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럽지가 않아 하나도 부럽지가 않아(갈6: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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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2년 5월 8일 주일
제목 : 부럽지가 않아 하나도 부럽지가 않아
본문 : 갈라디아서 6장 11-18절 *신308
[도입]
여러분, 가수 장기하를 아세요? 뭐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 이런 노래나 무한도전 가요제에 나와서 대중들에게 얼굴을 알리기도 했었는데요. 그가 최근에 ‘공중부양’이라는 앨범으로 곡을 냈습니다. 그 곡의 제목이 이래요. “부럽지가 않아.”
오늘 설교 제목도 그의 신곡에서 카피해 왔는데요. “부럽지가 않아, 하나도 부럽지가 않아.” 입니다.
그 곡을 보면, 가사가 다음과 같아요. 한 번 잘 들어보세요.
“너네 자랑하고 싶은 거 있으면 얼마든지 해 / 난 괜찮어 / 왜냐면 나는 부럽지가 않아 / 한 개도 부럽지가 않어 … 니가 가진 게 많겠니 / 내가 가진 게 많겠니 / 난 잘 모르겠지만 / 한 번 우리가 이렇게 한 번 / 머리를 맞대고 생각을 해보자고 / 너한테 십만원이 있고 / 나한테 백만원이 있어 / 그러면 상당히 너는 내가 부럽겠지 / 짜증나겠지 / 근데 입장을 한 번 바꿔서 / 우리가 생각을 해보자고 / 나는 과연 니 덕분에 행복할까 / 내가 더 많이 가져서 만족할까 / 아니지 / 세상에는 천만원을 가진 놈도 있지 / 난 그놈을 부러워하는 거야 / 짜증나는 거야 / 누가 더 짜증날까 / 널까 날까 몰라 나는 / 근데 세상에는 말이야 / 부러움이란 거를 모르는 놈도 있거든 / 그게 누구냐면 바로 나야”
세상을 살다보면, 여러분. 부러울만한 요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이 곡에서는요. 돈을 요소로 부러움을 이야기 했죠. 그래서 보면, 십만원을 가진 사람은 백만원 가진 사람을 부러워 한다고 말해요. 여러분들.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이 십만원을 가지고 있고, 옆에 앉아 있는 친구가 백만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어때요? 부럽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부러울 것 같은데, 뭐 여러분들은 부러울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죠.
또 이렇게 말하죠? 십만원 가진 사람은 백만원을 부러워하고, 백만원 가진 사람은 그걸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천만원 가진 사람을 부러워 한다는 것이죠. 즉 모든 사람은 부러워하고 또 부러워한다는 거에요. 그런데, 이런 부러움 조차 없이 사는 사람이 있는데, 그게 바로 자기 자신이라 말하죠.
그런데 이미 성경에는요, 장기하씨보다 먼저 부러움이 없다 말하는 자가 있었는데, 알고 계셨나요? 그 주인공은 바로 사도 바울 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떤 삶을 살았길래?]
사실 저는요 장기하씨의 “부럽지가 않아”라는 노래를 들었을 때, “왜 부럽지가 않을까? 진짜 부럽지가 않을까?” 의심도 되고 좀 더 생각해보게 되더라구요. 그래서 찾아보니 서울대라는 국내 최고의 학벌을 가졌죠, 가수로써 어느정도 벌어들인 액수가 있을 것인데, 가정도 꽤나 부유한 가정임을 알게 되었어요. 그는 부족함 없는 삶을 살아서 어쩌면 정말 부럽지 않을 수 있겠구나 싶더라구요. 그리고 이건 지극히 제 개인적인 견해인데, 제 기준에는, 장기하씨가 제법 잘 생겼다 생각이 들어요. 거기에 키도 큰편이니, 정말 부러울 것이 단 하나도 없을 수 있겠다 생각이 되더라구요.
그렇다면 사도 바울도 장기하씨처럼 부족함 없는 그런 삶을 살았을까요? 그래서 부러움이 없는 삶을 살았던 것일까요?
사도 바울의 생을 보면 예수를 만나기 전과 후로 확연하게 나뉩니다. 먼저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 삶을 보면, 그의 삶은 부족할 것이 눈꼽만큼도 없었어요. 그는 바리새인 중에서도 최고 권위층에 속해서 지나가는 많은 이들이 그를 마주할 때 고개 숙여 절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자존감이 높았겠어요? 뿐만 아니라 정말 가진 것이 많아서 남 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았다는 거에요. 거기에 기독교인들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박해해왔는데, 기독교인들에게는 미움과 증오를 샀지만, 비기독교인들에게는 열렬한 환호와 지지와 사랑을 받았던 자가 바로 사도 바울이었어요.
그랬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요. 사실 그는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고 괴롭혔지만, 최종 목적지는 예수님은 잡아 죽이는 것이었어요. 기회를 엿보다 드디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마주하게 된거죠. 근데 왠 걸요. 예수님을 마주하는 순간 사도 바울이 회개하기 시작해요.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며 “사도 바울이 맞나?” 의심이 들게끔 행동을 한거에요. 그는 그렇게 예수님을 마주하며 이전과는 달리 180도 변한 삶을 살아내게 됩니다.
물론 그가 180도 변했다 해서 그가 지닌 물질과 권위와 능력이 한 순간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세상에서 부러움이 없다 말함은 물질과 권위와 능력이 여전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빌립보서 3장 5절부터 9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이러한 고백을 했음을 알게 됩니다. “나는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이며 히브리 사람 중의 히브리 사람이요, 율법으로 말하자면 바리새 사람이며 / 열성으로 교회를 핍박했고 율법의 의로는 흠 없는 사람입니다 / 그러나 내게 유익하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다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 내가 참으로 모든 것을 해로 여기는 것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으로 인해 내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심지어 배설물로 여기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한 것입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의가 아니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얻는 의, 곧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께로서 난 의입니다”
그의 과거는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고 핍박하던 자였어요. 자신의 물질과 권위와 능력에 자존감이 하늘을 찌르던 삶을 살았죠. 그러나 이제는 이 모든 것을 무엇이라 여긴다 말합니까? 배설물로 여긴다 말해요. 쉽게 말해, 똥이라는 거에요. 돈, 권력 이 모든 것들이 더럽다! 버려야 할 것이다! 라고 선포한거죠.
이제 그가 자랑할 것은 오직 하납니다. 바로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거에요.
[큰 글자로 강조한 사도 바울]
이제 사도 바울은요. 원점으로 돌아 갔습니다. 배운 것, 가진 것, 모든 것이 이제는 배설물이 된 것이죠. 배출 되었고 버려졌습니다.
그런 그가 이렇게 기록합니다.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사도 바울이 자신의 저서 끝에 본인이 기록했음을 언급하곤 했지만, 이 갈라디아서는 조금 특별합니다. 이 “큰 글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자신이 기록했음을 표현했죠. 왜 그는 “큰 글자”라는 단어를 사용해 표현했을까요? 뭐 사도 바울의 눈이 안좋았기에 큰 글자로 쓴 것이다 등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그가 큰 글자로 기록함은 앞으로 나올 내용들이 중요했기에 “강조”하고 싶었던 거에요.
[십자가, 사도 바울의 자랑거리]
우리 14절을 함께 봅시다. 우리말성경으로 읽어 드릴게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인해 세상이 내게 대해 십자가에 못 박혔고 나 또한 세상에 대해 그러합니다.”
사도 바울은요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 고백했어요. 더이상 그에게 명예와 권력과 부는 자랑이 되지 않습니다. 오직 그가 자랑할 것은 십자가 하나 뿐이라는 거에요. 이처럼 예수님을 만난 자의 삶은 완전한 변화가 주어집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만나 인격적인 변화를 경험하셨습니까?
제 이야기를 잠깐 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 “썬데이 크리스천”이라고 아세요? 평소에는 기독교인인 것처럼 살지 않다가 주일에만 예배 드리러 오는 기독교인을 지칭하는 말이, 썬데이 크리스천이에요. 제가 그랬어요. 저는 전형적인 썬데이 크리스천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지역에서 분당우리교회를 가기 위해 대중교통을 이용하셨자나요? 저도 주일 아침마다 대중교통을 타고 30분 정도 가야 교회에 도착하는 시절을 보냈습니다. 거기에 당시 부모님 손에 이끌리어 갔으니 교회에 크게 애정이 없었죠. 이 이야기는 여러분들도 일부 공감하실거 같은데, 교회 친구들하고 아무리 친해져도 넘을 수 없던 벽이 있었어요. 지역이 달라 혼자 다른 학교를 다니니 그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만들어지는 에피소드에 낄 수 없다는 것에요. 제 학창시절 신앙생활에 있어 가장 큰 어려움이 있었다면, 신앙의 성장이 더뎠다. 죄에 무감각해짐에 두려워 했다. 이런게 아니었어요. 그저 동네 친구가 없어 공감대가 형성이 안된다는 것이 제일 큰 어려움이었어요.
청소년기에 친구라는 존재는 사실 너무나 중요하죠. 실제로 저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청소년기 가장 의지하는 사람은 부모님도 아니구요, 선생님도 아니고 친구가 가장 의지된다 말하죠. 그래서 저는 결단을 했었습니다. 20살이 되면 교회에 나가지 않아도 될 것같다고 말입니다. 20살부턴 성인이고, 내 인생의 결정권은 내게 달렸다고 생각했기에 그러한 다짐을 한거죠. 그렇게 고3 여름, 마지막 수련회에 참여하게 됩니다. 2박3일 일정 가운데 둘쨋날 밤, 고3을 위한 기도회 시간에, 저는 그렇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죠. 그 뒤로 저는 한 순간에 180도 변한 삶을 살아 내지는 못했고, 여전히 죄를 범했고, 넘어졌고. 하지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죄를 회개하기 시작했고, 넘어지면 아닌 척 하지 않았고, 재정비 하여 일어나려 했고 삶의 초점이 나에서 예수님으로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여러분들 또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삶의 변화를 경험하길 소망합니다. 저처럼. 그리고 또 사도 바울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나니 교회에 가는 이유가 더 이상 부모 손에 이끌리어 가게됨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도 동네 친구 없음이 그렇게 크게 걸림돌이 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니 현실적으로는 모든 것들이 필요는 하나 신앙 생활에 있어 필수는 아니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랬을 것에요. 예수님을 만나고나니 모든 것이 배설물이 되었고,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게 된거죠.
[십자가가 무엇이기에?]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모든 것을 버리고 자랑했던 그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로마서 5장 6절에서 11절을 보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그리스도께서는 작정된 시기에 경건하지 않은 사람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 의인을 위해 죽는 사람은 거의 없고 선한 사람을 위해 과감히 죽는 사람은 간혹 있기는 합니다 /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써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에서 확실히 구원받을 것입니다 /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됐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심으로 인해 그분과 화목하게 됐으니 화목하게 된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인해 확실히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 안에서 기뻐합니다”
사도 바울이 자랑한 그 십자가, 십자가 사건은 표면적으로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손과 발에 못박혀 죽으신 처형식이었지만, 내적으로는 죄인되는 우리의 죄를 대신해 지시고 우리를 품어주신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위대한 사랑’의 사건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전한거에요. 사도 바울이 전한 그 십자가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그 위대하신 사랑’을 전한 것입니다.
[적용]
사랑하는 청소년부 여러분. 우리는 오늘을 어버이 주일로 지킵니다. 물론 대부분의 부모님들이 믿기에 이 자리에 큰 어려움 없이 나아온 친구들이 많을 것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여나 믿지 않는 부모님이 계신 친구들이 있다면, 어쩌면 오늘이 그 기회일 수 있습니다. 평소 뜬금없이 “아빠, 엄마 교회가자” 라 말하면, “얘가 왜이러나?” 싶지만, 여러분 오늘은 어버이날이기에, 여느 날과 다르기에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귀한 주의 자녀되시는 여러분. 사도 바울이 모든 것 버리고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복음을 전한 것처럼, 우리도 세상의 모든 것보다 더 위대하고 능한 십자가의 그 사랑을 가족들에게 그리고 믿지 않는 친척들과 더 나아가 내 주변 사람들에게 전하는 오늘 하루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