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Tone Analysis

Overall tone of the ser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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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ne of specific sentences

Tones
Emotion
Anger
Disgust
Fear
Joy
Sad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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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alytical
Confid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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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al Tendencies
Openness
Conscientious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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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reeableness
Emotional 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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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오늘은 “믿음으로 거룩함을 전염시켜라”라는 제목을 가지고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지난 2번의 시간을 걸쳐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의 비유 다음에 나타나는 2가지 사건을 우리가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한 밤중에 배를 타고 가시는 중에, 큰 폭풍을 만나는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자신들을 구원해 줄 것이라는 믿음보다도, 당장 자기 눈앞에 나타난 큰 폭풍이라고 하는 고난 앞에 철저하게 무너진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이 “왜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고 꾸짖으신 것이죠.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자연을 다스리시는 능력이 있으신 분이심을 발견해야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는 제자들처럼 우리 앞에 놓여진 현실적인 두려움 속에서도, 그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을 배워야 했습니다.
좋은 밭에 떨어진 씨앗처럼 예수를 마음에 품고, 그 예수로 살아내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이죠.
두 번째 사건은 거라사인의 지역이라고 알려진, 데가볼리의 이방인들의 영역 가운데에서 예수님이 귀신들린 자를 자유롭게 하신 사건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 속에서 동일하게, 예수님이 초자연적인 세계인, 영적인 세계를 다스리시는 분이실 뿐 아니라, 예수의 구원은 유대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동일하게 흘러가고 있으며, 예수님의 구원을 경험한 사람이 회복된 사람이라면, 그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증거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가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마치 귀신에 의해서 고통 받던 한 사람이, 예수님의 복음으로 변화되어, 자신이 경험한 복음을 주변에 전하는 복음의 증거자로 살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예수님께서 자연과 초자연을 다스리시는 주님이시면서, 동시에 우리가 그 주님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주님의 자녀로서 어떠한 삶을 지향하며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본론]
오늘 이어지는 본문 역시,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죽음 가운데에서 살리신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사건임과 동시에 12년 동안 혈루병으로 고통받았던 한 여인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회복되는 사건을 보여주죠.
과연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이 말씀들이 오늘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에게 어떤 울림을 줄 수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하는 핵심은 “믿음과 거룩”을 통해 드러나는 제자의 삶입니다.
한 번 따라볼까요?
“믿음과 거룩을 통해 드러나는, 제자의 삶.” 오늘 본문의 가장 중요한 단어 2가지는 이 “믿음과 거룩”입니다.
이것을 분명하게 기억하면서, 오늘 본문을 차근차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아까도 잠깐 말씀드린 것처럼 2가지의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가장 메인이 되는 이야기,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주된 스토리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과 관련된 사건이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그냥 쭉 흘러가면 좋을텐데, 갑자기 “열 두해 동안 혈루병으로 고통받은 한 여인”의 이야기가 끼어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한 이야기가 진행되다가, 갑자기 다른 이야기가 중간에 끼어들고, 이 이야기가 끝남과 동시에, 다시 원래 진행되고 있는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는 이러한 구조를 흔히 “샌드위치 기법”이라고 합니다.
마가는 마가복음 안에서 이러한 샌드위치 기법을 자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흔히, 이런 것들을 “마가의 샌드위치”라고도 부르기도 합니다.
보통 우리가 샌드위치 빵을 생각할 때, 어떤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나요?
샌드위치의 시작과 끝을 구성하는 빵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내용물 아니겠습니까?
그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마가의 샌드위치를 이해할 때는, 중간에 삽입된 이야기가 전체 이야기를 푸는 열쇠의 역할을 합니다.
마가의 샌드위치로 오늘 본문을 이해하면, 크게 3가지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은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을 찾아와, 자신의 딸이 위독하기 때문에 딸을 고쳐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이 담긴 5장 21-24절 말씀, 그러다가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길 도중에 만나게 된 12년 동안 혈루병 걸린 여인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25-34절 말씀, 그리고 다시 야이로의 딸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35-4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이죠.
즉, 야이로의 딸 이야기가 마치 샌드위치 빵처럼 그 내용물인 “열 두해 동안 혈루증을 앓은 여인의 이야기”를 감싸고 있는 모양으로 되어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푸는 핵심적인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이겠습니까?
바로 “혈루증 앓은 여인의 이야기”가 21절부터 43절 전체 이야기를 푸는 열쇠 역할을 하게 되겠죠? 진짜인지 우리가 말씀을 살펴보면서 확인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인 5장 21절의 말씀은 본문 전체 이야기의 배경을 설명해 줍니다.
그 배경은 예수님이 거라사인의 지방을 떠나기 위해, 배를 타시고, 다시 반대편으로 건너갔다는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거라사인의 지방은 이방인의 지역이었는데, 다시 반대편으로 건너갔다는 것은 예수님이 다시 유대인들의 지역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죠.
즉, 오늘 본문은 다시 유대인의 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것이 “회당”, “회당장”이라는 표현들이 등장하는 것과 예수님이 “달리다 굼”이라고 하는 아람어로 말씀하신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회당과 회당장과 같은 것은 유대 문화권과 관련되어 있는 용어들이고, 아람어는 예수님이 사용하신 모국어인데, 이것은 이 당시 유대인들의 언어였습니다.
이런 것들을 종합해 볼 때, 오늘 본문은 유대인들의 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임을 알 수 있는 것이죠.
예수님이 유대인들이 살던 지역에 도착하시자마자, 한 회당장이 찾아옵니다.
우리는 여기서 “회당장”이라는 용어를 잘못 이해하고 있을 때가 많은데, 이 “회당장”이라는 이름이 회당을 책임지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이 사람들을 종교지도자나, 랍비와 같은 설교자, 심지어는 오늘날의 담임 목사나 교역자 정도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그것은 오해입니다.
오히려 이 “회당장”이라는 것은 평신도 리더십들을 이야기합니다.
이 사람들은 장로들에 의해서 선출된 사람들로서, 회당 건물을 수리하거나, 관리하고, 예배의 전체적인 진행을 맡아서 기획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회당에서 설교할 사람들을 직접 초청하는 일을 하기도 했죠.
그리고 이 회당장들은 그 지역에서 알아주는 아주 핵심적인 리더이거나, 유명인사이기도 했습니다.
이른바 권위가 있고, 자산가이면서,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그런 인물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회당장 역시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마가는 이 회당장의 이름을 “야이로”라고 소개하고 있죠.
지역 공동체에서 유망한 인물이면서, 동시에 많은 존경을 받을만큼, 지위와 명예와 자산이 있던 이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께 찾아오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딸이 위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오늘 본문 22-23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22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23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야이로가 예수님께 나아온 이유가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딸이 죽게 되었으니, 예수님께 그 아이를 고쳐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야이로의 모습에 주목해야 합니다.
야이로는 사회적으로 덕망이 있고, 지위나 명예가 있었던 회당장이었습니다.
그런 야이로가 오늘 예수님께 나아갔을 때는 어떤 모습이라고 나와있죠?
22절 말씀을 살펴보면 “예수께 와서,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지금 야이로는 자신의 신분이나 지위, 명예 그런 걸 따지지 않고, 정말 간절함 가운데 나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모습을 통해 감히 유추하건데, 야이로는 정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최후의 수단으로 예수님께 나아온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간절함은 그의 말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23절 말씀을 살펴보면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즉, 자기 딸의 머리 위에 예수님이 안수만 하셔도 그 아이가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죠.
야이로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어쩌면 이 분이라면 자기 딸을 죽을 병에서 자유롭게 하실 것이라고 하는 간절한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의 간절한 간구를 들으시고, 야이로의 집으로 향하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회당장 야이로와는 아주 극명하게 대조되는 한 인물이 본문에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12년 동안 혈루병으로 고통받고 있었던 한 여인”이었습니다.
여기서 혈루병이라는 것은 “여성이 월경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하혈을 하는 질병”입니다.
즉, 피가 멈추지 않는 질병인 것이죠.
이러한 혈루병은 구약에서 말하는 유출병과 같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29절 말씀을 살펴보면 이 “병”을 헬라어로 “마스틱스”라고 하는데, 이것은 “채찍, 매, 고통”이라고 말하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혈루병과 같은 질병은 단순한 육체적인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여성이 월경을 하게 되면, 그 여인은 율법에 따라 부정한 자로 여겨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월경을 한 여자는 일정 기간 동안 이스라엘 사회에서 격리되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월경으로 인해 부정해진 상태가 된 여인과 접촉하는 사람은, 그 여인의 부정함이 옮을 수 있기 때문이었죠.
이스라엘의 정결의 단계는 크게 3단계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거룩의 단계로서, 이스라엘의 제사장 그룹에 해당하는 그룹이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은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구별된 존재들로 여겨졌기 때문에, 항상 정결에 신경을 써야 했습니다.
두 번째는 정결의 단계로서, 일반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기에 해당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정의 단계가 있었는데,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바로, 나병이나 유출병 등으로 부정한 상태가 된 사람들, 또는 이방인들이나 죄인들이 이러한 부정의 단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문화에서는 이러한 부정함이 접촉을 통해 전염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공동체는 부정한 사람을 자신들로부터 격리시켜야 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스스로 정결하기 위해서 노력해야만 했죠.
이런 배경 속에서 혈루병을 앓는 여인을 살펴보면, 그녀는 무려 12년 동안 하혈을 하여 율법에 의하면 부정한 상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걸 다르게 표현하면 12년 동안 공동체에서 격리된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저는 최근에 코로나에 걸리지는 않았지만, 중학교 3학년 때, 신종플루에 걸려서 1주일 동안 격리된 적이 있었습니다.
코로나로 격리를 해보신 분들은 공감하실 수도 있으시겠지만, 사실 1주일 격리되는 것도, 막 답답하고, 힘든데, 이 여인은 1주일도 아니고, 무려 12년 동안 격리된 상태에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육체적으로도 고통스럽지만, 정신적으로도 고통스러운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죠.
심지어 26절 말씀을 살펴보면, 그녀는 많은 의사들을 찾아가서 질병을 고치려고 노력했지만, 오히려 더 많은 괴로움을 느끼게 되었고, 그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재산을 모두 사용한 상태였으며,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하고, 오히려 상태가 악화되었다는 점에서 정말 절망스럽고,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율법에 의하면, 공동체로부터 소외된 인물이었고, 불결하고, 부정한 자였기 때문에, 명예와 지위는 둘째치고, 사람들에게 인정조차 받지 못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이 여인의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을 살펴보면 말 다한 것이죠.
이런 점에서 회당장 야이로와는 완전히 대조되는 인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야이로는 당당하게 예수님께로 나아와서 예수님께 자신의 딸을 고쳐달라고 청했지만, 이 여인은 자신의 처지 때문에 몰래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지려고 했다는 점을 통해서도 이 둘이 얼마나 극명하게 대조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여인 역시 야이로의 상황만큼이나 절망스러운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 역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최후의 수단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면 자신이 나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게 된 것이죠.
그리고 그 믿음대로 그 여인은 치유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 여인의 행동이 굉장한 믿음의 행위라고 쉽게 생각할 때가 많은데, 사실 그렇게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아까 이스라엘의 정결 단계를 통해서 살펴본 것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은 부정한 사람과 가까이하면, 그 부정함이 전염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것은, 그녀의 부정함이 예수님께 옮겨질 수도 있는 굉장히 위험한 행동이었던 것이죠.
아마, 예수님이 자신의 능력이 나간 것을 깨달으시고, 이 여인을 찾으려고 했을 때, 여인이 두려워했던 이유는 이런 이유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신의 부정이 혹시 예수님께 옮겨갔을 수 있기 때문에, 그녀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죠.
우리는 샌드위치의 내용물인 이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서 2가지 핵심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는 이 여인의 믿음입니다.
자신이 고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자신의 부정함이 예수님께 옮겨갔을 것을 두려워했던 여인을 향해서, 예수님은 그녀를 꾸짖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녀를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 여인을 칭찬하신 이유는 바로 그녀의 믿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34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이 그녀를 병으로부터 구원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이 “믿음”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저 “낫고 싶다”는 믿음이었을까요?
이 믿음은 예수님의 복음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실천적인 믿음을 의미합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 즉, 복음을 듣고, 그 “들음”을 믿음으로 실천하여, 자기가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병고침을 받게 되었던 것이죠.
여기서 “예수의 복음을 듣고, 그 들음을 행함으로 실천하는 삶”은 제자의 삶의 태도와 모습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즉, 이 여인의 믿음의 행위는 곧 예수님의 제자들이 살아가야 할 모범을 보여준 사건이라고 볼 수 있고, 예수님은 그러한 믿음을 칭찬하신 것이죠.
그저 “낫고 싶다”는 믿음이 아닌, 복음을 듣고, 실천함을 통해서 나타난 “믿음”을 예수님은 칭찬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살펴볼 핵심은 “예수님의 거룩”입니다.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부정한 자와 접촉한 사람은 그 부정함이 전염되기 때문에, 그 사람도 똑같이 부정한 자가 되어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격리되어야 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혈루병 걸린 이 여인이 예수님과 접촉했다는 것은, 곧 이 여인의 부정함이 예수님께 전염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유대인들에게는 일반적인 상식인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의 부정함에 전염되지 않으셨습니다.
반대로 오히려 예수님의 거룩함이 그녀에게 전염이 되어, 그녀가 자신을 괴롭히던 채찍과도 같은 질병에서 구원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거룩함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역은 모든 부정한 것을 정결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레위기 11장 45절 말씀을 살펴보면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31장 13절 말씀을 보면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신 것이죠.
심지어 예수님은 요한복음 17장 19절 말씀을 통해서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하려 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를 거룩한 자로 부르심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를 이루는 그리스도의 제자들,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받은 저와 여러분 역시,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세상 가운데 거룩함을 전파하는 자들로 세워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죠.
즉, 우리는 예수의 복음을 듣고, 그 들은 것을 삶의 자리에서 실천하는 믿음을 가지고, 세상 가운데 예수님의 거룩을 전하는 자들로 살아야 하고, 바로 그것이 예수의 제자의 삶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이것이 오늘 본문의 가장 큰 핵심입니다.
이 핵심을 가지고 이후에 야이로의 딸을 다시 살리신 예수님의 사역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회복의 구원을 경험한 이후에, 시간이 지체된 나머지,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비보를 접하게 됩니다.
분명 예수님은 질병을 고치실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던 야이로였지만, 딸이 죽었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손을 쓸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에게 “믿음을 가지라”고 말씀하시죠.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 무엇일까요?
바로 혈루증 앓던 여인이 가졌던 그 믿음입니다.
모든 소망이 다 사라졌음에도, 혈루병 앓던 여인이 예수의 복음을 듣고, 그 들음을 실천으로 행동하는 믿음을 예수님은 야이로에게 똑같이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야이로의 집으로 가서 죽은 딸의 시체를 보았고, 그 시체와 가까이 하십니다.
그러나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시체를 접촉하는 자는 부정하게 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죽은 야이로의 딸을 가까이 하고, 그 손을 잡으신 것은 율법을 어기는 행위이고, 자칫 예수님이 부정하게 될 수도 있는 굉장히 위험한 행동을 하신 것이죠.
그러나, 오히려 예수님이 부정하게 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거룩이 죽은 야이로의 딸에게 흘러들어가서, 다시 살아나는 기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여기서도 믿음과 거룩이라는 원리가 나타나고 있음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사건은 그저 2가지의 기적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제자로 부름받은 저와 여러분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가장 중요한 핵심인 “믿음과 거룩”을 삶 가운데 드러내야 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그리스도인은 혈루병 앓던 여인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이 복음을 믿음으로 반응하여, 삶으로 증명해야하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그 삶으로 증명해낸 믿음을 가지고, 세상 가운데 예수님의 거룩함을 흘려보내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거룩 그 자체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부정함이 가득한 무덤가의 귀신들린 사람에게도, 혈루병으로 부정해진 여자에게도, 죽은 야이로의 딸에게도, 예수님은 부정함을 당하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예수님이 가지신 거룩하심으로 귀신을 쫓아내시고, 혈루병 여인의 고치시고, 죽은 소녀를 일으키시는 능력을 보이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자신의 거룩함을 세상 가운데 흘려보냄으로 죄의 부정함으로 오염된 세상을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죄성으로 인해 전적으로 무능력하고,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인, 부정한 자인 저와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보혈이라고 하는 그 분의 거룩하심으로 우리의 부정한 죄를 씻으시고, 우리를 더 이상 부정한 자가 아닌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러주셨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인 저와 여러분을 거룩하신 예수님의 몸 된 교회로 삼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서, 그 분의 거룩함을 부정한 세상 가운데 흘려보내는 역할을 하기 위해 세우셨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예수님의 그 거룩함을 세상 가운데 전파하여 거룩함으로 세상을 전염시킬 수 있을까요?
바로 혈루병 앓던 그 여인의 믿음을 통해, 우리는 세상 가운데 예수님의 거룩함을 전염시키는 복음의 전파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12년 동안 혈루병 때문에 고통받던, 한 여인을 치유하시고, 죽은 야이로의 딸을 다시 살리신 예수님의 기적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기적을 보여주신 사건이 아니라, 이 모습들을 통해서 제자의 삶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사건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믿음과 거룩”이라는 이 두 가지를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그것을 삶의 행동으로 실천했던 한 여인의 믿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거룩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정한 것들을 회복하심으로 구원을 보여주셨듯이, 우리 역시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 가운데 예수님의 거룩을 전하는 자들로 살아가야 함을 배울 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전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의도 아니고, 우리의 어떠함도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은혜와 예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신 거룩함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죄인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정한 자에서, 거룩하신 주님의 몸으로 불러 세워주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 거룩을 세상 가운데 흘려보냄으로서, 많은 이들을 주님의 제자로, 주님의 몸 된 공동체로 불러 모을 수 있는 담대함을 가진 거룩함의 전파자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바라기로는, 우리 서산중부교회 모든 공동체가 이 믿음과 거룩이라고 하는 제자도의 핵심을 기억하면서, 세상 가운데 믿음을 가지고 거룩함을 전염시키는 주의 제자 공동체로 세워질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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