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하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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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어제는 하나님께서 출애굽의 복음을 드러내시며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 그 거룩함을 침범하게 된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거룩함을 침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좀 충격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어제 말씀드린 것처럼 법궤가 다시 이스라엘 땅 벧세메스로 돌아왔습니다. 감사의 제사도 드렸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벧세메스 사람들이 법궤를 본 것 때문에 큰 살육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개역개정 성경본문에는 오만칠십명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영어성경들은 대부분 그냥 칠십명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거는 괄호 빼고 칠십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맞습니다. 벧세메스 인구가 그렇게까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원본은 없고 사본들이 여러개 남아서 그것을 종합하고 번역해서 우리가 성경을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 사본은 칠십이라고만 나와 있는데, 여기 있는 오만은 우리가 가장 신뢰하는 히브리어사본인 맛소라 텍스트에 오만칠십이라고 적혀 있기 때문에 혹시나 해서 괄호를 쳐서 오만을 살렸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본에서 이 부분을 그냥 칠십이라고 표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상은 맛소라 텍스트가 훼손된 것이 많아서 번역을 할 때 70인경이라는 구약성경을 헬라어 버전으로 번역해 놓은 것을 많이 참고합니다. 어쨌든 모든 자료를 참고해서 최대한 정확하게 번역한 숫자가 70명이 살육된 것인데 개역개정성경은 좀 더 조심스럽게 번역을 하는 면이 있어서 오만이라는 숫자를 살려놓았습니다. 전세계적으로 70명이라고 하니 그냥 70명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어쨌거나 오만칠십명이 되었든 칠십명이 되었든 법궤를 본 것 때문에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당사자들에게 충격이고 이 본문을 읽는 우리들에게도 충격적인 일입니다.
왜 법궤를 본 것 때문에 살육을 당했습니까? 19절에 들여다보다 할 때 히브리어 ‘라 아브’는 그냥 본 것이 아니라 구경거리 삼아서 들여다 본 것을 의미합니다. 법궤가 원래 어떻게 보관되어 있었습니까? 실로의 성막에 성막 뜰과 성소를 지나 지성소 안에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거룩한 장소에 있던 하나님의 성물입니다. 하나님의 특별임재의 상징이고 언약의 상징입니다. 그런 물건을 구경거리 삼듯이 여흥 삼아서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치신 것입니다.
살육 당한 70명의 행동은 재앙을 겪은 블레셋 사람들의 행동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법궤를 거룩하게 여기기는커녕 전쟁터에서 주워 온 전리품으로 생각하며 전시하며 전시해놓은 것을 구경거리 삼아 즐겼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온 블레셋이 재앙을 당하는 지경에 왔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살육을 당한 이 사건을 두고 하나님께서 왜 그분의 백성에게 폭력을 휘두르시나 이렇게 생각을 하기 전에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인들과 똑같이 행동하고 있는 것을 슬퍼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면 도대체 누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조차도 하나님을 제대로 경외하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성을 훼손하고 있는 이 상황이 안타깝고 슬픈 것입니다. 또 무서운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블레셋과 대결해서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법궤로 인해 곤란을 당한 블레셋의 처지를 비웃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그렇게 했으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했을 것이고, 법궤를 잃어버리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이 법궤를 이스라엘 땅으로 되돌렸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법궤를 받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법궤가 있어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고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법궤는 심판의 도구가 될 뿐입니다.
(적용)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오락거리나 구경거리가 아닙니다. 우리의 호기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쉽게 여기고 가볍게 여길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지으신 분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해결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높고 거룩하고 신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함과 동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마음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마음의 태도가 경외하는 것입니다. 이 태도를 기르는 현장이 바로 예배의 현장입니다.
거룩이란 히브리어 단어 카도쉬는 구분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구분 한다는 의미자체로 성경적인 거룩을 온전히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거룩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을 거룩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거룩한 분으로 인정하고 경외한다면 하나님께 전심을 다해 영광을 돌려드려야 합니다.
예배의 자리에서 모든 예배의 요소마다 소홀하지 않고 전심으로 하나님께 예배해야 합니다. 우리의 찬양, 기도가 하나님께 올려드릴 만한 것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인정하는 것은 예배의 자리에서 시작해서 삶의 현장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예배가 참 부족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때론 피곤해서 때론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지 않아서 때론 개인적인 일이 있고 사정이 생각나서 마음이 흐트러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 보다는 개인의 삶을 중시하는 죄인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우리의 흠 있는 예배는 영원한 제사를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예배가 되어 하나님 앞에 상달됩니다. 감히 우리의 부족한 예배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할 수 없지만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흠없는 제사로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 믿음을 가지고 나갈 때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완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믿음이 있기에 예배의 자리에서 나의 예배가 형편없다고 낙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고군부투하며 하나님 앞에 치열하게 예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을 침범하지 않도록 하나님을 힘써 경외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은 스스로의 거룩함을 보존하신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교훈은 하나님은 스스로의 거룩함을 보존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거룩함을 보존하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그 거룩함을 반영해서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룩한 제물이 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온전하게 되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지 않으시다면 우리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이 거룩함은 반드시 구원과 연결되어 있지만 구원 사역 이전에 하나님은 그분 스스로가 거룩하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법궤를 구경거리로 삼은 자들을 치신 후에 그제서야 백성들은 깨닫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무게감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이 법궤를 어떻게 보전해야 할지 고민하게 됩니다. 20절 하반절에 보면 그를 우리에게서 누구에게로 올라가시게 할까 라고 말합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이 법궤를 좀 더 잘 보관할 수 있는 곳에서 보관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은 블레셋이 도시에서 도시로 법궤를 옮긴 것을 연상시키지만 하나님의 거룩함을 깨달았다는 측면에서 그 맥락은 약간 다릅니다. 이스라엘은 70명이 살육당한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기고 그분의 거룩함을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기럇여아림 주민들에게 전령을 보냅니다. 그리고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가져 왔으니 그것을 기럇여아림으로 가져가달라고 요청합니다. 기럇여아림은 과거에 기브온 족속이 살던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속이고 이스라엘과 화친을 맺어서 이스라엘 공동체에 편입된 사람들입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기럇여아림 사람들에게 이것을 부탁한 것은 그 편입한 것에 대해 은혜를 갚으라고 요청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기럇여아림 사람들은 여기에 화답하여 법궤를 가져갑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정통 이스라엘인인 벧세메스에서는 법궤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나갔는데 나중에 이스라엘로 편입된 기럇여아림 사람들은 법궤로 인해 죽지 않습니다. 출신이나 민족과 상관 없이 하나님은 그분을 경외하고 그분의 거룩함을 아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기럇여아림 사람들은 법궤를 어떻게 대했습니까? 아주 조심스럽고 거룩하게 대했습니다. 7장 1절을 보시면 우선 법궤를 산으로 옮겼습니다. 아무나 접근하지 못한 일차적인 조치입니다. 그리고 아비나답이라는 사람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도록 했습니다. 법궤에 아무나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2차적인 조치입니다. 이 엘리아살은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과 이름이 유사합니다. 심지어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의 장인어른 이름이 암미나답인데 오늘 본문에 나온 엘리아살의 아버지 이름이 아비나답입니다. 그러니까 기럇여아림에서 법궤를 담당한 집안의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이 먼 옛날 출애굽 시절 최초의 제사장 혈통과 이름이 비슷한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기럇여아림의 거주하던 아비나답과 엘리아살이 제사장 혈통이라고 추측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법궤를 보존함에 있어서 최선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혈통과 이름이 비슷한 사람 집에 법궤를 맡길 정도로 그들은 법궤를 대함에 있어서 그 태도가 무거웠고 하나님의 경외하며 그 거룩함을 인정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모든 사건을 사용하셔서 타락한 이스라엘 가운데 계시지만 그 거룩함이 절대 상실되지 아니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그분의 백성의 정체성과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거룩함을 손해 보지 않으시고 거룩함을 훼손당하도록 가만히 계시지 않으십니다. 이 법궤는 기럇여아림에 들어가서 20년의 오랜 세월을 보냅니다. 성막도 없고 엘리 혈통의 제사장도 없었지만 하나님은 그래도 기럇여아림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셨습니다.
(적용) 하나님께서는 거룩함을 상실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높이며 예배하며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임을 인정합니다. 또 하나님의 명령대로 하나님도 거룩하니 우리도 거룩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닮은 하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때 세상 사람들은 복음을 모르는 이들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로 물든 세상 가운데 거룩함을 유지합니다. 늘 죄와 싸우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며 거룩함을 보여주고 우리를 통해서 거룩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것을 통하여 세상을 거룩하게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을 닮을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 흠 없는 어린양 되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거룩함을 침범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거룩함을 보존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거룩함을 침범하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보시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경외하고 그분이 거룩함을 상실할 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을 닮아 타락한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고 이 세상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맛보도록 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가는 곳을 거룩하게 변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거룩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하루 보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