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으로 무뎌지는 신앙의 위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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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으로 무뎌지는 신앙의 위험성/욕심은 우리를 우상에 빠지게 하여 영적으로 어리석게 만들어 자신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
[서론]
조영남씨가 중앙일보에 자신의 삶을 나눈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스승님으로 가수 이백천 선생님을 꼽는데, 그 분의 가르침은 매우 간단하다고 합니다.
첫째, 좋은 가수가 되려면 노래할 때 너무 잘 부르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잘하려고 하면 욕심이 생겨서 흐트러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자신이 가진 기량의 70퍼센트만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나머지 30은 다음 공연을 위해 비축해두라는 말입니다.
결국 이 두가지 모두 오버하지 말고, 힘을 빼라는 뜻입니다.
물론, 이 분의 가르침은 자주 공연을 하는 가수에게만 적용되는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프로 운동선수들도 중요한 경기일수록 오히려 욕심부리지 않으려고 마인드 컨트롤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욕심이 지나치면 모두 망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너무 오버해서, 너무 힘을 줘서 모든 것을 망칠뻔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의 잘못된 신앙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본론]
먼저 오늘 말씀의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13장부터는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쟁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항상 괴롭히던 옆나라 블레셋이 이번에는 대규모 군사를 이끌고 전쟁을 걸어왔습니다.
철병거가 삼만대, 기마부대가 육천, 보병은 모래알처럼 많아서 셀수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 당시 블레셋은 철기문명을 누리고 있었고, 엄청난 규모의 전투력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이스라엘은 겨우 3천명의 군사들이 있었는데 이들도 블레셋의 압도적인 군사력을 보고난 후 도망가서 겨우 6백명만 남은 상태였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은 오직 사울왕과 그의 아들 요나단만 철로 된 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군인수도 부족하고 무기도 너무나 변변찮았습니다.
이런 상태로는 이스라엘이 블레셋을 이길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울왕은 어찌할바를 몰라 대치상태로 가만히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때 나타난 사람이 바로 사울의 아들 요나단입니다.
요나단은 용감하게 블레셋의 심장부에 들어가 그들을 쳐부셨습니다.
자신과 함께 있던 병사 한명과 같이 단 둘이서 적군의 성벽을 타고 올라가 전세를 뒤집었습니다.
이들로 인해 블레셋 군인들은 우왕좌왕하며 자기들끼리 서로 죽이는 자중지란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그때서야 사울은 전쟁터로 나와 도망치는 블레셋 군인들을 뒤쫓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참 아이러니컬한 것은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이나 사무엘의 아들들은 망나니들이었는데 사울의 아들은 달랐습니다.
그런데 슬픈 것은 아들 요나단의 믿음이 아버지 사울의 불신앙을 잘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요나단과 사울의 모습을 비교해서 보여주며 사울의 불신앙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못 생긴건지 잘 모르잖아요?
그런데 연예인들 옆에 있으면 얼마나 자신이 오징어같은지 알게되는 것과 비슷한 원리입니다.
그럼 성경은 왜 사울의 전쟁장면을 몇 장에 걸쳐서 이렇게 자세히 소개하고 있을까요?
왕을 세운 목적 자체가 전쟁으로부터 땅과 백성을 잘 지켜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왕에게 제일 중요한 국가 대사중 하나가 전쟁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울이 어떻게 전쟁을 치루는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24절입니다.
‘그 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허기에 지쳐 있었다. 사울이 군인들에게 “내가 오늘 저녁에 적군에게 원수를 갚을 때까지, 아무 것이라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저주를 받을 것이다”하고 맹세시켰기 때문에, 군인들이 모두 아무 것도 먹지 못하였다.’
사울은 한 나라의 왕으로서 판단을 매우 잘해야 합니다.
전쟁터에서는 작은 판단하나도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대 세계에는 왕과 함께 종교지도자들이 전쟁터에 나가 신의 뜻을 묻곤 했습니다.
사울왕 역시 제사장이 함께 나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사울은 전쟁터에서 갑자기 군인들에게 금식을 명령합니다.
하나님께 물어보지도 않고 혼자 결정한 것입니다.
이것이 사울이 점점 교만해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심지어 금식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끔찍한 맹세도 군사들에게 강제로 시켰습니다.
그렇다보니 모든 군인들은 전쟁중 음식을 먹지 못하고 허기져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과연 사울은 왜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일까요?
사울은 전쟁에서 반드시 이기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성공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된 배경이 있습니다.
사울의 왕권은 그리 강력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의 출신이 가장 약한 지파였던 베냐민 지파였기 때문입니다.
자기 지파에서 강하게 밀어줘야 하는데 세력이 약하다보니 지지층이 약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국힘이나 민주당이 아니라 정의당에서 대통령이 나온 것과 같은 것이죠.
그래서 왕으로 선포됐을 때 반대하던 지방세력가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울이 처음에 암몬과의 전쟁에서 이겨 다행히 왕이 될 수는 있었지만 여전히 그의 왕권은 위태로웠습니다.
사울은 이 전쟁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백성들에게 증명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사울의 이런 마음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누구나 인정욕구, 성공욕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너무 지나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사울은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는 기발한 방법을 생각해냅니다.
그게 바로 금식을 하는 것입니다.
금식을 하면 하나님이 좋아하셔서 무조건 이 전쟁에서 이기게 하실줄 알았던 것입니다.
앞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궤를 전쟁터에 가져오면 무조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착각한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물론 금식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금식은 원래 정말 심각한 문제가 있을 때 집중해서 주님께 기도하기 위해 일상적으로 먹는 것조차도 하지 않겠다는 그런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경건의식중 하나입니다.
원래 이스라엘은 전쟁과 같은 중요한 일에 앞서 먼저 금식을 하며 마음을 준비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금식도 적당한 때가 있는 법입니다.
전쟁을 하기 전에 몸과 마음을 주님께 집중하기 위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전쟁중인데 금식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먹지도 못한 군사들이 제대로 싸울 수 있을까요?
사울의 금식명령은 전혀 때를 맞추지 못한 것이고, 군사들의 상태도 제대로 알지 못한 잘못된 명령입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사울이 영적으로 둔한 사람이고, 왕으로서 자질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사울의 진짜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금식의 동기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의 행동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 속 동기도 다 들여다 보십니다.
사울은 전쟁에서 꼭 이기고 싶었습니다.
백성들에게 왕으로서 꼭 인정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아들 요나단이 적진에 들어가 전세를 역전시켰기 때문에 자신도 뭔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마음이 너무 지나쳐 전쟁중에 금식을 명령한 것입니다.
금식하면 하나님이 좋아하셔서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실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그를 욕망에 눈멀게 했고, 결국 금식이라는 잘못된 열심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금식이라는 행위 자체는 잘못된 게 없지만, 그 행위의 그릇된 동기를 하나님은 아셨습니다.
사울은 사람들의 인정에 굶주린 사람입니다.
언젠가부터 그에게는 사람들의 인정과 성공이 우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능력있는 왕으로서 인정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의 마음에는 ‘내가 어떻게 왕이 되었는데 여기서 실패할수는 없지’라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울에게 진짜 전쟁은 블레셋과의 전쟁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전쟁이었습니다.
사울에게는 인정과 성공이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온 절대반지와 같았습니다.
그 인정이라는 반지를 끼우기 위해 그에게 모든 것은 도구가 되어 버렸습니다.
심지어 하나님 조차도 자신의 성공의 도구로 삼은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마음 속에도 날마다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상들이 우리의 마음 한복판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사울처럼 인정과 성공의 우상이 하나님을 마음속에서 밀어내고 있을 지 모릅니다.
우상이란 우리 삶의 도구일 뿐인데 그것을 절대적인 목표로 만들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돈, 명예, 성공은 우리 삶에 최종 목표가 아닌데 우리는 이것들을 우상으로 삼아 버립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자리를 이 우상들이 차지해 버립니다.
팀켈러의 책, ‘내가 만든 신’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크리스 애버트라는 과거 세계 정상급 테니스 선수가 있었습니다.
그 선수는 오랫동안 세계 정상을 누리다가 은퇴를 고려할 때쯤 이런 인터뷰를 했다고 합니다.
‘테니스를 떠나서는 내가 누구이며 무엇이 될 것인지 막막했습니다. 테니스 챔피언이라는 신분이 내 삶을 규정해 왔던 터라 우울하고 두려웠습니다. 완전히 길을 잃었지요. 경기에 승리하면 내가 대단한 존재로 느껴져 기분이 좋았어요. 마약 중독과 비슷했어요. 내 정체성을 얻으려면 승리와 박수갈채가 필요했습니다’
지금 사울이 그렇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정체성을 전쟁의 승리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는 백성들의 박수갈채에 굶주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백성들이 사울을 왕으로 세워준 게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사울에게 왕으로서 백성들의 인정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인정이 더욱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높이시기도 하고 낮추시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도 이런 유혹을 느끼곤합니다.
교회에서 경건활동을 이것 저것 많이 늘리고 싶은 유혹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더 기뻐하실 것 같아서입니다.
그렇다보면 교회가 매번 바쁘게 돌아갑니다.
뭔가 되고있다는 착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아닙니다.
많은 프로그램들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만들어주는 게 아닙니다.
지나친 프로그램들은 성도들을 바쁘고 괴롭게 만들 뿐입니다.
그것을 25절 이하에서 보여줍니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그의 군사들이 블레셋 군사들을 쫓다가 어떤 숲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숲에 들어가니 땅바닥에 꿀이 있었습니다.
그 꿀을 보니 얼마나 먹고 싶었을까요?
그러나 그들은 사울이 말한 저주의 맹세를 했기 때문에 입에 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나단은 아버지가 그런 명령을 한지 모르고 그만 꿀을 찍어먹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의 눈이 번쩍 뜨이고 생기가 넘쳤습니다.
그때 요나단은 한 군인을 통해 자신의 아버지가 군사들에게 금식명령을 내렸던 것을 알게 됩니다.
이에 요나단은 아버지의 어리석음을 탄식합니다.
29절입니다.
그러자 요나단이 탄식하였다. “나의 아버지께서 이 나라를 어렵게 만드셨구나. 생각하여 보아라. 이 꿀을 조금 찍어서 맛만 보았는데도 눈이 번쩍 뜨이고 생기가 넘치는데, 오늘 우리 군인들이 적에게서 빼앗은 것을 먹고 싶은 대로 먹었더라면, 얼마나 더 좋았겠느냐? 그랬더라면 블레셋 사람들을 더 많이 죽이지 않았겠느냐?”
여기서 요나단이 꿀을 먹고 눈이 번쩍 뜨인 모습은 사울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드러냅니다.
요나단의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그만큼 반대로 사울이 영적으로 어둡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사울의 결정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었는지 알려줍니다.
또한 요나단은 아버지가 이 나라를 ‘어렵게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어렵게 만들다’라는 단어는 원래 ‘괴롭히다’는 뜻입니다.
아버지가 왕으로서 백성들을 평안하게 해줘야 하는데 오히려 괴롭히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좀 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가 구약에서 언제 사용되었는지를 알면 우리는 이 단어의 숨겨진 의미도 찾을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 7장입니다.
여호수아가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을 점령한 후 그 다음으로 아이성을 공격하는데 패배하게 됩니다.
그 때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안에 범죄한 자가 있어 패배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범죄한 자가 바로 ‘아간’이라는 자입니다.
아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여리고성에서 몰래 귀한 물건을 빼돌렸습니다.
그 죄로 인해 하나님은 아이성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패배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 때 여호수아가 아간에게 한 말이 바로 너가 ‘우리를 괴롭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 후 아간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 때 사용했던 단어를 지금 요나단이 아버지 사울왕에게 다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사울의 운명이 아간의 운명과 비슷할 것이라는 암시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괴롭히다’라는 단어에는 아간의 비참한 죽음처럼 사울의 운명도 그렇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탐심, 우상숭배는 나만 망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그 모습이 32절에 나옵니다.
“그래서 군인들은 약탈하여 온 것에 달려들어, 그 가운데서 양과 소와 송아지를 마구 끌어다가 땅바닥에서 잡고, 피째로 고기를 먹었다.”
군인들이 금식 기간이 끝나자 너무 배고픈 나머지 약탈한 짐승들을 마구 잡아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배가 고팠던지 고기를 피째로 먹었습니다.
배고프면 삼겹살 아직 피기가 가시기도 전에 먹는 사람들 있잖아요?
그런 셈이죠.
이게 왜 문제냐면 율법에 따르면 고기를 피째 먹으면 안됩니다.
유대인들은 생명이 피에 있다고 믿기 때문에 피를 먹는 것을 철저히 금합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이나 이스람교를 믿는 사람들 보면 피가 싹 빠진 고기를 먹습니다.
유대인들의 이런 음식법을 ‘코셔’라고 부르고 이슬람 사람들은 ‘할랄’이라고 부릅니다.
이처럼 군사들이 너무 배가 고파서 고기를 피째 먹고 있어 하나님께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이 뭐라고 합니까?
33절입니다.
‘당신들은 하나님을 배신하였소’
군사들에게 하나님의 법을 어겼다며 배신자로 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군인들이 이렇게 행동하게 된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사울왕입니다.
그가 금식만 명령하지 않았더라도 군사들이 이렇게 고기를 피째 먹었을까요?
사울의 결정으로 인해 군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게 된 것입니다.
배신자는 군사들이 아니라 사울 자신입니다.
그래놓구선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
이런 모습을 통해 사울이 영적으로 어두운 사람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왕으로서도 부적합한 사람임이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사울은 군사들이 더이상 죄를 짓지 않게 큰 바위 하나를 가져와 그 위에서 고기를 잡아 먹게 합니다.
바위 위에서는 고기의 피를 잘 뺄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울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또하나 생각해냅니다.
사울은 하나님 뜻이 아니라 자꾸 자기 생각을 대입하는 게 문제입니다.
이 큰 바위를 가져온 김에 여기다가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왜 이렇게 했을까요?
사울은 군인들이 피째 고기를 먹은 죄를 해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혹시라도 하나님이 이 일로 진노하셔서 전쟁에서 지게 하실까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과연 누구에게 진노하고 계실까요?
군사들일까요? 아니면 사울의 아들 요나단일까요? 아니면 사울일까요?
한 장만 넘기면 사울은 어떤 중요한 결정을 하기 위해 하나님께 묻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울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그 때도 사울은 자기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범죄한 자를 색출해내려 합니다.
그래서 자기 아들 요나단이 금식기간에 꿀을 먹은 사실을 알게돼서 자기 아들조차 죽이려 합니다.
이쯤되면 독자들이 직접 사울에게 말해주고 싶을 정도입니다.
“바보야, 문제는 바로 너야”
[결론]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도 이렇게 말씀하고 계실 지 모릅니다.
“바보야, 문제는 바로 너야.”
그렇습니다.
사울은 금식 속에 탐심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비워내야 하는데 오히려 넘치게 채우려고 욕심을 부렸습니다.
오버하지 말고 힘을 빼야 하는데 더 힘을 주고야 말았습니다.
이로인해 사울은 군사들과 자신의 아들까지 괴롭게 만들었고, 위험에 빠뜨려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내가 너의 성공을 위한 수단이니? 아니면 내가 너의 성공 그 자체이니?’
우리는 왜 주님을 믿는 것일까요?
사람들의 인정과 성공같은 내가 만든 우상들을 얻기 위해 하나님이 필요한 것은 아닌가요?
사울은 금식이라는 경건을 자기 욕망을 위한 도구로 삼았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예배, 기도, 말씀과 같은 행위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움직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한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번 한주간도 욕심으로 인해 영적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는 우리 다카포 식구들이 되시길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