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서 승리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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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 views하나님의 능력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패해야 하나님이 승리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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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쟁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 사람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치고 블레셋과 싸웠지만
4천명의 전사자와 함께 쓰라린 패배를 맛봅니다.
하지만 이미 그들은 수 많은 전쟁을 치르며 승리했던 영광의 순간들을 조상들로부터 전해 들어왔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의 전쟁들 그리고 사사 시대를 지나며 외세의 정복당하고 억압받았지만 마침내 다시 회복했던 수많은 역전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그들이었습니다.
주눅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전쟁의 승리를 이끌던 기억속의 하나님, 언약궤를 다시 전쟁터에 가지고 와서 최종승리를 도모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궤를 그들 가운데 두고 치른 두번째 전쟁에서 더 큰 패배 3만며이 죽는 더 참혹한 패배를 경험하게 됩니다.
종국에는 이로인해 언약궤까지 이방인의 손에 빼앗기는 완전한 패배를 당합니다. 이보다 더 완전한 패배는 있을 수 없습니다.
- Pause -
서론
이스라엘은 참 전쟁이 많은 나라였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의 전쟁사는 출애굽이후 그리고 가나안 땅에 도착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전쟁을 하려고 세워진 나라라는 착각이 들정도입니다. 지금도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뗄래야 뗄 수 없는 전쟁, 이 전쟁의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전쟁들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시작하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진행되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는 전쟁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전쟁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의 전쟁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여호수아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고 이스라엘은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모세,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과 여호수와의 많은 대화들이 전쟁의 기록속에 함께 등장합니다.
그들이 시작한 전쟁에 여호와 하나님이 참여해서 도와준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시작한 전쟁에 이스라엘 백성이 참여해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싸울 수 있는 영광을 누린것이다.
그런데.
여호와의 전쟁이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들은 이런 생각도 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전능한 신에게 전쟁이 왜 필요해? 굳이 전쟁을 해야하나?
맞습니다.
만약 전쟁의 목적이 전쟁을 통해서 땅을 얻는 것이고 전쟁을 통해서 상대를 진멸시키는 것이 목적이라면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전쟁이라는 번거롭고 귀찮기만한 과정은 필요가 없을것입니다.
가나안 전쟁역시 그 땅을 빼앗는 것 자체가 목적이고 전리품을 얻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다면 하나님께서 전쟁을 치르실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전쟁을 통해서 얻으시려고 했던 것은 땅도 전리품도 아니고 당신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는 이스라엘을 얻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전쟁의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주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신의 백성을 얻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전쟁들을 모든 과정을 통해 빚어질 당신의 백성을 보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전쟁의 승리는 땅을 얻는것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땅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전쟁의 승리는 이방민족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느끼는 두려움을 보며 즐거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들이 두려워하든 두려워 하지 않든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 홀로 유일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전쟁의 승리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때 얻어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신뢰할 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순종하며 계명을 지킬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사랑할 때 얻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바로 하나님의 창세전에 작정하시고 예정하신 당신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참 백성이 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백성이 되는것 이기 때문입니다.
Leviticus 26:12 (NKRV)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 바로 여기 앉아있는 우리를 당신의 뜻대로 빚어가시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pause-
가나안 정복전쟁 하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전쟁의 꽃, 전쟁의 교과서 여리고 전쟁 아닐까요?
여리고 전쟁과 그 뒤를 이은 아이성 전투도 이 맥락에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여리고성 함락과 같은 엄청난 승리에 한 때 도취되어서 자신들의 전쟁이라 착각하고 전쟁을 주도하려고 할 때면 그들은 어김없이 참혹한 패배를 맛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전쟁이 누구의 전쟁인지 고통가운데 다시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여리고의 엄청난 승리를 만끽하며 자신감이 충천해서 치른 작은 아이성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참혹한 패배를 맛보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전쟁은 패배한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패했지만 하나님의 전쟁은 패하지않은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전쟁을 통해 하나님앞에 교만해지던 이스라엘을 돌이켰기 때문입니다.
자기 백성을 얻으시는 것이 목적인 하나님의 전쟁에서 오히려 여리고성의 승리 이후가 패배의 위험이 높았던 순간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치른 전쟁의 이유도 주변국의 침략이나 국제 정세의 흐름이 아니고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 삼으시고 자기 백성으로 빚어가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있습니다.
전쟁의 배경, 전쟁의 이유, 전쟁의 맥락이 다른 무엇이 아닌 하나님의 뜻과 사랑안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각자의 삶 속에서 치르고 있는 전쟁들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을까요?
그 전쟁은 왜 허락되었을까요? 그 전쟁의 끝에 얻어질 승리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인가요? 여러분의 전쟁인가요?
본론
그런데 오늘 본문에 소개되고 있는 전쟁이야기는 여호수아서에 기록된 전쟁들과 사뭇 다른 느낌을 줍니다.
이제 1절부터 오늘의 전쟁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 Samuel 4:1 (NKRV)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에 진 쳤더니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싸우려고 나갔다고 이야기 합니다.
아이들 싸움도 아니고 두 나라가 싸우는 전쟁을 묘사하는 본문인데 전쟁의 이유도 배경도 맥락도 없습니다.
조금전 함께 생각해보았던 이스라엘의 수많은 전쟁 아니 하나님의 전쟁과 비교해보면 본문의 전쟁은 하나님의 말씀도, 뜻도, 방법도 이스라엘 백성의 질문도 전혀 소개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본문을 기록한 성경의 저자는 이 전쟁을 하나님의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이스라엘의 전쟁임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과는 우리 모두 본문에서 보았듯이 4천명의 죽음과 함께 이스라엘의 패배입니다.
하지만 수많은 전쟁을 치러왔던 이들은 패배에 망연자실하지 않고 신속하게 대처를 합니다.
3절말씀을 보면 어찌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패하게 하였나? 라고 말하며 언약궤를 가져와서 이 전쟁을 승리하자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생각해 낸것은
회개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기도가 아닌 언약궤를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심을 의미하는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져오기로 결정하고 가져옵니다.
언약궤를 가져온다는 생각 얼핏보면 믿음의 생각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언약궤를 가져오는 것이 그들의 신앙고백이고 믿음이었다면 왜 처음부터 언약궤를 앞세우고 전쟁에 임하지 않았을까요?
언약궤를 옮겨오는 결정을 할 때에도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는 모습도 보이지 않을까요?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자기들 마음대로 자기들의 전쟁을 위해 서슴없이 가져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에게 언약궤는 더이상 이스라엘 백성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라는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그저 승리를 위한 도구처럼 되어버린것입니다.
어찌하여 라는 질문이 자신들을 돌아보는 질문이 되었다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들이 역사속에서 경험했던 패배의 원인이 불순종과 교만에 있었음을 기억하고 자신들의 모습도 깨달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레위기와 신명기에 기록된것 처럼 전쟁을 치르는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경고를 받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배제한 교만한 백성이 치르는 전쟁에 주신 경고의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를 치리니 너희가 너희의 대적에게 패할 것이요 너희를 미워하는 자가 너희를 다스릴 것이며 너희는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리라
여호와께서 네 적군 앞에서 너를 패하게 하시리니 네가 그들을 치러 한 길로 나가서 그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할 것이며 네가 또 땅의 모든 나라 중에 흩어지고
네 시체가 공중의 모든 새와 땅의 짐승들의 밥이 될 것이나 그것들을 쫓아줄 자가 없을 것이며
여호와께서 애굽의 종기와 치질과 괴혈병과 피부병으로 너를 치시리니 네가 치유 받지 못할 것이며
여호와께서 또 너를 미치는 것과 눈 머는 것과 정신병으로 치시리니
맹인이 어두운 데에서 더듬는 것과 같이 네가 백주에도 더듬고 네 길이 형통하지 못하여 항상 압제와 노략을 당할 뿐이리니 너를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며
물론 이 경고의 말씀도 하나님의 사랑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 이들은 옛적 조상들이 듣고 경험했던 하나님의 경고를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어찌하여 라는 질문은 자신들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는 모습으로 이어지지 않고
언약궤를 승리의 도구 삼아 자기들만의 전쟁을 이기려는 의지로 이어집니다. 원망의 목소리로 들립니다.
그들에게 필요했던것은 그들이 의지하고 싶었던 것은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자기의 전쟁에서 자기의 승리를 얻게 해줄 하나님의 능력일 뿐이었습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고 마음의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 이런 이스라엘의 중심을 아십니다.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빚어가시기 위해서는 이 전쟁의 승리를 허락할 수 없으셨습니다.
요한복음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한 수많은 사람들이 또 다른 기적을 찾아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마음의 중심을 아시고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시고 아십니다.
저는 아이가 셋입니다.
저희 아이들도 어느덧 중고생이 되었고 막내도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습니다. 가끔 아이들로부터 먼저 카톡이 옵니다. 왠일이지? 반가움에 놀라서 메세지를 확인합니다. 메세지를 확인하면서 이전에 나누었던 대화들도 한번 쭉 살펴봅니다. 그리고 알게됩니다. 아이들이 용돈이 필요한 나이가 되었다는걸.
얼마 줄수 있어? 얼마줄 수 있어? 얼마 줄수 있어? 물론 아이들이 필요한 용돈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지만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 언약궤 문제를 2천년이 훨씬 지난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 보지 말고 블레셋과 전쟁에서 패배한 그 현장 그자리에 함께 들어가서 생각해보면 좀더 배울것이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4천명이 죽었습니다. 전쟁이 끝난것이 아닙니다. 위기의 상황입니다.
그들이 승리를 위해 시도해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과거의 성공비법을 다시 사용하는 것이었을 겁니다.
언약궤는 가나안 땅으로 진입하던 그 옛날부터 늘 이스라엘을 앞서갔고 여리고 성을 돌 때도 앞서 갔습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이고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언약궤가 그들 가운데 있으면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있는것과 같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블레셋이 하나님을 해할 수 없다는 믿음은 그들 안에 있는 언약궤를 해할 수 없다는 믿음을 갖게 했습니다.
블레셋이 언약궤를 해 할 수 없다면 이스라엘도 해 할 수 없다는 믿음으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이 믿음이 그렇게 잘못되었다고 보여지지 않습니다. 충분히 믿음의 행동으로 보여집니다.
하지만 4장1절을 기억하면 왜 이 모든 상황이 믿음의 방식이라고 보기 어려운지 알 수 있습니다.
전쟁의 시작을 결정하는 순간에 하나님이 배제되었기 때문입니다.
한가지 비슷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저희 아들은 자전거나 컴퓨터 보다 옷과 신발을 더 좋아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자전거나 컴퓨터가 훨씬 더 좋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들이 옷이나 신발을 구입할때면 늘 필요이상의 돈을 쓰는것 같아 불편함을 느낍니다. 하지만 나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고 멋있다고 말해줍니다. 그런데 어느날 카톡메세지가 날아옵니다.
원래 30만원이 넘는 유명브랜드 운동화가 있는데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아 사고 싶어도 사기 힘든 신발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신발이 할인을 해서 25만원정도에 판매가 되고 있는데 구입 신청자중에 자기가 당첨이 되었고 그 신발을 싸게 살 수 있어 너무 기쁘다는 메세지였습니다. 메세지가 여기에서 끝났으면 다행인데 아들의 가장 친한 친구에게 생일 선물로 주겠다고 약속을 했답니다. 그래서 그런데 아빠가 입금을 대신해줄 수 있냐고 물어보는 메세지 였습니다.
부모 입장이라면 이 상황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순서가 잘못된것이죠.
먼저 저에게 사줄 수 있는지를 물어보고 신청을하고 선물하는것이 바른순서 아닐까요? 그리고 그것이 아빠를 인정하는 모습아닐까요?
신발값을 입금해주라고 요구하는 아들의 모습은 전쟁터에 언약궤를 갖다놓고 이 전쟁을 해결해줄 수 없냐고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과 닮아있습니다.
하나님을 구하는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을 컨트롤 하려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용하려는 모습입니다. 결정은 내가 하고 해결은 하나님이 하라고 종을 부리는 듯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인지 하나님을 도구로 부리는 것인지의 차이는 바로 이 일의 순서가 결정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마음이 있느냐의 문제인것입니다.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셨던것 처럼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의 고백이 중요한것입니다.
-pause-
7-8절을 보겠습니다.
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여 이르되 신이 진영에 이르렀도다 하고 또 이르되 우리에게 화로다 전날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
언약궤는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블레셋 사람에게도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었고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이었으며 모두를 떨게 하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언약궤가 들어올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 성이 무너지던 때를 생각하며 그 때와 같이 큰 소리를 지릅니다. 땅이 울릴정도의 담대하고 확신에 찬 소리였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실제로 공포에 떨었습니다. 두려워 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도 이스라엘 백성도 모두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언약궤의 의미, 하나님의 능력 잘 알고 믿고있었습니다.
그리고 블레셋 사람도 이스라엘 백성도 선택과 결정의 순간에 그 하나님을 배제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위한 이 전쟁을 도우실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궤마저 뻬앗기는 수치를 당하고 맙니다.
순간순간 우리를 격동하는 감정에 어떤 반응을 할것인지 우리는 선택해야합니다.
우리의 생계를 위협하는 환경에 무엇을 더 의지할지 선택해야합니다.
낙심케하는 상황이 오랫동안 지속될때 우리는 선하신 하나님을 신뢰할지 선택해야합니다.
이 모든 선택 가운데 선하신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 주께 피하는 자에게 벌을 내리지 않으시고 날개아래 품어주시는 하나님을 인정해야합니다.
그분을 배제하면 안됩니다.
참으로 이스라엘은 전쟁과 같은 큰 문제에도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배제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거룩한 여호와의 언약궤에 가장 가까이 머물며 지내는 제사장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를 위해 가져온 제물들을 탈취하고 탐닉했으며 회막문에서 일하던 여인들과 동침하는 음란함을 저질렀습니다.
그들의 아버지 엘리는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반복해서 부르실때 하나님이 부르시는 일임을 깨닫지 못해 세번째에야 깨닫고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임을 알려주는 영적으로 무디어진 모습을 보였습니다.
영적인 리더들도 나라를 이끌어가던 지도자들도 하나님을 모르며 하나님을 배제하는 사사시대의 타락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전쟁을 통해 보여지는 이스라엘의 못브은 4장1절의 전반부 다음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
1 Samuel 3:19–21 (NKRV)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다시 나타나시되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니라
타락하고 어두운 이스라엘의 모습, 여호와의 말씀마저 희귀해진 소망 없어 보이는 이스라엘에 하나님은 다시 사무엘을 세우십니다.
전쟁은 패배하고 영적 리더라던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었습니다. 언약궤는 빼앗겼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제 그만 멈출것 같은 절망적인 시간에 하나님은 사무엘을 세우셨습니다.
여호와를 알지도 못하면서 성전에서 잠들던 사무엘, 여호와의 말씀도 들어보지 못한 사무엘에게 하나님은 다시 찾아오셔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해 말씀하시기 시작하십니다. 그의 입술을 통해 하신 말씀을 다 이루십니다.
우리안의 엘리, 우리 안의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고 내가 부적처럼 의지하던 언약궤도 빼앗길 수 있습니다.
내가 죽을 힘을 다해 치르는 수많은 전쟁도 모두 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이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의 승리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당신의 자녀 삼으시고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의 이유를 패배의 이유를 다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삶의 어떤 영역에서 여전히 하나님을 밀어내고 있으며 하나님 없이 행복한 삶을 살려는 뿌리깊은 죄성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숨만 쉴수 있어도 하나님을 잊어버릴 수 있는 존재입니다.
설사 징계를 받아 마땅하고 패배를 경험하는 것이 마땅한 우리의 삶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전쟁은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를 향한 그 사랑은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 사무엘을 세워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우리의 삶에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패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죄보다 더 위대한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전쟁에 능하신 분이십니다. 마침내 승리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빚어가시고 자녀삼으시고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주시는 분이십니다.
도데체 왜? 왜 나에게? 라는 물음표와 함께 전쟁의 패배를 겪고 계신분이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나의 마음을 살피십시요.
내가원하는 승리가 포기가 안되어 패배의 원인을 분석하려 애쓰지 말고 우리 하나님 앞에 엎드리십시요.
그분의 말씀을 들으십시요. 그 뜻에 순종하십시요.
하나님이 이루실 그 승리를 마음으로 꿈 꾸십시요.
하나님께서는 전쟁의 패배를 통해 우리를 벌하시고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라 징계를 통해서라도 우리를 아버지 품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는 전쟁에서 패하여 고통스럽고 쓰라릴지라도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말씀으로 찾아오셔서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빚어가심을 믿으십시요.
하나님의 전쟁은 결코 패하는 법이 없으니 그분은 우리를 자녀 삼아주시고 백성삼아주셔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실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의 패배가 승리로 변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잠언 말씀으로 오늘 준비한 말씀을 맺겠습니다.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말씀을 기억하며 찬양하겠습니다.
[ 청중주해]
잦은 부부싸움 (지병이 있는 아내가 자기 관리를 못함 이로 인해 남편의 분노)
고등부때 교회 임원이었던 분이 수십년간 교회를 떠났다가 교회에 다시 나온 첫 날.
부부갈등과 교회 상처로 교회 안에 자리를 잡지 못하고 갈등중인 부부
이혼 위기의 여자 성도 와 두 자녀
자녀 문제와 부부갈등을 가진 초신자
해직, 사고, 건강 문제, 경제 문제를 안고 있는 부부
부모님과의 극심한 갈등과 상처로 폭발한 공황장애 집사님
교회 사역으로 지쳐가는 청년부 리더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