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함에서 신실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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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신과 함께라는 영화가 굉장한 인기를 끌었었습니다. 국내 최초로 후속작까지 다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로 신기록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 신과 함께라는 영화를 제작할 때 그 감독이 단테의 신곡이라는 책을 참고했다고 합니다. 신곡은 워낙 유명한 책이라서 한 번쯤은 그 제목을 들어보시거나 읽어보신 분이 많으실 겁니다. 그 내용은 주인공이 지옥과 천국을 여행하며 인생과 섭리와 구원에 대한 내용에 대해 논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신과함께라는 영화에 나태한 사람들이 고통당하는 나태지옥이 있지 않습니까? 단테의 신곡에서도 나태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바로 출애굽 후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가나안 땅에 바로 들어가지 않은 광야 1세대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나태해서 가나안 땅에 안 들어갔나? 전쟁하기 무서우니까 안 들어갔지”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단순히 게으른 것만이 나태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것, 하나님의 일은 등한시 하고 세상의 일에만 열중하는 것을 나태함이라고 합니다. 물론 나태함에는 게으름이 들어가 있지만 나태함이 무서운 이유는 나태함이 지향하는 최종 목표가 하나님에 대한 열심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2장 11절에도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말합니다.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지 않다보면 신앙의 의욕이 점점 사라지게 되고 끝내는 나태하게 됩니다. 코로나 19를 거의 지나고 있으면서 우리에게 눈에 띄게 나태함이 늘었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게 됩니다. 저부터가 그렇습니다. 코로나 이전보다 힘을 내서 기도하는 일이 더 힘들게 느껴집니다. 당평교회 덕분에 오랜만에 노방전도를 했는데 전도 하는 것이 왠지 이전보다 더 힘겨운 것 같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제 자신이 코로나 이전보다 더 나태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매우 두렵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 기도회를 통해 이 나태함에서 벗어나는 은혜를 얻기를 원합니다.
본론1: 우리의 신앙은 나태해지기도 한다.
(전환문장)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은 우리의 믿음 생활은 때론 나태해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설명) 신앙이 나태해지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약해서 그런 게 아닙니다. 우리 안에 여전히 죄의 본성이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는 나태함은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고 해야 할 일을 미루는 이런 게으름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에 열심히 없는 것을 말합니다. 이 하나님의 일은 교회 봉사도 되겠지만 세상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도 다 포함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나태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준수하지 않고 세상적인 사고방식을 따라 살았습니다. 2장 2절을 봐주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였거든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주실 때 그곳에 있는 민족을 몰아내고 거기에 있는 우상숭배 문화를 끊어버릴 것을 원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길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했습니까? 1장을 보시면 가나안 족속을 제대로 몰아내지 못합니다. 27절에는 므낫세가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니까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했다고 나옵니다.
28절을 보면 더 가관입니다. 이스라엘에 힘이 생기니까 가나안 족속을 자기 종으로 삼습니다. 마치 그 옛날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을 때 종살이한 것처럼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종으로 부려보려 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괜히 힘들게 쫓아낼 필요 있나? 우리보다 힘도 약한데 종으로 삼아서 부려 먹으면 편하고 좋지” 이렇게 세속적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주인이 되고 가나안이 종이 된 것은 관계를 맺은 것입니다. 언약 관계를 가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민족의 주인이 되고 가나안 민족은 이스라엘의 종이 됩니다. 하지만 이것이 화근이 되어 가나안 종교가 이스라엘의 신이 되고 이스라엘은 가나안 종교에 사로잡히게 되는 역사가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말씀을 준수하지 않은 나태함 때문에 죄의 악순환이 시작됩니다. 그것이 사사기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은 완전하지만 우리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나태해질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이 말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완전했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그렇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증명) 나태함은 교회 전통에서 ‘일곱 가지의 대죄’에 속할 정도로 치명적인 죄로 취급합니다. 교회 전통에서 일곱 가지 대죄는 교만, 시기, 분노, 나태, 탐욕, 탐식, 정욕이 있습니다. 그중에 나태가 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이 나태라는 개념은 본래 사막 수도원에서 나왔습니다. 4세기 사막 수도사 에바그리우스는 은둔해서 영성훈련을 하는 수도사들이 상당수가 나태에 빠져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환경도 열악하고 금욕 훈련 때문에 지치고 건강도 나빠집니다. 미래에 대해 염려와 불안이 생깁니다. 수도원 생활을 해도 기대한 것만큼 영성이 깊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수도 생활을 열심히 하지 않고 어슬렁거리게 됩니다.
에바그리우스는 이것을 나태라고 불렀습니다. 나태는 굉장히 독특한 죄인데 그 이유는 다른 죄는 교만, 분노, 정욕 이런 것들은 어떤 일을 실천으로 옮기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건데 나태는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아서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성경 말씀의 핵심이지 않습니까? 나태는 이 핵심을 비껴나가게 합니다. 우리가 가진 에너지가 이 핵심에서 멀어지면 점점 세상적인 가치에 물들게 되고 하나님 명령에 부지런한 것이 아니라 세속적인 일에 부지런하게 됩니다. 엉뚱한 일에 부지런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족속을 몰아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오히려 그 가나안 족속을 노예로 삼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준수하지 않고 나태해지니까 다른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나태함을 경계해야 합니다.
(적용)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다 바쁘기 때문에 스스로가 나태하다고 생각 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나태함은 단순한 게으름과 차이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아무리 바빠도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서 쓴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준수하지 않는다면, 열심을 품고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는다면 성경적인 관점에서 그건 나태한 것입니다.
코로나를 지나면서 우리에게 나태함이 더 깊숙이 자리 잡지 않았는지 다시금 회개하게 됩니다. 코로나니까 아이들이 교회에 안 오나보다 코로나 때문에 교회 싫어하는데 전도가 되겠나 라고 생각합니다. 저부터도 그렇지만 어느순간부터 코로나 때문에 이게 안 되고 저게 안 된다고 핑계를 대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워졌습니다. 우리가 덜 기도하고 덜 예배하고 덜 섬길 수 있는 면죄부가 되어버렸습니다.
이제는 일상에서 가족 모임을 하고 맛집을 다니고 여행을 다닙니다.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것들은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에서는 여전히 코로나가 남긴 후유증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 2년, 3년간 코로나는 우리의 신앙을 너무나도 나태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내 안에 하나님을 섬기는 열심 대신에 세상적인 즐거움과 만족만이 있지 않은지 살펴야 합니다.
본론2: 우리는 나태해지지만 하나님은 신실하다.
(전환문장)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교훈은 우리는 나태해질 수 있을 지라도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는 것입니다.
(설명)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준수하지 않는 나태함을 보였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언약에 불성실했지만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셨습니다. 언약이 무엇입니까? 언약이란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그 약속이 언약입니다. 2장 1절을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으로 올라와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이끌어냈다. 너희 조상에게 약속한 땅에 들어가게 했다. 그리고 너희와의 언약을 절대 깨뜨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준수하지 않는 나태함을 보였지만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언약에 대한 신실함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대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약속의 땅을 허락하셨습니다. 앞으로도 영원히 이스라엘에게 복을 내려주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주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성실하게 이행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나태했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을 때부터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 때까지 끊임없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 주시고 구원하시고 인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순종하지 않아 징계는 했을지언정 이스라엘을 버리지는 않으셨습니다. 이 본문에서도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겨서 질책을 듣고 있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언약이 영원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신실함은 2장 1절에 천사가 움직인 동선에서도 나타납니다. 1절을 보시면 천사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으로 올라와 말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천사가 길갈에서 집 짓고 살지는 않았을텐데 왜 천사가 하필 길갈에서 올라왔습니까? 길갈은 아주 중요한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 4장을 보면 길갈에는 한 지파당 하나씩 해서 열 두 개의 돌이 세워져있습니다. 길갈의 열 두 돌은 하나님께서 출애굽 때 홍해를 건너게 한 것처럼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게 한 것을 기념하라는 의미에서 세운 것입니다. 길갈의 열 두 돌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징표입니다. 길갈의 문자적인 의미는 수치를 굴러가게 했다는 뜻입니다. 옛날에 이스라엘은 노예였고 떠돌이였지만 이제는 그 수치를 벗고 정착할 땅을 얻었습니다. 길갈은 이런 의미가 있는 중요한 장소입니다. 천사가 이 길갈에서 올라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언약에 신실하신지 다시 깨닫게 해줍니다. 이스라엘의 수치를 굴러가게 하시고 이스라엘에게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언약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언약에 신실하십니다.
(증명) 구약에서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아주 드라마틱하게 나타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창세기 15장에 횃불 언약입니다. 하나님이 불안해하는 아브라함과 횃불 언약을 맺으시는데, 새로운 언약이 아니라 이전의 언약을 더 강화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동물을 쪼개서 놔두는데 횃불이 나타나서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갑니다. 고대 근동에서 언약을 맺을 때 동물을 쪼개서 언약을 맺는 당사자들이 지나가는 그런 풍습이 있습니다.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간다는 것은 내가 언약을 이행하지 않으면 내가 이 고기처럼 쪼개지겠다는 뜻입니다. 횃불이 쪼갠 고기를 지나갔다는 것은 하나님이 쪼갠 고기를 지나갔다는 의미입니다. 절대불멸이신 하나님이 그분이 언약을 어기면 스스로를 쪼개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 역사 가운데 늘 신실하게 언약을 잘 지키셨습니다. 불순종하고 타락한건 늘 그분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원래 언약에 신실하지 못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쪼갠 고기처럼 되어야 하는데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셔서 하나뿐인 아드님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죄인들이 쪼개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쪼개지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의 의무를 충분히 하셨는데도 죄인들의 부족함까지 담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적용)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이렇게 신실하신데, 우리가 쉽게 나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나태해질지라도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보며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닮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나태함에서 벗어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잠언 26장 14절에는 아주 재밌는 표현이 있습니다.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도 도느니라” 문짝은 돌쩌귀에 달려 있기 때문에 문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 돌쩌귀는 경첩입니다. 계속 이리 저리 열렸다 닫혔다 왔다 갔다 합니다. 문짝이 문에서 떨어지려면 이 경첩에서 풀려야 합니다. 경첩이 박살이 날 정도로 강력한 물리력이 필요합니다. 외부에서 강한 힘이 주어져야 경첩에서 문짝이 떨어져 나갑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힘이 필요합니다. 내가 문에 달린 문짝처럼 자꾸 형식적인 삶만 살고 그냥 굴러 가는대로 되는 대로, 나태하게 살아가고 있다면 나를 붙잡고 있는 나태함의 경첩을 부서뜨려야 합니다. 이 나태함의 경첩을 부서뜨릴 수 있는 중요한 원동력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인지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모든 물질, 시간, 능력 또한 새롭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율법지식이 그가 회심하기 이전에는 교회를 핍박하는데 사용됐지만 그가 회심하고 나서는 복음 전하고 바울 서신 12권을 집필하는데 사용됐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기억하며 내가 가진 모든 것들도 나와 함께 구원 받았기 때문에 내가 가진 시간과 물질과 능력을 하나님과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깨닫게 되면 묵상하면 쉽게 쉽게 나태하게 살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개인의 결단력은 너무 약해서 나태함의 경첩을 부서뜨리기는 힘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의 동역자를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교사로 섬길 때에 나 혼자서 교사로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동료 교사선생님이 있습니다. 부장선생님이 있습니다. 부족한 종이지만 저도 있습니다. 제가 시험에 들고 무기력해질 때 담임목사님이 저를 지도하십니다. 선생님들이 계셔서 힘을 얻습니다. 선생님들이 시험에 들고 무기력해질 때 담임목사님의 설교말씀으로 또 저의 응원으로 다시 일어서시지 않습니까? 코로나를 지나면서 나태함이 우리를 강력하게 붙잡을지라도 우리의 동역자들이 서로를 지켜주고 있습니다. 개인은 나태할지라도 공동체는 신실하게 서로를 붙들어줍니다.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죄인이라서 하나님을 섬기는 열심에서 나태해지고 싶은 욕망을 자주 느낍니다. 코로나가 이 욕망을 더욱 자극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저와 성도님들이 여기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미 우리는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금요일마다 전도를 하고 부모기도회로 교사기도회로 자체강습회, 세미나로 열심히 모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열심을 사용하실줄을 믿습니다. 코로나 이후의 한국교회 주일학교는 앞으로 5년 안에 결정된다고 합니다. 교회가 어느정도 인력적으로 재정적으로 힘이 남아있는 거의 마지막 시간입니다. 2030년에는 대부분 교회에서 주일학교가 없어질 것이라는 무서운 분석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나태함에서 벗어나 더욱 열심을 품고 주를 섬김으로서 우리 당평교회의 주일학교는 다시 한 번 부흥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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