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영적상태는 어디에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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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업 다운이 존재합니다.
세상은 업 다운이 존재합니다.
1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오래지 아니하여 레바논이 기름진 밭으로 변하지 아니하겠으며 기름진 밭이 숲으로 여겨지지 아니하겠느냐
레바논이 기름진 밭으로 변하고, 기름진 밭이 숲으로 변합니다. 레바논이란 수리아 해안을 따라 두로에서 아르밧까지 남서쪽에서 북동쪽으로 약 160Km를 뻗어 있는 두 개의 산맥, 곧 동쪽의 안티레바논 산맥과 서쪽의 레바논 산맥으로 구성된 나라입니다. 이 곳은 높은 산지와 울창한 산림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솔로몬이 당시 두로 왕 히람으로 부터 예루살렘 성전과 솔로몬 궁전 건설을 위해 레바논의 각종 목재를 제공 받았습니다.
그래서 17절에서 초반에 ‘레바논’과 후반의 ‘숲’은 동의어라 생각하면 됩니다. 그리고 기름진 밭이란 경작을 할 수 있는 비옥한 땅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울창한 나무가 있는 곳에서는 밭을 경작할 수 없습니다. 울창한 숲의 나무들을 다 제거하고 땅을 뒤엎어야 밭이 됩니다.
따라서 17절 말씀을 다시 정리하면, 울창한 숲이 비옥한 밭이 되고, 비옥한 밭이 울창한 숲이 된다는 말입니다. 마치 수수께끼와 같은 말이지요. 그러나 이 수수께끼와 같은 말은 우리의 인생에서 종종 현실이 되어서 나타납니다. 특히, 우리의 신앙에서 그렇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의 주기를 살펴보면, 은혜가 충만한 시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영적으로 심각한 디프레이션이 오기도 합니다.
어릴 적 신앙 생활을 돌아보면, 기도원에서 신앙수련회 집회에서 큰 은혜를 받고, 변화되어서 집으로 돌아가면, 얼마 되지 않아 영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기 일 수 입니다. 그리고, 다시 기도원에 가고 은혜받고 내려와서 또 은혜를 잃어버리고… 그렇게 다람쥐 챗바퀴 돌 듯 우리의 신앙상태는 은혜 충만, 은혜 소멸, 또 은혜 충만, 또 은혜 소멸을 반복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 누구도 여전히 동일한 마음, 동일한 신앙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17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우리의 신앙의 여정에서 업다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의 업 다운이 있는 것이 나쁜일일까요? 오늘 본문에서는 숲이 기름진 밭이되고 기름진 밭이 숲이 되는 것에 관하여 좋고 나쁨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냥 이 인간사에는 늘 있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에서 업다운이 있는 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닙니다. 주일날 예배 드리리면서 신앙을 회복하고, 월요일부터 점점 신앙에서 멀어져 가다가 다시 주일에 신앙을 회복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늘 있는 것입니다.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신앙의 업다운이 있는 것 나쁜 것 아닙니다. 정말 나쁜 것은 나는 신앙의 업 다운이 없다라고 믿는 것에 있습니다.
제가 집 사람에게 늘 조심해야 하고 믿지 말아야 하는 기독교 인의 일 순위가 항상 신앙적인 사람이라고 말한적이 있습니다. 결코 사람은 늘 한결 같을 수 없습니다. 특히 신앙에 관해서는 더 그렇습니다.
그런데, 늘 한결같이 신앙적이고 영적이고 항상 성령충만하다고 자신을 그렇게 믿는 사람이야 말로 신앙적으로 매우 문제가 심각합니다.
<전환문> 왜 그럴까요?
2. 잘 못된 영적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2. 잘 못된 영적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1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늘 신앙적이라 하는 사람은 항상 자신은 믿음으로 산다고 말합니다. 성령충만하다고 합니다. 늘 기도하고 말씀을 본다 합니다. 그런 사람은 전혀 자신의 신앙 상태를 보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나 마음으로는 멀리 떠난 사람"일 수 있습니다. 본인은 분명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지만,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일 수 있습니다.
즉, 신앙으로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지요. 저는 정말 많이 신앙으로 자기 자신을 속이는 신앙인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특히, 목사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요 근래에 주변의 목사님들 중 두 분이 자신이 편안하게 살 집을 마련했습니다. 물론 자신이 편하게 살 집을 마련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성도들이 피 땀 흘려 벌어서 헌금한 돈을 사용하여 무려 5억원이 넘는 집을 장만한 것이 문제입니다. 그 교회분들도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고, 저 또한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코로나로, 고금리로, 전쟁으로 어려운 시기에 왜 그 분들은 자신이 살 집을, 그것도 교회 성도들의 헌금으로 장만해야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강단에 올라 서서 그 분들은 신앙을 논하고, 헌신을 요구하고, 복음을 외칩니다. 저는 감히 이 분들 같은 분들에게 이사야서 29장 13절을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아이러니하게도 정말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자신이 매우 신앙적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말 신앙적인 사람은 자신은 늘 부족하다 생각합니다.
또 자신이 매우 신앙적이라 하는 사람에게 문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15-1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자기의 계획을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의 일을 어두운 데에서 행하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니
너희의 패역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
이 말씀은 소위 신앙적이라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과 같거나 혹은 하나님보다 더 지혜롭다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이 항상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 정도는 하나님도 이해하실꺼야” “그런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거야. 그건 하나님도 아셔", “하나님이 설마 그렇게 하셨겠어" 등등..... 자신이 마치 하나님을 모두 이해 하듯이 말합니다. 그것은 마치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버린것과 진배 없습니다.
우주에서 보면, 먼지보다도 더 작은 것이 태양계에 있는 지구입니다. 이 지구를 위성에서 내려다 보면, 아니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다 보면, 인간이라는 것은 한 낱 보잘 것 없는 먼지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먼지 같은 존재인 인간인 이 우주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함부로 “하나님은 이해하실꺼야? 상황은 이러하니 하나님도 눈 감아 주실 것이라" 호언 장담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잘 못된 행동을 눈감아 주실 것이라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요? 하나님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땅의 어느 누구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창조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빚으셨습니다. 크신 하나님께서 그 무한한 지혜로 이 세상을 만드시고, 우리 각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늘 부족하고 모자란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똑똑하다 해도 하나님을 능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혜롭게 하셔도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에 결코 다다를 수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함부러 우리의 대화에서 생각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면 안 됩니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이 어떤 생각을 하실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냥 겸손하게 하나님이 이 땅에서 행하는 일들을 받아드리면 됩니다.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지혜로우신 하나님이 지혜롭게 하신 일들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결코 그 크신 하나님의 지혜를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알려 주신 것 만큼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당신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신앙으로 교만한 이들에게는 그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도록 사람의 지혜를 닫으십니다.
10절 부터 12절까지 읽겠습니다.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의 지도자인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
그러므로 모든 계시가 너희에게는 봉한 책의 말처럼 되었으니 그것을 글 아는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그가 대답하기를 그것이 봉해졌으니 나는 못 읽겠노라 할 것이요
또 그 책을 글 모르는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글을 모른다 할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성경의 말씀은 들어도 듣지 못하게 하시고, 깨닫게 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성경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성경대로 산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다 안다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이 감긴 선지자들과 선견자들이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이라 우기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판단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들먹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여정이 다 그러하듯 우리의 신앙의 여정도 다운 텀이 있으면 회복되는 시점이 있습니다.
1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 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
그 날 , 획복의 날 하나님이 성경의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보긴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듣기 들어도 듣지 못하는 이들이 성경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게 합니다. 이 또한 하나님이 회복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여정 가운데, 하나님은 우리의 귀를 여시기도 하시고 닫기도 하십니다. 우리의 신앙을 깊게도 하시고 신앙적으로 방황하게도 하십니다. 성경을 읽으면 깨닫게도 하시고 전혀 이해 되지 않게도 하십니다. 우리의 인생이 언제나 업 다운이 있듯이 우리의 신앙도 언제나 업다운이 있습니다.
그럼으로, 신앙적으로 업 되었을 때 자만하거나 교만하지 마십시오. 또 신앙적으로 다운 되었을 때, 레바논이 비옥한 토지가 되 듯이,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듣듯이 맹인이 눈으로 보듯이 언젠가 하나님이 회복하실 것이라 믿으십시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내의 신앙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자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신앙이 다운 텀에 들어가면,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창조물인 인간이 판단하고 다 이해한다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결코 온 우주 만물을 창조 하신 하나님의 지혜를 한 낱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결코 다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성경에서 당신의 뜻을 우리 인간들에게 조금 비취주었을 뿐입니다.
그럼으로, 우리의 조력자이신 성령님을 의지하고 나의 영적 상태가 어느 곳에 놓여 있는지 항상 확인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