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518수요] 아담, 노아, 모세, 그리고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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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도전 88[내 진정 사모하는], 94[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찬송 83 [나의 맘에 근심 구름]
기도 형희경 집사
본문 출 2:1-10
이름이란 단지 그 대상을 뭐라고 부를 것인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까지도 가리킨다. 예를 들어 송진영 이라 한다면, 앞에 서 있는 저를 뭐라고 불러야 하느냐, 즉 호칭의 의미만이 아니라, 이 이름을 떠올릴 때 관련된 음식이나 사건들, 관련된 기억들까지도 생각이 날 것이다. 학창시절에 함께 놀았던 친구들의 이름을 떠올려보라. 그 사람의 이름을 떠올릴 때 그 사람과의 추억, 그 사람과 함께 먹었던 음식, 함께 했던 많은 기억들이 떠오르지 않는가? 성경 속에서도 이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을 ‘아담, 노아, 모세 그리고 예수’라고 정해보았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위로자요 우리의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만을 더욱 의지하고 붙드는 시간이 되시기를 소망한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바로의 횡포가 점점 더 극에 달하던 때였다. 바로의 정책, 곧 아이가 태어나거든 남자아이라면 나일 강에 던져버리라는 그 명령은 결국 시행되었다. 출산일이 다가오던 이스라엘 가정들은 곧 출산이 임박했다는 복된 소식에 기뻐함과 동시에 이 아이를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이다. 성경은 그 중에서 특별히 레위지파의 한 가정에 집중한다. 바로 아므람과 요게벳의 가정이었다. 아므람과 요게벳 사이에서 모세는 장남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의 형 아론이 있었고, 그의 누이 미리암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출생에 대해 생략하고 있는 것은, 형제들 중에서도 특별히 모세가 장차 큰 역할을 감당할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2절을 보라. 한글성경에서는 그가 ‘잘 생겼다’ 라고 번역한다. 우리는 보통 잘 생겼다는 의미를 어떨 때에 사용하는가? 국어사전을 찾아보니까 ‘사람의 얼굴이나 풍채가 보기에 썩 좋게 생기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갓 태어난 모세가 그저 우리말대로 잘생겼다고만 번역을 한다면, 그가 장차 연예인을 해도 될 타고난 외모를 가졌다 정도로해석할 여지가 있겠다. 그러나 원어의 의미는 조금 다른데, ‘잘 생겼다’라고 번역한 히브리어는 ‘토브’라는 단어가 사용이 된다. 이 단어의 의미는 ‘선하다, 좋다’ 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지으실 때에 지으신 것을 보시며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좋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가 ‘토브’이다. 이 단어를 모세에게 사용하는 것은 단지 모세의 외모가 출중했다, 외형적으로 아름다운 자 였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하나님이 맡기실 큰 일을 훌륭하게 담당할 자로서의 존귀함, 아름다움이 그의 용모 속에 드러나 있었음을 의미한다. 어머니는 갓난 아이의 모습 속에서 그의 비범함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3 달이나 집안에서 숨겨 키웠다. 그러나 아이가 점점 자랄수록 어려움을 깨닫고는 결국 갈대상자를 만들어 나일강에 띄우게 된다.
3 절을 보라. 본문에서 아이 모세가 타게 되는 ‘갈대 상자’, 여기서 ‘상자’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테바’이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오직 두 장면에서만 사용이 된다. 본문에서 모세가 담겨진 ‘갈대 상자’에서의 상자를 가리킬 때 한번 쓰이고, 그리고 창6 장 에서 노아와 가족들이 탑승했던 방주를 가리킬 때 한번 쓰인다. 즉, 테바 라는 히브리어는 성경에서 단 두번밖에 사용되지 않는다. 히브리어에서 상자나 바구니를 지칭하는 단어들이 여럿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 노아와 가족들이 탑승했던 방주와 동일한 단어가 바로 이곳에서 사용되는 이유는 모세가 노아와의 연결점이 있음을 보여준다. 노아 라는 단어의 의미는 ‘안위하다, 위로하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노아’라는 이름의 의미처럼, 장차 모세가 바로에 의해 억압받던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할 자, 참된 안식을 가져다 줄 자로 여겼던 것이다.
창1:28 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할 것을 명하신다. 그리고 홍수심판이 끝나고 뭍으로 내려온 노아에게 하나님은 아담에게 주셨던 복을 한번 더 선포하신다. 창9:7 말씀에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가득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 이러한 하나님의 축복은 아담과 노아와의 연결점이 있음을 보여준다. 즉 노아는 홍수심판으로 완전히 새롭게 시작된 세계에서 제 2의 아담과 같은 존재였다.
그렇다면 아담은 누구였는가. 히브리어 아담 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사람’ 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첫사람 아담을 지으실 때, 이미 만드신 피조물들 중의 어느 형상으로 만들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빚으실 때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의 형상을 참고하시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의 형상으로 빚으셨다. 즉,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았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선하시고 거룩하시며 고귀하신 성품을 닮은채로 지으신 바 된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아담은 하나님이 지으신 동산 에덴에서 왕노릇하였다. 모든 동물들은 아담의 다스림 안에 순복했다. 마치 하나님께서 온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는 것처럼, 아담은 에덴을 다스릴 권세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결코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아님을, 그는 결코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했다. 비록 에덴을 다스릴 권세를 받았지만, 자신은 진정한 통치자, 진정한 왕이 아님을 기억해야 했다. 영원한 통치자이신 하나님과는 달리, 자신은 유한한 물질, 곧 흙먼지로 만들어진 존재임을 기억해야 했고, 오직 자신의 권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졌음을 깨달아 자신 위에 온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겸손히 인정해야 했다. 그 차이점을 깨닫게 하는 장치가 무엇이었는가? 바로 선악과였다.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바라보며 자신 위에 전능하신 창조주께서 계심을 기억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이 일에 실패한다. 아니 그는 의도적으로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 대신 자기 자신을 신의 자리로 올려두려는 반역을 저질렀다. 그 결과 그의 안에 하나님의 형상은 산산 조각나버렸으며, 그 결과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되었다.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인생 가운데 수고가 찾아온다. 그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했던 악한 선택이 결국 인생을 비극과 온통 비참함으로 만들어버렸다. 그 죄 때문에 이생에서의 고통과 고난이 찾아왔다. 기근이 찾아온다. 질병이 찾아온다. 온갖 슬픔과 괴로움과 탄식이 찾아온다. 그리고 죽음이 찾아온다. 사람들은 이 죄의 결과 때문에 하루하루 고통과 기진함 가운데 살아가기 시작한다. 오늘날 뉴스를 보면 죄다 ‘전쟁’이라는 단어를 붙인다. 취업전쟁, 자격증전쟁, 입시전쟁, 심지어 육아에도 전쟁이라는 말을 붙이더라. 그말인즉 우리의 살아가는 인생이 이처럼 고달프다는 것이다. 마치 전쟁터처럼 치열하고, 긴장을 늦출 수 없고, 각박하고, 고통스럽다는 것이겠다.
이것은 비단 오늘날에만 속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아담의 죄로 인하여 여자는 저주를 받아 해산하는 고통이 더해지고 남자의 돌봄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또한 아담으로 인하여 땅도 저주를 받아 이전처럼 더이상 아담에게 열매를 마음껏 내어주지 않는다. 땀을 흘리며 수고하지 않는다면 소산을 얻어낼 수 없게 되었다. 땅은 계속해서 엉겅퀴와 가시덤불을 냄으로, 아담은 매우 수고해서 땅을 기경해야만 한다. 그에게 에덴에서 누리던 안식이 주어졌는가? 그렇지 않다. 쉬는 것은 사치였다. 온 몸이 괴로울 때까지 고생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득도 거둘 수 없다. 이와 같은 인생의 고통과 기진함 속에서 “누가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주며, 누가 우리를 위로해 줄 수 있을까?”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뿐만 아니라 당대의 사람들에게도 공통된 질문이었을 것이다. 진정 자신들에게 참된 안식을 가져다 줄 존재, 고통 중에 있는 자신들을 위로해 줄 수 있는 존재를 대망했을 것이다.
아마도 라멕도 그러한 사람 중 하나였으리라. 그래서 창5:29 를 보면, 182 세에 아들을 낳으면서 자신의 염원을 담아 아들의 이름을 ‘노아’라 지었다. ‘노아’라는 히브리어는 ‘안식하다, 위로하다’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마도 노아의 아버지인 라멕은 고달픈 인생,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인생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진정 그들에게 참된 안식을 가져다 줄 구원자를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에, 그리고 자신의 아들이 그 이름에 걸맞게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에 그의 아들의 이름을 노아라 지었을 것이다. 노아의 이름의 의미가 무엇이라 말씀드렸는가? ‘안식하다, 위로하다’.
그런데 여러분, 과연 노아는 라멕의 바람대로 택한 백성들의 '노아’가 되었는가? 주의 백성들에게 위로를 안겨다 주고 진정 그들에게 참된 안식을 가져다 주었는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노아로 인하여 죄의 저주가 끝이 나질 않았기 때문이다. 홍수 심판 이후에도 계속해서 죄는 발전해갔으며 이전보다 죄는 더욱 깊어져감으로 더 많은 기진함과 고통들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그는 제2의 아담으로서 본래 아담에게 주어졌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해야 했다. 그러나 머지 않아 포도주에 취하여 자식들 앞에서 경건과는 거리가 먼 모습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노아 이후의 사람들은 이전보다 더욱 극심하게 부패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홍수심판을 금새 잊어버리고 자신들의 힘과 능력으로 하나님과 같이 되기 위하여 바벨을 쌓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사 지면에 모두 흩어버리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흩으신 하나님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수많은 우상들을 만들어 하나님을 대적하게 된다.
이러한 배경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을 부르시고 언약을 주시지만, 이는 그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을만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뭔가 이쁨 받을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족장들을 세우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사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실 것이며, 약속의 땅을 주시리라는 약속을 주신다. 그러나 그 약속은 당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엄청난 시련들이 담겨 있었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의 미모 때문에 애굽 왕 바로나 그랄 왕 아비멜렉과 같은 사람들 때문에 여러 위기를 만났다. 야곱은 형을 피해 도망을 가게 되고, 또한 외삼촌 라반 아래에서 고생의 시기를 지나가게 된다. 또한 야곱의 딸 디나가 히위 족속에게 강간을 당하게 되자 야곱의 아들 시므온과 레위가 그 족속 모든 남자를 죽인 것 때문에 곤혹을 치루지 않았던가. 또한 가장 사랑하던 아내가 낳은 요셉을 잃어버리는 사건까지 겪었으니 그의 인생 가운데 얼마나 우여곡절이 많았던가.
시간이 흘러 약속의 자녀들이 애굽 땅에 들어가게 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장의 기근문제는 잘 해결된 것처럼 보였지만, 400 년 넘게 애굽에 머물면서 이스라엘에는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스리시사 애굽 안에서 번성하게 하셨고, 또한 직면한 정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그들을 지켜 주셨다. 그러나 아직 바로의 명령이 철회된 것은 아니었다. 바로는 더욱 눈에 불을 켜고 이스라엘의 씨를 말살하려 했다. 이러던 때에 두 번째 노아로써, 그 이름의 의미대로 애굽에서 매우 수고하던 이스라엘을 위로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참된 안식을 가져다주기 위하여 모세가 등장한다.
모세 라는 이름은 출2:10 의 말씀처럼 ‘건져내다’ 라는 의미이다. 그는 노아가 방주에 피신하여 자신의 목숨을 보전 받았던 것처럼, 작은 갈대상자에 피신하여 자기 목숨을 보전받았다. 그가 나일강 물에서 건져냄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모세라고 지었을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왕족으로 입양이 된다. 학대받던 노예층이던 모세가 이스라엘을 학대하고 괴롭히던 왕가로 입양되어 들어가게 되니, 모세야말로 이스라엘의 위로자요, 그들에게 참된 안식을 가져다줄 자격이 충분해보였다. 이스라엘을 고역으로부터 건져낼 수 있는 진정한 노아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모세가 진정 이스라엘의 노아가 되었는가? 그는 진정 두번째 노아로서 택하심을 입은 백성들에게 안식과 위로를 가져다 주었는가? 그는 그 이름의 의미대로 죄에 빠져 고통과 비참함 가운데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진정 건져내었던가? 그는 애굽의 손아귀로부터 이스라엘을 건져내었는지는 몰라도, 이 모든 문제들의 원인인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교회를 건져내지는 못했다.
노아도 실패했고, 모세도 실패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보다 더 나은 노아, 그들보다 더 나은 모세가 필요하다. 우리에게 참된 위로를 가져다 주실 분, 우리를 참된 안식으로 인도하실 분, 우리를 이 비참함 가운데서 건져내실 진정한 구원자가 필요하다. 그분은 누구이신가? 마1:21 말씀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우리를 이 비참함 가운데에서 건져내실 분, 우리를 우리의 죄에서 구원하실 분, 오직 예수님이다.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즉,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모세하실, 우리를 건져내실 진정한 노아, 진정한 위로자요 참되고도 영원한 안식을 주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임을 그는 확신했던 것이다.
여러분, 이생에서의 수고와 고통으로 인한 기진해 있는 우리에게 누가 위로자가 되시고 누가 우리를 영원한 안식으로 인도하시며, 누가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내시는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땅을 살아가면서 잠시 잠깐 우리를 쉬게 하고, 잠시 잠깐 우리를 평안하게 만들 수 있는 많은 요소들이 있지만, 그것은 온갖 비참함의 본질, 죄라는 궁극적 원인을 해결해주지 못한다. 죄에서 구원받는 길 외에는 우리에게 진정한 위로가 있을 수 없다. 죄와 사망으로부터 건짐을 받는 길 외에는 우리에게 진정한 안식이 찾아오지 않는다.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에서 그토록 예언되었던 바 대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내려오셨고, 택하신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짊어진 채로 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 주님은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셨다. 그리고 성부께서는 죽기까지 순종하셔서 얻으신 아들의 의를, 오직 그 아들을 영접하고 믿는 자들에게 값없이 전가해 주신다. 롬 8:1- 2 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오직 주님만이 우리에게 참되고도 영원한 안식을 주시며, 우리의 모든 수고와 눈물을 위로해 주산다. 계 7:16-17 을 쉬운 번역으로 읽어드리겠다. ‘그들은 결코 배고프거나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여기서 그들이란 택하심을 받은 교회, 성도들을 가리킨다). 뜨거운 햇볕도 그들에게 해를 입히거나 상하게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좌 가운데 계시는 어린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생명수가 흐르는 샘으로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지키시사 어떠한 해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실 것이고, 이 세상의 모든 고통과 괴로움을 지나 마침내 우리를 생명수가 흐르는 샘으로 인도하실 것이며, 이 세상을 살아가며 겪었던 모든 수고와 괴로움으로 인한 우리의 눈물을 닦으시고 위로해 주실 것이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맺는다. 첫사람 아담은 죄에 넘어지면서 자신 안의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박살났지만, 무죄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신, 아담보다 뛰어나신 분이시다. 그분은 라멕의 아들 노아와는 달리 택하신 백성들에게 진정한 노아로서 이 땅에서 수고한 모든 성도들을 위로하시고 영원한 안식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또한 그분은 아므람과 요게벳의 아들 모세와는 달리 언약백성들에게 진정한 모세로서 창세 이전부터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신 모든 성도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으시고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건지사 구원하실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담대하게 외친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세상 어느 누구보다 탁월하시고 아름다우시며 위대하시고 영광 중에 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더욱 깊이 알아가고, 의지하시는 이 자리의 모든 성도 여러분들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한다.
찬송 82[성부의 어린 양이]
우리의 진정한 위로자, 우리에게 진정한 안식을 주실 분은 오직 예수님 뿐이다. 우리를 죄악에서 건져내사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실 이도 오직 예수님 뿐이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늘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를 깊이 묵상하는 우리가 되길 기도하자. 오직 예수 안에서 안식과 쉼을 누리며, 오직 예수 안에서 영원한 생명과 복락을 받아 누리는 우리가 되도록 더욱 예수를 붙드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더욱 예수로 충만한 우리가 될 수 있기를 이 시간 함께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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