은혜에 감사하고 찬양하는 넓은 마음을 가진 삶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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