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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Samuel 10:17–27 (ESV)
17 Now Samuel called the people together to the Lord at Mizpah. 18 And he said to the people of Israel, “Thus says the Lord, the God of Israel, ‘I brought up Israel out of Egypt, and I delivered you from the hand of the Egyptians and from the hand of all the kingdoms that were oppressing you.’
19 But today you have rejected your God, who saves you from all your calamities and your distresses, and you have said to him, ‘Set a king over us.’ Now therefore present yourselves before the Lord by your tribes and by your thousands.” 20 Then Samuel brought all the tribes of Israel near, and the tribe of Benjamin was taken by lot.
21 He brought the tribe of Benjamin near by its clans, and the clan of the Matrites was taken by lot; and Saul the son of Kish was taken by lot. But when they sought him, he could not be found. 22 So they inquired again of the Lord, “Is there a man still to come?” and the Lord said, “Behold, he has hidden himself among the baggage.”
23 Then they ran and took him from there. And when he stood among the people, he was taller than any of the people from his shoulders upward. 24 And Samuel said to all the people, “Do you see him whom the Lord has chosen? There is none like him among all the people.” And all the people shouted, “Long live the king!”
25 Then Samuel told the people the rights and duties of the kingship, and he wrote them in a book and laid it up before the Lord. Then Samuel sent all the people away, each one to his home. 26 Saul also went to his home at Gibeah, and with him went men of valor whose hearts God had touched.
27 But some worthless fellows said, “How can this man save us?” And they despised him and brought him no present. But he held his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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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피타고라스 공식으로 친숙한 피타고라스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였습니다. 피타고라스는 이 세상을 관찰하고 탐구하여 진리를 찾고자 노력했던 사람이었는데, 그것을 위한 도구로 숫자를 사용했습니다. 늘 변하는 사람과는 다르게 숫자는 변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피타고라스는 숫자를 사용하여 진리를 탐구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인간의 영혼을 세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올림포스 경기가 진행되는 날 보이는 세 가지 모습을 통한 구분이었는데요. 첫 번째는 경기장에서 물건을 사거나 팔아서 이익을 취하는 자들, 즉 자신의 이익을 위하는 자들이 최하 부류라고 피타고라스는 생각했습니다. 두 번째 부류는 그곳에 경쟁을 위해, 그리고 명예를 얻기 위해서 나가는 사람들이고요. 마지막으로 가장 훌륭한 부류는 구경하러 가는 사람들, 즉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분석하고 반성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반성에 대한 강조는 피타고라스만 주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 시대의 또다른 철학자인 소크라테스는 “반성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강력하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반성은 영혼을 가지고 있고, 이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인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매우 고결한 것입니다. 반성이 무엇입니까? “인간이 자기 자신의 의식을 적용하여 스스로의 심리 상태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자신의 상태를 돌아봄으로써 더 나은 상태를 향한 움직임에 도움을 주는 것이 이 반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피타고라스의 주장에서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듯이, 반성을 위해서는 무언가를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집 안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이 반성이 아니라, 최하 부류인 장사꾼, 두 번째 부류인 명예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과 함께 가장 훌륭한 부류인 반성하는 사람들 역시 올림포스 경기장에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가서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분석하고, 나 자신과 나란히 두어 생각해보아야 반성을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렇듯 반성이란 나 자신을 포함하여 많은 것을 보고 경험했을 때 올바르게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매우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는 무엇을 보며 반성하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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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대상을 보면서 반성하지 못한다면, 마치 목적지가 잘못 설정되었을 때 말이 더 좋으면 좋을 수록 목적지로부터 더 멀어지는 것과 같은 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즉, 반성도 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모습은 그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17-18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17 Now Samuel called the people together to the Lord at Mizpah. 18 And he said to the people of Israel, “Thus says the Lord, the God of Israel, ‘I brought up Israel out of Egypt, and I delivered you from the hand of the Egyptians and from the hand of all the kingdoms that were oppressing you.’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스바, 그리고 여호와 앞에 모았습니다. 그리고 미스바에 모인 모든 이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것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고, 애굽인의 손과 이스라엘을 압제하는 모든 나라의 손에서 건지신 하나님의 손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구약에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을 나타내는 중요한 두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잘 아는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시작하는 구절입니다.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성실하게 이행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담고 있는 구절입니다.
또 다른 하나가 바로 18절과 같은 구절입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고 너희를 애굽인의 손과 너희를 압제하는 모든 나라의 손에서 건져내신 하나님’입니다. 관용구처럼 상용되는 이 두 구절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듣고 마음에 새길 수 있도록 돕는 구절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행한 이 일들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신 바를 분명하게 나타내셨습니다. 출애굽기 10장 2절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 and that you may tell in the hearing of your son and of your grandson how I have dealt harshly with the Egyptians and what signs I have done among them, that you may know that I am the Lord.”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그 놀라운 일들을 행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바로 당대에 애굽에서 하나님의 기적을 본 사람들, 홍해가 갈라지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바위에서 물이 솟아난 것을 당대의 본 사람들의 아들과 자손의 귀에 하나님이 여호와인 줄을, 즉 스스로 존재하시는 전능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전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같이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 모든 자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되었어야 했습니다. 그들의 모든 생각과 행동과 반성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명기 6장 21절 이하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Deuteronomy 6:21–25 (ESV)
21 then you shall say to your son, ‘We were Pharaoh’s slaves in Egypt. And the Lord brought us out of Egypt with a mighty hand. 22 And the Lord showed signs and wonders, great and grievous, against Egypt and against Pharaoh and all his household, before our eyes.
23 And he brought us out from there, that he might bring us in and give us the land that he swore to give to our fathers. 24 And the Lord commanded us to do all these statutes, to fear the Lord our God, for our good always, that he might preserve us alive, as we are this day.
25 And it will be righteousness for us, if we are careful to do all this commandment before the Lord our God, as he has commanded 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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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말씀을 가슴에 품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눈과 마음은 블레셋을 비롯한 주변의 강성한 나라들에 향하였지, 하나님에게 향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사무엘상 7장 10절에는,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의 전쟁이 있었고, 그 전쟁이 여호와께서 큰 우레를 발하심에 따라서 이스라엘이 승리했던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을 여는 사람도 사무엘인데요. 한 사람의 인생이 끝나지도 않을 이 짧은 시기에, 큰 우레를 통해서 블레셋을 패하게 한 사건을 목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19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19 But today you have rejected your God, who saves you from all your calamities and your distresses, and you have said to him, ‘Set a king over us.’ Now therefore present yourselves before the Lord by your tribes and by your thousands.”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오랜 전투에서 반성을 하긴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반성은 철저히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왜 블레셋에게 이런 꼴을 당하는 거지?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 것일까? 아, 우리에게는 왕이 없구나. 왕이 있다면 이길 수 있을텐데, 그러니깐 왕을 세우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겠구나! 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모든 재난과 고통 중에서 친히 구원하여 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오늘 버렸습니다. 그리고 왕을 세우라 말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가 잘 아는바와 같이 사무엘은 제비를 뽑았고, 베냐민 지파가 뽑혔고, 그 다음엔 마드리의 가족, 또 그 중에서 기스의 아들 사울이 뽑혀서 왕이 된 기록을 우리는 오늘 묵상 본문을 통해서 읽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마음과 시선을 주변에 강해보이는 나라에 두어서는 안됐습니다. 그들의 반성은 모세의 말과 같이, 여호와의 규례에 근거했어야 했습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까 읽어드린 신명기 말씀과 같이, 여호와께서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하신 것은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에는 여호와의 규례를 준수하는 것보다 당장 강해보이는 블레셋을 따라하는 것이 더 좋아 보였을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세상적으로는 전혀 이해가 안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 한 분 이외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어제 우리가 했던 생각이 오늘 달라지는 것을 어렵지 않게 경험합니다. 사실, 어렵지 않게 경험하는 정도가 아니라, 늘 느끼고 계시지 않습니까? 과거의 어떤 생각이 변하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내가 하는 이 생각이 마치 진리인 것처럼 생각하지는 않는지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살아온 시간을 되돌아보면 좋아 보이는 것이 사실은 좋은 것이 아닐 수 있고, 좋지 않아 보이는 것이 사실은 좋지 않은 것이 아닌 경우를 참 많이 보곤합니다. 우리는 유한한 피조물이고, 우리의 생각은 늘 변하며, 우리의 판단은 매번 정확하지 않기에 그렇습니다.
왕을 세우라 외치는 이스라엘도 그렇습니다. 그들도 유한한 피조물이며, 늘 변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고, 그 생각이 사실 정확하지 않을 수 있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말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는 너희를 모든 재난과 고통 중에서 친히 구원하여 내신 너희의 하나님을 오늘 버리고 이르기를 우리 위에 왕을 세우라 하는도다”
Deuteronomy 6:21–25 (ESV)
21 then you shall say to your son, ‘We were Pharaoh’s slaves in Egypt. And the Lord brought us out of Egypt with a mighty hand. 22 And the Lord showed signs and wonders, great and grievous, against Egypt and against Pharaoh and all his household, before our eyes.
23 And he brought us out from there, that he might bring us in and give us the land that he swore to give to our fathers. 24 And the Lord commanded us to do all these statutes, to fear the Lord our God, for our good always, that he might preserve us alive, as we are this day.
25 And it will be righteousness for us, if we are careful to do all this commandment before the Lord our God, as he has commanded 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