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대표 - 본디오 빌라도

사도신경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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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싸가 되다 2. 합리적 의구심 3. 고난의 십자가는 실제이다 4. 참 신앙의 길은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것 5. 인정받지 못한 구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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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 의구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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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5번째 시간이에요. 이렇게 사도신경의 고백을 하나씩 살펴볼 줄 몰랐다고 하는 청년들이 있더라구요. 저도 사도신경을 매주 준비하면서 고민해요. 은근슬쩍 다른 주제로 넘어가볼까 하는 유혹도 받아요. 하지만 준비하면서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유혹을 누르더라구요.
사도신경이 여러분의 삶에 크게 와닿지 않을 수 있고 또 이 주제가 여전히 생소할 수 있겠지만요. 그래도 우리 내가 매주 하는 이 고백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보는 중이라 생각해주면 좋겠어요. 몰랐을 때의 고백과 알고 난 이후의 고백에는 큰 차이가 생기거든요.
아무것도 기억에 남지 않는 것 같아 보여도 어떤 순간에 불현듯 성령님께서 들었던 말씀들이 생각나게 하실거에요. 그리고 또 그 고비를 건너가게 해줄거에요. 그것이 하나님이 삶에 주시는 은혜거든요. 삶에 그러한 은혜가 넘쳐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 혹시 사도신경을 외우면서 ‘본디오 빌라도'라는 사람에 대해 의구심을 가져본 적이 있나요? 본디오 빌라도보다 더 중요한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텐데 왜 이 사람이 사도신경에 기록되어 있을까요?
앞으로 여러분이 하나님에 대해 더 많이 알아가고 싶고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고 싶다면요. 말씀을 읽을 때 혹은 이러한 고백을 할 때 계속해서 의심해야 해요. 말씀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세요. “왜 이런 내용이 적혀있을까? 이것은 무슨 뜻일까?”하는 의구심을 계속 가져야 해요.
왜 제가 예전에 영상 설교 때 인도 영화관 이야기 했었잖아요? 인도에서는 영화를 볼 때 정말 감정이입을 제대로 해서 영화를 본다구요. 그 안에 있는 인물들의 감정을 더 잘 이해하고 영화를 즐기기 위해 감정이입을 제대로 해요. 이것이 정말 저와 여러분에게 필요해요. 단순히 글로 써있는 것을 보고 읽는 것을 넘어서서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을 찾아야 해요.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이라 믿는다면요. 말씀 역시 마찬가지에요.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책. 지금도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거든요. 단순한 텍스트. 글이 아니라 성경은 여전히 살아있는 말씀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의구심을 갖고 질문을 던져야 해요.
제가 여러분에게 기도가 무엇이라 생각하세요? 라고 묻는다면 아마 대다수가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할거에요. 맞아요.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 기도에요. 대화는 죽어있는 것과 할 수 없어요. 그건 혼잣말이죠. 대화는 쌍방의 이야기가 오고 가는 것이에요.
하나님과 대화하기 위해 기도한다면, 말씀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이에요. 당연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을 거에요.
끊임없이 의구심을 가지면서 질문해야해요. 하나님께 따지듯이 질문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내가 왜 이 말씀을 받아 드려야 하는지 그리고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과 뜻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구심을 갖고 질문을 던지라는 것이에요.
저는 이것을 합리적 의구심이라 말하고 싶어요.
합리적 의구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더 이해하고 받아드리게 만들어줘요. 그 의구심과 질문은요. 여러분의 중심에서 꿈틀거리고 때론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면서 하나님의 뜻을 향해 걸어가도록 만들어줄거에요.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도 합리적 의구심을 가져야 하는 부분이 많이 있는데요. 그 중 한 부분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라는 이 부분이에요. 이 부분에 대해 말하기 전에 본디오 빌라도에 대해 잠깐 살펴보면요.
일단 빌라도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후 26-36년까지 유대 총독이었어요. 당시 유대 총독이 가졌던 권한은 다음과 같아요. 사형 집행권, 군사, 사회, 종교 등의 최대 권력자였어요. 그에 말 한마디에 다스리던 모든 지역의 사회가 휘청거릴만큼의 권한이 있었어요. 로마 황제를 대신하여 그 지역을 다스리는 자였기 때문에 갖고 있던 권력이 정말 엄청 났어요.
빌라도는 평소에 예루살렘이 아닌 가이사랴에 머물렀어요. 가이사랴에서 군대와 함께 있었고 예루살렘에는 파병 군인들일 보내어 그들이 치안을 유지하도록 했구요. 그러다 예루살렘으로 오는 특별한 날들이 있었는데 유월절과 같은 이스라엘의 큰 절기 때는 예루살렘으로 왔었어요. 절기가 되면 유대 각지에서 예루살렘으로 사람들이 몰려 들었거든요. 사람들이 짧은 시간 동안 많이 모여들면 다양한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고 또 그들이 모의하여 쿠테타등을 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이동해서 사람들을 살펴보았어요.
빌라도가 유대 총독으로 있었던 것은 로마의 역사에 기록이 되어있지만 그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아요. 그가 총독으로 있으면서 어떤 일들을 했는지에 대한 특별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선 그는 별로 유명하지 않았던 사람인 것 같아요. 하지만 분명히 역사 속에 살아있었던 존재에요. 세상 역사 책에 빌라도라는 사람이 기록이 되어있어요.
유대 총독이지만 별다른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던 그가 갑자기 핵인싸가 된 사건이 있었어요. 물론 유대 총독이라는 자리 자체가 인싸의 자리이긴 하지만 그것을 넘어선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 사람을 핵인싸로 만들어준 사건이 하나 있었어요. 이 사람과 전혀 상관없는 대한민국에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빌라도라는 사람의 이름을 잊지 못하도록 만들어준 사건. 바로 십자가 사건이에요.
하지만 그의 유명세가 무색하게도 예수님은 본디오 빌라도라는 사람 때문에, 혹은 그에 의해 고난을 받은 적이 없어요. 아무리 성경을 찾아봐도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지 않으셨어요. 정확하게 유대인 제사장과 종교인들에게 고난을 당하셨어요.
빌라도는 직접적인 책임이 없어요. 오히려 놓아주려 했어요. 빌라도의 아내는 “예수님은 ‘옳은 사람'이다.”라고 말까지 했을 정도로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주고 싶어했어요. 하지만 유대인 제사장들과 종교인들이 너무 반발 했어요. 그래서 그들에게 빌라도는 ‘손을 씻으면서'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라고 말까지 했어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죽음에 빌라도의 책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싶지 않았고 그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것에 대한 걱정 때문에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도록 했거든요.
예수님은 빌라도의 직접적인 주도 속에 고난을 받으신 적 없어요. 그런데 사도신경은 마치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고난을 받으신 것'처럼 되어 있어요. 왜 이렇게 표현이 되어 있을까요?
(쉬고)
사실 이 이유는 좀 허무해요. 라틴어로 적혀진 사도신경을 번역하면서 생긴 오류 때문이에요. Under Ponitus Pilate / Sub Pontio Pilato. 번역하자면 본디오 빌라도의 “통치”아래에서 고난을 받아에요. 번역의 오류를 바로 잡고 보면 이 말의 의미가 좀 달라져요.
본디오 빌라도라는 사람의 통치 아래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사건이 실제로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문장이 되어요.
번역의 오류를 잡고 보면 십자가 사건이 역사적으로 사실이었다.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그 사건이 진짜였다는 것이 명확해져요.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에서 일어난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증명해주는 역할을 해요. 빌라도라는 사람의 이름만으로 “예수님은 어떠한 신화가 아닌 실제 존재했던 인물"이 되는 것이죠.
그리고 사도신경에서 빌라도에 대해 기록한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어요.
빌라도가 실존했던 역사 속의 인물이라고 했잖아요? 이것은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기 위해, 우리와 대면하여 구원하기 위해 친히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기도 해요. 빌라도가 유대 총독으로 있었던 AD 26-36년 그 때 예수님이 실존하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죠.
우리가 머무는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으로 하나님이 오셨어요.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수준으로 끌어 올리기 위해,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세워주시기 위해 친히 우리 수준까지 낮아지셨어요.
그분을 배신하고 등에 칼을 꽂고 돌아선 우리의 역사 속에 들어오셔서요. 모두가 손가락질하고 수군거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일을 행하셨고, 그 일을 지금도 지속해 나가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에요.
본디오 빌라도우리 모두가 세상 속의 역사 속에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써내려가시는 이야기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어요.
그렇기 때문에 빌라도라는 사람이 굳이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사도신경에 이름이 올라가게 된 거에요.

인정받지 못한 구세주

사람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끌고 왔어요. 그리고 빌라도는 공식적으로 예수님을 심문했어요. 모두가 볼 수 있는 공개된 상황 속에서 “에수님은 죄가 없다"라고 외쳤어요. 하지만 유대인 제사장과 종교인들 그리고 그들에게 넘어간 수많은 군중 앞에 자신의 판결을 뒤집었어요.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공개적 처형을 하라 명령해요.
빌라도의 이 사형 선고는요. 정말 중요한 선고에요.
정말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유죄가 되셨다는 것을 사람의 입으로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것이거든요.
진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셨다는 것을 확실하게 증거해주는 선고이거든요.
그 분 자신의 소유인 이 세상에서 거부 당하셨어요. 피조물이 세상의 창조주를 버렸어요. 당신은 우리의 구세주가 절대 아니야! 라고 외쳤어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당신은 나의 아버지가 아니다! 당신은 나의 신이 아니다! 나는 당신이 싫다! 라고 한 것과 같아요.
빌라도의 사형 선고. 무죄를 유죄로 확증한 그의 말은요. (도리도리) 단순히 군중들의 폭동을 두려워서 한 말이 아니에요.
“예수를 못 박으라" 라는 그의 말은 단순한 한 사람의 명령이 아니에요.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한 구세주. 그 주인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세상 모든 사람들을 대표하는 고백이에요.
세상 모든 사람들의 마음의 고백이라구요.
어쩌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일지도 몰라요. 어쩌면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밀어내고 잊고 살았을지 몰라요. 우리도 살아가면서요. 예수님 앞에 섰던 빌라도처럼 그 수많은 군중들처럼요.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부인하고 못 박았을지 몰라요. 그분 없이 사는 것이 더 편하다 생각했을지 몰라요.
차라리 예수님을 몰랐다면 좀 편하게 살았을 것 아니에요. 직장에서는 동료들과 함께 학교에서는 선후배들과 함께 신나게 먹고 마시면서 내가 하고 싶은데로 편하게 살았을거 아니에요.
예수님 몰랐다면 소개팅도 교회 다니는 사람만 찾는 것이 아니라 좋아보이는 사람 만나서 즐겁게 지냈을 것 아니에요.
말씀대로 살지 못했다는 자책감도 느끼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왜 나는 이 모양으로 사는 것이지? 하면서 스스로를 힘들게 할 필요도 없을 것이잖아요.
지난 주 복음은 스캔들이라 했었죠. 여러분처럼 당시 사람들도 그랬을거에요.
도대체 예수라는 사람은 누군데 우리의 마음을 이렇게 흔드는 것일까?
왜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할까? 나는 지금도 편안하고 행복한데 왜 나에게 죄인이라고 하지? 왜 나를 힘들게 하지?
회개하라! 라고 외치는 저 말이 왜 이렇게 마음에 찔리지? 도대체 이 감정은 뭐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 감정들이 뒤섞이다 터져 나온 한마디 “예수를 못 박으라.”
차라리 그 분이 없는게 낫다고 생각한거에요. 그 분만 내 삶에 사라지면 다시 나는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데로 살아갈 수 있다. 그 모든 마음의 표현이 빌라도라는 한 사람의 입을 통해 포효하듯이 터져나온거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실제

누가복음 15장 11-16절에 여러분이 잘 아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요. 바로 탕자에요. 탕자가 아버지를 찾아가서 자신에게 줄 재산을 먼저 달라고 요구하잖아요. 아버지가 죽기 전에 유산을 분배해 달라는 것의 의미는요. 빌라도를 통한 그 고백과도 같은거에요.
“난 당신이 필요 없어요.”
“당신이 가져온 스캔들 때문에 내가 너무 힘들어요.”
“당신을 내 마음에 두고 살고 싶지 않아요.”
“당신에게 매여있는 삶은 날 너무 피곤하게 해요, 나는 자유롭게 마음 껏 살거에요.”
아버지가 죽기 전 유산을 분배받는 것은 아버지를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것이었거든요. 아버지라는 한 사람의 인격을 그 마을에서 완전히 소멸시키는 것과 같아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본디오 빌라도, 즉 세상에게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어요. 탕자가 재산을 먼저 분배받아 아버지를 매장시키고 그 인격을 소멸시키려 했던 것처럼 세상은 빌라도를 이용 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았어요.
세상은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부인했어요. 창조주를 매장시켰어요. 세상의 주인을 십자가에 달아버렸어요.
그리고 환호했어요.
저와 여러분이 믿고 있는 예수님은요. 이렇게 세상이 버린 존재에요.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그 때도 지금도 여전히 예수님을 밀어내고 이 세상 그 때도 지금도 여전히 예수님을 밀어내고 그 분을 찍어내고 그 분을 사정없이 짓밟고 있어요.
세상의 기준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은 죄인이에요. 최악의 죄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를 저와 여러분은 믿고 있다고 고백하는거에요.
바울은요. 고린도전서 1장 22-24절. 오늘 본문을 통해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
“유대인 너희들에게는 거리끼는 그 그리스도를 전한다.”
“십자가에 달린. 나무에 달린 저주 받은 죄인을 너희는 거리껴 하지만, 우리는 그 분을 전한다.”
“이방인들아. 너희가 미련하다 말하는 그 그리스도를 전한다.”
“십자가에 달린 최악의 죄인이라 생각하는 그 그리스도를 전한다.”
바울과 우리가 믿고 자랑하는 예수님은요. 세상의 기준으로 봤을 때 아주 황당한 일일거에요. 신이 인간이 된 것 자체도 말이 안되는데, 그 분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대신 지셨다는 그 이야기는요.
아주 황당한 일이면서 동시에 조롱받기 딱 좋은 이야기에요. 사람들이 개무시하는 그 이야기. 세상은 절대 받아드리고 싶어하지 않는 그 이야기를 저와 여러분은 믿고 전하고 있는거에요.
우리 오늘 본문 24절을 함께 읽을까요?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아멘"
세상은 예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황당하다 말하지만, 그 분은 우리에게 능력이고 세상을 살아갈 지혜에요. 저와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최악의 죄인도 아니고, 황당한 사건의 주인공도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확신하고 선포해야 하는 의무가 있어요.
그런데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확신하고 선포하며 살아가면요. 한가지 문제가 생겨요. 바로 내 믿음에 대한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는거에요. 빌라도 같은 세상 나라의 권세가 여러분을 전방위로 압박할거에요.
열심히 살아가려 노력하면 할 수록 내가 그리스도인이 맞는가? 라는 생각이 들며 내 믿음이 부끄럽다 생각하도록 들거에요.
제대로 살아가고 있지 못하는 것에 대한 자책. 내 믿음은 왜 여전히 이대로이지? 나는 왜 이 것 밖에 되지 않을까? 라 자책하게 만들거에요.
내가 왜 이 공부를 해야 하고, 내가 왜 직장에 있는 것인지. 왜 하나님은 나를 이 곳에 보내신 것일까? 잘못 보내신 것 아닌가? 이 전공이, 이 일이 나에게 무슨 소망이 있는가? 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도록 만들거에요.
여러분이 있는 그 자리에서 집중하지 못하도록 할거에요.
혹시 지금 그런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나요?
그렇다면요. 여러분 잘하고 있는거에요. 정말 잘 살아내고 있는거에요. 예수님을 삶으로 확신하고 선포하며 살아가고 있는거에요.
그냥 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단순히 여러분을 위로하기 위해 하는 말이 절대 아니에요.

참 신앙의 길은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것

참 신앙의 길은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거든요. 참 신앙의 길을 걷고 있는 자들의 믿음은 당연히 흔들릴 수밖에 없어요. 고난은 순종의 결과이기도 하거든요.
세상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과 하나님 나라의 원리가 달라요. 근본적으로 달라요.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따라 살려고 하면 할수록 세상과 충돌하게 되는거에요.
우리 마음이 흔들리고 내 믿음이 형편없어 보이는 이유는요. 세상이 알려주는 것과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에요.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경쟁하게 만들잖아요. 누군가를 끊임없이 미워하게 만들고 짓밟고 내가 일어서야 한다 말하잖아요. 옆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다 내 경쟁자로 여기게 만들잖아요.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달라요. 주위 사람들이 내 경쟁자가 아니에요. 모두가 함께 하나님의 자녀라 말해요. 우리를 형제 자매 한 가족이라 말해요. 누가 가족을 경쟁자로 여기고 밟고 일어서나요. 하나님 나라는 우리 눈에 마음에 가득찬 독기를 빼고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는 법을 가르쳐요.
빌라도 같은 세상은요. 그것이 너무 싫은거에요.
우리의 눈에 독기가 빠져 나가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 정말 싫은거에요. 그래서 우리의 믿음을 흔들어 대는거죠.
사랑하는 여러분. 고난은요.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해요.
하나님을 적당히 믿는 사람에게는요. 고난이 없어요. 다른 생각 안해요. 그냥 내 마음대로 해요. 내 마음대로 하는데 고난이 어디 있어요. 다만 눈치는 보겠죠. 내가 한 말 혹은 행동을 통해 누군가 날 싫어하지는 않을까? 하는 눈치는 보겠죠. 하지만 고난이 없어요. 고난을 고난으로 생각하지 못하거든요.
혹시 여러분의 삶이 힘들고 고난 속에 있다면요. 잘살고 있기 때문이에요. 고난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사람들에게만 찾아오는 것이거든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 당연해요. 절대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하지만 그래도 살아보려 노력하는 사람들은요. 필연적으로 세상에서 오는 고난을 맞이하게 되어있어요.
여러분 그 고난을 품어야 해요. 나의 마음을 온통 헤집어 놓는 그 무엇인가 때문에 힘들다면요. 이제는 그것을 한번 있는 그대로 받아드리려고 해보세요. 맞아요. 고난을 받아드리는 것 정말 힘들어요. 그래서 고 인내가 정말 필요해요.
당시에는 죄인 한명을 특사로 풀어주는 일이 있었어요. 빌라도가 보았을 때 예수님은 죄가 없었어요. 그래서 풀어주고 싶었어요. 하지만 세상은 진짜 죄인이었던 바라바를 풀어주라 요구해요. 결국 재판은 엉터리 재판이 되어버렸어요.
무죄였던 예수님은 유죄가 되었어요.
유죄였던 바라바는 무죄가 되었어요.
이 엉터리 재판이 저와 여러분에게 주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어요. 앞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게 되었을 때를 보여주는 장면이거든요.
우리는 빼박 죄인이에요.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면 유죄 판결을 받을거에요.
(쉬고)
하지만 우리는 그것과 동시에 무죄. 죄가 없다는 선고를 받게 될거에요.
죽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바라바는 이해할 수 없는 자유를 얻었어요. 그도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는 자유를 얻었어요.
고난 속에 죽을 듯이 힘들겠지만, 그것을 품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 것이에요. 고난이 하나님 나라에서 무죄의 은혜를 누리게 해줄 것이거든요.
이 세상 나라를 사는 동안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다 얻는 고난. 그 고난의 삶을 품어야 해요. 고난을 마주하고 받아드리고 품으려 하는 그 행위 자체가 여러분에게 큰 영광으로 돌아올거에요.
풀려날 이유가 하나도 없는 바라바가 무죄 판결을 받고 살아났던 것처럼, 저와 여러분이 겪는 그 순종의 댓가인 고난을 통해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에서 무죄의 은혜를 반드시 누리게 될 것이에요.
혹시 나는 별로 순종하지도 않는 것 같은데 왜 고난이 있지? 라는 생각을 하는 분이 있다면요. 감사하게 생각하세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에요. 고난을 통해 합당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구나! 라고 생각하며 감사하세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불필요한 고난과 십자가형을 당하신 이유는요.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서였어요.
이사야 52장 13절부터 53장 12절에 우리를 위해 기꺼이 고난을 받으로 이 땅에 오는 한 종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어요.
그 분은 아무런 죄가 없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그를 밀어내고 싫어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고 고난을 받으세요.
더 이상한 것은요. 그분이 받은 그 고난이 저와 여러분을 치유. 회복했어요.
정말 아무 의미없는 고난과 죽음처럼 보였는데요. 그 분이 고난을 당하고 죽고 나니까요. 그 고난과 죽음이 무의미 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어요.
그 분의 고난과 죽음은 우리를 회복시켰어요. 그 분이 자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거든요. 댓가 없는 고난과 죽음이 저와 여러분을 지금 발을 딛고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어요.
여러분 혹시 ‘아사셀 염소'라는 말 들어보았나요? 레위기 16장 10절을 함께 읽어볼까요?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는 산 채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니라. 아멘"
이스라엘은 7월 10일을 대속죄일로 가져요. 두 마리의 염소를 택해 제비를 뽑아 한 마리는 속제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고, 다른 한 마리는 광야로 내보내는 관습이 있어어요. 이 때 광야로 보내는 염소가 바로 ‘아사셀'이에요.
성소에서 진행 된 제사와 제물의 피뿌림 의식을 통해 죄와 허물이 완전히 정화되었어요.
거기에 다해서 상징적으로 백성의 죄를 전가시킨 산 염소를 광야로 보냄으로 더 이상 백성들의 죄가 남아 있지 않고 모든 죄악이 제거 되었음을 확인시켜주는 의식이에요.
이 염소는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사람이 살지 않는 거친 광야에서 방황하다 맹수에 찢겨 죽거나 절벽에 떨어져 죽어요. 이스라엘의 죄가 멀리 사라져 용서 받는다는 상징을 보여주는 염소를 아사셀 염소라고 해요.
아사셀 염소의 이 역할이 바로 예수님의 역활과도 같아요.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죄를 홀로 짊어지고 아무도 없는 곳에 혼자 남으셨어요.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십자가에 달려 고통을 혼자 오롯이 다 받아내셨어요.
맹수에 찢기거나 절벽에 떨어져 죽었던 아사셀 염소처럼 예수님도 온 몸이 찢기셨어요.
자신이 만든,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 인간들에게 찢기셨고 결국 죽으셨어요.
그리고 죽으시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참 신앙의 길은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에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이루어내신 그분의 삶의 목표이자 사명은 고난의 길을 걷는 것이었어요. 우리에게 무죄를 선포하기 위해 기꺼이 그 고난의 길을 걸어가셨어요.
저와 여러분은 앞으로도 끝없이 빌라도와 같은 세상에게 무시 당하고 압박 받을거에요.
여러분의 마음을 뒤흔들고 넘어뜨리고 빼앗아 가려 할거에요.
모든 마음과 신경을 다 끊어버려서 아무 것도 들리지도 보지도 못하게 할거에요.
그 때 이 고백을 꼭 기억하세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죽으시고.”
정확하게 본디오 빌라도의 통치 하에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죽으시고.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실제 있었던 일이에요. 여러분이 하나님을 향해 갖고 있는 그 믿음은 가짜도 헛된 것도 절대 아니에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라는 이 고백은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을 지독히도 미워하고 싫어하는 세상 가운데 역사하는 생생한 믿음이에요.
참 신앙의 길은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에요. 고난의 십자가는 레알 진짜에요.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 받는 구원과 그에 따른 여러분의 믿음 역시 레알. 진짜에요.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위해 우리가 머무는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 찾아오셨어요. 2천년 전에 한번 반짝하고 찾아오시고 끝나지 않았어요.
지금도 저와 여러분이 살아가고 있는 그 자리. 지금 이 자리. 이 시간. 이 공간에도 동일하게 찾아오셨어요.
여러분의 그 고백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나의 삶으로 들어오신 하나님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이에요.
한 주간 살아가며 부정적인 생각이 여러분을 괴롭힌다면 이 고백을 떠올리고 꼭 내뱉기를 바래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그 때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살아계셔서 우리의 삶의 자리에 내려오셔서 함께 하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무엇인지 생생하게 깨닫게 해주는 고백이 되기를 소망하며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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