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 한 것 같아 보여도

사도신경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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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활에 대한 도전 2. 부활의 의미 3. 내 삶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4. 나의 실패는 위대한 실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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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정말 재미있게 읽었던 만화책이 있었어요. 이 것을 보고 괜히 내가 뭐라도 된 것처럼 주위를 관찰하고 살펴보고 했었어요. 그러면서 뭔가 특이한 것 혹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되면 마치 엄청난 것을 찾은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었는데요.
이것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왜 저 사람은 저렇게 이야기할까? 이 사건은 왜 이렇게 진행이 되었을까? 등등 혼자 많은 상상을 했었기도 했어요. 어린 휘석이의 관찰력 스킬을 올려주었던 만화책이었어요.
이 만화책의 주인공은 달라요. 그런데 정말 비슷한 부분이 있어요. 이 두 주인공이 가는 곳마다 문제가 생긴다는거에요.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될거 같은데 꼭 어디를 가고 가면 무슨 일이 발생을 하고 이 사람들은 그것을 해결해요.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이런 멘트를 해요.
“범인은 이 안에 있어!”
이 멘트 다 들어봤죠? 바로 소년탐정 김전일과 코난이죠. 이 두 사람이 가는 곳마다 문제가 생기고 사람이 다치거나 죽어나요. 그리고 일이 터지면 각자 관찰하고 증거를 수집해서 범인을 찾아내요.
그 전까지 범인들은 시치미를 뚝 떼고 가만히 있어요. 그리고 다른 사람이 범인일 것이라고 몰아가거나 치밀한 트릭을 통해 용의자 선상에서 벗어나려고 해요. 하지만 결국 잡히죠. 왜냐하면 그 사람이 범인이라고 입증해주는 정확한 증거가 있기 때문이에요.
김전일과 코난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요. 밀실 살인이어도, 알리바이가 아무리 확실해도, 아무리 완벽한 계획이라 해도 허점은 있다는거에요. 즉, 사람이 세운 계획은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이죠.

부활

오늘 우리는 ‘장사 된 지 사흘만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에 대해 살펴볼거에요. 이것이 진짜 일어난 사건이라면 분명한 증거가 있을거에요. 정말 완벽하게 숨이 멎어 죽어버린 인간이 다시 무덤에서 일어났다면 그 증거가 있겠죠.
사실 부활은 쉽게 믿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아무나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에 대한 증거를 찾았어요. 가능한 일일까? 이게 이성적으로 해결이 되는 문제인가?
정말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싸매고 모여 회의도 하고 깊은 묵상을 하고 난 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자신들 나름의 결정을 내려요. 예수님의 탄생 자체가 스캔들이었던 것처럼 죽음 그리고 그 이후의 삶 역시 엄청난 스캔들로 번져나가요.
원래 사람은 말을 하고 그 말을 전하길 좋아하잖아요. 그들은 이 부활에 대한 자신들의 의견을 말해요. 그리고 이 스캔들은 점점 커져가면서 내용들이 정말 많아져요.
여러분 혹시 서프라이즈라는 프로그램 본적 있어요? 거기 보면 진실 혹은 거짓이라는 코너가 있는데요. 부활에 대한 여러 의견들을 여러분에게 소개할건데요. 이것이 진실일지 혹은 거짓일지 함께 판단해보면 좋겠어요.
예수님의 부활은 거짓말이다.
무덤을 막고 있던 그 돌은 우연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옮겨졌다. 그것을 본 제자들이 밤에 몰래 시신을 훔쳐갔다. 그래서 예수님의 시체는 도난 당했다.
이 말이 진실처럼 퍼져나가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럼 그렇지 무슨 놈의 부활이야"라고 생각을 했어요.
여기에 또 다른 이야기가 퍼져나가기 시작해요.
예수님은 기절한거야.
“아니야. 훔쳐가지 않았어! 예수님은 기절한거야!” “십자가에서 너무 아파서 기절하셨는데, 서늘한 동굴 무덤에서 정신을 차린거야.
그럴싸 한 말이죠.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 “오 그럴 수 있는데?” 라고 받아드렸어요.
그랬더니 옆에 있던 사람이 이렇게 말해요.
무덤을 헷갈렸겠지.
“야 그 무덤에 올라갔던 여자들과 제자들이 무덤을 잘못 찾아간거야. 그렇게 슬퍼하고 울었는데 잠이나 제대로 잤겠어? 새벽길에 올라가다가 무덤을 잘못 찾아갔는데 하필 그게 빈 무덤이었던거지.”
무덤이 비었어. 시체가 없어. 그럼 뭐야? 부활했다고 생각했겠지"
옆에 있던 사람은 또 이렇게 말해요.
쟤네 꿈꾸는거야. 환상을 보는거라고.
“예수가 잡혀갈 때 그리고 십자가에 달릴 때 제자들 다 부인하고 도망갔지? 스승을 배신했다는 그 죄책감이 부활이라는 환상으로 이어진거야.”
“사람이 어떻게 살아나?”
다 그럴싸 한 말이죠?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갔다. 기절했다가 다시 깨어났다. 무덤을 잘못 찾았다. 환상이야. 등등 부활을 설명할 수 없고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으니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받아드려질 가능성이 높았어요.
이것은 진실일까요. 아니면 거짓일까요?
그런데 이들의 주장을 하나씩 까보면요. 허점들이 많아요. 마치 김전일과 코난이 증거를 찾고 ‘범인은 이 안에 있어!’라고 외쳤던 것처럼, 그들의 말이 틀리다는 증거가 여기저기 넘쳐나요.
먼저 부활은 거짓이다. 제자들이 훔쳐간 것이다. 라는 이 말은요.
마태복음 28장에 보면 틀리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어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경비병들에게 돈을 주고 제자들이 훔쳐 갈 수 있으니 철통같이 지키라. 라고 말하거든요.
그리고 예수님이 잡혀갈 때 도망가기 바빴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갈 용기가 있었을까요? 그리고 시신을 훔쳐가면서 왜 시신을 둘러쌓던 세마포와 머리 수건을 벗겨 놓았을까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그 분을 전하는 삶에 목숨을 걸었던 사람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부활을 목격한 후 제자들의 삶은 완전히 바뀌어 버렸어요. 완전한 변화의 삶을 살았어요. 죽을 까 도망갔던 그들이 목숨을 걸고 부활을 전해요.
정말 시체를 훔쳐서 숨겨놓고 부활했다고 거짓말을 했다면요. 혹독한 고문과 핍박을 견딜 수 없었을거에요. 거짓설. 도난설은 틀린 가설이에요. 거짓이에요.
십자가에서 기절하셨다는 기절설은요.
진짜 그럴만 해보이죠.
하지만 성경을 보면 아니 당시 십자가 형을 보면요. 경비병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듯 보이는 사람의 옆구리를 창으로 세차게 찔러요. 그리고 죽었는지 완벽하게 확인을 해요.
요한복음 19장 34절을 보면 옆구리를 찌르자 피와 물이 나왔다는 기록이 있죠.
사람이 완전히 죽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해요. 혈전과 혈청이 분리되어 피와 물처럼 보인 것이죠. 기절했다 살아난거라면, 창으로 찔러 죽은 것을 확인한 병사들이 거짓말을 한 것이겠죠.
그들이 무슨 이유로 이것도 거짓말을 했겠어요. 그리고 그 일을 하던 사람들인데 기절과 죽음을 몰랐을리 없어요. 그래서 이 거짓이에요.
그 다음 무덤을 혼동했다는 혼동설.
예수님의 무덤은 공동묘지가 아닌 한 사람이 구매한 개인 묘지였어요. 그렇기 때문에 다른 동굴 무덤과 헷갈릴 수 없었어요. 잘못 찾을 수 없는 구조에요.
그냥 거기에는 그 무덤만 있어요. 그리고 혼동한 것이라면, 부활하신 주님을 그 앞에서 만난 두 여인과 사람들의 증거를 설명할 길이 없어요. 이것도 거짓이에요.
마지막 예수님에 죽음에 대한 죄책감이 부활이라는 환상으로 이어졌다는 환상설.
한 두명이 말한 것이라면 환상이라 생각할 수 있어요. 하지만 성경은 열두 제자와 오백여 형제 그리고 많은 사람들 앞에 나타나셨다고 말해요. 또한 도마는 예수님의 몸을 만져보기까지 했어요.
수많은 사람들이 한번에 환상에 빠지는 집단 최면은 불가능하죠.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는요. 그 집필시기가 A.D 55년이에요. 예수님의 부활 사건 22년 뒤에 쓰여졌어요. 22년 동안 집단 최면. 환상이 이어졌을까요?
그 환상이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전달되었을까요? 정말 환상이었다면, 이것은 환상이었다! 라는 양심 선언이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이것도 거짓이에요.

다시 살아남의 의미

부활에 대한 수많은 도전들이 있었어요. 이 도전들은 부활을 믿을 수 없기에, 그것을 설명하려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어요. 하지만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부활에 대한 도전은 설명을 넘어서, 부활은 없다로 몰려가기 시작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부활은 불가능하니까요. 그래서 부활 흠집내기로 사람들의 스텐스가 바뀌어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이해하려고 여러 증거를 찾고 증명해내는 것보다 그냥 “없다!”라고 결론을 내려버리면 이제 어떤 말이던 갖다 붙일 수 있거든요. 부활은 없는 것으로 그냥 몰아가면 되거든요. 초대교회 당시 복음을 박해하던 모든 사람들이 가장 싫어했던 것이 부활이에요.
사도들은요.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들이 전한 모든 메시지의 핵심이 바로 부활이에요.
사도들이 그리고 저와 여러분이 전하는 이 부활을 부정하고 무너뜨려야 해요. 그 모든 것을 헛되게 만들어야 해요. 그래야 부활이라는 문제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어요.
더 이상 부활을 설명하려고 이해하려고 시간과 에너지를 쏟지 않아도 돼요. 그리고 부활을 무너뜨리고 헛되게 만들어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한 속죄. 죄 용서가 의미가 없어지거든요.
그래서 세상은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부활을 흔들고 부정하고 없애려고 해요.
부활은 이천년 전의 사건이에요. 그리고 당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사람도 있고 보지 못한 사람도 있어요. 예수님의 부활을 본 사람들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사람들이에요. 눈으로 보고 만졌으니까요.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예수님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어요.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데도 우리는 그 부활을 실제로 믿고 나의 신앙으로 받아드리며 살아가고 있어요.
여러분. 부활이 실제라고 믿도록 만드는 그 믿음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나요? 무엇이 부활 신앙을 갖게 해주었나요?
우리 고린도전서 15장 20절을 볼까요?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그리스도. 메시야가 우리 부활의 보증이 되신다고 분명히 성경은 말하고 있어요. 여기에서 말하는 첫 열매에 우린 집중해야 해요.
예수님의 부활은 안식일 후 첫날에 이루어졌어요. 유월절 후 첫 안식일 다음 날이에요. 이 날은 이스라엘이 맥추절. 첫 이삭을 드리는 날로 보내는 하루에요. 수장절이라고도 하는데요.
첫 곡식을 하나님께 드리는 이 절기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곳간에 추수 열매로 들어가는 것을 상징하는 절기에요. 예수님이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데요.
이것은요. 하나님 나라 곳간의 첫 수확물이 예수님이 되셨다는거에요. 그리고 뒤 이어 우리가 두번째, 세번째 열매가 되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말해요.
저와 여러분이 살아갈 소망. 지금 이 세상에서의 지독한 실패와 고통을 감내하고 버텨낼 수 있는 희망은 무엇인가요?
바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날을 기대하기 때문 아닌가요?
예수님이 첫 열매가 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당당히 얻게 된거에요.
고린도전서 15장 20절은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거에요.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다! 우리의 진짜 삶은 다음 세상에 있다.”
저와 여러분이 그토록 기다리는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것. 하나님과 영원히 행복하게 평생을 살아가는 그 천국에서의 삶. 우리의 진짜 삶은 그곳에서 시작되는거죠.
부활 신앙이 있는 사람은요. 이 땅에서의 암담하고 절망스러운 상황을 견뎌낼 수 있어요. 세상에서 얻어 맞고 쳐박히고 던져지고 넘어져도요. 사람들로 인해 상처 받고 속상하고 울다가도요.
일어나요. 부들부들 다리를 흔들면서도 땅을 집고 일어나요. 나를 향해 뻗어진 예수님의 손을 잡고 일어나요.
부활의 삶을 위해. 그분과 영원히 살아가기 위해 우린 지금 이 땅에서 고난의 삶을 연습하는거에요.
고난이 많은 사람은 소망도 커요. 고난이 끝나면 참은만큼 인내한만큼 기쁘거든요. 버텨낸 내 자신이 대견하고 또 성장했다고 느끼거든요.
우리가 아무런 고난도 없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믿는 것만으로 천국에 갔다면
그것에 대한 감사와 소중함을 절대 절대 느끼지 못했을거에요. 내가 아무 것도 안했는데 너무 당연하게 얻었으니까요.
잘 생각해봐요. 예수님의 그 고난과 십자가로 우리 구원을 얻었어요. 그런데 우리의 삶은요? 구원의 감격을 매일 매일 누리며 ‘아침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나요?’
아니 어쩌면. 불평불만하고 내 삶에 한탄할 때가 많지 않을까 싶어요. 아니 불평불만도 없이 그냥 “휴..”하고 하루를 시작할지도 모르죠. 우리도 예수님을 아직 모르는 사람들처럼 살아갈 때도 있어요.
우린 이렇게 구원받은 것을 잊고 살아갈 때가 더러 있어요. 예수님의 부활 사건 없이도 천국행 티켓이 주어졌다우리는 이 세상을 정말 있는 힘껏 멋대로 마음대로 살아갔을거에요. 어차피 천국 가니까요.

실패한 것 같아 보여도

세상은 우리에게 정말 자연스럽게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잊게 만들어요. 존재를 잊게 만든다는 것의 의미는 우리한테 하나님 믿지 말라고 하는게 아니에요. 오히려 우리가 신앙생활 하도록 내버려둬요.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도록 내버려둬요.
그리고 어느 특정한 순간에 툭 건드려요. 실패를 경험하게 만들어요. 그 실패를 통해 삶에 대한 의심을 하도록 고민에 빠지도록 만들어요. 실패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몰아쳐요.
제가 신대원을 졸업하고 서울에서 사역을 할 때 처음부터 전임 사역을 하지는 않았어요. 파트였는데 저는 준전임 혹은 전임처럼 사역을 했어요. 그 때 저는 일산에 살았고 사역했던 교회는 사당에 있었어요. 매주 오고가는 시간과 기름값이 상당히 부담되었지만 그래도 다녔어요.
저에게 맡겨진 부서 친구들을 만나고 교제하기 위해 부지런히 일산과 서울을 다녔어요. 그렇게 다니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조금씩 생겨났어요. 심방비 지원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재정적인 어려움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고민을 하던 중 파트였으니 평일에 카페에서 알바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어요.
알바몬을 보다가 마침 월화목 마감 알바를 구하는 곳을 발견했어요. 제가 또 나름 카페 알바와 매니저 경력이 꽤 있거든요. 이력서를 냈고 그 곳에서 바로 연락이 왔어요. 수요일 밤 9시에 면접을 보기로 했고, 수요 예배가 끝나자마자 바로 사당에서 일산으로 달려서 면접 장소에 갔어요.
카페 면접을 보러 온 사람이 정장을 입고 있으니까 이 분이 저를 이상하게 생각하신건지, 카페 일과 상관없는 질문을 막 하셨어요.
저에게 뭐하는 사람이냐 묻더라구요. 그래서 고민하다 ‘저는 전도사입니다.’라고 대답을 했어요. 저는 그 때 그분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어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 혹은 교회에서 상처 받은 사람이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저를 바라보더니 “죄송하지만 나이가 너무 많아서 알바생으로 못쓰겠네요. 마감일이 쉽지 않은데 잘 하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그 나이 먹도록 아직도 알바를 구하고 또 전도사면 어떻게 해요? 죄송하지만 돌아가주세요.” 라고 하더라구요.
그 때 제가 33살인가 34살이었거든요? 그리고 저는 마감경력도 있었고 카페에서 일을 이미 4년 반을 했던 상황이었어요. 제 경력을 보고 면접보자고 하셨던건데, ‘전도사'라는 말을 듣자마자 태도가 확 바뀌시더라구요.
쫓겨나다시피 나와 차에 앉았서 집에 돌아가려고 하는데요. 갑자기 너무 서러운거에요.
그 때 아내가 한국에 없었을 때였는데, 집에 돌아가는 차 안에서 그리고 혼자 있는 집에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거에요.
알바를 하려 했던 제 마음의 동기는요.
제가 사고 싶은 무엇인가를 사기 위해서, 저를 위해 쓰려고 했던게 아니었어요. 심방비를 벌기 위해 알바를 하려 했을 뿐인데, 저는 저에게 맡겨진 친구들을 한번이라도, 한명이라도 더 만나고 싶어서 일을 하고 싶었을 뿐이었어요. 맡겨진 친구들이 먹고 싶어하는거 사주고 싶었을 뿐이었어요.
제 마음의 동기 순수하지 않아요? 이런 마음으로 일을 하려고 했을 뿐인데, 돌아왔던 결과는 ‘그 나이 먹고 아직도 전도사를 하면 어떻게 하느냐. 나이가 많은데 왜 알바를 구하냐’라는 말이었어요.
진짜 현타가 왔어요. 저의 의사와 상관없이 눈물이 쏟아지던 그 때 머릿속에 꽂쳤던 단어가 있어요.
“실패" ‘나는 실패자다. 나는 실패한 인생이다.’
그러면서 “하나님 제가 뭘 잘못했죠? 왜 제가 이런 이야기를 들어야 할까요? 도대체 저에게 왜 이러세요?” 라는 원망이 쏟아지더라구요.
세상은 우리에게 이렇게 다가와요. 하나님 믿는거 그냥 두고 봐요. 잘 믿도록 우리를 도와줘요. 그리고 어떤 순간에 마음을 쿡 찔러요.
우리에게서 말씀. 하나님을 빼앗아 가려 해요. 현타 먹고 정신 못차리는 그 순간 무섭게 몰아치기 시작해요.
그리고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요.
예수 잘 믿어봐야 소용 없다.
이천년 전의 사람은 너와 아무 상관 없다.
너를 위해 죽을 사람 없다. 그리고 사람이 어떻게 부활할 수 있냐고
예수 아무리 잘 믿어도 너에게 돌아오는 것은 실패와 조롱 뿐이라고
세상의 목적은 예수님의 부활을 지우는거에요. 그러면서 우리의 시선을 예수님의 부활에서 세상으로 돌려요.
하쿠나 마타타 “아무 걱정하지마"
너가 예수를 믿으니까 걱정거리가 생기는거야. 꼭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마음이 드니까 자꾸 실패하는거야.
주위를 둘러봐 놀고 즐길게 얼마나 많아! 너에겐 이 땅이 전부야. 죽으면 사후 세계가 아니있어. 그냥 그대로 끝이야. 그러니까 살아있을 때 먹고 마시고 달려.
예수만 믿지 않으면 ‘아무 걱정 하지 않고 즐기면서 살 수 있어.’
케세라세라. “세상에서 뭐든지 될 수 있고 가질 수 있어"
모든 것은 너의 손과 선택에 달렸어. 한번 사는 인생 즐겁게 하고 싶은데로 하고 살아
세상은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해요. 무조건 아니라고 그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이라 이야기해요. 지난주 빌라도처럼 세상은 예수님이라는 존재를 부인해요.
저와 여러분은 그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에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부활 신앙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에요.
예수님을 부인한 세상이 저와 여러분을 가만두지 않을거에요. 저와 여러분도 세상이 부인할거에요.
실패한 인생처럼 낙인찍고, 실패감에 쌓여 살아가도록 만들거에요. 그러면서 실패한 이유. 우리의 마음이 불편한 이유가 다 예수님 때문이라고 말할거에요.
사실 우리는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존재에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라는 선택의 자유 그 권리를 주셨어요. 그 자유의지는요. 성공만을 보장해주지 않아요. 성공 할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어요. 인간은 언제든지 실패할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어요.
실패. 자기 부인이라는 그 감정은요. 예수님을 믿고 부활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에요. 자유의지를 잘못된 방향으로 사용하게 만드는, 유도하는 세상에서 시작된 것이에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실패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역하고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것이었어요.
그 결과 우리는 나의 생각이나 의지에 상관없이, 상황과 기회만 주어지면 언제든 실패하고 배신하고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어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느끼는 그 실패 혹은 어떠한 자기 불안적 감정은 세상이 주는 가짜 감정이라는거죠. 여러분을 속이고 넘어뜨려서 부활신앙을 빼앗아 가려는 술수라는거죠.
제가 카페 면접을 보고 한참을 우울한 감정에 있다가요. 하나님 앞에 실컷 원망을 쏟아내고 나서요. 뭐 했는지 아세요? 다시 알바몬을 보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다시 일할 곳을 찾았어요. 오기가 생겼거든요.
하나님 일 위해서 일하는데 까이고 무시당하는건 당연한거야.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 라고 제 자신에게 말하면서 일할 곳을 찾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다른 곳에 면접을 보러 갔어요. 그런데 그 곳에서 사장님이 저에게 똑같이 물으시는거에요. “뭐하는 사람이세요? 왜 이 나이에 알바를 구하세요?” 아 PTSD.
이번엔 고민하지 않고 말했어요. 저번에 ‘전도사'라고 말하기 전에 고민을 했는데 그게 너무 제 자신이 바보 같아 보였었거든요. 하나님을 믿는다. 그 분을 위해 살아간다는 말하는 것에 대해 주저했던 그 때를 돌아보며 “저는 전도사입니다.”라고 고민도 하지 않고 말했어요.
사장님이 안경을 이렇게 내리고 저를 빤히 쳐다보셨어요. 그리고 환하게 웃으시면서 “저는 OO교회 안수 집사입니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내일부터 출근하세요. 라고 하셨어요.
사장님 부부를 통해 정말 많은 위로를 받았어요.
여러분은요.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에요.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잖아요? 예수의 부활을 부정하는 세상 앞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잖아요?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려는 사람. 그 부활신앙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붙들고 살아내려 하는 사람에게 “실패와 넘어짐은 어쩌면 필연적인 것"일지 몰라요.
세상은 계속해서 저와 여러분에게 부활은 없다고. 예수를 믿으면 인생 고달파진다고. 한번 사는 인생 즐기라고 계속해서 말할거에요.
세상이 여러분의 마음에 혼란을 주고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것에 속지 마세요. 여러분이 갖고 있는 그 부활신앙을 빼앗아 가려 하는 수작을 부리면요. 가만히 있지 마세요.
끊임없이 속삭이는 세상에 대해 지지 말고 똑같이 말하세요.
“내가 믿는 예수님은 여전히 살아계신 분이며, 그 분의 부활은 거짓이 아니라고.”
“부활은 나의 소망이고 내가 믿는 믿음과 은혜이며, 내가 살아갈 힘이 되어주는 것이라고"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은요. 그 자체만으로도 세상을 향해 “부활은 실재이며, 나의 믿음과 신앙이다"라고 말하고 외치고 있는 것과 같아요.
굳이 다른 것을 하지 않아도. 애써 뭔가를 하지 않아도.
여러분 그 자체만으로 세상을 향해 “예수님의 부활은 여전히 우리에게 살아있다.”고 외치는 것과 같아요.
한주 살아가며 또 실패하고 넘어질거에요. 이건 분명해요. 그 때 내가 넘어지고 실패하는 이유에 대해서만 집중하지 마세요. 나는 이 것 밖에 안돼 라는 감정에 빠지지 마세요.
그럼에도 내가 다시 일어서야 하는 이유를 생각하고 붙잡고 서는 여러분 되기를 바래요.
저와 여러분의 인생을 실패할 수 없어요. 지금 여러분이 겪는 그 실패는 위대한 실패에요. 나의 보잘것 없는 실패를 들어쓰시는 하나님의 위대함을 보게 될거에요.
실패하고 넘어지는 나이지만, 나라는 존재 자체만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다는 것믿음으로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랑하는 모든 가온누리 청년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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