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Tone Analysis

Overall tone of the ser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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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core of 0.5 or higher indicates the tone is likely present.
Emotion Tone
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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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gust
0UNLIKELY
Fear
0UNLIKELY
Joy
0UNLIKELY
Sadness
0UNLIKELY
Language Tone
Analytical
0UNLIKELY
Confident
0UNLIKELY
Tentative
0UNLIKELY
Social Tone
Openness
0.21UNLIKELY
Conscientiousness
0.13UNLIKELY
Extraversion
0.44UNLIKELY
Agreeableness
0.6LIKELY
Emotional Range
0.2UNLIKELY

Tone of specific sentences

Tones
Emotion
Anger
Disgust
Fear
Joy
Sadness
Language
Analytical
Confident
Tentative
Social Tendencies
Openness
Conscientiousness
Extraver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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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otional Range
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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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따를 것인가?
구약 성경을 잘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이 세상의 문화와 같은 체제를 따를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시험하는 상황들이 많이 나온다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40년의 광야 시간 동안 다양한 시험을 당했던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입성을 합니다.
그리고 정복 전쟁을 거치고 땅 분배 후 안정기에 접어들었죠.
가나안에 정착해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그들이 꿈에 그리던 땅에 터전을 잡고 살아갑니다.
광야생활은 처절하고 힘들었지만, 마지막은 약속의 땅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끝난 것 같아 보입니다.
일명 해피엔딩이죠.
영화나 드라마, 혹은 책을 본다면 결론이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끝이 나는 것을 보면, 그 이후의 삶도 행복할 것이라 우리는 예상합니다.
땅 분배까지 마치고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제는 행복한 나날들만 기다리고 있는 듯 보입니다.
여호수아는 고별 설교 때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여호수아의 설교에 대한 이스라엘의 대답은
우리가 결단코!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
아니니이다.
우리가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그들의 대답대로라면, 그들은 앞으로 여호와만 섬기는 삶. 하나님만 의지하고 바라보는 삶.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것만큼 행복해 보이고 은혜로워 보이는 삶은 없을 것 입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 이스라엘은 실제로 그들의 말처럼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갑니다.
사사기 1장을 보면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
그들은 하나님께 묻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해 전쟁을 이어나갑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여호와를 버리기 시작합니다.
조상들의 삶과 그들의 고백을 잊어가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조상들의 고백을 잊어가기 시작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조상들의 신앙의 고백이 올바르게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후손들에게 있어 하나님을 향한 부모님들의 믿음의 고백은 크게 와 닿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사기 2장 10절을 보면 여호와를 향한 고백과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았던 세대들은 다 죽고,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다른 세대가 살아가기 시작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후손들은 조상이 살았던 시대와 많은 것이 달라진 세상을 살아갑니다.
바알과 아스다롯 신상을 많이 보았고 그것들이 익숙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것들에 마음을 주기 시작합니다.
이어지지 못한 선조들의 믿음은 이스라엘에 어려움을 갖고 오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먼저 버리고 떠났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스스로 자초한 어려움과 시험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행복하고 평안하게 살던 이스라엘에게 갑작스러운 시험과 고난은 그들의 삶과 생각을 뒤흔들게 됩니다.
당황스러운 삶의 변화는 그들에게 있어 나와는 상관 없다 여겨졌던 조상의 하나님을 생각해내도록 만듭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간에 우리가 모일 수 있는 것이겠죠.
하지만 어쩌면 우리의 첫 마음은 예전과 같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만나고 그 뜨거웠을 때를 생각해보면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이렇게 외치기만 해도, 아니 십자가를 보기만 해도 마음이 떨리고 눈물이 나곤 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저의 모습은 너무나 부끄럽게도, 그러한 떨림과 눈물이 더 이상 없습니다.
저는 모든 분들의 삶의 상황을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예상 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전에 비해 지금의 삶이 “꽤나 괜찮다.” 코로나로 인해 경제적인 어려움이 생기긴 했으나, 그것과 별개로 세상은 점점 더 살기 편해졌습니다.
모든 것들이 간편화 되었습니다.
예전에 비해 더 나은 모습으로 삶의 환경들이 변해갑니다.
세상의 일들이 간소화, 간편화 되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 생활도 이것처럼 점점 편안해져갑니다.
코로나19 기간 동안 우린 비대면 예배로 또 모이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며 더 편안해졌습니다.
예배 회복 캠페인을 진행하고, 제자리[RE:]로 돌아오기 위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코로나 이전처럼 우리의 마음이, 믿음이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이미 지난 2년 동안 비대면으로, 또 모이지 않음으로 편안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다시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지금, 회복되어지는 이 때를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조금씩 회복 되어지는 이 때가 하나님을 잊기 딱 좋은 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리고 회복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라 생각하는 우리를 세상이, 삶이 가만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회복되는 것을 절대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갑작스러운 사건들을 만들며 우리를 흔들어 댑니다.
회복되어지는 이 때 이스라엘처럼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 정착했고 그들이 원했던 회복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회복을 경험하던 그들은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을 잊어갑니다.
하나님을 잊어가며 그들은 여러 어려움을 맞이하게 됩니다.
정착된 생활이 길어갈수록, 광야에서의 어려움들이 희미해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잊어가죠.
하나님을 잃어가던 그들에게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선택의 결과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상하게 답답하고 삶이 어렵다 느껴집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가나안 사람들의 지배를 받고 있는 자신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선택받지 못한 민족의 지배를 받으며 괴로워하던 그들은 잊고 있던 하나님을 떠올렸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기 시작합니다.
에훗의 등장
이 때 에훗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에훗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그는 주목 받던 사람도 아니었을 뿐더러 왼손잡이입니다.
원래 왼손잡이였는지 후천적으로 왼손잡이가 된 것인지, 손에 장애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사사기 20장 16절에 기록된 것처럼 “베냐민 지파 중 물매를 던지는 잘 훈련된 왼손잡이”였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본문에 등장하는 에훗은 잘 훈련된 사람은 아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왼손잡이”의 원문을 찾아보니 “오른손에 제한이 있는 자”라는 단어가 사용 되었더라구요.
에훗은 오른손에 장애가 있던지, 아니면 능숙하게 사용하기에 문제가 있었던 사람임은 틀림없습니다.
오른손잡이가 아닌 왼손잡이.
오른손에 제한이 있는 사람.
그 누구도 그가 자신들을 구해줄, 하나님이 세우신 사사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에훗의 앞에 나타났던 옷니엘과 비교하면 에훗은 작아보입니다.
옷니엘은 크고 강한 아낙 자손의 땅을 빼앗은 갈렙의 조카입니다.
그는 거대했던 아낙 자손의 본거지였던 기럇 세벨을 공격해 점령합니다.
아낙 자손은 이스라엘 사람들 스스로가 메뚜기처럼 생각하도록 만들었던 그런 민족이었습니다.
모두가 두려워했던 그 민족을 옷니엘이 공략해냈습니다.
옷니엘처럼 용감하고 크고 강한 사람이 사사라면 이스라엘을 구원할 가능성이 더 커보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 등장하는 에훗은 옷니엘과 달랐습니다.
에훗에 대한 묘사는 왼손잡이 하나입니다.
베냐민의 뜻은 “오른손의 아들”입니다.
이 것만 보아도 베냐민 지파는 다른 지파에 비해 오른손 사용이 뛰어났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 낼 수 있습니다.
왼손잡이.
누가 봐도 약하고 멸시 받는 사람입니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사람.
“설마 쟤는 아닐 거야.
에글론에게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사람은 에훗이지만, 쟤는 우리를 구원할 수 없어.”라는 인식이 이스라엘인들 가운데 있었을 것입니다.
에훗은 이스라엘을 대신해 공물을 바치는 자였습니다.
15절을 보면 “그를 통하여”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오른손에 제한이 있는 에훗을 통하여 공물을 바칩니다.
이것은 어쩌면 이스라엘의 참담한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철저하게 굴복 당한 이스라엘의 모습을 가장 가능성 없고 약해 보이는 사람을 통해 우리는 보고 있는 것입니다.
에훗이 공물을 바치는 자는 에글론입니다.
에글론은 "비둔한 자"라고 묘사되고 있습니다.
“비둔하다.”
듣기만 해도 부정적인 느낌이 딱 오지 않나요?
비둔하다는 뚱뚱하거나 옷을 두껍게 입어서 움직이는 것이 둔하다.
라는 사전적 정의를 갖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처음 침략했을 때의 에글론의 모습은 지금처럼 비둔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점령했던 땅은 여리고 성입니다.
여리고 성이 어떤 성이죠? 여리고는 종려나무 성읍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고 계심을.
역사하심을.
살아계심을 두 눈으로 확인했던 곳입니다.
40년간의 기나긴 광야생활을 마치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가나안 정복의 시작이 된 첫 전쟁이 바로 여리고 전투였습니다.
하루에 한 바퀴씩, 그리고 마지막 날은 일곱 바퀴를 돌고 큰 함성을 지르던 그들의 눈에 철옹성 같았던, 불가능해보였던 여리고 성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해 길갈에 돌을 세우기까지 했습니다.
지금 이 고난을 겪고 있는 세대들은 그 사건에 대해 그 윗 세대들에게서 귀에 딱쟁이가 지도록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가 있는 기념비적인 도시가 이방인.
에글론에 의해 함락 되었습니다.
여리고를 공격한 에글론은 지금처럼 비둔한 모습이 아닌 전투에 능한 장수였을 것입니다.
에글론이라는 이름의 뜻은 황소입니다.
황소는 강하고 용맹하다는 의미를 갖고 있기도 하죠.
에글론은 자신의 이름의 뜻처럼 처음에는 날렵하고 강하고 용맹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리고 정복 후 18년이라는 평안한 생활은 날렵했던 그를 비둔하게 만들었습니다.
맨 처음 점령하고 가졌던 그 승리와 기쁨 등을 다 잊어버리고 평안한 생활을 누렸습니다.
이스라엘인들과 에글론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혹시 아시겠나요?
이들의 공통점은 처음 마음들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현실에 적응했고, 편안함에 속아 자신들의 본 모습을 잃어갔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회복이 너무나 명확한데도 불구하고 그 감사함을 잊었습니다.
제사의 자리에 나아갈 때 두렵고 떨리고 기대하는 마음을 가졌던 그 마음을 잊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어떠한가요?
저는 늘 제 자신에게 묻습니다.
“휘석아 그 때 그 마음.
잊지 않고 있지? 요즘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니?”
제2가족 여러분에게도 묻고 싶습니다.
그 때 그 마음.
여전히 유효하신가요?
그 때 그 마음.
아직도 진행 중 이신가요?
어쩌면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매일 생각해야 하는 문장일지 모릅니다.
우리가 누리고 사는 평안함이 진짜 평안함이 아닐 수도 있거든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함이라는 오해 속에 빠져, 정말 나는 괜찮아! 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지 모릅니다.
제가 필리핀에서 있었을 때의 일입니다.
선교사로 파송되어 가시던 목사님께서 저에게 “선교지로 가자!”라고 말씀하셨고, 저는 호기롭게 따라 나섰습니다.
저의 첫 선교 생활이었고, 선교사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새로운 문화권에서 살아간다는 것, 선교지에서 생활한다는 것. 너무나 즐거웠고 하루 하루가 넘치는 큰 은혜였습니다.
저를 소개하는 간단한 영어 외에 아무 말도 못하던 제가, 현지인들과 영어로 소통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너무나 행복했었습니다.
눈 뜨고 자는 것 모든 것이 은혜롭게 여겨지던 나날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3개월이 지나가자 점점 제 안에 첫 마음이 사라지더라구요.
“동네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겠어!”라는 마음이 점점 사그라들더라구요.
새벽예배, 공부, 전도, 운동, 공부, 저녁예배.
이렇게 똑같이 반복되어지는 일상 속에서 저는 의무적으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 영어로 소통도 가능해지자 영어 공부를 향한 마음도 식어졌습니다.
영어가 안 될 때는 그렇게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더니, 익숙해지자 그 기도도 소홀해졌습니다.
모든 것이 은혜였던 때가 언제였는지 모르게 더운 날씨가 조금씩 짜증나기 시작하고, 그 곳에서의 삶들이 때론 무료하다 여겨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은혜를 갈급해하던 모습이 아닌 눕고 쉬는 모습들로 변해갔습니다.
공부 한다고 방에 들어가서 낮잠을 자고, 선생님들이 내준 숙제도 게을리 하고 결정적으로 말씀 읽는 것도 하지 않게 되는 날들이 많아졌습니다.
첫 마음을 잃어버리자 급속도로 그저 삶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는 몰랐습니다.
제가 잘 살고 있는 줄 알았거든요.
첫 마음을 잃어버렸어도 여전히 공부 하고 있었고, 여전히 전도하러 동네를 돌아다니고 있었거든요.
전 정말 하나님이 주시는 평온함 속에 잘 지내고 있다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 그것이 저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로 저의 모습에서 발견하게 된 것이죠.
더 이상 감사하지 않는 저의 모습.
동네를 돌아다니며 사람이 보이지 않아도 찬양을 부르며 즐거웠던 모습은 온데 간데 사라지고, 덥다고 투덜, 오늘은 왜 사람이 이렇게 안 보이냐고 투덜.
불평불만을 쏟아내는 저를 보게 된 것입니다.
저는 정말 평온하다.
잘 지내고 있다 생각했는데 저의 오해였던 것이죠.
하나님이 주신 이 여유와 선교의 삶을 즐겁게 누리고 있다 생각했는데, 그 것이 아닌 제 멋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된 것이죠.
그리고 저는 그 날부터 금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첫 마음을 회복하게 해달라고, 선교사로써의 마음.
선교지 올 때 가졌던 그 마음의 회복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알던 평안함은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함이 아니었고, 하나님을 잊도록 하는 평안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함과 즐거움이었다면 저는 그 삶 가운데 불평 불만보다 감사하며.
하나님을 만나는 삶을 더 간구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저 뿐만 아니라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도 이러한 오해 속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평안함은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을 향한 우리들의 마음을 사라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혹시 지금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하고 걱정이 없다면, 회복되어지고 있는 여러 영역을 보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고 있다면요.
잠깐 서서 나의 삶이 올바르게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 것인지 점검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걷는 이 길이 정말 하나님을 향해 바로 걷고 있는 것인지 유심히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우리 삶에 어려움들이 나타납니다.
그 때 우리가 보이는 일반적인 모습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어려움의 이유에 대해 묻고 생각하기 보다, 일단 이 어려움이 해결되기를, 지나가기 만을 열심히 기도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 위기가 나타날 때, 하나님은 단지 우리가 그 문제에서 벗어나기만을 바라시지 않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도우심을 갈망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단순하게 우리가 그 분의 도움의 손길만을 찾길 원하지 않으십니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라고 하신 시편 27편의 말씀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찾기를 원하십니다.
문제 해결만을 원하는 기도가 아닌, 근본적인 것을 바꾸실 하나님을 기대하는 태도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과 더 깊은 교제와 관계를 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넘쳤을 그 때의 그 마음처럼 “하나님의 얼굴”구하기를 힘쓰시나요 아니면 “하나님의 손”만을 찾으시나요.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났는지,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깊은 교제를 통해 깨닫고 더 성장하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삶의 변화
이스라엘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에훗이 우편 안쪽 허벅지에 약 40cm나 되는 한 규빗의 칼을 숨기기로 마음 먹습니다.
아무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에글론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은밀한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에글론은 그를 가까이 부릅니다.
우리 성경에는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원문에는 ‘엘로힘’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글론이 은밀한 일이 하나님의 명령이었기 때문에 에훗을 가까이 부른 것이 아닙니다.
‘엘로힘’은 이 당시에 하나님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토착 신들을 표현하는 단어이기도 했습니다.
그랬기에 에글론은 ”엘로힘의 말“이라는 것에 의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신들의 말. 바로 신탁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 당시의 은밀한 일이 무엇이었을까 조사해보니, “주위 나라의 군사 정보나 재물 혹은 그 나라의 국가 기밀”등을 뜻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에글론은 그러한 정보들을 기대했고 가까이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칼에 찔림을 당합니다.
아무도 에훗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에글론이 비둔해도 강하고 용맹한 용사였습니다.
그가 오른손에 제한이 있는 왼손잡이 에훗에게 당할 것이라는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에훗이 찌른 칼이 빠지지 않았습니다.
18년이라는 시간이 에글론에게 얼마나 평안했는지 알 수 있는 순간입니다.
기름에 칼날이 엉켜서 빠지지 않은 것이죠.
칼에 찔려 죽어가는 에글론을 두고 에훗은 재빠르게 자리를 피합니다.
오랜 시간동안 왕이 나오지 않자 신하들은 에글론을 찾아 나서지만, 화장실에 있는 것으로 오해하고, 왕이 편하게 볼 일을 볼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해줍니다.
우리의 삶을 잘 돌아보며 잠자리에 드는 주일 저녁이 되면 좋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뜨거웠던 마음이 여전히 나에게 있는지 한번쯤 생각하는 시간을 갖기를 부탁드립니다.
우리 모두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초심.
그 때 그 마음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만약 초심과 지금 나의 마음이 다르다면, 우리 마음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움이 존재하지 않는다면요.
우리가 누리고 있다 생각하는 그 평안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짜 평안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겉은 평안한 모습이지만 사실 그 안에 우리 영혼의 상태는 불안함 속에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확인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면 됩니다.
“은혜를 은혜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가?”
그 때 그 마음.
하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순수했던 우리의 열정.
하나님을 향한 사랑.
나의 삶으로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을 결단했을 때의 모습들과 마음들이, 우리의 삶에 여전히 존재하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도록 만드는 큰 원동력이 되어지길 소망합니다.
이스라엘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을 경험하지만 곧 잊어버렸습니다.
잘 알고 있고 경험까지 했음에도 평안함에 속아 하나님을 잊는 삶이 계속해서 반복되어진 것이죠.
이스라엘의 이런 모습들을 반면교사로 삼아 “그 때 그 마음”을 날마다 생각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 속에 견고하게 자리잡아 흔들리지 않고, 그 때의 그 마음을 날마다 기억하며, 뜨거운 가슴으로 살아가는 사랑하는 모든 제2가족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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