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함이 전능함을 만날 때(요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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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2년 4월 24일 주일
제목 : 무능함이 전능함을 만날 때
본문 : 요한복음 15장 1-5절 *신
[선물나눔]
반갑습니다. 저번 주 나의 짝궁을 가장 잘 알아 정답을 맞춘 네 명이 누구였을까요? 상품을 전달하는 시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달고나 선물)
[도입]
한 주간 여러분들은 어떤 시간들을 보내셨나요? 저는 한 주간 정말 바쁜 시간을, 또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간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하나뿐인 제 딸이 이 세상에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아엘이 사진 / 두두등장)
그런데, 왜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간이었을 보냈는가?
저희는 월요일 준비를 마친 후 화요일 입원했습니다. 그렇게 검사를 받는데, 태아의 심박수가 떨어지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급히 수액을 넣으며 회복시켰죠. 그게 끝이 아니었어요. 저녁이 되어선 움직임이 둔해져서 산소를 공급하기도 했고 이래저래 아이를 낳기 전부터 쉽지 않구나를 느꼈습니다.
그렇게 밤에 병원 로비를 걸으며 아내와 이런 대화를 나눴습니다. “차라리 아엘이가 ‘아빠! 나 이제 나갈꺼야! 준비 다 되었어!’ 라고 말해준다면 부모입장에서 얼마나 마음이 편할까?”
코로나라 날짜를 정하고 입원해서 아이를 낳아야 하는 것이 현재 시스템이지만, 사실은 제가 주일에 교회에 와서 이렇게 설교를 하려면, 아엘이는 늦어도 목요일에는 세상에 나와줘야만 했습니다. 어쩌면 아엘이는 아직 나올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제 일정 때문에, 목회자의 자녀라는 이유때문에 서둘러 나와야 하는 것은 아니었나 미안함이 커지는 대화였습니다.
그러다 대화를 이어가길, “하나님도 음성으로 대화할 수 없어 답답하기는 마련인데, 아엘이랑 같다 말할 수 없음은, 한 쪽은 너무너무 무능했고, 한 쪽은 세상 무엇보다 전능했기에” 결코 같다 말할 수 없었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병실로 와서 얼마 지나지 않아 산모에게는 진통이 왔고, 그 밤 저희는 뜬 눈으로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아이의 출산이 임박했을 때쯤 산모는 고통에 울부짖었고, 로비에서 기다려야만 했던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하염없이 무능한 존재구나. 저 고통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구나.”
우리는 한 없이 연약하고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의식에 늘 “나는 할 수 있지.”라 헛된 자신감을 가지고 일을 해결하려고 하지는 않으십니까?
[하나님=농부 / 나=포도나무]
오늘 본문 말씀인 15장의 1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사랑의 제자라 불린, 예수님만을 바라본 사도 요한은 본인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여러분, 포도나무는 포도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이 포도나무는 스스로 포도를 맺을 수 없습니다. 나무만 있다하여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심겨지기 위해서는 토지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영양분이 있는 흙이 필요합니다. 또 자라게 할 물이, 햇빛이 필요합니다. 벌레가 생겨 괴로워 할 땐 이를 해결해줄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즉 포도나무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 존재에 빗대어 사도 요한은 ‘자신은 포도나무라’ 말합니다.
더 나아가 사도 요한은 자신의 아버지인 하나님을 향해 “농부”라 칭합니다. 농부는 자신의 작물이 잘 자라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땅을 다집니다. 그리고 심고 영양분의 흙을 부어줍니다. 물을 줌으로 잘 자라도록, 햇빛이 잘 들 수 있도록 주변을 다지기도 하구요. 벌레가 생기면 농약을 치거나 또는 이를 해결 할 수 있도록 다른 방법을 모색하곤 합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 나무가 최상의 열매를 맺도록 도움의 손길을 줍니다. 이런 모습을 사도 요한은 하나님 아버지 모습을 빗대어 설명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해나가고 있습니까? 포도나무의 모습입니까? 아니면 농부의 모습입니까?
저는 이번 개척을 준비하며 ‘미디어’에 정말 많은 시간을 투자했습니다. 온라인 예배가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또 현장에서 자막과 준비가 완벽하게 준비될 수 있도록 큰 노력을 해왔습니다. 어느정도였냐면 토요일에, 아니 주일로 넘어간 새벽에 퇴근을 해서 집에 돌아가 옷 갈아입고 다시 나와서 준비를 할 정도로 마음의 불안함과 완벽함에 대한 절실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분명 퇴근 전에는 됐던 시스템이, 옷만 갈아입고 다시 돌아왔을 때는 되지 않는 등 참으로 처참한 상황을 경험했습니다. 그렇게 길고 길었던 하루를 끝마치고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실패의 원인은 나에게 있다. 내 힘으로 이 모든 것을 해결하고자 했음이 모든 것의 실패 원인이다.”
지난 주일 저는 포도나무임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지난 주일의 조광원이라는 사람은 포도나무가 아니라 농부라 착각했습니다. 영양분을 공급받았고, 물을 마시고 햇빛을 받으며 저 스스로가 준비된 공간에서 포도나무가 아닌 농부라 착각을 해버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청소년부 여러분. 여러분은 농부입니까? 포도나무입니까? 명심하십시오. 우리는 결코 농부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포도나무이며,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포도나무라는 사실을 결코 부끄러워 하지 마십시오.
[포도나무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주님 안에 온전히 거하여야 한다.]
포도나무 되는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먼저, 우리는 주님 안에 온전히 거해야 합니다. 거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입니까? “거한다”의 의미를 원어로 살펴볼 때, 우리는 이런 의미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장막을 치다. 텐트를 치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즉 우리가 주님 안에 온전히 거한다는 것은 “주님의 울타리 안에 지내는 것”을 “결코 다른 곳을 넘어감이 아닌 그곳에 자리를 잡아 영원히 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평소 전도를 하다보면 참으로 많이 듣는 답변이 있습니다. “나도 한 때 교회 다녔어.” 이런 대답을 하는 자들에게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야지.”라 전한다면 “나도 주님 안에 거했었고, 열심히 사역도 하고 그랬어.”라 대답하곤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는 여러분들이 생각해도 건강한 신앙생활이 아님을 알 것입니다. 주님 안에 거함은 결코 한 때란 없습니다.
여행을 좋아하십니까? 저는 여행을 정말 좋아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주기적으로 여행을 가야 회복할 수 있고 새 힘을 얻는다 생각하곤 합니다. 특히 제주도를 정말 좋아하고, 정말 자주 가는데 제가 제주도 숙소를 구할 때는 저만의 기준이 있습니다. 비싼 곳보다는 제주스러운 숙소를 구해야 한다. 흔히 인스타 감성이라 하는 숙소보다는 제주만 나타낼 수 있는 숙소를 구하는 편입니다. 그렇게 심사숙고하여 숙소를 정해 예약을 합니다. 하지만 이 숙소에서 영원히 머물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숙소는 여행 중 잠깐 머무는 곳에 불과합니다.
나의 집은 어떻습니까? 인스타 감성의 집은 아니지만, 내 모든 만족을 채워주는 곳은 아니지만, 나의 물건과 나의 삶이 담겨져 있는 곳 아닙니까? 잠깐 머물지 않습니다. 영원히 머무는 곳이 우리의 집입니다.
주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여행 중 숙소를 구함이 아니라, 내가 영원히 머무는 집을 말합니다. 정착하는 것. 그곳에 거주하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시편 23편을 통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 주께서 내 원수의 못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다윗은 자신의 목자되시는, 자신의 농부되시는 주 하나님만을 온전히 의지하며 그 안에 거하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사랑하는 청소년부 여러분. 다윗의 고백으로 남겨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길 소망합니다. 우리 이 시간 이렇게 고백해봅시다. “주님 / 내가 여호와의 집에 / 영원히 거하겠습니다.”
[포도나무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회개할 수 있어야 한다.]
포도나무가 되는 우리는 또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는 회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 안에 거함은 압니다. 하지만, 우리는 연약하기에 실수합니다. 죄를 범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곤 합니다. 그런데 이 실수가, 이 죄가 하나님 아버지 마음에 상처를 입히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하나님 아버지 사이의 거리를 멀어지게 합니다.
회개가 없이 죄가 이어지고 횟수가 쌓일 수록 우리는 점점 죄에 무감각해집니다. “세상 사람 어느 누구 하나 죄 없는 사람 없지 않습니까? 나도, 크리스천도, 죄 지을 수 있지 않습니까?” 오히려 큰 소리 치게 됩니다.
이찬수 목사님의 ‘세상에서 믿는 자로 산다는 것’을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많은 크리스천조차도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고 하면서 자기의 부정을 합리화한다. 이것은 자기를 합리화하는 아주 비겁한 일이다. 왜 털면 다 먼지가 나야 하는가? 우리는 그렇게 나약한 속담이나 되뇌는 크리스천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 저는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으로 살기 원합니다.’라는 각오로 달려가야 하지 않겠는가?”
세상에 먼지 하나 안 나는 사람 없지 않는가 라며 우리를 위로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저번 주 말씀 드린 것처럼 아무 문제 없는 척 넘어가지 마십시오. 넘어지지 않은 척 하지 마십시오. 지금 현 상태를 가지고 시합에 다시 뛰어들고자 하지 마십시오. 넘어졌을 땐, 쓰러졌을 땐, 우리의 첫 걸음은 하나님을 향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향해야 합니다. 회개해야만 합니다.
닉 부이치치. 알고 계십니까? 그에게는 아주 짧디 짧은 왼쪽 발만 있을 뿐 어느 곳 하나 성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 짠했습니다. 불쌍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연설을 듣다보면 저의 생각이 점점 변해갑니다. 짠합니다. 불쌍합니다. 누가요? 제가요. 그의 설교를, 그의 연설을 듣다보면 내가 짠해지고, 내가 불쌍해집니다. 사지 멀쩡한 내가 오히려 불쌍해지고 짠해진다는 것입니다. 그가 나보다 열심히 살기 때문에요? 그가 나보다 더 유명인이기 때문에요? 아니요. 그의 삶에는 온전히 주님 안에 거하는, 정말 포도나무와 같은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요. 그렇게 살아가지 못하는 나의 모습이 이제는 짠해지고 불쌍해집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면 행복해집니다.” 여러분. 포도나무가 백날 발버둥을 쳐도 사과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사람처럼 움직이고 말하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포도나무는 포도 열매만을 맺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포도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농부가 필요합니다. 그 농부의 역할을 하나님께서 감당해주고 계십니다. 왜? 우리가 열매 맺도록 하기 위해서.
바라옵기로는 우리가 죄를 범할 때, 십자가를 향해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회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괜찮은 척은 결코 오래 못갑니다. 넘어졌으나 다치지 않은 척은 결국 상처가 덧나 감출 수 없게 됩니다. 포도나무로 살아가는 우리는 회개하며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말씀하시는 주님 앞에 나아가 거해야만 합니다.
[결론]
말씀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청소년부 여러분. 우리는 결코 스스로 대단한 존재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정말 나약한 존재입니다.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포도나무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농부가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농부 옆에 우리는 붙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 안에 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죄를 범했을 때 우리는 척, 척 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 앞에 되돌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곳에 숙소를 구해 돌아다니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더 멀어지기 전에 우리는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마음의 상처를 주었다 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화나있을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벌써 우리의 실수를 잊어버리셨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루 빨리 주님 품으로 되돌아오길 기다리고 계십니다. 왜요? 주님이 우릴 사랑하시기 때문이에요.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망치 소리가 울려 퍼질 때, 그의 살갖이 찢어져 나갈 때, 피가 뚝뚝 떨어져 나갈 때 예수님은 아무런 저항 하지 않으셨어요. 그가 무능해서요? 그가 나약해서요? 아니요. 그는 전지전능했어요. 무능한 포도나무되는 우리와 다르게 그는 농부처럼, 목자처럼 모든 것을 인도하고 도우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셨어요. 하지만 그는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으셨어요. 왜, 왜 그는 아무런 저항 없이 그 고통을 참으셨습니까? 이유는 오직 하나에요. “우리를 사랑하셨으니까.”
포도나무는 스스로 열매 맺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행할 때 끝내 우리는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삶이 결코 우리의 삶이 되지 않길 소망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어 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의 끝 없는 사랑을 생각하며 회개하며 그의 품 안에 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시간 우리 함께 찬양하며 우리의 믿음을 결단하며 나아가길 소망합니다.
[합심기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